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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관 칼럼](14)교체될 뻔한 이승엽...동점 스리런 홈런
[현명관 칼럼](14)교체될 뻔한 이승엽...동점 스리런 홈런
  • 현달환 기자
  • 승인 2021.07.03 09: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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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전과 나눔 고문
제34대 한국마사회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
2002년 삼성라이온즈 야구단 구단주
삼성물산 대표이사 회장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비서실장
삼성건설 대표이사 사장

2002년 하면 단연 한일월드컵이 생각난다.

그러나, 야구광, 야구팬이라면 명불허전 삼성과 LG의 한국시리즈 결승전 명장면이 생각날 것이다.

1차전 삼성 승, 2차전 LG 승, 3차전 삼성 승, 4차전 삼성 승, 5차전 LG 승, 6차전 삼성 승의 결과.

우승에 목말랐던 삼성(감독 김응룡)이 LG(감독 김성근) 9회말 9대 6으로 3점차로 뒤지던 순간, 부진을 거듭하던 이승엽을 교체하지 않고 타석에 내보내 당대 최고의 마무리 투수 이상훈 선수를 상대로 결국 3점 홈런을 뽑아 냈으니 경기장엔 열광의 도가니였다.

당시, 삼성팬은 물론 TV를 지켜보던 시청자들 역시 그 짜릿함에 너나없이 환성을 지를 정도였다. 결국, 마해영 선수가 다시 끝내기 홈런으로 삼성 우승의 한을 풀었지만, 사람들은 마해영 선수보다는 이승엽 선수의 그 3점 홈런을 더 기억하고 있다.

야구관계자들도 당시 그때의 이야기를 꺼내보면 엄지척할 정도로 명승부였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한민국 프로야구 사상 몇 안되는 명불허전 장면이기 때문이다.

필자도 이번주 이승엽의 3점 동점 홈런을 때리는 장면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스포츠라는 것이 특히, 야구라는 것이 이렇게 사람의 감정을 하나로 만드는데 일조하는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끝까지 믿고 선수를 타석에 서게 한 김응룡 감독의 용병술, 또한, 현명관 구단주의 기다림. 이러한 운이 하나로 연결고리가 되었을 것이다.

당시, 삼성의 김응룡 감독은 우승 소감에서 "야구의 신과 대결하는 느낌이었다."고 말해 이후로 김성근 감독의 별명은 자연스럽게 야신이 됐다. (역으로 '야구의 신'과 대결해서 '난 이겼다'라는 의미도 포함)

현명관의 자서전 ‘위대한 거래’를 통해 우리는 '거래'를 하면서 그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고 분석하고 확신하는지를 보고 있다.

마지막까지 믿어준다는 것.
우리는 누군가를 그렇게 마지막까지 믿어준 일이 있던가.
불안해하지 않고 담담한 마음을 가진 적이 있던가.

본문에 있는 내용 '불신물용(不信勿用) 용인필신(用人必信)' 즉, 사람을 믿지 못하겠으면 끝까지 쓰지 말고, 사람을 쓰고자 한다면 반드시 믿고 맡기라는 말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맨 마지막에 탑재한 동영상을 보면서 당시 이승엽 선수가 쏘아올린 3점포가 지금 힘들게 살고 있는 우리들의 가슴에 희망의 홈런으로 변하길 기원해본다.오늘도 현명관의 자서전 '위대한 거래'를 통해 한단계 성장하는 순간을 만들자. 많은 필독이 있기를 바랍니다.[현달환 편집장]

현명관 회장
현명관 회장...현명관 회장은 아직도 그때를 기억하면 가슴이 떨린다고 말한다.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광풍도 가라앉자 사람들은 야구로 다시눈을 돌렸다. 1985년 전기 후기 모두 1위를 하면서 한국시리즈 없이 삼성 라이온즈는 싱거운 우승을 했지만 그것을 삼성의 우승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삼성 라이온즈의 저주는 사실 1982년 프로야구 원년 우승을 OB 베어스한테 헌납하면서 꼬이기 시작했다. 박철순 투수를 영웅으로 만들어 주는 조연을 하더니 1984년에는 최동원을 전설로 만들며 결승에서 패했다.

이런 식으로 다섯 번 결승에 올라 한국시리즈에서 패하고 20년을 헛손질하며 만년 우승 후보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을 달고 다닌 삼성 라이온즈가, 오늘 대구에서우승을 노린다.

중국 초나라 장왕의 방탕함을 일깨우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불비불명(不飛不鳴)-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다.'는 이 말은 방탕하다는 뜻보다는 때를 엿본다는 의미가 강한 고사 성어다. 3년간 허허실실 전략으로 충신과 간신을 가려내려는 장왕은 3년 동안 불비불명했다.

그런데 삼성은 20년이나 불비불명하고 있으니 “아재요~ 참 마20년이다. 언제 할낀데 우승!”하는 자조 석인 탄식이 대구 팬들 사이에서는 일상화되었지만 구단에 대한 사랑은 여전히 뜨거웠다.

출처 한겨례 신문
출처 한겨례 신문

11월 10일, 경기 전, 대구 시민운동장 전광판에는 거대한 플래카드가 걸렸다.

20년 不飛不鳴 (불비불명) 雄飛(웅비) 삼성'

과연 오늘은 모든 실망과 좌절과 조롱을 뒤로하고 승리할 것인가? 3승 2패에 1승을 더하면 우승이고 오늘 경기에서 패하면 3승 3패가 되어 서울에서 결승을 치러야 한다.

최저 기온 7도, 월드컵 등 각종 행사에 밀려 찬밥이 된 한국 프로야구는 경기를 미루고 미루다, 11월에 한국시리즈를 치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얼어 죽을 만큼 쌀쌀한 날씨라고 한두 마디씩 불평이 나왔지만 수많은 팬들과 짧은 치마의 치어리더들은 우승에 대한 열망으로 초겨울 같은 가을 날씨를 압도하고 있었고, 자신의 홈구장에서 우승의 감격을 맛보기 위한 팬들로 대구 경기장은 14번째 만석이 되었다.

경기 전 LG 감독 김성근은 홈구장의 열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늘도 마운드에 올라가 야구공을 굴렸다. 그는 경기 전 야구공을 투수 마운드에서 굴려 보곤 했다.

공을 집어 들고 흙이 얼마나 묻는지 보기 위해서다. 그날 야구장의 습도를 측정하고 판단하는 그만의 방법이었다. 이런 식으로 온갖 것을 체크하면서 작전을 구상했다.

“오늘은 타격전이 될 것 같군“

LG가 승리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대구 경기장에 먹구름처럼 몰려온 것은 2회였다. 풀카운트 상황에서 포수가 공을 놓쳐, 주자 낫 아웃 상태가 되어 LG는 주자를 내보내는 데 성공한다. 뒤이어 다시 볼넷으로 타자가 걸어 나간다. 순식간에 주자 1, 2루. 불길하다.

LG 최동수가 타석에 오른다. 연속 포볼에 대한 보상심리였을까? 삼성 투수는 정직하게 한복판에 143km짜리 직구를 꽂아 넣는다.

"땅!"

정통으로 얻어맞은 타구가 크게 솟구친다. 홈런이다. 우타자 최동수가 우측 담장을 넘기는 쓰리런 홈런포로, 대구 팬들은 초겨울 같은 날씨에 찬물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3대 0.

기분 나쁜 볼넷이 더 기분 나쁜 홈런으로 점수를 만들었다. 2회말 삼성도 투런홈런으로 따라붙고 3회에는 양준혁의 적시타로 동점을 만든다. 3회 3 대 3.

4회 5 대 4로 삼성은 역전에 성공한다. 대구 구장은 우승에 대한 희망을 잠시 품기 시작한다.

그러나 6회 초, 투 아웃 투 스트라이크 투 볼에서 나온 LG 김재현의 좌중간 안타로 1, 2루 주자를 모두 불러들이자 관중석에서는 욕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7 대 5로 LG가 앞섰다. VIP석에서 구단 관계자들과 관전하던 현명관 구단주는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번에도 우승을 놓치는 것인가?”

옆에 있던 KBO 회장은 쓰린 속에 한 번 더 스트라이크를 먹인다.

“오늘 시상하는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현회장님?

“경기는 지켜봐야죠. 이제 뭐 6회 아닙니까?"

“이승엽은 계속 두고 보실 건가요? 한국시리즈 내내 역할을 못하네요. 허허.”

박용오 KBO 회장은 오늘 삼성이 우승할 경우, 시상을 위해 끝까지 경기를 지켜봐야 하는 사람이었다. 두산 그룹 회장이기도 한 그는 엄청난 야구광이면서 전문가였다.

6회 2점 차로 역전을 하자 LG 감독 야신 김성근은 승리를 확신하기 시작했다.

“이상훈을 언제 투입하느냐가 문제군, 그동안 마무리하면서 투구 수가 많았다. 조금만 참았다 쐐기를 박아야 한다. 아직은 등판이 이르다. 조금만 참아보자.”

특급 마무리 갈기 머리 이상훈이 올라오면 그 경기는 끝난 것이다. 2점 차로 뒤지기 시작하자 김응룡 감독도 그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김응룡 감독은 특유의 무표정으로 복잡하고 불안한 마음을 숨기며 생각했다.

“지금 따라붙지 못하면 이상훈이 올라와 마무리할 것이고 그때는 따라가기 어렵다.”

LG는 경쾌하게 점수를 얻고 있었으며, 반면 삼성은 중심 타선이 침묵한 채, 엉뚱한 타선이 빛을 내며 따라붙고 있었다.

중심 타선 침묵에는 3번 타자 이승엽의 부진이 제일 컸다. 포스트시즌 내내 20타석 가까이 되는 동안, 안타 2개만을 만들어낸 그의 부진을 계속 두고 볼 팬과 코치, 스텝, 구단 프론트는 없었지만, 김응룡 감독은 이승엽을 교체하지 않고 계속 기회를 주고 있었다.

8회가 되자 야신(野神) 김성근의 승부근성이 발동한다. 무사(無死)에 외국인 용병이 안타를 치며 1루에 나가자 야신은 바로 번트 신호를 보낸다.

“일단 이기고 보는 거야.“

타자주자 아웃, 다음 주자 고의사구.

원아웃 주자 1, 2루, 최동수가 타석에 오른다. 그는 3회에 홈런을 쳤었다. 최동수가 힘차게 방망이를 휘두른다.

방망이가 부러지며 좌측에 안타.

순식간에 8 대 5로 LG가 승기를 잡는다.

VIP석에서 지켜보던 삼성 라이온즈 프론트와 현명관 구단주의 속이 타들어갔다.

“상대는 배트가 부러져도 안타고, 우리는 평범한 파울 플라이도 놓치고, 6차전은 물 건너 간 것인가………. 승리의 여신은 LG를 선택한 것인가?”

이어진 연속 안타로 LG대 삼성은 9 대 5.

"아…….“ 현명관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반면 VIP 룸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역전과 재역전을 거듭하는 명경기에 대한 박수였으나 현명관 구단주는 속이 불편했다.

박용오 KBO 회장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현명관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오늘 내가 우승 팀에게 시상을 할 일은 없을 거 같네요. 서울에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보겠습니다. 현회장님? 저 가도 되죠?"

옆에 있던 LG 트윈스 구단 측 관계자가 거든다.

"그럼요, 회장님 들어가십시오. 서울에서 뵈어요. 그때 멋지게 우승 팀에게 시상해 주십시오. 물론 저희겠지만요. 하하하."

현명관은 차마 끝까지 지켜보자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박빙의 승부가 4점 차로 무너진 지금, 삼성이 우승할 수도 있으니 시상식을 위해서 남아 달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현회장은 박용오 희장이 사라진 문을 향해 성의 없이 인사를 하고 다시 심각하게 그라운드를 바라보았다.

LG 선수들이 모두 뛰쳐나와 홈을 밟는 선수들을 얼싸안으며 아직도 환호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환호 속에서도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는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LG의 김성근 감독은 4점 차가 난 상황에서도 안심하지 못했다.

그는 “오늘 경기는 4점 차 이상 나야 승리할 수 있다”라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공격수들이 차분히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을 했으나 ‘볼을 기다리라’는 작전을 내지는 않았다.

실수였다.

손써 볼 틈도 없이 급하게 공격하던 LG 타자들이 아웃을 당하고 4점을 앞선 상황에서 8회 말을 맞았다. 8회 말, 1점을 삼성이 따라붙는다.

김성근 감독은 생각했다.

“3점 차는 불안하다. 이상훈이 마무리를 잘 해 주길 바랄 뿐. 하지만 오늘 경기를 잡으면 우승은 우리다.”

9회 말, 삼성의 마지막 공격을 막아내라는 특급 명령을 받은 이상훈이 갈기 머리를 휘날리며 마운드에 올랐다. 그는 이현세 만화에 나오는 '공포의 외인 구단‘ 명투수 까치처럼 자신감이 넘쳤다. 3점차는 특급 소방수가 역전을 허용할 만한 점수가 아니다.

김응룡 감독은 이상훈이 마운드에 오르자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었다. 팬들도 이미 7차전을 대비하며 아쉬움을 소주로 달래고 있었다.

“이렇게 된 바에야 행운을 믿어 보자”
김 감독은 대타를 투입해보기로 한다.

“첫 타자, 김재걸로 교체.”

코치의 호명에 김재걸은 머리로 피가 솟구치는 걸 느꼈다. 벤치에 앉아 있던 김재걸은 큰 각오를 하고 타석으로 걸어갔다. 한국시리즈 6차전, 첫 타석을 9회 말이 돼서야 밟아본 김재걸은 원한을 풀듯 방망이를 휘둘렀다.

"중견수 쪽 쭈욱 뻗어갑니다! 중견수 뛰어갑니다! 중견수 뒤로! 중견수! 담장 맞고 떨어집니다! 자 2루까지! 2루 돌아서 3루는...가지 않습니다. 큰 타구가 나왔습니다. 하마터면 홈런이 될 뻔한 아주 큰 타구! 아 삼성으로서는 다시 불꽃을 살릴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합니다.”

TV 중계를 하던 SBS 김정일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구장의 팬들도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다음 타자 강동우는 삼진, 다시 LG 벤치는 박수를 치며 벤치를 박차고 뛰쳐나왔고 승리를 확신했다. 삼성 쪽은 침울해졌다.

다음 타자는 브리또와 이승엽이다. 한국시리즈 20타수 2안타라는 최악의 타격 부진을 겪고 있는 이승엽을 보면서 김응룡 감독은 많은 생각을 했다. 삼성 프론트도 고민이 많았고 현명관 구단주도 침이 말랐다.

한 번도 경기 운영에 관여하지 않은 현명관이었지만 이 번 만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승엽 빼야 하는 거 아니요? 오늘 4타수 무안탑니다. 5타수 무안타 만들 겁니까? 정말 여기서 포기하자는 거예요 뭐예요? 안되겠습니다. 인터폰 어딨어요? 내가 감독한테 직접 말하겠습니다."

현명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인터폰 쪽으로 향했다.

순간 VIP석에서 관전하던 삼성 프론트의 김단장이 조용히 말렸다.

"한 번만 더 김응룡 감독을 믿어 보시죠. 무슨 생각이 있겠죠.“

현명관은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김단장이 말한 믿어 보자라는 단어를 마음속에 새겼다. 인터폰 쪽을 바라보며 끓어오르는 갑갑함을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그래, 지금까지 전문가를 믿고 여기까지 왔다. 설사 여기서 패하는 한이 있더라도 한번 믿었으면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그 사이 브리또가 볼넷으로 출루했다.

다시 희망을 품으며 현명관은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 아무 기대도 없이, 이승엽이 타석에 들어서는 모습을 담담하게 지켜봤다.

이승엽은 뜸을 들이며 유난히도 타석을 발로 여러 차례 골랐다. LG 이상훈은 멍하니 바라보다 이승엽이 타석에 자리를 잡자, 지체 없이 크게 왼팔을 휘돌리며 공을 뿌렸다.

초구 스트라이크, 펑 소리가 날 정도로 자신감 넘치는 투구였다.

현명관은 마음속으로 '역시'를 외쳤다. 조금 전 머뭇거리며 인터폰으로 이승엽의 교체를 주문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했다.

자신감을 얻은 LG 투수 이상훈은 더 자신 있는 폼으로 두 번째 공을 한복판에 뿌렸다.

슬라이더였다.

주자 1, 2루 상황에서 병살타를 유도하려는 투구였다.

“딱!”

우측 아래로 흐르는 슬라이더를 지금껏 보여주지 않던 번개 같은 스윙으로 이승엽이 걷어 올렸다.

“받아칩니다~! 우측에 큽니다. 아아~!!"

“우측에 호오오오오오옴 런!! 이승엽의 홈런!"

“침묵하던 이승엽! 9회 말, 동점 홈런!"

사진=매일신문, 2002년 이승엽이 극적인 동점 홈런을 터뜨린 후 환호하고 있다.
사진=매일신문, 2002년 이승엽이 극적인 동점 홈런을 터뜨린 후 환호하고 있다.

TV 중계를 하던 김정일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전국에 울려 퍼졌고 삼성의 우승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기적 같은 9 대 9 동점이 되자, 현명관은 구단 관계자들과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그리고 급하게 전화 한 통을 주문한다.

"아까 자리 뜨신 KBO 회장님, 빨리 돌아오시라고 전화하세요. 우승 시상식을 할 사람이 없으면 안 되잖아요."

KBO 한국야구 위원회 소속 간부가 IC를 막 빠져나가려는, 박용오 회장에게 급히 전화를 돌렸다.

“회장님, 빨리 오셔야겠습니다. 삼성이 우승할 수도 있겠습니다.

지금 이승엽이 동점 홈런을....... 앗! 마해영! 지금 마해영이 한 번 더 홈런을 쳤네요. 와! 삼성 대단하네요. 삼성이 10 대 9로 이겼습니다! 우승입니다! 삼성 우승!"

박용오 회장은 경부 고속도로 북대구 IC를 통과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급하게 차를 돌려 대구 야구장으로 향했다.

인생도 모르고 야구는 더 모를 일이라는 것을, 그날 전국의 야구팬은 마음속에 새기며 삼성의 우승을 축하해 주었다.

꽃이 화분 안에 들어가면 마침내 생기가 떨어져 무력해지고
새가 새장 안에 있게 되면 곧바로 하늘이 준 멋스러움이 죽어버린다.
산속에서 꽃과 새가 번잡스럽게 모여 아름답게 되고
날갯짓 퍼덕이며 스스로 반야 지혜를 얻고*1
이로써 침착하고 여유로워져(유연悠然) 마음을 깨닫느니만 못하다.
화거분내 종핍생기 조입롱중 변감천취
花居盆內 終乏生機 烏入籠中 便減天趣
불약산간화조 착집성문 고상자야(약)*2 자시유연회심
不若山間花鳥 錯集成文,  翶翔自若      自是悠然會心     -. 채근담 /제55장

*1(일반적인 해석) 마음대로 이리 날고 저리 날아서 스스로가 한가롭고 자연스러움을 깨달음만 못하느니라.

*2 위 고상자약 부분에서 일반적으로 약若을 어조사로 처리하는데 앞의 새조烏자가 3성(niao)임을 생각하면 약若이 아니고 반야(지혜)를 뜻하는 야[re]가 되어야 3성으로서 각운이 맞는다. 그러므로 자시自是 역시 이로부터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회심은 마음을 깨닫는다는 뜻이기 때문에 문맥이 맞으려면 위의 해석이 더 원뜻에 가깝다고 본다.

하마터면 나는 20년 삼성 우승의 숙원을 날려버릴 뻔했다.

우승에 대한 열망으로 그때 내가 강하게 이승엽을 교체하라고 했다면 첫 우승의 감격과 야구 역사에 남을 명장면은 없었을 것이다.

그날 나의 조급함을 막아준 것은 삼성맨으로 오랜 시간 지내면서 나도 모르게 체득된 용인술 때문이었던 것 같다.

삼성가에는 불문율처럼 내려오는 고전의 경구가 있다.

불신물용(不信勿用) 용인필신(用人必信)

즉, 사람을 믿지 못하겠으면 끝까지 쓰지 말고, 사람을 쓰고자 한다면 반드시 믿고 맡기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 말을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위에서 보면 아랫사람들이 하는 일의 잘잘못이 쉽게 보인다. 자신이 더 잘 아는 것 같고 부하는 어리석게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간섭을 하게 되고 간섭을 한번 하기 시작하면 점점 더 많이 하게 된다.

왜냐하면 윗사람이 한번 치고 들어오면 그때부터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고 점점 더 방어적인 자세로 책임을 윗사람에게 떠넘기기 때문이다.

특히 전문가를 써야 하는 분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최악의 결과를 낳고 만다. 그래서 삼성 그룹은 용인필신의 철학으로 사람을 채용하고 중책을 맡겼다.

채근담은 이 부분을 좀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서 우리에게 알려준다. 전문 분야에 특출난 사람을 '새'로 바꾸어 보면 위 말의 깊이를 실감할 수 있다.

새장이나 화분은 윗사람의 통제를 상징한다. 통제가 강해지면 새는 제 목소리를 잃고 그 미묘한 맛을 잃어버리게 된다.

또한 마지막 구절에 ‘새는 유연해져 마음을 깨닫는다(회심會心)’고 하지 않았는가? 이는 문제해결 능력이 보통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깨달은 사람의 그것과 같음을 말한다.

김응룡 감독의 수십 년 노하우로 바라본 그날 한국시리즈 6차전과, 구단주를 하고 있는 야구 문외한이 바라본 6차전은 전혀 다른 깊이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20타수 2안타라는 통계를 보며 이승엽을 교체하고 대타를 내세워야 한다는 것이 2년 된 문외한의 판단이라면, 김감독은 20타수 2안타이기 때문에 이제 터질 때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뚝심 혹은 혜안이 삼성 우승을 만들었다.

그날 내가 김응룡 감독의 새장이 되지 않았던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날 옆에서 조언해 준 사람 말을 듣길 잘 했다고 생각하며 오늘도 흐뭇한 우승 순간을 떠 올린다.

◆현명관의 21세기 채근담

전문가를 믿어라. 만약 그를 당신의 새장 속에 가두려 한다면
더 이상 아름다운 자연 속 새 노래는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전문가를 믿어라. 같은 것을 보고 당신과 다른 판단을 하는 존재가 전문가다.
전문가를 믿으라고 하는 조언이 들어오면 한 번 더 생각하고 인내하라.
큰 승부를 앞두고는 더욱 그래야 한다.


당시 중계 화면을 함께 보면서 오늘도 열정적인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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