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인 칼럼](14)붉은 벽돌집
[경제인 칼럼](14)붉은 벽돌집
  • 현달환 편집장
  • 승인 2020.11.01 02: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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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만난 제주인, "아, 제주마씸?"
[김택남 자서전] 제주 소년, 꿈을 투망하다
(주)천마그룹 김택남 회장의 인생 스토리

뉴스N제주가 창간기념에 맞춰 '제주경제인 칼럼'을 게재하는 가운데 그 첫 순서로 선보인 김택남의 자서전, '제주 소년, 꿈을 투망하다'라는 내용이 독자들로부터 많은 감동의 후기들이 전해오고 있다.

이번에 올린 '붉은 벽돌집'은 제목만 봐도 가격이 나가는 고급 주택처럼 느껴진다. 본문에서는 두가지 사건(?)에 대한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 주택구입에 대한 사연과 지금은 최고의 가족계획인 삼형제를 낳은 이야기, 그리고 아들까지 얻게 되는 내용을 술회했다.

이글을 통해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무엇인가를 갈구하면 이루진다는 것을 느겼다. 즉, 꿈을 꾸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면  우연과 필연이 내발에 와닿아 자기 것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남녀가 사랑하고 부부가 되어 처음으로 자기 집을 갖는다는 것은 흥분될만 하다. 평균 11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과정 속에 자기 집을 소유한다는 것은 '안정'이라는 의미있는 가정 생활이 된다는 것이다.

거기다 아이 셋을 둘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여유가 생기니 자기 집에 대한 애착이 크다고 볼 수 있다. 그중에 주인이 거의 좋은 조건으로 살 수 있는 배려를 해준다는 것은 행운이다. 살다보면 우연이라는 것은 이럴 때처럼 종종 찾아오는 것이다. 그러한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자기 것이 안되지만 그런 기회를 살리면 자기 것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김택남 회장이 은근히 아들에 대한 욕심을 내비치자 그런 눈치를 알아챈 아내가 아이를 갖겠다는 생각을 가졌다는 것에 박수를 보낸다. 아니 남편이 아들에 대한 욕심보다 오히려 아내가 더 욕심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아무래도 아빠닮은 아들을 은근히 기대해서 아무래도 살다보면 아들에 대한 욕심도 있다. 

남편은 아내의 행동에 남편은 무한한 감사를 한다. 요새는 아이를 안낳으려는 분위기가 강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지만 과거에는 그야말로 동네 울음소리가 정겨웠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곳곳에서 아이들 우는 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 에어컨 등 난방기로 인해 문을 꼭꼭 닫고 살아서 아이있는 집에서도 웃음소리나 우는 소리를 밖으로 새나가지 않는다. 점점 삭막한 세상이 되는 느낌이다. 아이들 웃는 소리를 녹음기에서나 들을 정도로 귀한 소리가 됐다.

김택남 회장의 성실성으로 빨간 벽돌집 주택까지 갖게 되고 아들 '태호'로 아이 셋을 둔 가장이 됐으니 부러울 게 없는 사람이 됐다. 이들 5명의 가족이 어떻게 전개될 지 다음 편이 기다려진다.

지금도 어느 곳에서 아이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부러움이 되고, 주택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부러운 이야기이다. 그러한 귀인들이 내 주위로 몰릴 수 있도록 더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주자. 그러면 많은 이들이 박수를 보내며 응원을 할 것이다.  오늘도 좋은 하루가 되기를 빌며 많은 필독이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주]

나는 성격 탓인지 남들보다 일을 빨리 끝내는 편이다.

남들 고등학교 3학년 때 취득하는 전기기능사 자격증도 일 년 빨리 땄고 그만큼 취업도 빨랐다. 결혼도 남들보다 한 걸음 먼저 했고 승진도 남들에게 뒤진 적이 없다. 서른두 살에 내 사업을 시작했으니 결코 늦었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집 장만은 결코 빨랐다고는 할 수 없다.

대한민국 직장인들이 집 장만 하는데 평균 11년이 걸린다는데 나는 육지에 나와 집을 장만할 때까지 16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집에서 도와준 것 하나 없이 맨손으로 아내와 둘이 아껴가며 집을 장만했기에 남들보다 오랜 세월이 걸렸다.

그렇지만 그 16년도 그 분을 만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시간인지도 모른다. 아마 그 분을 만나지 못했다면 내 집 마련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분을 만난 것, 솔밭의 매서운 경험을 겪은 이후다. 솔밭의 기억은 비온 후 굳어진 땅처럼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매출은 점점 늘었고 조금씩 ‘태평양기전’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지만 내 손에 남는 돈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달랑 300만 원으로 시작한 사업이 제 궤도에 오르기까지 공장건설과 자재구입 등 사업에 투자할 데가 많았다. 사업이 점점 바빠지자 출퇴근시간도 아까워진 나는 공장 근처로 집을 옮길 생각을 했다.

내 수중의 돈은 고작 4000만 원. 당시 집을 사기엔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고 공장 가까이에 있는 전셋집을 구하러 돌아다니던 중이었다. 그 때 붉은 벽돌로 지어진 큼직한 집이 눈에 띄었다. 당시 '하나'와 '두나' 그리고 아내까지 달랑 네 식구가 살기엔 꽤 큰 집이었지만 탄탄하게 지어진 그 집은 골목에서 가장 멋진 집이었다.

매매를 기다리는 집이라는 말에 이런 집을 지금 아니면 언제 구경할까하는 마음에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집에서 ‘그 분’을 만났다.

태호의 장래희망은 아버지 같은 사업가.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아들의 말은 아버지에게 가장 뜻 깊은 훈장이다.

그 집의 주인이었던 그 분은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그 분은 고향을 떠나서 포항제철에 오랫동안 근무를 하다,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었다고 하셨다.

이제 곧 고향으로 돌아간다며 어린 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오랜 세월 객지생활을 하던 나는 그분의 마음을 금방 이해할 수가 있었다. 고향을 떠나서 포항에서 객지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그 분과 나는 쉽게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됐다. 더구나 포항제철이라는 공통점까지 있으니 그 분은 오랜 이웃처럼 나를 살갑게 대해주셨다.

“이 집, 자네가 사게.”

당시 그 집 가격은 내가 가지고 있던 돈으로는 어림없었다. 나는 돈이 부족하다고 손사래를 흔들며 안 된다고 말씀드렸다.

“그럼 가지고 있는 돈만 줘.”

“네?”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지금은 가지고 있는 돈만 주고, 나머지 사업 잘해서 갚으면 되잖아.”

돈이 부족했던 내게 그 분은 말도 안 되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그리고 아내의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사업이 안 되면 천천히 갚아도 돼.”

“제가 돈을 안 갚으면 어쩌시려고요?”

생면부지 타인에게 손해 보는 제안을 하시는 이유가 궁금해진 나는 그 분께 여쭤보았다.

“내가 사람을 좀 볼 줄 아는데, 자네는 남의 돈 떼어 먹을 사람은 못 돼.”

처음 본 나를 오랜 친구처럼 믿어주는 그 분의 제안에 나는 마음이 흔들렸다.

“나는 여기서 좋은 일이 참 많았어. 복이 많은 집이거든. 이 집에 살면 자네한테도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거야.”

그 분의 덕담에 나는 그 집을 사기로 결심했다. 집의 기운을 받아 운이 좋길 바라는 마음 때문은 아니었다. 나를 믿어주신 그 분의 마음을 꼭 되갚고 싶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함부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 상처를 입고 손해를 본다고. 타인에 대한 신뢰는 너무나 쉽게 버려지고 믿음의 대가가 배신이 되는 세상이 됐지만 처음 본 나를 믿어 주신 그 분의 제안이 고마웠다.

공장도 가까이 있었고 아이들을 키우기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집이었다. 그 붉은 벽돌집의 가격은 1억 4000만 원이나 되었고 내가 갚아야 할 돈은 1억이 남았다. 막 사업을 시작하고 공장에 투자한 나에게 적잖은 부담이 되는 돈이지만 꼭 기한내로 갚겠다고 약속했다.

전세를 구하러 간 내가 집을 샀다고 하자, 아내는 또 걱정을 쏟아냈다. 무슨 돈으로 집을 샀냐며 질문이 이어졌다. 내가 만난 그 분의 이야기를 하자, 아내는 잘했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업에 투자하느라 내가 직장을 다닐 때만큼 넉넉한 생활비를 받지 못했고, 그 돈을 갚기 위해서는 더 절약해야 한다는 것을 아내 또한 알고 있지만 그 분의 마음에 아내도 감동받았다.

기록 아기 ‘김태호’ 내 인생에 없을 줄 알았던 아들은 서른일곱 살 다 늦은 나이에 늦둥이란 이름으로 나에게 찾아왔다.

아내와 나는 그 분의 호의와 배려로 결혼한 지 9년 만에 우리집을 갖게 됐다. 그 집으로 이사 가는 날을, 우리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막 다섯 살이 된 두나는 마당 이곳저곳을 뛰어 놀았고 하나는 2층 집이 신기했는지 계단을 뛰어다녔다.

아내는 막상 아파트에서 마당이 있는 집의 살림을 맡게 되자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그렇지만 내 집이 생겼다는 것, 그것만으로 우리는 하나와 두나처럼 마냥 즐겁고 행복했다.

집 터 덕분인지 그 분의 덕담 덕분인지 우리는 그 집에서 좋은 일들이 많았다. 내 사업도 위기를 만나긴 했지만 전화위복이 돼서 쭉쭉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꿈도 꾸지 못한 큰 선물을 얻은 곳도 그 집에서 살 때였다.

아내와 나는 결혼 전부터 아이는 ‘하나’만 낳기로 결심했다. 내 형제는 여섯이었고 아내의 형제도 넷이나 됐다. 없는 살림에 많은 형제들은 부담이 되었고, 그것을 보고 자란 아내와 나는 아이는 하나만 낳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첫딸 아이 이름을 ‘하나’라고 지었다.

내 맏딸 하나는 지금은 나에게 아들보다 듬직한 자식이지만 갓난아이 때는 울보였다. 한번 울기 시작하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그칠 줄을 몰랐다.

육아를 도와줄 웃어른이 없던 아내는 우는 아이를 달랠 방법이 없었다. 아이를 들쳐 업고 울음이 그칠 때까지 아이를 어르는 수밖에 없었다. 늦은 퇴근을 하고 들어오는 길, 달래다 지친 아내가 울다 지친 아이를 업고 엎드려 자는 모습에 가슴이 아렸다.

우리 부모님은 언제나 형제 간의 ‘우애’를 강조하셨고 속 깊은 내 딸 하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읽은 듯 동생들의 중심에 서서 형제 간의 우애를 키워나갔다.

울보 하나 때문에 힘들어하는 아내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도와줄 방법을 몰랐다. 밖에서는 무서울 것 없는 사람이었지만 집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다행히 하나의 울보 시절은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 끝났지만, 둘째에 대한 기대는 아내도 나도 없었다. 어린 시절의 가난과 육아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정 많고 야무진 하나가 나이가 들면서 동생 타령을 시작했다. 혼자 있는 것이 외로웠던 모양이다. 제 엄마에게 동생 하나만 낳아달라고 한참을 졸라댈 때, 아내가 둘째를 임신했다.

회사에서 자리를 잡고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자, 아이 둘을 키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말로 드러내놓고 표현하지 않았지만 내심 욕심도 있었다. 이미 딸 하나는 있으니 둘째는 아들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아들, 딸을 욕심대로 낳을 수 없는 노릇이었고 하나는 여동생을 두게 되었다. 두나는 아빠의 서운함을 알았는지 어릴 때부터 나만 따라다녔다. 이모나 할머니의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짓궂은 질문에도 언제나 ‘아빠’만을 외쳤다.

잠을 잘 때도 아빠와 자려고 해서 설계 아르바이트를 할 때 두나를 재우고 일을 해야할 때도 있었다. 두 아이는 나에게 무엇보다 큰 보물이었고 냉혹한 사업의 세계에서 살아갈 힘을 주었다. 하지만 모든 아버지들이 그렇듯이 아들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었다.

일은 열심히 욕심껏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자식을 낳는 것은 열심히 욕심껏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에겐 아들은 없나 보다, 욕심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나보다 내 속을 훤히 아는 아내가 나보다 먼저 결심을 했다.

내가 친구와 아들이 함께 하는 모습을 부럽게 바라보는 것이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딸들은 크면서 점점 엄마의 친구가 되어 가는데 목욕탕에 같이 갈 아들 녀석 없어 외로워하는 내 마음을 나보다 먼저 알았던 것이다. 당시 아내의 나이는 서른다섯 살, 내 나이는 서른일곱 살.

다시 갓난아이의 부모 노릇을 하는 것이 벅찬 나이였지만 아내는 용감하게 셋째를 가졌다. 이번에는 내 바람대로 아들이었다. 적지 않은 나이의 아내는 아들 녀석을 낳느라 꽤 애를 먹었다. 아내의 나이도 나이였지만 아들 녀석이 크게 나왔다.

하나만 낳아 잘 키우자는 신혼의 결심은 세월에 따라 흐려지고 하나, 두나, 태호 1남2녀를 둔 다둥이 아빠가 됐다. 늘어난 자식만큼 염려할 것도 많아지지만 그만큼 행복도 커진다.

낳자마자 의사에게 ‘이 녀석 가방 메고 학교에 가도 되겠네’란 소리를 들을 정도였고 병원에서는 ‘기록 아기’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 병원에서 가장 큰 아이로 태어나 붙은 별명이었다.

아내가 고생한 만큼 엄마의 좁은 뱃속에서 나오느라 아들은 온몸에 멍이 들었다. 막 태어난 아이가 까맣게 멍이 들자, 혹시 모를 이상을 찾기 위해 병원에 입원을 해야 했다. 축하와 행복으로 가득해야 했던 시간, 아내도 아들도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 나는 걱정이 되지 않았다. 아들이 생겼다는 것만으로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엄마를 힘들게 한 ‘기록 아기’라는 별명도 좋았다.

내 아들이 남들보다 크게 태어났다는 것까지 자랑스러웠다. 그렇게 벅찬 감동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아들 녀석은 내 바람대로 시커멓던 멍도 사라지고 곧 퇴원해 집으로 돌아왔다.

위의 두 딸 이름은 쉽게 지었는데 아들 녀석은 욕심과 기대 때문인지 이름을 쉽게 지을 수가 없었다. 내가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장모님과 아내가 작명소에 다녀온 모양이다. 출생신고를 앞두고 내 앞에 이름 몇 개를 펼쳐 보였다. 그중에 한 눈에 들어 온 이름이 있었다. 기쁠 태(兌) 하늘 호(昊). 아빠는 바다를 품고 자랐지만 아들은 바다보다 넓은 하늘을 품고 자랐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아들은 ‘기록 아기’라는 별명을 벗고 ‘태호’가 되었고 지금은 나의 믿음직스런 자식이자 친구로 자란다.

오래전 그 집의 주인은 또다시 바꿨지만 아직도 그 골목을 지나면 가슴이 따뜻해진다. 태호가 태어나고 하나와 두나가 자라고 내 사업이 커가는 동안 우리 가족은 별 탈 없이 기쁘고 행복했던 순간을 그 집에서 맞이했다.

아마 그때 손해 보는 거래에도 흔쾌히 집을 내어준 그 분들의 따뜻한 마음이 오랫동안 우리 가족들을 보듬어 주었다고 나는 믿는다.

시간이 지나면 이상하게도 힘들었던 기억은 힘이 되고 따뜻했던 기억은 그리움이 되고 만다. 20년 전, 잠시 스쳤던 인연이지만 처음 보는 나에게 호의와 배려를 베풀며 내 앞날에 좋은 일만 가득하길 기원했던 그분, 마산 출신의 ‘강호열’ 어른을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붉은 벽돌집을 들어가는 골목길부터 모든 것이 생생하다.

우리는 그 집에서 가족도 늘고 내 사업도 성장하며 더없이 기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울보를 졸업한 큰딸 하나는 삼남매의 맏이로 언제나 의젓하게 동생을 잘 돌봤다.

우리 부모님은 언제나 형제 간의 ‘우애’를 강조하셨고 속 깊은 내 딸 하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읽은 듯 동생들의 중심에 서서 형제 간의 우애를 키워나갔다.

하나만 낳아 잘 키우자는 신혼의 결심은 세월에 따라 흐려지고 하나, 두나, 태호 1남2녀를 둔 다둥이 아빠가 됐다.

늘어난 자식만큼 염려할 것도 많아지지만 그만큼 행복도 커진다.

기록 아기 ‘김태호’

내 인생에 없을 줄 알았던 아들은 서른일곱 살 다 늦은 나이에 늦둥이란 이름으로 나에게 찾아왔다.

최근 김택남 회장과 아내의 모습
최근 김택남 회장과 아내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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