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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인 칼럼](13)솔밭의 추억
[경제인 칼럼](13)솔밭의 추억
  • 현달환 편집장
  • 승인 2020.10.25 08: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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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이 만난 제주인, "아, 제주마씸?"
[김택남 자서전] 제주 소년, 꿈을 투망하다
(주)천마그룹 김택남 회장의 인생 스토리
솔밭의 추억으로 인해 김택남 회장이 연결된 모든 사진들
솔밭의 추억으로 인해 김택남 회장은 크게 성장한다.(사진은 회사 직원들과 단합대회, 물속에서 기개를 외치는 모습)

뉴스N제주가 창간기념에 맞춰 '제주경제인 칼럼'을 게재하는 가운데 그 첫 순서로 선보인 김택남의 자서전, '제주 소년, 꿈을 투망하다'라는 내용이 독자들로부터 많은 감동의 후기들이 전해오고 있다.

이번에 올린 '솔밭의 추억'은 제목만 보면 김택남 회장이 젊은 시절 사랑을 나눴던 추억의 장소로 짐작을 했는데 사업을 하면서 큰 성장을 하게 만든 사건을 다룬 내용이었다.

제주도 제주출신으로 포항에서 사업의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면서 기존의 시장을 잠식 해 가면 주위 경쟁업체들은 긴장하게 되고 주시하게 된다.  

사업이란 것이 자신의 노력과 행운, 주위 환경, 여건 등으로 성장하는 것인데 같은 업종들의 눈에는 자신들의 파이를 나눠 먹고 있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경쟁업체들이 김택남 회장을 솔밭으로 납치해서 위협을 가한 것이다.

김 회장이 1년 동안 사업을 최선을 다해 연매출 30억이라는 엄청난 성장을 했으니 '김택남'이라는 사람을 납치해 위협을 가해 사업을 그만두게 했던 것. 사업을 하다보면 업무에 대한 어려움도 있지만 이처럼 외부 요인이 더 사업을 어렵게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자신보다 잘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미워하게 되는 게 좋은 모습일까?  당당하게 자신이 그렇게 되려고 노력해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하는 것이 가끔 있는 것이다. 현실이다. 

그러한 경쟁이 그 분야에 많은 성장을 가져오지만 이러한 풍토가 사라지고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고 더 분발해야 할 것이다. 

제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제주에도 많은 사람들이 사업을 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을 그렇게 시기하고 배척한다면 그 사회는 아름다운 사회가 될 수가 없다.

솔밭의 추억으로 인해 김택남 회장이 연결된 모든 사진들
솔밭의 추억으로 인해 김택남 회장은 크게 성장한다.(사진은 김회장이 텃밭에서 재배한 오이들, 무농약으로 인해 곱지가 못하다)

김 회장은 사업을 하면서 솔밭의 사건으로 인해 험담과 협박을 칭찬으로 들을 수 있는 아량을 얻게 해 주었다고 토로했다.

자신의 모습을 한 번 더 뒤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솔밭의 사건으로 김 회장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주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냉혹하리만큼 차가운 사업의 세계에서 나를 한 단계 성장시킨 귀중한 기회가 됐던 그러한 순간들이 우리 모두에게 한번은 다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계기를 겪은 자신이 그 다음 어떤 눈으로 그 문제를 해석하고 해결하고 노력했는지에 따라 흥망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날 이후 김 회장이 포기했더라면 더 이상 김 회장의 인생스토리는 멈췄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순간을 잊지않고 교훈으로 삼아 사업을 하며 지금에 이른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위기가 왔다면 어떤 판단과 결정으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당신에게 가장 귀한 친구는 당신 자신이다.

당신은 그래서 외로워져야 한다. 만약 사업을 하겠다면. 사업을 하는 데 외롭지 않다면 그 사업은 크게 성장이 안되기 떄문이다.

지금도 어느곳에서 사업을 하는 외로운 사람들에게 큰 박수를 보내며 많은 필독이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주]

솔밭의 추억으로 인해 김택남 회장이 연결된 모든 사진들
솔밭의 추억으로 인해 김택남 회장은 크게 성장한다.(사진은 회사 텃밭에 가꾸는 호박, 어린 호박이 성장하는 것은 사업이 성장하는 것과도 같다)

얼마 전, 포항에서 알고 지냈던 지인이 제주를 찾았다. 반가운 마음에 아내와 더불어 지인을 환영하기 위해 나섰는데 낯익은 얼굴이 지인의 곁에 있었다. 분명히 아는 사람인데 어디서 본 사람인지 영 감이 잡히지 않았다.

지인과 식사시간이 끝날 무렵, 그 낯익은 사람의 정체가 갑자기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사람도 나와의 인연을 깨달았는지 나와 눈을 마주치는 것을 피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이 많다지만 남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기엔 세상은 좁고 인연은 질긴 듯 싶다.

동료들의 응원 덕에 나는 빨리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사업을 시작한지 1년 만에 100평이 넘는 제법 번듯한 공장을 갖게 됐다.

공장을 갖고 직원들을 채용하자, 내 어깨는 더 무거워졌다. 직원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의 생계까지 태평양기전의 실적에 달려 있었고 일에 대한 욕심이 어느 때보다 커졌다. 일을 수주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덕목은 누가 뭐래도 ‘기술’이었다.

솔밭의 추억으로 인해 김택남 회장이 연결된 모든 사진들
솔밭의 추억으로 인해 김택남 회장은 크게 성장한다.(사진은 살아 생전에 찍은 김태남 회장의 부모님모습)

나는 다른 업체의 대표들과 달리 엔지니어 출신이었으니 기술면에서는 절대 다른 업체에 뒤지지 않았고 누구보다 빨리 견적을 낼 수 있었다.

특히나 포스코건설에서 건설하는 공장의 전기설비표준화작업을 진행했고 감리를 담당했으니 수요자의 필요가 무엇인지 누구보다 쉽게 알았다. 거기다 나를 응원해주는 든든한 지원군도 있어 수주를 따내는 것이 어렵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인맥이 있다고 언제까지 기대고 있을 수 없었다. 특히 우리가 납품한 제품의 품질이 떨어지면 우리 회사에 대한 평가는 물론이고 도움을 주었던 동료들에게 폐를 끼치게 된다. 나를 위해, 나에게 도움을 준 동료들을 위해 품질관리에 무엇보다도 많은 공을 들였다.

설계도 한동안은 내가 직접 담당했고 자재도 품질이 확인된 고가의 제품만 사용했다. 혹 우리 제품에 문제가 생기면 낮이고 밤이고 상관없이 A/S에 나섰다. 품질을 지키고 A/S에 힘쓰자 일이 몰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단돈 300만 원으로 시작한 ‘태평양기전’은 1~2년 만에 매출 30억 원이 넘는 회사로 급성장했다.

솔밭의 추억으로 인해 김택남 회장이 연결된 모든 사진들
솔밭의 추억으로 인해 김택남 회장이 연결된 모든 사진들(사업 성장으로 사회에 환원하려는 작은 모습들)

그렇다고 모두 다 행복한 결과를 얻은 것은 아니다. 수주할 물량은 한정돼 있는데 누군가 나타나 파이를 떼어가기 시작하자 기존의 업체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포항 출신도 아닌 내가 기댈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태평양기전 매출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기존 포항 업체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불만 끝에 솔밭의 그 사건이 벌어진 것은 1994년 늦가을 무렵이었다.

막 퇴근을 하던 내게 두 남자가 다가왔다. 한 남자가 나를 발로차 넘어뜨렸다. 일어나면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몸을 일으켜 세우기도 전에 한 남자가 다가왔다. ‘찰칵’ 소리와 함께 뾰족한 물건을 내 옆구리에 댔다.

나는 순간 잭나이프 같은 칼이 들어온 줄 알았다.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졌다. 여기서 죽는구나라는 생각이들자, 아직 미처 끝내지 못한 일들이 떠올랐다.

“차에 타!”

빠져나갈 구멍을 막으려는 듯 두 남자가 양쪽에서 움직일 수 없도록 내 팔짱을 잡았다. 도망칠 생각도 하지 않았고 그들이 말하는 대로 순순히 차에 올랐다.

솔밭의 추억으로 인해 김택남 회장이 연결된 모든 사진들
솔밭의 추억으로 인해 김택남 회장이 연결된 모든 사진들(사업 성장으로 사회에 환원하려는 작은 모습들)

‘중소기업 사장 납치’

내일 신문의 헤드라인이 머릿속을 스쳤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지만 머리는 오히려 차분해졌다.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이 있지 않은가? 비록 독 안에 든 쥐라도 겁에 질려 쉽게 무너지지 않겠다, 굳게 마음먹었다.

“이 쓰레기 같은 새끼, 사업 똑바로 해!”

차에 올라타자 남자들이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말로 할 때 포항을 떠나는 게 좋을 거야, 괜히 다치고 나서 후회 하지 말고!”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들의 협박을 듣기만 했다.

“우리가 너 같은 놈들 어디에 파묻어도 사람들이 찾지도 못해, 알아?”

그들의 협박이 심해지자 오히려 안도감이 몰려왔다. 진짜로 나쁜 마음을 먹고 나를 해하려고 했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나를 끌고 다니지는 않았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들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송도해수욕장의 솔밭이었다. 지금에야 송도시장이 반듯이 정비되고 유원지로 잘 개발되어 있지만 당시만 해도 송도해수욕장은 포항시민이 찾는 작은 해수욕장에 불과했다.

거기다 겨울이 오기 시작한 바닷가였으니 음산하기만 했다. 인적이 드문 솔밭에 그들은 차에서 밀어내듯이 나를 내렸다. 나를 꿇어앉히고는 그들은 겁을 주기 시작했다.

솔밭의 추억으로 인해 김택남 회장이 연결된 모든 사진들
솔밭의 추억으로 인해 김택남 회장이 연결된 모든 사진들(사업 성장으로 사회에 환원하려는 작은 모습들)

“내 말 똑바로 들어. 내일 당장 회사 문 닫고 포항 뜰래, 아니면 여기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래?”

그들의 협박을 다 듣고 나서 나는 내 사정을 이야기했다.

“무슨 말을 듣고 왔는지 모르지만 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요.”

내가 겁에 질리기는커녕 자신들을 설득하려하자, 처음에는 콧방귀만 뀌었다. 하지만 나는 진심을 다해서 사실만을 이야기했다.

“나는 사업하면서 지금까지 남의 입찰을 빼앗은 적도 없고 도덕적으로 양심적으로 한번도 거리낄 일을 해 본 적이 없소.”

협박과 폭력에도 지지 않고 대꾸를 하자 조금씩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정 못 믿겠으면 나를 보낸 사람과 삼자대면을 시켜주시오. 그래서 그 사람 말대로 내가 정말 나쁜 놈이고 죽일 놈이면 내가 내일 당장 회사 문을 닫으면 될 것 아니오.”

나는 마지막으로 삼자대면을 해달라고 설득했다. 처음에는 빠져 나갈 구멍을 찾으러 변명하는 것이라 여겼던 그 사람들도 조금씩 내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솔밭의 추억으로 인해 김택남 회장이 연결된 모든 사진들
솔밭의 추억으로 인해 김택남 회장이 연결된 모든 사진들(제주해녀 심춘들과)

“날 보낸 사람의 평소 인격을 당신들이 더 잘 알 거 아니요. 평소에 그렇게 믿음직스러운 사람이었다면 이런 일을 하라고 사람을 보내는 일은 안 할 거요.”

나의 마지막 말에 대장인 듯싶었던 남자가 한참을 생각하더니 결정을 내렸다.

“풀어 줘.”

그의 한 마디에 나를 옥죄던 팔이 사라졌다.

“000 이 새끼가 나쁜 놈이네.”

자신이 이용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화가 난 목소리였다. 그리고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가자며 부하인 듯싶은 청년들을 데리고 떠났다. 그들이 떠나자 나는 내 옆구리를 살폈다.

솔밭의 추억으로 인해 김택남 회장이 연결된 모든 사진들
솔밭의 추억으로 인해 김택남 회장이 연결된 모든 사진들(사업을 하다보면 늘 맑은 날만 있는 것이 아닌 매일 폭우만 내릴 때도 있다)

그러나 칼이 들어왔다 여겼던 자리는 멀쩡하기만 했다. 당황했던 나는 어두웠던 터라 ‘찰칵’ 소리에 칼이라고 지레짐작했던 모양이다. 그것이 잭나이프와 같은 소리를 내는 자동차 열쇠였다는 것을 후에야 알았다.

다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난 후에도 한참 동안 솔밭을 떠나지 못했다. 초겨울의 차가운 바닷바람이 가슴 속을 뚫고 지나가는 듯, 추위에 잠시 몸을 떨었다.

나는 호랑이 굴에서 살아 돌아온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 초겨울 내가 추위를 느낀 것은 살아 돌아 왔다는 안도감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남들보다 실적이 좋다는 이유 하나로 호랑이 굴에 끌려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이야기했던 것처럼 도덕적으로나 양심적으로나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사업을 할 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난 그저 자신들의 파이를 빼앗는 적일 뿐이었다.

잘잘못에 상관없이 사람에게 함부로 폭력을 가할수 있는 곳, 그런 냉혹한 사업의 세계 한가운데 있다는 것이 못 견디게 외로웠다. 한참 동안 솔밭을 서성이며 그 외로움을 떨치려고 노력했다.

냉혹한 사업의 세계에서 이대로 밀려날 수 없다, 가족들의 얼굴을 떠올리고 공장 식구들의 이름을 되뇌며 외로워진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20년이 지나고 그 매서웠던 ‘솔밭’에서 나를 협박했던 사람을 제주도에서 다시 만났다. 협박했던 사람과 협박당했던 사람이 신세와 형편이 달라진 후에, 한 상에서 밥을 먹는 것은 거북스러운 일이었다. 그 사람도 민망한 듯, 구석자리에서 일어날 줄 몰랐다.

솔밭의 추억으로 인해 김택남 회장이 연결된 모든 사진들
솔밭의 추억으로 인해 김택남 회장이 연결된 모든 사진들(사업을 하다 보면 날씨로 인해 모든 것이 무너져도 다시 일어서는 사람이 성장하고 성공하는 것이다)

지난 세월 그 매서웠던 기억이 나에게 약이 되었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었지만 쑥스러워하는 그 사람을 위해 모른 척 넘어가기로 했다.

포항에서 사업을 하면서 나를 협박한 사람은 비단 그 사람 하나가 아니었다. 내가 사업을 잘해 나갈수록 파이를 빼앗긴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가 쌓였다. 매출이 오를수록 나는 나쁜 사람이 돼 술자리의 안줏감으로 자주 오르내렸다. 내 바로 옆 술자리에서 나를 죽이네, 살리네 하는 한탄을 들은 적도 있었다.

내 얼굴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 회사와 내 이름은 포항의 많은 사람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바로 옆에서 나의 험담을 들어도 나는 더 이상 기분이 상하거나 상처받지 않았다.

솔밭의 추억은 나에게 그런 험담과 협박을 칭찬으로 들을 수 있는 아량을 얻게 해 주었다. 내가 남의 것을 훔치지 않고 남의 일을 빼앗지 않으며 경쟁으로 얻은 일은 정당한 결과다. 경쟁에서 진 것은 김택남이나 태평양기전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탓이었다.

그걸 깨닫지 못하면 술자리에서 다른 이를 죽이네, 살리네 하는 한탄만 해야 하는 것이다. 매서웠던 솔밭의 추억이었지만 그 추억은 냉혹하리만큼 차가운 사업의 세계에서 나를 한 단계 성장시킨 귀중한 기회가 되었다.

솔밭의 추억으로 인해 김택남 회장이 연결된 모든 사진들
솔밭의 추억으로 인해 김택남 회장이 연결된 사진(고3때 모습, 자신의 인격이 형성되고 성공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길을 가는 길목에서 고3때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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