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관 칼럼](15)제주도의 푸른 밤-어린시절 이야기
[현명관 칼럼](15)제주도의 푸른 밤-어린시절 이야기
  • 현달환 편집장
  • 승인 2021.07.10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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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전과 나눔 고문
제34대 한국마사회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
2002년 삼성라이온즈 야구단 구단주
삼성물산 대표이사 회장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비서실장
삼성건설 대표이사 사장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

지난주 장면에서는 이승엽 선수의 시원한 홈런 스토리를 읽으면서 많이 시원해졌을 것이라 생각된다. 사람은 자신을 믿어준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고 힘든 결정이지만 그 영향은 엄청난 결과로 나타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스포츠나 사업은 물론 모든 것은 타이밍이 중요하다. 적절한 타이밍이 사람을 묘하게 흥분되게 만든다. 드라마를 보더라도 착한 아이가 폭력을 당하고 있을 때 위인이 나타나 적을 다 무찌르는 것처럼 이 타이밍도 사업에 중요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휴대폰만 해도 그렇다. 미리 다 완벽한 휴대폰을 만들면 좋을 것인데 무언가 하나씩은 꼭 빠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게 사업상 다 전략이 있는 것처럼, 새로운 상품을 출시해야 회사도 사는 것이기에 적절할 때 신모델을 출시하는 것이다.

그 타이밍이 자신의 인생에 접목시켜 본다면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자신의 인생이 걸어온 길이 다 경험이고 그것이 경력이 되지만 타이밍이라는 것이 적절할 때 성공가도를 달릴 수있느냐 없느냐가 판가름 나는 것이다.

현명관 회장이 중학교 시절에 경기고 선배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서울이라는 곳을 그렇게 동경하지도 않았을 지도 모른다. 초등시철 서울아이들이 와서 함께 했던 생활이 인생에 막연한 동경이었지만 꿈이라는 것을 심어놓기에 충분했다. 모두다 타이밍의 예술이다.

이번장 제5장에는 현명관 회장이 치열하게 살다가 어느날 라디오에서 들려온 제주도 푸른밤의 이야기라 정감이 가는 장면이다. 자신이 어릴 적 느꼈던 제주도는 피하고 싶었던 그림이었지만 막상 제주도에 대한 그리움을 마음에 담아 놓으니 애착이 가는, 아름다운 곳임을 글 속에 숨긴 것이다.

장면 12와 13이 펼쳐지는데 장면12는 이번 주에 싣고 다음 주에는 군함을 타고 폭풍우를 뚫고 가는 장면을 실을 예정이다. 사람에게는 자존심이 굉장히 중요하다. 아이를 가르칠 적에도 현명한 부모는 아이의 자존심을 박박 긁어 결국 울게 만들면서 교육을 시키는 것을 본 적도 있다.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은 한계를 극복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하나의 원에서만 자라지 않고 그 원을 잘라 세상 밖으로 나가기를 바라면서 부모들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물론 과거에는 스스로 터득하지 않았다면 힘들고 어려운 시절, 공부한다는 것은 꿈도 못꿀 것인데 다행스럽게 현명관 회장은 많은 경험을 통해 자존심이 상해도 꾹 참고 이겨낸 것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힘이 있다.

그 힘을 어디에 쓰느냐고 중요한 것이다.

현명관 회장은 이제 자신의 경험을 강의나 사람들에게 전달하는데 시간을 보내고 있다.  분명 우리에게는 배울 것이 많다.

그 위대한 거래를 만들기 위해 오늘도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당신을 위해, 무더운 여름, 위대한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현명관 칼럼은 참고서가 될 것이다.

이번 주에는 최성원의 제주도 푸른밤 노래를 들으면서 제주에서 살고 있는 나 자신은 행복한 존재임을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더운 계절, 코로나19의 절정 속에도 건강에 유의를 바라면서  많은 필독이 있기를 바랍니다.[현달환 편집장]

1989년 1월 8일 승진을 하고 현명관 대표는 분위기를 일신하고자 신라호텔의 모든 간부들이 참석하는 경영 전략회의 소집을 결심했다.

1월 20일 충청북도에 있는 증평 호텔에 신라호텔의 간부들과 현명관 대표가 도착했다.

임직원들은 저녁 식사를 하고, 야간 회의를 하기 전 각자의 방으로 휴식을 취하러 들어갔다. 현명관 대표도 배정된 객실로 들어갔다. 여러 가지 생각이 몰려왔다.

잠시 머리를 식힐 겸 라디오를 틀었다.

"대한이 소한 집에 놀러 갔다가 얼어 죽었다고 하는 말이 있잖아요. 원래 대한 추위가 별것 아니라지만, 오늘은 어쩐 일일까요?

대한답지 않게 영상 7도까지 올랐네요. 참 포근한 겨울 날씨였죠. 아무리 포근했어도 과연 한 겨울에 어울릴까 싶은… 오늘 특별한 신곡이 나왔네요.

바로 록밴드 들국화의 베이스 기타 최성원 씨가 솔로 앨범을 냈는데요. 타이틀곡을 들어볼까요? 제주도의 푸른 밤."

'제주도‘라는 말에 뉴스 채널로 돌리던 손을 멈추고, 현명관 대표는 벌써 어둑해진 겨울 하늘을 보며 노래를 듣는다.

아, 제주도,

이 말은 현명관 대표가 듣기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름이며 가슴 아픈 아버지의 기억과 고생하신 어머니의 모습이 어지럽게 엉클어진 이름이었다.

노래는 잔잔한 파도 소리와 함께 시작했다. 현명관 대표도 그 소리와 함께 44년 전 제주도로 되돌아갔다.

제주도의 푸른밤

최성원 작사 작곡

떠나요 둘이서 모든 걸 훌훌 버리고
제주도 푸른 밤 그 별 아래
이제는 더 이상 얽매이긴 우리 싫어요
신문에 TV에 월급봉투에
아파트 담벼락보다는
바달 볼 수 있는 창문이 좋아요
낑깡밭 일구고 감귤도 우리 둘이 가꿔 봐요
정말로 그대가 외롭다고 느껴진다면
떠나요 제주도 푸른 밤하늘 아래로


제법 긴 간주가 나오자 현명관은 한 번 더 그 시절의 추억에 깊이 잠겼다.

노래 가사와 달리 그에게는 '신문도 필요했고 TV도 월급봉투'도 절실했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고향 제주, 그에게는 신라호텔을 이끌어야 하는 선장의 자리가 주어졌기 때문에 지금 감귤밭을 뛰어다닐 자유는 없었다.

떠나요 둘이서 힘들게 별로 없어요
제주도 푸른 밤 그 별 아래
그동안 우리는 오랫동안 지쳤잖아요
술집에 카페에 많은 사람에
도시의 침묵보다는 바다의 속삭임이 좋아요
신혼부부 밀려와 똑같은 사진 찍기 구경하며
정말로 그대가 재미없다 느껴진다면 떠나요 제주도
푸른 해가 살고 있는 곳

파도 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지며 노래는 한 소절 길이만큼 기타 연주가 계속되었다. 이 노래는 현명관에게 긴 여운을 남겼다.

“그래 재미 없어지면 제주도로 떠나자. 술집에, 카페에, 많은 사람에 지치지만 그래도 난 아직 이 일이 재밌다.“

자신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왕성하다면 베옷을 입고 움집에 살아도
천지 우주가 부드럽게 화합하는 기운을 얻을 것이요
명아주 나물국을 끓여 밥을 먹어도 그 맛에 만족하면
인생의 담박한(= 욕심 없고 깨끗한) 참맛을 깨닫는다.

신감 포피와중 득천지충화지기
神酣 布被窩中 得天地冲之氣
미족 갱여반후 식인생담작지진
味足 羹藜飯後 識人生澹泊之眞 채근담 / 後集 第87章

1988년 8월 18일이 위 음반의 공식 발매 일이지만 신문에는 89년 1월 10일에 들국화 최성원이 솔로로 데뷔하며 음반을 냈다는 기사가 나온다.

내 기억에도 그 즈음 이 노래를 처음 들었던 것 같다. 원래 음악을 잘 듣는 사람은 아니지만 노래 제목이 '제주도‘라 하여 관심을 갖고 끝까지 들었던 기억이 난다.

푸른 밤의 제주 풍광을 떠올리게 하는 아름다운 가사도 일품이지만 여기 '떠나요 제주도'라는 가사는 당시 나에게 완전히 반대의 의미로 해석됐었다.

나는 제주도를 떠나고 싶었다. 사람들은 제주도로 떠나고 싶었겠지만 나는 제주도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고 또 그것을 실천해서 더 큰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馬)은 제주도로 보낸다'는 말 그대로 내가 태어난 1941년의 제주도는 말(馬)을 제외하곤 내세울 것이 없는 곳이었다.

채근담에서는 자연과 벗하며 사는 안빈낙도를 찬양하지만 이미 자연만이 벗인 사람들에게는 바다와 바람과 돌과 해녀만 있는 곳은 떠나고 싶은 답답한 곳이었다.

나의 어머니 (정갑순)는 해녀였고 아버지(현여방)는 지금의 교육 위원회에 해당되는 제주도청 학무과 계장이었다.

공무원이라는 안정된 신분과 어머니의 부업으로 당시로서는 어렵지도 넉넉하지도 않은 평범한 가정에서 6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곳은 록밴드 들국화의 최성원 씨가 부르는 노래 가사 대로 금귤(금귤이 바른 말이고 낑깡은 일본어임)이 많이 자라 숲을 이룬 곳이고, 해변으로 가면 세계 문화유산 성산 일출봉이, 오른 편에는 섭지코지 해변이 있는 멋진 곳이다. 나는 세상이 다 이렇게 생긴 줄 알았다.

그러나 노랫말에 나오는 낭만적인 '제주도 푸른 밤 그 별'은 나에게 아름다운 푸른빛으로 기억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제주의 이미지는 8살부터 오래도록 붉은 피의 섬으로 기억되었다. 미국 드라마'로스트(LOST)'의 무시무시하고 두려운 섬처럼.

붉은 피의 섬 4.3의 제주

모두가 그렇듯 어린 시절의 기억은 대개 꿈처럼 흐릿하지만, 내가 8살에 겪은 제주 4. 3 사건은 지울 수 없는 핏빛 기억으로 너무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제주도는 4.3 사건이 터지기 1년 전부터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1947년 3월 1일, 민주주의 민족전선이 주최한 제28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경찰이 총을 쏘는 바람에 주민 6명이 사망하는 3.1 사건이 터졌다.

그 후 1년여 동안 크고 작은 유혈 사태가 벌어지더니 급기야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 무장봉기가 일어나고, 무자비하고 끔찍한 진압이 뒤를 이었다. 무차별적인 공권력 폭력이 자행되고 평안남북도 청년들이 중심이 된 서북 청년단들은 폭력과 학살, 고문으로 제주도민을 공포에 떨게 했다.

그들이 무서웠던 이유는 공산당의 인민재판이나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혐의만 있으면 증거고 뭐고 없이 즉석에서 사람을 죽였다. 반대로 밤이 되면 좌익 세상이 되어 무장 공비들이 똑같은 학살을 저지르고 다녔다.

아버지의 사촌 형 되시는 분도 서북청년단에 끌려가 죽었다. 어떤 마을에서는 동네 청년을 다 모이게 해놓고는 전부 총살 시켰다. 또한 군수사대는 마을에 한 명의 빨갱이가 나오면 마을 전체를 빨갱이로 몰아 수색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좌익이라고 끌고 갔다.

그들은 끌려가 고문으로 반병신이 되거나 죽고 말았다. 이런 소문이 파다하게 제주 전체에 퍼졌고 우리 가족도 공포에 떨며 조심하자고 호롱불 밑에서 수군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공무원이던 아버지가 퇴근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잡은 성게로 미역국을 끓이던 어머니는 몇 번이고 국을 데워가며 아버지를 기다렸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해녀였던 어머니는 깊은 근심에 잠겨 잠들었고 다음날부터 미친 사람처럼 남편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아버지의 행적은 찾을 수 없었다. 멀쩡히 퇴근했다는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지 않자 어머니는 피 끓는 마음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이튿날을 맞았다.

그렇게 3일이 지나 제주의 푸른 밤이 걷히던 새벽, 자는 둥 마는 둥 하던 어머니가 인기척에 놀라 마당으로 뛰어나갔고, 거기에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기어오다시피 들어오는 아버지가 서 있었다.

나와 형제들은 아버지를 보고 놀라 아무 말도 못 했다. 어머니는 숨죽이듯 낮은 비명을 지른 후 아버지를 부축했다.

"여보! 어떻게 된 거예요?” 어머니의 얼굴에는 생사를 알지 못하고 살아 돌아은 아버지에 대한 반가운 감정과 처참한 아버지의 모습에, 자신이 고문당한 듯 괴로운 고통이 섞여 있었다.

영원히 잊지 못할 충격적인 장면이었고 내가 제주도를 푸른 밤으로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었다.

나중에 커서 안 사실이지만 우리 집 말고도 나의 친구들, 친척들 중 끌려가 고문을 당한 사람은 한 둘이 아니었으며 그중에는 가장(家長)이 죽어 졸지에 아버지를 잃은 사람들도 있었다.

한집 걸러 하나씩, 반병신이 된 아버지, 삼촌이 있었다. 머리에 먹물 좀 들었다 싶으면 죄다 끌려가 조사를 받고, 고문을 받고, 더러 죽던 시절이니 학무과에서 일한 아버지가 조사를 받은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조사 며칠 전, 아버지가 친구들과 막걸리를 한잔하면서 당시 시국과 이승만 대통령의 문제를 비판했던 모양이다. 사실 당시 지식인 중 친일파와 손잡은 독립 영웅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지 않은 사람은 없었을 터인데 이를 누군가 수사대에 밀고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아버지는 계엄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말았다. 이후 아버지는 일생 동안 허리와 다리에 통증을 겪으며, 장애를 안고 살게 되었다.

“아, 얼마나 맞으면 사람이 저렇게 될까……….”

어른이 되어 나도 정강이뼈가 두 동강 나는 큰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 올린 적이 있었다. 당시 얼마나 고통스럽고 원통했을까.

그런데 내가 자라는 내내 아버지는 그때 끌려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마디도 하신 적이 없었다.

아버지의 상처는 고등학교 때 우리 집에 초대한 친구를 통해 짐작하게 되었다. 가장 좋아하고 친했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아버지, 어머니가 월남하신 분이었다. 당연히 그 친구도 평안도 사투리가 말투에 섞여 있었다. 같이 식사를 하는 도중 내 친구의 평안도 어투를 듣고 아버지는 갑자기 얼굴이 굳어지셨다. 식사를 마치고 아버지가 나를 조용히 불렀다.

"저 친구 고향이 어디니?"

"평안도 쪽이래."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버지는 분노와 공포가 뒤섞인 이글거리는 눈으로 얼굴이 무섭게 변했다. 서북청년단과 군수사대의 고문 후유증이 그 순간 아버지를 지배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획 돌아서 방을 나가 버리셨다.

그 시절 나는 아버지가 왜 그러셨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대학에 가고 이것저것 알게 되면서 아버지의 그때 모습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 아버지! 얼마나 속이 뭉그러지고 고통스러웠으면 아들의 친구 고향이 평안도라는 말에 온몸이 굳어 고문당했던 때의 기억을 떠올리셨나요?”

나는 그 일을 한 번도 위로해 드리지 못하고 아버지를 세상에서 떠나보냈다. 요즘 말로 하면 고문은 트라우마가 되어 평생 당신을 괴롭혔나 보다.

그리고 오래도록 아버지의 그때 그 얼굴은 내 마음을 안타깝게 하는 제주의 기억으로 남았다.

내가 7살부터 14살까지, 7년 동안 제주도에서는 사망자 1만 245명, 행방불명 3천578명, 후유장애자 163명, 수형자 245명이 발생했다. (제주 4.3 평화 재단이 밝힌 공식 자료 기준) 가옥 4만여 채가 소실되었으며, 중산간 지역의 상당수 마을은 폐허로 변했다. 제주 4.3은 한사람에게 씻지 못할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입힌 정도가 아니라 섬 전체가 회복 불능의 트라우마를 앓게 했다.

한 번은 제주시에서 이런 일도 목격했다. 남녀노소 불문, 공비들을 떼로 잡아 와서 가슴에 ‘나는 공비다'라고 명패를 붙인 것을 보았다. 그리고 마을을 한 바퀴 빙 돌렸다. 그다음 리더를 죽이고 제주항 근처, 관덕정에 시체를 걸어 놓았다. 관덕정은 제주시에 있는 큰 광장이다. 그 광장에서 초등학생인 나도 매달린 시체를 구경했다.

야만의 시대였고 폭력이 일상화된 때였으며, 정신적 충격을 받을 대로 받으며 자란 어린 시절이었다. 제주에서 자란 나와 같은 또래의 어린이들 머릿속에, 제주도가 '제주도의 푸른 밤'보다는 '핏빛의 섬'으로 기억되는 이유다.

두 번 다니며 운명이 바뀌다.

아버지 직장 때문에 초등학교 2학년 2학기 때 성산포에서 제주시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학교도 성산초등학교에서 제주동초등학교로 옮겼는데 앞서 말한 관덕정이라는 곳에서 700M 떨어진 제주항 근처에 자리 잡은 학교였다.

그런데 전학 시기가 문제였다. 할 수 없이 6개월을 놀다가 이듬해, 2학년을 다시 다니게 되었는데 이것이 나의 인생을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게 되었다. 새 학교에 다니기 전까지 나는 공부에 취미를 둔 학구파가 아니었다.

놀기 좋아하는 보통 아이였으나 새 학교로 전학 오면서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다. 공부를 열심히, 그것도 아주 신나게 하는 학생으로 확 달라졌다.

이유는 단 하나, 수업 시간에 많은 칭찬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성산포에서 배운 내용을 다시 배우게 되니 모르는 것이 없었다.

수업 시간마다 선생님의 질문에 척척 답을 하고 손을 들어 발표하니 선생님의 칭찬이 쏟아졌다. 그때 처음으로 공부의 재미를 느꼈고 그 칭찬과 기대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더 열렬히 공부하게 되었다.

난민촌 아이들

두 번째로 더 열심히 공부하게 된 계기도 생겼는데, 바로 6.25 때문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곧바로 7월, 육군 제5훈련소(구 주정공장 자리)가 설치되어 국군의 신병 훈련을 담당했다.

더불어 1만 명에 이르는 피난민들이 제주도로 물밀듯이 들어왔다. 1951년 4월 8일 자 동아일보는 제주 피난민이 7만1228명이라고 기록한다.

심지어 1.4후퇴 때에는 피난민이 15만 명까지 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니 곳곳에 피난민 천막이 지천이었고 특히 학교 운동장은 피난민들의 주거지로 점령되었다.

제주 동초등학교(당시 초등학교) 운동장 역시, 하루아침에 밀려든 피난민들로 난민 수용소가 되어 천막이 쳐졌고 끼니때가 되면 여기저기 밥 짓는 연기가 운동장을 자욱이 뒤덮었다. 푹푹 찌는 한여름에 난리도 아니었다.

그때 자연스럽게 제주도 말을 쓰지 않는 외지인들의 자녀들과 같은 학교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한 반에 100명~120명 되는 학급이 만들어졌는데 물에서 온 아이들은 제주 토박이 친구들과 비교도 안 될 공부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때문에 육지 아이들에게 지고 싶지 않은 오기가 생겼고 자연히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서울에서 온 친구, 대구에서 온 친구, 부산, 광주, 강원도 등에서 온 아이들을 보면 나는 이것저것 캐물어봤다.

서울에서 온 친구가 말해준 서울 풍경은 듣고도 믿지 못할 정도로 놀라웠다. 영화관이라는 곳이 있고 전차가 다니며 남대문, 중앙청 등 가 볼만한 곳이 많다고 했다.

또 다른 서울 친구는, 지금은 운동장 천막에서 살지만 서울에서는 2층 집에 살고 있었으며 전쟁이 끝나면 다시 거기에서 살게 될 것이고 미제 구라이스라(크라이슬러) 자가용을 타고 학교를 다닐 거라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내 눈과 귀는 반짝였다.

“아,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가 있었구나. 난 지금 엄청나게 작은 세계에 살고 있구나. 도대체 육지란 어떤 곳일까?”

넘치는 호기심이 날마다 거칠게 밀려와 내 심장을 뛰게 했다. 언젠가는 그 세상의 문을 열고 꼭 들어가리라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사라진 아이들

이렇게 3학년 때 터진 6.25로 나는 전국의 친구들과 경쟁한 덕에 5학년까지 열심히 공부했다. 그런데 5학년 2학기가 되자 거짓말처럼 이 육지 아이들은 사라졌다.

전쟁이 끝난 것이다. 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자 육지에서 온 피난민들은 썰물처럼 순식간에 자신들이 살던 뭍으로 빠져나갔다.

“그들이 있어서 열심히 공부도 하고 육지로 나갈 꿈도 꿨는데…….”

어수선했고 어지럽고 더러웠던 운동장은 제주의 저녁 놀 밑에 아름답게 텅 비어버렸고 그걸 바라보던 내 가슴에 허전함과 서러움이 마구 밀려왔다.

나에게 공부의 짐을 지워준 녀석들이고 희망을 준 친구들인데, 나를 제주 촌놈으로 남겨 놓고 그들은 무심히 떠나 버렸다. 아이들은 사라졌고, 그들은 육지로 나갈 수 있다는 나의 꿈마저 앗아가 버린 것 같았다.

돈의 맛

허전함을 메우기 위해서였을까, 돈을 벌어 서울에 가고 싶어서였을까? 정확한 이유와 동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갑자기 초등학교 5학년 때 돈에 꽂혔다.

사회 경험을 해 봐야겠다고 생각해서, 아버지 반대를 무릅쓰고 6개월가량 신문배달을 했다. 내친김에 6학년이 되자 방학 한 달 동안은 생선 유통업에 손을 댔다.

항구로 들어오는 생선을 새벽에 사서 제주 시내에 내다 파는 일인데 쏠쏠한 돈이 바로 바로 들어오니 아주 재미있었다.

어린 나이에 돈맛을 알자, 무슨 이벤트가 있다고 하면 달려가 돈 벌 궁리부터 했다. 제주 공설운동장에서 도민 체육 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한참 궁리를 했는데, 역시 냉차 장사가 최고라 생각했고 물에 설탕을 타서 구경 온 사람들에게 팔았다.

돈을 버는 일은 신나는 일이었다. 사람들에게 좋든 싫든 머리를 숙이면 돈으로 보상받아 기쁨으로 돌아온다. 그걸 어린 나이에 알게 되면서 인내와 서비스를 배운 것이 아닌가 싶다.

반말로 “야 인마, 전마” 소리를 듣지만 시간이 지나면 좋은 말도 해주고 지난번 손님이 다시 찾아주고 하는 일에 서서히 눈을 떴다.

왜 이렇게 아르바이트에 목숨을 걸었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아마도 돈을 벌어 서울 가고 싶은 마음이 잠재의식 저편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 같다.

D반 중학생

피난민 외지 친구들과 경쟁하며 공부의 틀을 갖춘 덕에, 나는 제주에서 명문으로 소문난 제일중학교에 거뜬히 합격했다.

여기서도 경쟁의 환경이 만들어지고 공부는 탄력을 받아 차분하게 학습을 이어갈 수 있었다. 지금은 상상조차 어렵지만, 당시 제일중학교는 고등학고 입시를 해 하지 학생들을 가르쳤다.

한명이라도 더 명문고에 합격시키기 위해 학급을 A, B, C, D로 나눠 차등교육을 실시했다.

이른바 우열반으로 학생을 나눈 것인데 D반이 최우수 학생들로 구성되었고 이들은 교복 왼쪽 가슴에 ‘D’라고 써 붙이고 학교를 다녔다.

자존심 강한 나는 아르바이트도 다 때려치우고 죽기 살기로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고 줄곧 가슴에 D를 달고 중학교 생활을 했다.

사람에게 약점은 때론 강점이 된다. 자존심이 강하고 지기 실하는 사람들은 그것에 상처받을 더 고통이 큰 반면, 그걸 극복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도 하는 법이다.

그게 노력인지도 모른 채 목표에만 몰입하게 되는데, 그런 환경이 초등학교 3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찾아왔던 것이다.

서울 피난민 아이가 해준 서울 이야기가 점차 멀어지고 꿈도 사라질 즈음, 다시 한 번 나를 서울병에 걸리게 하는 사건이 찾아왔다.

경기 배지

같은 마을에 사는 선배였다. 그는 내가 다니고 있는 제일중학교 출신인데 언제부터인가 안 보이더니 방학 때 불쑥 고향에 나타났다. 멋진 교복을 입고 촌티를 싹 벗어던진 채 반갑다며 한마디 던졌다.

"수남아 공부 잘하냐?“

당시 내 이름은 명관이 아니라 수남이었다. 명관은 22살이 되던 62년에 아버지가 “출세하고 집안을 일으키라“고 지어준 이름이다.

"네. 형 근데 어디 다녀요?"

“서울 경기고 다니고 있잖아.”

몸이 떨리고 눈이 커지며 숨어있던 열망이 한꺼번에 터지는 단어였다.

“서울 경기고등학교라니! 이곳 제일중학교에서 공부 좀 한다는 친구들은 대개 제주 명문고를 다니는 게 꿈이었고 나의 부모님도 그 정도면 대만족일 텐데, 이 형은 대한민국에서 최고 중 하나로 알아주는 경기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다니…….”

그리고 자세히 보니 왼쪽 가슴에 '경기' 배지를 단 것이 보였다. 그 순간부터 그 배지는 지워지지 않는 내 욕망의 징표가 되어 줄곧 나를 괴롭혔다.

“과연 내 실력으로 경기고를 갈 수 있을까?”

“아니지, 이왕이면 서울고등학교가 낫지.”

“서울대를 더 많이 보내잖아!”

“서울로 나를 유학 보내야 하는데 우리 집 형편에 가능할까?”

“합격해도, 서울 친구들과 공부하다 뒤처져서 열등반 A 마크를 다는 건 아닌가? 그건 죽기보다 싫은데…….”

“아냐 아까 보니까 그 형 A, B, C, D 마크는 없었어.”

그날 이후 별의별 생각을 하며 밤마다 고민하며 잠들었다. 속이 터지는 날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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