[현명관 칼럼](30)말 많은 사회-도박장이 된 왕의 스포츠
[현명관 칼럼](30)말 많은 사회-도박장이 된 왕의 스포츠
  • 현달환 기자
  • 승인 2021.10.23 09: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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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전과 나눔 고문
제34대 한국마사회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
2002년 삼성라이온즈 야구단 구단주
삼성물산 대표이사 회장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비서실장
삼성건설 대표이사 사장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

현명관 회장이 삼성에서 느꼈던 그동안의 깔끔하고 절도 있고 완벽한 삶의 과정을 새롭게 인식 시켰던 곳이 아마도 마사회 회장으로 취임해서 느꼈던 감정들이 아닌가 싶다.

자서전에도 서술됐지만 그는 그동안의 세상에서 벗어난 경마장의 적나라한 상황들을 보면서 삼성에서 느끼고 배우고 실천했던 것을 실행했다. 필자는 가장 흥미롭게 생각하며 눈여겨봤던 장이다. 주인이 어덯게 하느냐에 따라 고객은 그에 맞춰 따라온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가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 무수한 만남의 과정에서 느끼는 것 중 하나가 한 번 스치고 지난 사람들을 잘 기억을 못한다. 그러나 어느날, 매너 있게 다가오는 사람이 친절을 베풀어 준다면 그 사람을 기억하게 된다.

직업 중에서 가장 서비스를 잘 하는 곳이 호텔이 그 중 하나라면 호텔에서 행하던 것을 야생 같은 마사회 현장에 접목시켰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사람이 가장 먼저 인식하는 게 복장이다. 복장은 과거에는 게급의 상징이기도 했다. 인간이 가장 필요한 세가지인 옷, 음식, 집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옷이란 것을 느낄 수 있다. '의식주'라는 단어에서 보듯 옷은 먹는 것보다, 잠자는 곳보다 중요함을 조상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옷을 잘 입고 서비스를 하는 사람들이 다가오면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 욕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같이 동화가 될 것이다.

현명관 회장이 행한 그것을 우리는 일반 영업을 하고 있는 자영업에도 접목시킬 필요가 있다. 가게를 하면서 아무옷이나 입는 것보다 그래도 깨끗한 옷을 입고 손님을 맞이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은 마인드의 문제라고 생각된다. 본문이 조금은 길다. 필독해서 나라면, 만약 내가 마사회 회장이라면 어떻게 할까?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읽으면 나도 자연스럽게 동화가 될 것이다.

가을이라는 계절,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낙엽이라는 이름으로 자식들을 떨어뜨리는 나무의 위대한 삶의 방식을 배우면서 이 가을을 준비하는 시간을 만들자. 현명관 칼럼, 많은 필독이 있기를 바랍니다.[현달환 편집국장]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

욕망으로 미쳐버린 눈동자, 자욱한 담배 연기, 어지럽게 굴러다니는 신문지, 괴성과 고함소리, 잃은 자와 딴 자의 희비가 교차하는 곳, 고니와 고광렬이 돈뭉치를 비닐 장판에 던지던, 영화 '타짜'의 비닐하우스 도박판이 아니다. 이곳은 2013년 12월, 칼바람 몰아치는 과천의 경마장이다.

현명관은 34대 마사회 회장으로 내정되었고 난생처음, 과천 경마장에 가 보았다. 그는 충격을 받았다. 각종 영화나 잡지에서 보던 영국의 더비가 아니었다. 경마를 관람하는 날, 특별히 화려한 모자를 쓰는 일은 영국의 귀족 여성이 누리는 특권이지만, 이곳 한국의 과천에서는 그런 풍경을 100년이 지나도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장식이 화려한 모자를 쓰고 나타나면 아마도 인파에 밀려 떨어진 그 고급 모자는 도박꾼들의 발자국에 걸레가 되었을 것이다.

굴러다니는 깡통과 로비 전체가 재떨이 같은 곳에서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을 배우고 돌아갈 여유도 없이, 장내 아나운서의 중계와 함성과 고객들의 괴성이, 멀쩡한 사람도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현명관은 생각했다.

"이런 미친 세상도 있구나. 이러니 경마를 도박이라고 하는구나."
정상적인 가장이라면 결코 가족의 레저 장소로 선택할 수 없는 도박장. 그것도 3류 도박장의 모습을 과천 경마장은 자신의 브랜드로 삼고 있었다.

"2번 마(馬), 2번 마 질풍노도 치고 나옵니다. 2마신, 1마신 질풍노도 10번 마 붉은 토끼를 제치느냐? 그대로 치고 나갑니다. 1마신 2마신 그대로 결승선 통과, 우승은 질풍노도 2번 마에게 돌아갑니다. 2위는 10번 마 붉은 토끼.”

"에이 XX"

장내 아나운서의 중계를 듣던 관람객이 쌍욕을 하며 경마 예상지를 현명관의 발 앞에 던졌다.

현명관은 바람에 펼쳐지는 경마 예상지를 주워 펼쳐 봤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경마 관중석은 잠시도 있고 싶지 않은 살벌한 풍경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혼돈의 경마장 안에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 모든 것을 책임지는 마사회장이 되어 이곳을 선진국의 경마장처럼 만들고 싶다는 꿈이, 과연 성공할 수 있는 목표인지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34대 마사회장 임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수레를 뒤엎는 사나운 말이라도 길들이면 부릴 수가 있고
마구 뛰어오르는 쇳물도 마침내 틀 속에 넣을 수 있다.
다만 한결같이 우유부단하여 떨쳐 일어나지 않으면
곧 평생토록 아무런 발전도 없을 것이니라.

봉가지마 가취구치 약야지금 종귀형범
之馬 可就驅馳 躍治之金 終歸型範
지일우유부진 변종신무개진보
只一優游不振 便終身無個進步   -.채근담 / 前集 第77

나는 이 말을 아무리 형편없고 통제 불가능해보이는 상황이라도 그 단점만을 보지 말라는 경구로 이해한다. 경마장의 환경이 그러했다. 날뛰는 사나운 말과 같은 환경이라도 잘만코를 꿰면 멋진 경주마로 변신할 수 있는 것이라 믿고 싶었다. 답답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분명, 다른 나라가 잘 하고 있다면 우리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억지로라도 품고 싶었다.

공기업은 죽어야 산다.

나라의 규모가 있는데, 이런 귀족 스포츠를 3류 도박장으로 운영하는 상황에 매우 화가 났다. 왜 아무도 이걸 뜯어고치지 않았을까?

경마는 영국에서 왕의 스포츠'로 불린다. 17세기 찰스 2세는 스스로 기수가 되기를 자처하며 경주에 나서기도 했다. 왕실 소유의 경마장도 있다. 입장료도 2만원에서 40만원까지 한다. 드레스 코드도 있다. 화려한 드레스와 모자를 쓰고 관람하는, 누구나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 경마장이다.

그러나 영국이라는 나라의 전통이 얼마나 오래되었는가?
기껏 500년~600년이다. 16세기부터 크게 발전해서 초강대국이 되고 오늘날까지 그 힘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통일신라 때부터 따져도 1300년이 넘는 문화 강국인데, 어엿한 산업 하나를 도박장으로 밖에 운영하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한류의 나라가 이것 밖에 못하나? 2013년 명목 GDP 1조 1975억 달러, 당시 세계 15위의 경제규모를 갖고 하우스 같은 경마장이라니…… 마사회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보다 분노가 앞섰다.

우리의 경마장을 선진국 사람들이 보고, 우리를 깔볼까 두려웠다. 우리의 관료제가 만든 병폐는 그 연장선이 공기업에서 독버섯처럼 뿌리를 내려 이런 처참한 모습을 만들어 내었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자, 도지사 낙선의 아픔이 다시 밀려왔다.

그래도, 이런 상태의 공기업을 책임지는 사람이 되었으니 뭔가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동안의 복지부동, 무사안일한 경영과는 다르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당시 나이 73세. 무엇이 두려우랴.

도지사가 되어 펼쳐 보고자 한 꿈을, 작은 곳이긴 하지만 마사회에서 이루어 보자는 마음도 생겼다. 공기업을 죽이는 마음으로 완전 환골탈태를 시켜 새롭게 부활시켜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게다가 내고향, 제주의 말 산업과도 직결된 공기업 아닌가?

킹덤

우선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고민이 컸다.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가? 임기 시작 전 찾아간 경마장 답사 때, 제일 먼저 거슬렸던 직원들의 옷이 떠올랐다. 호텔 서비스업으로 다져진 친절에 익숙했던 나는, 그것과 한참 동떨어진 과천의 고객 응대가 너무도 낯설었다. 손님의 기분을 생각하지 않는 말투, 태도 등 여러 가지가 함량미달이었으나 그중에도 내가 낙제점을 주고 싶은 것은 우리 직원들의 옷이었다.

우리는 예부터 복장을 중요하게 생각한 문화 민족이다. 신분에따라 옷을 입어야 했으며 잘못 입으면, 요즈음 말로 갑부라도 멍석말이를 당하는 나라가 아니던가? 얼마 전인 2019년 1월, 넷플릭스에서는 조선시대 좀비를 그린 '킹덤'이라는 영화가 화제였는데, 나를놀라게 한 것은 이 영화를 보고 외국인들이 아마존에서 조선의 갓을구매한다는 뉴스였다. 외국인들이 '킹덤'을 보고 쓴 댓글에는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들인지 규정하는 아주 명확한 평가가 있다.

"'이건 좀비와 진짜 멋진 모자에 관한 영화다."(Mediocre Elf @MediocreElf 트위터에 올라 온 외국인의 반응 You should watch Kingdom on Netflix. It's about zombies and really fancy hats.)

목숨처럼 모자를 쓰고 다녔던 민족이 우리 민족이다.

의관을 정제하고(정돈하여 가지런히 하다)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옷만큼 패션의 완성을 관(冠 모자)에 두었다.

관이란 갓이라는 뜻이지만 동음이의어 '관(官)'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때의 관은 자기 통제를 의미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스스로를 예에 어긋나지 않도록 했으며 자신의 신분과 역할을 기억해 왔다.

옷이 그 사람의 행동을 규정하고 예를 만드는 기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조선이 망하지 않고 그대로 이어졌다면 호텔 신라에서는 모든 종업원들이 갓을 쓰고 다녔을지도 모른다. 서비스 정신을 늘 지니기 위해서.옷은 한 사람에게는 인격을 담는 그릇이지만 이것이 조직으로 확대되면 유니폼이 되고, 유니폼은 조직을 분명한 목적이 있는 킹덤으로 만든다.

못 하나 바꿨을 뿐인데

첫 출근을 하자마자 고객 제일주의를 선언했다.

백화점 같은 서비스 정신으로 무장하고, 과천에 오는 모든 고객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정신 혁명을 강조했다. 이를 바탕으로 하나하나 뜯어고쳤다. 우선 옷을 바꾸자고 했다. 서비스 정신을 살리고 경마장에 오는 사람을 도박꾼이 아닌 고객으로 만들기 위해 복장을 개혁했다.

발권하는 직원도, 청소하는 미화원도, 경비원들도 모두 의상을 교체했다. '여기는 도박장이 아니고 건전한 레저의 공간'이며 '왕의 스포츠를 즐기는 곳이다'라고 경마장에 근무하는 모든 직원이 옷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영국, 일본, 홍콩의 경마 문화를 뛰어넘어 새롭게 한류 경마를 만들어 낼 장소임을 옷으로 선언했다.

당시 마사회 직원들은 완장을 찬 순찰 대원처럼 행동하던 시절이었다. 경마장 스탠드에서 혹시 고객이 불법 사설 경마를 하지는 않을까 하여 손님을 감시하던 때였다. 그들은 고객을 감시의 대상으로 생각했지, 서비스의 대상으로는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의식의 변화는 한 번에 되지 않는다. 우선 현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의상을 품위 있게 바꾸고 호텔 직원처럼 행동하게 함으로써, 의식개혁을 시작했다. 마치 백화점 개점 시간에 모든 직원들이, 입장하는 고객에게 인사하듯 전 직원이 나와 고객을 향해 인사도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고객을 위한 제대로 된 서비스 태도를 조금씩 확립해 볼 생각이었다.

그러자, 나 자신도 놀랄 일이 일어났다. 슬리퍼에 반바지, 굴러다니는 신문지를 아무 데나 펼쳐 앉는 사람들이 사라졌다.

호텔 로비에 침 뱉고, 아무 데서나 몸을 긁적이며 누워서 자고, 담배를 피우고 꽁초를 버리는 사람이 없듯이, 과천 경마장도 서서히 물이 바뀌기 시작했다. 슬리퍼 신고 오는 사람이 사라졌다. 점잖은 옷을 입은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게 대세가 되었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나자, 타짜 하우스 같던 역겨운 경마장 풍경은 우아함과 열정이 혼재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직원들의 만족도도 높아졌다. 직원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과천 경마장은 아시아 최고의 경마 킹덤'을 향한 첫 단추를 옷으로 시작한 것이다.

여기가 교도소인가?

삼성건설 사장으로 있을 때 큰 사고 수습을 하느라 직원들 면회를 간 적이 있었다. 인간의 자유가 합법적으로 제약되는 교도소는 무서운 곳이다. 누구든지 위축되게 만든다. 반가운 사람을 만나도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작은 구멍으로 수감자와 이야기를 나누어야만 한다. 수십 년 전, 면회를 하면서 그때의 생소하고 불쾌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 옆에 면회하던 아줌마는 아이를 업고 있었는데, 남편으로 보이는 사람과 작은 구멍을 통해 안타까운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의 기분이 어땠을까? 얼마나 괴롭고 속이 쓰렸을까? 지금도 생각이 난다. 그런데 과천 경마장의 마권 판매대가 그렇게 생겼었다. 직원은 고객들에게 얻어맞지 않고 욕설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전당포 창구처럼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작은 구멍으로 말하며 마권을 팔고 있었다.

여기가 교도소인가? 고객에게 서비스를 파는 경마장인가? 나는 참을 수 없었다.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유리 벽 철거를 명령했다. 시가총액 1위의 대형 은행처럼 마권 판매 창구를 바꿨다. 우리가 고객으로 모시면 그들도 우리를 대접한다.

우리가 고객을 죄수처럼 대하니 그들은 우리를 갑질하는 교도관으로 생각하고 울분에 차서 폭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직원들에게 설명하고 고객이 왕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당연히 아무도 내 정책과 혁신에 동조하지 않았다. 거의 모두가 얼마 못 가서 원위치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에 대한 믿음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 앞서 말한 유니폼의 경우처럼, 고객은 수감자처럼 굴지 않았으며 폭동도, 폭행도, 폭언도 사라졌다.

초심을 지킨 결단

시작이 어렵다고 하지만 진짜 어려운 일은 처음 뜻을 그대로 유지하고 키우는 일이다. 특히 그 일이 조직의 매출과 직결되어 있을때 초심을 유지하기란 더욱 어렵다. 화상경마장은 마사회에서 운영하는 장외 경마장이다.

내가 부임하던 당시, 이곳의 사정은 과천 경마장 보다 한 수 위였다. 몇 천 명이 빌딩에 들어가서 줄담배를 피우며, 마치 영화 속 안개 특수 효과를 뿌려 놓은 듯한 분위기에서 웅성거리고 서 있던 곳이었다.

이곳을 바꾸고 싶었다. 바꿔야만 했다. 마사회의 도박 이미지는 도심 곳곳에 들어선 화상 경마장이 만들고 있었으며 주민들이 어서 나가주길 바라는 혐오 시설이 된지 오래였다. 바꿔야만 했다. 초심대로 원대한 목표를 위해 바꿔야만 했다. 나는우선 고객이 서서 스크린을 쳐다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증권객장처럼 품위 있게, 앉아서 봐야 한다고 직원들에게 말했다.

모두가 반대했다. 공기업에서 회장의 지시에 반대를 무릅쓰고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용기를 내서 직원들이 직언한 데에는, 이 사안이 마사회의 매출액과 직결된 문제였기때문이다. 좌식 관람으로 바꿀 경우, 당장 입장객 숫자가 급감할 것이 뻔했다. 1/2 매출 감소가 확정적이었다.

당장 마사회가 부실화될 수도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원래 깨끗한 레저 문화를 기대한 적도 없는 화상 경마장까지 개혁을 할 필요가 있을까? 과천만 신경 쓰고 덮고 갈까? 역대 마사회장들이 이런문제를 알고도 그냥 흘려보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조용히 지내다 가도 될 것을, 일부러 일을 만들고 마사회를 부실로 만들어 자칫 임기도 채우지 못하고 떠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결단을 내렸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내가 마사회를 맡기로 한 이유는 이곳에서 경력 한 줄,회장 직함과 지위를 유지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위상에 걸맞는 경마 문화를 만들고 관련 산업을 육성시키기 위함이 아니던가? 제주도 출신인 나는 제주도의 상징인 말이, 천연기념물이 되어 동물원이나 몇몇 목장에서 관람용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말을 길러 수익을 내고, 때론 외국처럼 말 한 필에 수백억을 호가하는 명마를 생산하여, 제주도민들이 돈도 많이 벌기를 바라는 꿈이 있었다.

후가이치 페가수스라는 서러브레드 종(영국 재래 암말에 아랍 수말을 교배시켜 만든 품종) 경주마는 2000년에 한화 약 830억 원(7천만 달러)에 팔렸다. 우리도 세계적인 명마를 만들어야 하지 않는가? 그렇게 되려면 먼저, 우리의 경마문화가 도박장이 아닌 건전한 레저의장이 되어야 했고, 그 시작은 마사회가 고객 서비스를 최우선 가치로 삼고 실천하는 데 있었다.

기울어진 그릇

둘째, 차라리 모자란 편이 낫다는 생각에서였다. 모든 화상 경마까지 지나친 흑자를 보려는 마음은 모든 것을 채우려는 마음이다. 채근담에는 이런 말이 있다.

기울어진 그릇은 가득 참으로써 엎어지고…그러므로 군자는
차라리 모자라는 상태로 머물지 언정
완전한 상태에서 머물지 않는다.

이걸 보면서, 군주는 모든 것을 꽉 채우지 말라는 교훈을 다시 새겼다고 한다.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이 모든 분야에서 많은 흑자를 내려고 하면, 자칫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있다. 적자를 그대로 용인할 때, 그 부서는 언젠가 큰 효자가 되어 기업을 살리기도 한다.

삼성도 적자를 기록하던, 삼성테크윈의 카메라 사업을 정리할 뻔했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 모든 휴대폰에 카메라 이미지 센서가 들어가기 시작하고 광학 기술이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시대가 오자, 삼성의 카메라 산업에 투자한 돈은 갤럭시 스마트폰의 카메라 기술에 활용되면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로 되돌아왔다.

경영자가 기기(攲器 기울어진 그릇)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욕심을 내면 조직원들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지나친 흑자를 만들게 되고 그건 자칫, 그 부서 본연의 위치를 잃어버려 시간이 지나면 보이지 않는 해를 끼치게 된다.

"그래! 화상 경마장이 적자 난다고 호들갑 떨지 말자. 초심대로 한다. 고객들을 추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레저 산업이 아니지 않는가? 5년 10년 후를 보자! 그때 경쟁력 있는 화상 경마장이 된다면, 이 시스템은 해외 수출도 가능하고 세계를 석권할 수도 있다."

모든 이의 반대를 무릅쓴 고독한 결정이었다. 대신 입장료를 높였다. 처음에 불만이 많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주말 여가를 즐기려는 사람들은 크게 환영했다. 분위기가 바뀌었고 화상 경마장도 과천 경마장 같은 깨끗하고 건전한 레저의 장이 되어갔다. 우려하던 매출반 토막은 일어나지 않았다. 매출이 유지되면서 객장의 분위기는 우아해졌고,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화상 경마가 시작되었다.[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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