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관 칼럼](17)아버지의 마지막 선물
[현명관 칼럼](17)아버지의 마지막 선물
  • 현달환 편집장
  • 승인 2021.07.24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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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내 죽음을 아들에게 알리지 말라(17)
(사)도전과 나눔 고문
제34대 한국마사회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
2002년 삼성라이온즈 야구단 구단주
삼성물산 대표이사 회장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비서실장
삼성건설 대표이사 사장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

지난주는 현명관 회장이 제주에 대한 향수와 사랑에 대해 그렸다면 이번 장에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는 특별한 관계이다. 누구나 아버지를 떠올리면 과묵한 아버지가 떠올리는데 그런 와중에도 아버지는 늘 아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한 감정은 어머니와 아들간의 감정보다 더 깊은, 믿음의 관계로 자신의 분신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요즘은 딸이나 아들이나 다 사랑스러운 존재로 키우고 있어 그러한 관계가 많이 희미해졌지만 과거에는 아들에 대한 자식사랑이 깊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번에 게재하는 6장 '내 죽음을 아들에게 알리지 말라'라는 제목을 보고 바로 이순신의 죽음을 떠올렸다. 적과의 싸움에서 자신의 죽음을 알리면 아군의 사기는 바로 떨어질 것을 염려했고 사기가 떨어지면 바로 싸움에서 패한다는 것을 잘 아는 장군의 강한 집념에서 나온 말이다.

현명관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에서 마지막 유언이 바로 아들에게 '죽음을 알리지 말라'라는 말.

그만큼 아버지는 중요한 시험에서 아들의 합격을 원했고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시험이 망치지 않기를 바라는 부성애의 발로였을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는 지순한 마음일 것이다. 이처럼 강한 아버지의 애착으로 자식은 살아가는 것이다.

이 장을 보면서 아버지의 믿음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절대적으로 아들을 믿어주면 아들은 자신의 아버지를 존경하고 그렇게 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확신을 줘야 한다. 아들에 대해 자신이 아들을 믿고 사랑한다는 확신을 줘야 아들도 이해한다. 마음속으로만 "내마음 알지?"라는 묵언은 안 통한다. 요즘은 아이들도 잘못 이해하기에 어릴적부터 가끔 그러한 이야기를 해줘야 나중에 기억하게 된다.

다행스럽게 현명관 회장이 시험에 합격하고 나중에 산소에 찾아가서 아버지의 사랑과 정을 느끼며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에 대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만약에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다면 자식 입장에서는 평생 불효가 되는 것이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몸을 바치지만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몸을 바친다. 그만큼 높은 눈을 가진 사람이다. 우리에게 아버지가 없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나의 존재를 만들어줬다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위대한 아버지인 것이다.

오늘 이 장을 살펴보면서 자식이 앞으로 살아가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이름까지 개명하려는 노력을 보이며 아버지가 아들에 대한 사랑이야기를 보면서 아버지는 어머니가 보지 못하는 자식이 걸어나가는 길을 만드는 사람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미 언급됐지만 현명관 회장이 어릴적 '수남'이라는 이름을 '명관'으로 개명했다. 아래 신문기사에는 합격자명단에 '현수남'으로 나온다.다음 장에는 그와 관련 좀더 많은 이야기가 준비됐다.

'최선'이라는 말을 생각해본다. 우리는 어떤 과업에서 '최선'을 다했는지. 물론 최선을 다해도 '운'이란 게 있다. 운도 실력이라는 말이 있지만 최선을 다하고 난뒤 우리는 결과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자.

현명관 회장이 '최선'을 다해 공부를 하는 그 집념을 지금 이시대에도 필요한 것이다. 점점 코로나19의 거친 바람이 불고 있지만 최선을 다해 일하는 당신에게는 코로나19도 피해갈 것이다.

뜨거워지는 여름, 제주인 현명관 회장의 자서전 '위대한 거래'는 말하고 있다. 인생은 거래의 연속이라고. 그것이 실패든 성공이든 위대하다고. 우리들이 걷는 발걸음이 발자욱이 되고 역경이 큰 사람을 만들었다고.

7월의 주말에 자신의 아버지를 생각해보는 의미있는 한 주가 되었으면 좋겠다. 많은 필독이 있기를 바랍니다.[현달환 편집장]

현명관 회장님과 카페에서 만남
현명관 회장님과 카페에서 만남

1962년 7월 12일, 사법고시 1차 시험을 본 후 기다렸던 합격자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 하숙집 마당에 새벽 신문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현명관은 문 앞으로 달려가 동아일보를 펼쳤다. 1차 합격자 468명, 제목을 지나 깨알같이 한자로 쓴 이름을 한 줄 한 줄 찾아나가기 시작했지만 자신의 이름은 좀체 찾을 수 없었다.

초조해졌다. 숨이 막힐 지경이 되어 맨 마지막 줄을 훑던 그의 손가락이 멈췄다.

1962년 7월 12일 동아일보 3면
1962년 7월 12일 동아일보 3면

 

현수남, 아직 개명 전인 자신의 이름을 발견하고 두 팔을 번쩍올려 소리 없는 환호를 질렀다. 사타구니에 습진이 생기도록 새벽부터 밤 12시까지 오로지 시험공부에만 매달린 보람이 있었다.

현명관은 이 소식을 속히 고향의 어머니 아버지에게 전해야 했다. 오전 9시까지 기다려, 아버지 어머니가 사는 마을에서 전화기가 있는 집에 전화를 걸었다.

휴대전화는커녕 유선 전화도 몇집 걸러 있던 시절이라, 가족과 통화하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 시외전화라 교환까지거치는 어려운 통화 끝에, 현명관은 기쁜 소식을 부모님께전할 수 있었다. 대학 3학년에 장한 아들이 만들어낸 경사였다.

10일 후 치러진 2차 시험은 낙방했다. 첫 시험은 1차위주로 시험 준비를 했다. 이듬해 사시 2차 시험에 집중하기 위한 전략이었기 때문에 예상했던 대수롭지 않은 불합격이었다. 사시 1차 합격자는 2차 시험에 불합격해도 1년 후 다시 2차 시험을 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1년 후 1963년,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으나 현명관은 2차시험에 낙방했다. 그러나 그것은 좌절의 시작일 뿐, 이듬해인 1964년의 실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다시 사법시험에 낙방했다.

부모님과 현명관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해 가을의 좌절은 좀처럼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는 마음을 추스르고, 싸늘해진 늦가을부터 한번 더 공부에 매진했다.

어느덧 크리스마스가 다가왔고 서울 거리에는 '북 치는 아이'가 눈발과 함께 울려 퍼졌다. 피카디리 극장에는 브리짓드 바르도 주연의 '폭군 네로'가 장안에 화제를 일으키며 연인들을 극장으로 불러모았지만, 현명관은 책가방을 끼고 도서관을 오가며 대망의 1965년을 맞이하고 있었다.

"새해에는 1차, 2차를 한 번에 다 통과해야 한다. 졸업한 지도 2년째, 우리 집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반드시 해야 한다."

이렇게 결의를 다졌지만 사법시험 공부는 고달픈 일상의 연속이었고 점점 현명관은 지쳐갔다.

멀리서 한 남자가 눈을 밟으며 다가왔다. 자세히 보니 아버지였다. 하숙집 앞에 있던 현명관은 갑작스럽게 방문한 아버지가 놀랍고 반가웠다.

"아버지, 말씀도 없이 웬일이세요?"

“공부 잘하고 있나 보러 왔다. 이제 4년째라 힘들지?"

"괜찮아요. 올해는 1,2차 한 번에 붙을게요. 작명가가 저 된다면서요?"
"그래 우리 아들 장하다.”

현명관은 서울대 합격을 하고 이 말을 아버지한테 들었었다. "수고했다 장하다 우리 아들"하며 얼싸안고 기뻐했던 아버지가 또 장하다는 말을 지금 다시 하고 있다.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지금처럼 잘 참고 견뎌라. 아버지는 이만 간다."

"네? 아버지! 집에 들어가서 쉬셨다 가시죠. 벌써 가십니까?"
"응 이제 그만 갈게.”
"아버지..…. 아버지…. 어디 가세요?"

현명관이 애타게 불렀지만 아버지는 빠르게, 휑하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골목길을 벗어나고 있었다.

꿈이었다. 현명관은 새벽에 눈을 뜨고 가방을 챙기는 내내, 꿈생각을 했고 아버지와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지 1년이 지나는 동안, 그의 가족에게도 엄청난 시련이 닥쳐왔다. 쿠데타로 쉰이 넘은 공무원들은 사회 개혁 차원에서 무조건 나가줘야 했기 때문에 현명관의 부친도 공무원을 그만두고 제주 산골로 들어가 소 키우는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6남 1녀를 먹여 살리는 일에, 명관의 대학 등록금과 고시 뒷바라지에, 평생 펜대만 잡은 아버지의 손가락은 1년 새, 노동자의 손으로 변했다. 아들의 성공을 위해 자신은 노동자로 변신했지만, 아들은 고생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고3 때 폐병으로 제주에 내려가 있었을 때였다. 밤늦게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오는데 집 앞 어귀에 아버지가 서 있었다. 흐뭇하게 웃으며 아버지는 성실한 아들에게 깊은 사랑을 보내고 있었지만 말은 엉뚱하게 했다.

"아픈 녀석이 무슨 공부를 그렇게 오래 하냐. 머리가 나쁘니 어쩔 수 없나 보네.”

"하하... 아버지 닮아서 그렇죠."

그날 밤 아버지는 집으로 걸어오면서 평소에 하지 않던 말을 아들에게 했다. 달빛도 없는 어둔 길과 별과 밤바람이, 아버지의 속내를 아들에게 털어놓게 했다.

“명관아 내가 어중간해서 문제다. 그래서 고문도 당하고.….."
"최고가 되지 않으면 억울한 일이 많이 생긴다. 너는 사법고시 합격해서 꼭 판검사해라. 그럼 아버지 같은 일은 당하지 않아도 돼.”

현명관도 4.3 때 아버지가 겪었던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아버지의 한도 풀어주고 판검사가 되어 잘못된 세상도 바로잡고 싶었다. 더욱이 이번 5.16 강제 퇴직도 어중간한 직급이라 그렇게 된 것을 알고 있었기에 반드시 합격해서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고 싶었다.

"아버지는 지금쯤 뭐하고 계실까? 제주라도 산속이니 눈이 내리겠지?"

그날 저녁, 밥 먹기 위해 들른 하숙집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제주에서 온 시외전화였다.

“명관이 형, 저예요.” 남동생 현척남이었다.

"어? 네가 어쩐 일이니?"

“형, 잘 지내고 있어? 음…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너무 힘들어하59지 말고 잘 들어줘."

불길함을 예고하는 묵직한 떨림이 평소와 다른 동생의 어조에서 느껴졌다.

“형…….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응? 야 그게 무슨 말이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에 현명관은 모든 피가 바닥으로 쏟아지는 느낌을 받으며 현기증이 났다.

“실은 한 달 전 갑자기 심장마비로 쓰러지셨는데.…. 차마 사정이 있어서 알릴 수가 없었어. 미안해….”

“뭐… 뭐라고? 아니, 왜 이제야……..”

“중요한 시험을 앞둔 형에겐 알리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집안 어른들이 그렇게 했어. 어머니도 형을 위해 그러자 하셨고, 그런데 형한테 죄스럽고 도저히 이건 아닌 거 같아서 내가 연락한 거야. 이제야 알려서 ....…... 정말 미안해 형!"

현명관은 망치로 얻어맞은 듯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서 있었다.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이야기를 들었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자식으로서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도 모자라 아버지의 죽음조차 모르고 공부만 한 자신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이 사실을 알리지 않은 집안 식구들도 모두 원망스러웠다.

11월 21일, 한라산 추위는 매서웠다. 전국적으로 최저기온 2도에서 최고기온 9도의 날씨였으나 한라산의 아침은 그보다 더 추웠다. 그날 아침, 아버지는 쌀쌀한 한라산 중턱의 야외 화장실에 다녀온 후, 군불을 때는 따뜻한 오두막집 구들방으로 들어와 이불 속에 발을 넣고 몸을 녹였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체온 변화를 겪은 탓에 심장마비가 왔다.

가슴을 움켜쥐며 방바닥으로 쿵 쓰러지는 남편을 보고 황급히 아내가 달려왔다.

"여보! 왜 그래요. 여보!"

"으...... 가슴이.. 가슴이…."

"여보!"

한라산 중턱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는 농장은 전화도 이웃도 없는 오지였기에 의사를 부를 수도 없었다.

"......"

무엇인가 마지막 말을 하려는 남편의 입이 움직였으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무슨 소린지 알아듣기 위해 아내는 희미하게 움직이는 남편의 입에 귀를 갖다 댔다.

"명관이 .… 명관이에게 알리지 마!"

그것이 현명관의 아버지 현여방씨가 남긴 마지막 유언이었으며 또한 고시공부를 하는 아들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그렇게 방안에 들어온 지 1분도 안 돼서 아버지 현여방씨는 세상을 뜨고 말았다. 향년 55세. 너무 젊은 나이였다. 어머니는 손을 쓸 방법도 병원으로 옮길 재간도 없이 그대로 남편을 떠나보내야만 했다.

20분 거리에 있는 마을 사람에게 도움을 청해 겨우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렀다. 친척들은 현명관이 사시 1차, 2차 시험을 한꺼번에 준비 중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중 사려 깊은 어른 한 분이 이 소식을 명관에게 지금 알려야 아무 도움도 안 되니, 유언대로 시험이 끝난 후에 알리자고 제안했다. 어머니도 강한 결심을 하고 유언대로 했다. 시험에 합격한 아들의 모습을 남편에게 보여주는 것이 자신이 할 일이라고 냉정하게 판단한 어머니는, 슬픔을 뒤로하고 아들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먹구름이 잔뜩 낀 날씨였다. 한손에는 3년 전 동아일보 합격자 명단과 다른 한 손에는 소주를 들고 현명관은 한라산 중턱에 마련된 아버지 묘지를 찾아갔다.

전화를 받고 나서도, 서울에서 제주로 오는 동안에도, 현명관은 눈물이 나지 않았다. 열차와 배를 번갈아 타고 고향으로 내려오는 내내 멍한 상태였다. 지금이라도 제주에는 아버지가 있을 것만 같은 헛된 기대감마저도 들었다. 어머니와 함께 묘지에 도착해서 술잔을 놓고 술을 따르고 지나간 합격자 명단을 제단 위에 올려놓았다.

"사법고시 1차 합격자 468명, 현수남 합격, 아버지! 3년 전처럼 여기 이 신문에 다시 한번 제 이름을 올릴게요. 아버지, 그동안 고생 많으셨....."

현명관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꼈다. 그동안 참았던 눈물과 감정이 끝없이 쏟아졌다. 이제 다시는 아버지의 거친 손도 만질 수 없고 나를 향해 웃어주던 얼굴도 볼 수 없다. 돈을 많이 갖다 주는 아버지도 아니었고 다정하게 말하는 법도 몰랐던 아버지였지만 언제나 등 뒤에 서서 지켜보며 응원해 주던 분인데, 이제 완전히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현명관은 실감했다.

“아버지께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아, 아버지 죄송했어요."

3년 전, 현명관은 아버지와 단둘이 고등학교 졸업식을 치렀다. 서울대 합격을 하고 지역 신문에도 난 경사스러운 일이었지만, 가난했던 아버지는 초라한 행색으로 아들을 찾아왔고 아들은 그런 아버지가 몹시 부끄러웠다. 친구의 사진기를 겨우 빌려 몇 장의 사진을 찍는 둥 마는 둥 그렇게 우울한 시간을 때우고 부자는 교문을 나섰다. 변변한 중국집에서 식사도 못했다.

"서울 아버지들은 세련된 옷차림에 화려한 꽃다발 들고 온 가족이 함께 와서 축하해 주는데 난 이 꼴이 뭔가."

이런 생각에 현명관은 아버지에게 괜한 짜증을 부렸다. 죽기 살기로 자식을 공부시키겠다며 애쓴 아버지를, 철없는 아들은 더 초라하게 만들고 말았다.

명관의 짜증과 심통을 듣고도, 평소 엄격했던 아버지는 어깨가 처져, 아무 말 없이 잰 걸음으로 앞서가던 아들을 뒤따랐다. 시간이 지나서도 명관은 이 일이 마음에 걸려 꼬깃꼬깃 묻어 두었고 언젠가는 아버지 앞에서 꺼내려 했었다. 그런데 사시에 전념할 때는 시간이 없었고 지금은 그 아버지가 세상에 없다. 명관은 스스로가 원망스럽고 한스러워 아버지의 묘지 앞에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

때마침 늦가을 한라산에 부슬비가 내렸다. 마치 아버지가 현명을 위로하듯, 부슬비는 얼룩진 현명관의 얼굴을 빗물로 씻겨주고 있었다.

아버지는 인자하고 아들은 효성스러우며 형은 우애롭고
동생은 공손하여 비록 그것이 극진한 자리에 이르렀어도
모두 그렇게 되어야 합당한 것이므로
털끝만큼도 감격하는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된다.
만약 베푸는 자가 덕으로 생각하고 받는 자가 은혜로 생각한다면
이는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과 같아서 장사꾼의 도가 이루어지게 된다.

부자자효 형우제공 종주도극처 구시합당여차
父慈子孝 兄友弟恭 縱做到極處 俱是合當如此
착불득일호감격적넘두
著不得一毫感激的念頭
여시자임덕 수자회은 편시로인 편성시도의
如施者任德 受者懷恩 便是路人 便成市道矣  -.채근담 / 前年 第133 章

채근담은 부모 자식의 관계를 장사하는 사람들처럼 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부모 자식의 관계는 그보다 훨씬 깊고 그 무엇으로도 설명하기 힘든 것이어서 천륜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아버지 어머니께 “감사합니다”라는 말도 하지 말고 살라는 뜻은 아닐 것 같다. 뼈에 사무치는 깊은 감사의 마음을 지니고 나도 그와 같은 일을 후대에 베풀며 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주고받는 관계가 아닌 일방적으로 주는 사람이 부모이고 일방적으로 받는 사람이 자식이지만 여기에서 덕과 은혜라는 생각을 갖게 되면 그 관계가 천해진다. 부모 자식의 관계는 그보다 더 깊은 천륜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나도 감사한다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 아버지의 희생과 사랑을 어찌 상거래할 때 쓰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부모가 세상을 뜨면 생전에 받았던 사랑이 사무치게 그립나 보다. 나도 아버지의 묘지에서 그때 그렇게 후회하고 울었지만 지금 이 나이가 되어도 회한은 풀리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더 후회가 된다.

젊은 대학생일 때 본 아버지와, 내가 아버지 나이가 되어 보는 아버지는 분명 다르기 때문이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남자가 직장이 떨어질 때 겪는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한다.

나도 아무 대책 없이 결혼부터 하고 아이를 갖게 되었을 때, 직업이 없어서 고통을 겪었다. 그때 몹시도 아버지 생각이 났었다. 평생 공무원만 한 사람이 50세의 나이를 넘어, 새로운 밥벌이를 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자식 한명은 서울로 유학을 갔고 나머지 6명의 아이들도 먹여 살려야 하는 입장이 되자, 아버지는 물불 가리지 않고 산속으로 들어가 소를 키우겠다고 결심했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심정도 몰라주고 잘 사는 다른 아버지와 비교하며 짜증이나 냈으니 그 후회가 뼈에 사무친다. 다시 마주 앉으면 소주 한잔 따라드리고 용서를 빌며 환하게 웃는 모습이 보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꿈속에서도 불가능한 일이다.

히데오(ひで 수남秀男)는 안 된다.

아버지는 늘 자식들의 이름을 맘에 들어 하지 않으셨다.

일제 식민지 시대 때 지어진 이름이라 모두 일본식 훈독에 어울리는 이름들이었다. 나의 이름 현수남도 일본의 흔한 이름으로서 일본어로 읽으면 '히데오'가 된다. 아버지는 자식들의 모든 이름에서 일본의 잔재를 빼 버리겠다고 결심하고 우리 식으로 다시 지어 법원에 개명 신청을 준비했다.

지금 생각하면 대단한 분이다. 5.16 이후 직업이 떨어져 생계가 막막하던 시절이었는데 더 늦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한두 명도 아니고 모든 자식의 이름을 다시 지어서 개명할 생각을 하다니…

그런데 법원에서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는모든 형제들을 제쳐 두고 내 이름의 개명을 먼저 시작했다. 먼저 제주에서 제일 유명한 작명가를 찾아가셨다. 서울에서 공부를 하고,고시를 준비하는 아들이기에 이 자식만큼은 크게 되길 바라는 바람이 간절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이야기 '출세할 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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