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관 칼럼](13)삼성 첫 우승의 비밀 - 돈을 제일 많이 받은 대가
[현명관 칼럼](13)삼성 첫 우승의 비밀 - 돈을 제일 많이 받은 대가
  • 현달환 편집장
  • 승인 2021.06.26 09: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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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전과 나눔 고문
제34대 한국마사회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
2002년 삼성라이온즈 야구단 구단주
삼성물산 대표이사 회장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비서실장
삼성건설 대표이사 사장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

지난 3월 23일 컨테이너선 에버 기븐(Ever Given)호가 수에즈 운하에서 모래 폭풍을 맞닥뜨리게 되면서 시속 74km의 강한 바람으로 인해 배는 방향타를 잃어 좌초되어 6일간 통행이 마비된 사건이 있었다.

수에즈 운하가 1869년 개통한 이래로 150년 역사 동안 단 한 척의 선박으로 지중해 및 홍해에서 배가 대기하고 운하가 완전히 막힌 경우는 이 사건이 처음이라고 한다.

갑자기 무슨 말이냐고 하겠지만 사실 수에즈 운하가 만들어진 때가 1869년이다. 이 시기에 미국 최초의 프로야구팀 신시내티 레드 스타킹(Cincinnati Red Stocking)이라는 팀이 탄생됐다. 150년이 넘는 시기에 프로야구가 탄생된 셈이다.

일본은 1873년에 미국으로부터 야구를 도입 후 1935년에 프로야구를 출범시켰고 근 50년 가까이 된 1982년에 우리나라에도 프로야구가 탄생됐다. 혼란과 격동 속에서 출범한 제5공화국이 국민의 관심과 시선을 정치로부터 조금이라도 멀어지게 하기 위해 프로야구의 탄생을 서둘러 탄생시킨 것이다.

1982년 3월 27일, MBC 청룡(초대 감독 백인천), 롯데 자이언츠(초대 감독 박영길), 삼성 라이온즈(초대 감독 서영무), 해태 타이거즈(초대 감독 김동엽), OB 베어즈(초대 감독 김영덕), 삼미 슈퍼스타즈(초대 감독 박현식) 등 6개 팀이 탄생으로 역사적인 개막경기가 진행됐고 대한민국의 야구는 시작됐다.

특히 당시, 흑백에서 컬러텔레비전의 탄생으로 프로야구는 급속도로 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 경기로 자리 잡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의 성적은 물론 개인사까지 줄줄 외워 다니면서 자랑하던 팬들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인기종목이 된 프로야구 스토리를 하자면 길어지는 데, 대구와 경상북도 지역 등을 연고지로 탄생한 삼성은 우승에 목말라 있었다. 삼성의 이만수, 장효조 등 이름만 들어도 겁이 나는 선수들로 즐비한데 우승이란 타이틀을 못 가져갔으니 최고경영자 입장에서는 영 기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삼성하면 제주출신 오봉옥 투수가 생각난다. 동네에서 돌멩이로 던지기를 잘했다는 누군가의 말이 생각난다. 지금은 강민호 포수가 선수로 있다. )

우승에 목말라 있는 팀에서 감독을 하든지 구단주를 하는 것은 모험이다. 프로는 냉정하기에 우승이 아니면 곧 죽음이다. 목이 달아나는 것이다. 최고경영자가 목을 치는 것이 아니라 팬들이 목을 치는 것이다.  파리목숨이란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손으로 날아다니는 파리를 아무리 죽여도 파리동물협회에서 손해배상이나 소송이 날아오지 않는 것처럼 감독을 경질해도 아무런 대항을 하지 못하는 게 프로의 세계인 셈이다.

우승 승부사로 알려진 해태출신 김응룡 감독을 삼성의 새로운 감독으로 선임됐다는 기사가 뉴스에 톱으로 장식됐다. 여기저기 아우성도 있었지만 승부의 세계에서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것을 삼성에서 우리는 배울 수 있었다. 해태출신은 해태에서만, 롯데출신은 롯데에서만 하는 그러한 인식이 깨진 것이다.

현실은 냉정하다. 승부의 세계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본문에서 나온 것처럼 김응룡 감독과 현명관 회장이 서로 소통으로 인정하고 묵인해줌으로 인해 선수들과 감독은 경기에만 매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이다.

인정하지 않는다면 인간성은 말살되기 때문에 그 인정을 통해 사람은 끈근하게 이어지는 것이다. 이건희 회장이 말한 "간섭하지 말아라"라는 말이 선수에게, 감독에게, 팀에게 무서운 것이다. 자율적으로 하되 결과를 만들라는 것이다.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그러한 인내속에 결국 삼성은 우승을 했지만 프로야구를 통해 온갖 근심걱정을 털어내고 새로운 활력소를 찾는 것이다. 야구는 우리들의 인생사이다. 네박자라는 노래도 있지만 1,2,3루를 돌아 홈으로 와야만 점수가 나는 경기라 길(고향)을 떠난 사람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때 어떤 모습으로 돌아올 것인가?라는 생각을 해주는 게 야구인 셈이다. 홈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삶을 잘하기 위해 평소에 자신의 역량을 키워 놓자.

현명관의 자서전 ‘위대한 거래’는 우리에게 어덯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들어 있다.

내용이 길어져 다음 장면으로 이어지는 이승엽 선수의 활약에 대해 다음 호에 게재하기로 한다.

뉴스N제주는 프로야구의 힘이 국민을 하나로 힘으로 단결시키는데 큰 몫을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힘이 하나로 뭉치지 못할 때 우리는 수에즈 운하에서 만난 바람을 우리의 인생, 제주, 대한민국에서 맞을 수도 있습니다. 내년에 이어지는 정치의 계절, 우리는 프로야구의 힘처럼 하나로 뭉쳐 새로운 제주,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온힘을 다애햐 할 것 같습니다. 프로는 자신의 말에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거기에 현명관의 '위대한 거래'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많은 필독이 있기를 바랍니다.[현달환 편집장]

인터뷰하는 현명관 회장
인터뷰하는 현명관 회장

가장 무거운 감투를 쓰다

1996년 12월, 삼성 비서실장에서 물러나자 이건희 회장은 나를 삼성물산 총괄대표이사 부회장에 임명했다.

나는 아직 부회장 직함을 달 정도의 역량이 안 되고, 가서 일을 잘하면 부회장을 시켜달라고 했으나 '인사는 내가 하는 거야'라는 꾸중만 듣고 과분한 부회장이 되어 삼성물산을 경영하게 되었다.

다시 2001년 3월에 부회장의부를 떼고 대표이사 회장이 되었다. 2002년 2월에는 모든 등기 이사직을 그만두고 그룹의 원로로서 일본 담당 회장과 스포츠 및 해외협력 업무를 담당했다.

대표이사가 빠진 회장은 등기 이사가 아니기때문에 경영의 결과에 대해 법적 책임이 없어서 훨씬 자유로운 대외활동이 가능했다.

국제자유도시포럼 공동대표(2002년), 무역협회의 e트레이드 사업 추진 위원회 위원장(2002년), 신아시아 경제 연맹 준비 위원회 공동 발기인 대표(2002년 3월) 등 여러 직함이 하나둘씩 늘어나던 시기에 중요한 직책 하나를 맡아야 하는 일이 생겼다.

삼성 라이온즈 구단주 권한 대행이 그 일이었다. 등기이사를 떼기 1년 전인 2001년 3월이었다. 우리나라의 프로야구 구단주는 대개 오너가 직접 맡는다.

삼성 라이온즈도 이건희 회장이 구단주였다. 그러나 이회장은 직접 관여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가 없기 때문에 구단주 대행 체재를 만들어 프로야구단을 운영했다. 그 구단주대행을 내가 하게 된 것이다.

이건희 회장은 고등학교 때 레슬링을 했던 사람이다. 그만큼 스포츠에 관심도 많고 승부욕도 남다른데, 프로야구단의 구단주까지하면서 삼성이 우승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매우 심기가 불편했다.

본인이 맡은 스포츠 단체는 반드시 최고의 성과를 올려야 직성이 풀리는데, 삼성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프로스포츠에서 우승을 못하고 있으니 얼마나 속이 답답했겠는가?

특별한 전갈이 왔다.

“삼성 라이온즈를 현회장이 맡아라! 자율적인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도록 감독에게 힘을 실어 줘라. 간섭하지 마라.“

이것이 이건희 회장의 뜻이었다.

평소 야구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경기가 있을 때면 가끔 머리를 식히고 싶어 삼성 라이온즈의 경기를 관람하곤 했었다.

그때마다 구단 관계자들은 나를 부담스러워했고 경기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제발 오지 말라는 부탁을 하곤 했었다.

당시 8개 구단 중 가장 많은 현금 지원을 받고 있던 삼성 라이온즈는 이건희 회장이 볼 때 답답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전 세계 일등을 노리는 것도 아니고 국내 8개 팀 중에서 1등을 20년 동안 못하고 있다는 것은 도저히 자존심이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3년간 그룹 비서실장으로 일한 사람을 구단주 대행으로 임명한 뜻이 무엇이었겠는가? 당연히 우승이었다.

그래서 더욱 부담이 되었다. 2천년 초반부터 여러 감투를 쓰면서 대외 활동을 했지만 그 시절, 내게 가장 무거운 감투는 역시 삼성라이온즈 구단주 대행이었다.

돈을 제일 많이 받은 대가

당시 삼성은 8개 구단 중 가장 돈이 많았다. 팬들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가장 많은 돈을 지원받는데 우승을 하지 못할까?

이에 대한 해답은 2001년 구단주 대행을 시작하면서 알게 되었다. 구단 대행으로 취임 후, 일본 롯데 팀과 시범 경기를 마치고 김응룡 감독과 일본에서 미팅을 했다.

그는 2000년 10월 30일, 나보다 몇 개월 먼저 라이온즈에 입단했었다. 이 자리에서 김응룡 감독은 나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속 시원하게 말해주었다. 김응룡 감독과 이야기 나누며 알게 된 라이온즈의 가장 큰 문제는 많은 돈이었다.

그 돈이 오히려 족쇄가 되었던 것이다. 삼성 라이온즈가 1패만 해도 여기저기에서 전화가 오기 시작한단다. 사실 나 자신도 이런 전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 적이 있었으나 그것이 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걔 빼야 합니다. 지금 이대로 가면 또 우승 못해요.'

“주루 코치가 문제예요. 주루 플레이 잘못으로, 날린 승리가 몇갭니까?“

“타격 코치는 뭐 하는 사람인가요? 몇 사람 빼고 전부 죽을 쑤잖아요. 바꿔야 삼성이 삽니다.“

심지어 가장 중요한 선수 스카우트 문제까지 간섭하는 계열사도 있었다.

“이번에 그 친구 알죠? 걔 데려와야 합니다. 김00은 한 물 갔어요.”

삼성그룹 임원이나 사장은 사실상 코치요 감독이 되어 구단을 흔들었던 것이다.

모두 삼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충정 어린 조언을 했겠지만 듣는 구단 측 관계자는 진땀을 흘려야 했고, 몇 가지는 그들 뜻대로 해주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그래야 구단 직원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다 보니 배가 산으로 가고 있었다. 모기업의 뜨거운 지원은 타들어가는 논바닥에서 비실대는 모내기처럼 구단 프론트를 실신시켰고 그것은 그대로 감독과 코칭스테프에게 전달되어 자신들의 능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게 만들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선수 스카우트도 헛돈을 쓰는 경우가 많아서 일반 야구팬들을 갸우뚱하게 만들기도 했을 정도다.

이것을 뜯어고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방패가 되어 누구도 흔들지 못하게 해야겠다. 그리고 최고의 감독인 김응룡 감독을 믿자."

흔들던 사람이 방패가 되다.

우리나라에는 진정한 프로 스포츠 구단이 없다. 한국이 세계 13위 국력이라고 자랑하지만 아직도 국민들은 스포츠 관람을 즐길 정도의 여력이 없는 나라라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혹자는 무슨 소리냐, 지금 삼성 엘지 SK 등 프로야구단이 있지 않느냐고 항변하겠지만, 이들은 자체 입장 수입으로 선수 연봉과 프론트 경영진)의 임금을 감당하지 못하는 반쪽짜리, 무늬만 프로 구단들이다.

모두 모기업의 지원 아래 움직이는 기생식물 같은 존재라고 보면 된다. 800만 관중이라고 말하는 프로야구지만 각 구단마다 100억 대의 적자를 기록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룹 비서실이나 모기업 임원의 한마디는 그대로 구단 측에 지시처럼 받아들여지게 된다. 돈이 거기서 나오기 때문이다. 내가 구단주 대행이 되기 1년 전, 삼성 라이온즈가 금융감독원에 제출한 2000년 감사보고서를 봐도 이러한 상황은 숫자로 드러난다.

총 302억 3937만 원의 수입액 중 160억 원이 삼성 계열사의 지원금이었다.

입장료 수입은 18억 6천630만 원이었다. 삼성 라이온즈에 대한 계열사별 지원금을 보면 삼성전자, 삼성생명, 삼성화재, 삼성SDI, 삼성증권, 삼성코닝, 삼성전기, 삼성SDS 등 각 계열사들이 많게는 수십억 원에서 적게는 수억 원을 지원하고 있었다.

이러니 회사로부터 걸려오는 전화를 구단 측이 홀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도 아슬아슬하게 우승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여러 번 지켜보면서 그때마다 속이 터져서 구단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불평을 말하기도 했었다.

구단 대행에 임명되고 구단의 사정을 살펴보니 그것이 얼마나 큰 압박이었는지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제는 내가 입장이 바뀌어, 이리저리 휘둘리는 구단을 흔들리지 않게 지켜야 하는 방패가 되어야 했고 우승을 시켜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적절한 배분 그리고 심기일전

나는 신라호텔에서도 삼성시계에서도 그랬지만 사람에 대한 투자, 단기 효과보다는 장기적인 효과를 내는 투자에 망설이지 않았다.

삼성 라이온즈에 와서도 그렇게 했다. 해외 전지훈련에 돈을 아끼지 않았고 선수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하여 성과에 따른 인센티브 차등 지급 등 일본이나 미국의 프로구단이 시행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각종 입김 때문에 헛돈 쓰는 일은 줄이고 감독의 권한을 최대한 보장해 주었다.

김응룡 감독은 명장다웠다. 선수들을 장악하고 팀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세세한 것까지 신경 쓰는 모습이 경영자와 다를 바 없었다.

해태 시절, 한국시리즈 9전 전승의 대위업을 달성했던 김감독은 오자마자 “삼성의 개인주의를 뿌리 뽑겠다”라며 스타플레이어가 많았던 삼성 라이온즈의 문제를 간파했다.

전지훈련 내내 체력을 위해 고기만 먹을 것을 강요하며 식탁에서 김치를 제외할 정도로 독한 사람이었고 엄청난 강훈련을 시키며 선수들을 굴렸다.

느릿느릿 걷는 것도 용납되지 않았고 방망이를 집어던지며 성질을 부린 선수는 곧장 귀국행을 통보받았다. 한마디로 무시무시한 저승사자 같은 감독이었다.

삼성은 심기일전했고 2001년 8월부터는 1위 독주가 계속되었다. 내가 대행을 맡자마자 우승하는 것 아닌가 하여 들떴고 한국시리즈가 시작되기도 전에 화려한 우승 축하 이벤트를 계획했었다.

아뿔싸, 이럴 때 항상 문제가 생기는데, 살얼음 밟는 기분으로 살아야 되는데 방심이 참사를 불렀다. 역시나 우리는 한국시리즈에서, 지금은 두산 베어스인 당시 OB 베이스에게 4패를 당하고 두 번 밖에 이기지 못했다. 우승은 OB 베어스가 차지했다.

마해영의 헛스윙으로 우리의 패배와 OB 베어스의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당시 KBO 회장이면서 OB 베어스의 구단주인 두산의 박영오 회장은 크게 기뻐했다.

이건희 회장이 TV 중계로 봤을 텐데 또 우승을 하지 못하고 저런 기쁨을 구단주에게 선물하지 못한 것이 매우 아쉬웠다.

당장이라도 책임을 지고 물러나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김응룡 감독도 오자마자 삼성을 한국시리즈에 올려놨지만 9전 전승이라는 자신의 한국시리즈 기록이 깨지며 자존심이 상했다.

그것도 정규 시즌 3위 팀에게 당한 패배였기에 아픔이 매우 컸다.

승진 그리고 악몸의 7연패

과거 삼성은 감독들의 무덤이었다. 우승에 실패하면 모든 코칭스태프와 감독이 갈렸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감독을 신뢰하고 한 번 더 도전하기로 했다.

이건희 회장의 결단이었다. 나도 구단주 대행에서 구단주로 승격되었다. 반드시 우승하라는 무언의 압력이면서 사람을 썼으니 믿는다는 메시지였다.

그렇게 다시 2002년 우승을 향해 달려가자고 파이팅 했으나 어쩐지 작년보다 순위가 올라가지 않았다. 그러더니 급기야 6월 28일부터 7월 9일까지 7연패를 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나를 비롯한 삼성 라이온즈의 프론트는 이대로 무너지는 줄 알았다.

정말이지 이 기간 동안 감독의 일을 간섭하지 않고 게임에 관여하지 않기는 무척 힘들었다.

하지만 내가 정한 원칙이고 처음 구단에 부임해서 깨달은 삼성 라이온즈의 문제를 스스로 가중 시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인내했다.

하늘이 도왔을까, 삼성이 9월 10일부터 15연승을 따낸다. 프론도 기운이 났고 다시 한 번 선수 코칭스태프가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하나 되어 돌진했다.

그 힘으로 삼성은 그대로 한국시리즈에2년 연속 직행하고 우리는 대구구장에서 LG를 상대로 한 첫 게임을 기다렸다. 나와 프론트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엄숙할 정도로 차분했다.

11월 3일 홈구장에서 4대 1로 승리, 1승
11월 4일 홈구장에서 1대 3으로 패배, 1패
11월 6일 서울에서 6대 0으로 완승, 2승 1패
11월 7일 서울에서 4대 3으로 승리, 3승 1패
11월 8일 서울에서 7대 8로 석패, 3승 2패

우리는 11월 10일 대구에서 6차전을 맞았다.

여기서 1승을 보태 우승을 하느냐 아니면 패배하고 서울에 가서 결승을 치르냐가 달린 경기였다. 전날 7대 8로 진 후유증이 구단 전체를 짓눌렀다. [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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