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인 칼럼](4)아버지의 유산
[경제인 칼럼](4)아버지의 유산
  • 현달환 편집장
  • 승인 2020.08.24 02: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편집장이 만난 제주인, "아, 제주마씸?"
[김택남 자서전] 제주 소년, 꿈을 투망하다
(주)천마그룹 김택남 회장의 인생 스토리

뉴스N제주가 창간기념에 맞춰 '제주경제인 칼럼'을 게재하는 가운데 그 첫 순서로 선보인 김택남의 자서전, '제주 소년, 꿈을 투망하다'라는 내용이 독자들로부터 많은 감동의 후기들이 전해오고 있다.

이번에 '아버지의 유산'이라는 제목은 제주만이 아닌 대부분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자상하지만 때로는 투박하다. 그러나, 실제로 아버지가 자식에 대한 애정은 어머니가 갖고 있는 것보다 그 이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사랑표현을 겉으로 잘 안해서 그렇지 실제로 자기 자식 사랑에 대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랑의 표현법이 어떤 아버지는 욕으로도 하고, 어떤 아버지는 포옹으로 감싸기도 하지만 실제로 아버지는 자기 자식사랑에 대한 감정은 바다보다 더 깊은 것이다.

"남자가 공부해서 뭐하냐, 사업해야지" 하는 말은 어린 김택남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이다. 당시 (아버지)자신이 공부를 많이 했었지만 경제적인 부를 갖지 못한 것에 대해 자식에 대한 사랑법과 자식에게 목표를 설정해준 것이다.

김택남 회장은 그러한 말들이 머릿속에서 남아 '사업'이라는 것을 접하게 되고 아버지가 말한 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만약에 그러한 말들을 하지 않고 그냥 방관만 했으면 자식은 그냥 전기공사 직원으로 평생 남았을 것이다.

자신의 아들에게, 그것도 가장 막내는 얼마나 귀엽고 소중했겠는가. 아버지가 막내를 보면서 힘들어도 웃음을 짓고 살았을 것이다. “원래 자식과 부모 일에는 힘든 게 없다. 너도 커 보면 안다.”라는 말을 하면서 외할머니의 목욕을 위해 솥에 물을 데우는 아버지의 모습은 효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피를 김택남은 물려 받는다. 그렇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식을 위해 몸을 던지지 않을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부모는 실천가여야 한다. 그래야 자식은 실천하는 부모를 배우면서 닮아가려고 한다. 얼굴 생김새만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 말씨,  태도 등이 자연스럽게 지애비, 지어미를 닮아가는 것이다.  부모의 역할이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아버지의 유산'은 김택남의 효심을 극대화 하게 만들고 세상에 대한 배려에 대해 눈을 돌리게 한 것이다. 우리의 삶은 과거의 생활에서 표현되는 것이다. 많은 필독이 있기를 바랍니다[편집자 주]

어머니의 병환 이후에 조금씩 철이 들기 시작한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시간을 쪼개 책을 보기 시작했다. 어린 마음에도 나는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공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적은 마음처럼 쉽게 올라가지 않았다. 누군가는 공부하는 것이 제일 쉬웠다는데 나에게 공부는 그리 쉽지 않았다.

공부하려고 책을 펼치면 천정에서 지네가 떨어지고 전기세 내기도 빠듯한 형편에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지만 내가 가장 아쉬웠던 것은 공부하는 방법을 알려줄 주변의 어른이 없다는 것이었다. 누군가 공부하는 길을 내주었다면 그 길을 쉽게 따라갔을 텐데, 주변 아무도 책을 잡고 공부했던 사람이 없었다. 다들 하루 먹고 사는데 바빠서 미래를 위해 공부하는  것은 사치라고 여겼다. 어렸을 때부터 누구 하나 ‘공부하라’고 챙겨 준 사람이 없었으니 공부의 기초가 부족했고 머리가 굵어 따라 잡으려니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노력’을 이기는 ‘재능’은 없는 법이다.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나의 성적은 오르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입시를 앞두고 또다시 나의 진로를 정해야 했다. 제주 명문고라 손꼽히는 고등학교에 갈 실력은 됐지만 이후가 문제였다. 중학교 공부도 빠듯하게 했으니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해 대학을 갈 형편은 못됐다. 집에서도 되도록 빨리 자리 잡기를 바라는 눈치였으니 인문계 대신 ‘한림공업고등학교’를 희망했다.

당시 한림공업고등학교는 대학에 진학할 형편이 안 되는 제주의 수재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경쟁률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지만 그 입학시험을 치루는 학생들 중에 내가 제일 절박했다. 다른 학생들은 여기서 떨어져도 다른 인문계 고등학교에 시험을 칠 기회가 있었지만 나에게 다른 대안은 없었다. 입학시험에 떨어지면 더 이상의 공부는 무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비장한 각오로 시험을 치러 가는 길, 아버지가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10대 소년이 성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공부뿐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2~30등에 머물던 내 성적은 꾸준한 노력으로 상위권에 올랐고 명문으로 손꼽히던 한림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남자가 돈을 벌려면 사업을 해야지, 공부는 무슨….” 인생이 걸린 시험을 앞둔 아들에게 아버지는 또다시 사업타령을 늘어놓으셨다. 긴장하지 말고 시험을 잘 보고 오라는 격려의 말씀은 없었다. 내 가슴에 울컥하고 무언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다녀오겠다는 말만 건성으로 담긴 채 시험장으로 나섰다. 내가 공부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시는 것은 알았지만 아버지의 10대 소년이 성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공부뿐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2~30등에 머물던 내 성적은 꾸준한 노력으로 상위권에 올랐고 명문으로 손꼽히던 한림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사업타령은 그날따라 나를 더욱 서럽게 만들었다. 무뚝뚝했던 어머니와 달리 우리 아버지는 제주 아버지들 중에 가장 자상한 양반이셨다. 육지로 돈을 벌기 위해 다녀오셨을 때도 자식들을 하나하나 꼭 안아주셨다. 품속에서 자식을 느끼며 멀어진 시간에 얼마나 자랐는지 아버지는 마음으로 셈하셨다. 제주에 찬바람이 불면 아버지는 좁은 방에서도 자식들을 품에 안고 주무셨다.

자식의 찬 발을 당신 다리 사이에 끼시고는 아버지의 체온을 나눠주며 행여 바닷바람이 자식 건강을 해할까 걱정하셨다. 주머니에 든 것이 없어 자식의 배를 주리게는 했어도 마음은 늘 넉넉해서 자식의 마음은 풍요롭게 하셨던 분이 우리 아버지였다.

자식사랑은 끔찍했던 아버지, 그중에서도 막내아들에 대한 편애(?)는 더 특별했다. 이웃에 잔치가 벌어지는 날이면 아버지는 나를 찾았다. 어린 누이들이 이번에는 자기를 데리고 가라며 아버지에게 투정을 부려도 아버지는 한사코 나만 데려 가셨다.

사진첩은 추억의 수첩이다. 가난 때문에 빨리 철이 들어야했던 나는 조용히 공부만 하는 학생이었다.

아버지를 따라간 잔칫집은 언제나 별천지였다. 몇 촌인지 셈하기 어려운 할아버지와 삼촌들에게 고개 절 한번 꾸벅하고 나면 고기국과 수육을 얻어 먹을 수 있었다. 가끔 이가 불편한 할아버지들이 남겨놓은 돼지 껍데기도 모두 내 차지였다. 집에 돌아오면 동생들은 시기 어린 시선으로 나를 곱지 않게 쳐다봤다. 잔칫집에 온 사람들의 옷차림이나 먹은 음식들을 꼬치꼬치 캐묻고는 따라가지 못한 것을 더 서운해 했다.

다음번에는 꼭 오빠 대신 자신들을 데려가 달라고 아버지를 졸랐지만 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없이 흐뭇하게 우리를 쳐다만 보셨다. 넉넉한 아버지의 마음은 자식들만 품은 것이 아니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로 남은 외할머니를 봉양한 것도 아버지셨다.

우리 어머니의 여섯 자매 중 가장 형편이 어려웠던 것이 우리집이다. 그런데도 다른 이모 집에서 생활하시던 할머니를 붙잡은 사람이 아버지셨다. 아마도 자꾸 어두워지는 외할머니 얼굴에 마음이 쓰이셨던 모양이다. 넉넉한 형편의 자식들 집에서 눈치보고 사시는 것보다 비록 나눌 것은 없지만 마음이라도 편히 계시라며 우리집에서 사실 것을 권했다. 그리고 아무런 불평 없이 아버지는 외할머니를 모셨고 할머니의 임종을 지킨 것도 우리 아버지셨다.

학창시절 사진은 추억의 수첩이다.

하루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늦게 집에 오던 날이었다. 아버지는 굴묵에 불을 때고 계셨다. “다 늦은 시간에 뭐하세요?” 달아오른 불에 얼굴이 붉게 익은 아버지는 무심히 나를 쳐다보셨다.

“네 할머니 목욕물 데운다.”

다 늦게 밭일을 끝내고 나면 아버지는 할머니를 위해서 늘 목욕물을 데우셨다. 하루 종일 고된 일과에 피곤하셨을 텐데, 아버지는 외할머니 일엔 마다하는 법이 없으셨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옆에 앉았다. 

할머니의 목욕물을 데운 것은 굴묵의 말똥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힘 안 드세요?”

“원래 자식과 부모 일에는 힘든 게 없다. 너도 커 보면 안다.”

나는 물이 끓을 때까지 아버지 옆을 지켰다. 굴묵에 주섬주섬 말똥을 넣으시는 아버지를 보며 나는 아버지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봤다. 나보다는 언제나 남을 위해서 사는 사람, 웃어른을 위해서 나의 피로는 잠시 접어두는 사람. 굴목에 비치는 아버지의 등은 어느 때보다 컸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모든 일에 베풀기만 하셨던 것은 아니다. 어머니 대신 우리집의 살림을 맡아 하셨던 아버지는 제주 최고의 짠돌이기도 했다. 쪼개고 나눠도 늘 부족한 살림이니 근검절약은 당연한 일이지만 아버지는 근검절약을 넘어서 인색할 정도였다.

특히나 자식들 공부에 들어가는 돈을 아까워 하셨다. 공부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셨으니 공부에 대해 관심도 없으셨다. 다른 부모님이 입에 달고 사는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아버지께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시험을 보고와도 성적을 궁금해 하시지도 않았다. 대신 책이나 학용품을 사기 위해 용돈을 달라고 할 때, 공과금 고지서를 드릴 때마다 아버지는 사업타령을 하셨다.

“공부는 무슨, 돈을 벌려면 사업을 해야 한다니까….”

학창시절 사진은 추억의 수첩이다.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 어린 나는 아버지의 사업타령이 지겨웠다. 공부를 맘대로 시켜주는 것도 아니고 종잣돈을 대어줄 형편도 아닌데 무슨 사업을 해서 돈을 벌어오라는 건지 아버지가 야속하기만 했다.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것은 내가 그 날의 아버지보다 나이가 더 든 후였다. 내가 서른두 살 때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을 시작하며 집에 인사를 전하러 잠시 내려왔다. 사업을 시작한다는 말에 어머니는 걱정부터 앞서셨지만 아버지는 뭐가 흐뭇한지 연신 밝게 웃으셨다.

“남자는 돈을 벌려면 사업을 해야 한다니까!”

내가 안정된 직장을 뒤로 하고 사업에 대한 꿈을 꾼 것은 아마 어렸을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아버지의 말씀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네가 하는 게 뭐라고?”

아버지는 자식의 새로운 일이 궁금하셨고 나는 내가 하는 사업에 대해 잠깐 말씀을 드렸다.

“그래도 공부해 놓으니 너는 써먹긴 하는구나! 내가 한 공부는 하나도 도움이 안됐는데….”

그제야 나는 아버지가 공부하는 것을 왜 그리 못마땅하게 생각하셨는지 이해가 됐다.

우리 아버지는 이제 여든 여덟, 아흔을 바라보고 계신다. 그 오래된 옛날, 아버지는 학교를 가는 대신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공부하셨다. 머리가 좋고 셈이 빨랐던 아버지는 한학에도 소질이 있으셨고 서당에서도 공부 잘하기로 소문난 학생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너무나 빨리 변했다. 아버지가 열심히 공부한 학문은 하루아침에 고리타분한 옛 것이 돼버렸고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돈을 벌기 위해 육지에 다니러 오시며 아버지는 답을 제주가 아닌 육지에서 찾으셨다. 제주에서는 손이 곱도록 일을 해도 가난을 벗어날 길이 없었고 당신은 아내와 자식을 위해서 제주로 돌아왔지만 자식들은 육지에서 성공하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먹고 사는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하는 공부 대신 육지에 나가서 성공하는 법을 배우라는 말씀을 사업타령으로 하셨던 것이다. 굴곡의 대한민국 현대사를 제주라는 섬에서 온 몸으로 겪고 얻은 지혜를 이해하기엔 당신의 아들은 철이 너무 늦게 들었다. 오랜 세월 아버지의 깊은 뜻도 모르고 내 마음을 몰라준다, 아버지를 야속하게만 생각했던 아들은 아버지께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돈을 벌려면 사업을 해야 한다니까! 김 회장 봐~. 내가 어렸을 때부터 사업하라고 했더니, 성공했잖아!”

아버지는 지금의 내 성공이 당신 덕분이라며 내 얼굴을 볼 때마다 흐뭇해 하신다. 아버지가 나에게 성공을 위해 물려주신 것은 비단 사업에 대한 꿈만이 아니었다. 나보다는 가족을 생각하는 희생, 남을 위해서 배려하는 마음,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상을 넓게 보는 시야를 물려주셨다. 그것은 아버지가 아니면, 세상 누구도 아들에게 물려줄 수 없는 위대한 유산이라고 나는 믿는다.

한림에 아버지를 뵈러 가는 길, 공부에 바쁜 아들을 찾았다.

“아빠, 할아버지 댁에 가게?”

이제 머리가 굵어진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알고 있다는 듯이 군소리 없이 따라나섰다. 쌀집에서 쌀을 사고 정육점에서 고기를 끊었다. 어느새 나보다 키가 큰 아들은 말없이 쌀을 짊어지고 고기를 들었다. 그리고 어린 나처럼 내게 묻는다.

“아빠, 주말에 가지. 회사 갔다가 할아버지 댁에 가면 안 힘들어?”

나는 아들에게 지난날에 내가 들었던 말을 해주었다.

“원래 자식과 부모 일에는 힘든 게 없어. 너도 커 보면 알아.”

태호는 아는 듯 모르는 듯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내 뒤를 따라 걸었다. 굴목에 비치는 아버지의 등처럼 석양에 비치는 내 그림자가 아들의 눈에 크게 보였으면 좋겠다.

사진첩은 추억의 수첩이다. 가난 때문에 빨리 철이 들어야했던 나는 조용히 공부만 하는 학생이었다.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