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 기행](1)절부암(節婦庵)의 마을 용수리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 기행](1)절부암(節婦庵)의 마을 용수리
  • 현달환 기자
  • 승인 2020.06.01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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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택 칼럼][1]차귀현(遮歸縣)의 비경(秘境)과 비사(秘史)를 찾아서
문영택 수필가, (사)질토래비 이사장
문영택 (사)질토래비 이사장(좌)와 문종태 제주도의원(우)
문영택 (사)질토래비 이사장(좌)와 문종태 제주도의원(우)

뉴스N제주는 ‘문영택 칼럼’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 기행」을 게재합니다.
문영택 님은 본적이 제주도 구좌읍 행원리이고 구좌중앙초, 제주제일중, 제주제일고, 공주사범대, 충남대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1977년 3월부터 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교사,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13년),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교육국장을 지냈습니다.

1997년 자유문학 통해 수필가 등단, 2007년 수필집 '무화과 모정' 발간했고 현재 (사)질토래비* 이사장을 맡아 제주의 원도심 길 걷기와 세미
나 등을 통해 제주문화탐방을 통해 잃어버린 제주문화보존 목표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사)질토래비는 제주 원도심 활성화를 위한 연구와 돌하르방과 관련된 학술 및 문화콘텐츠 개발을 통한 제주 문화의 보존을 목표로 2018년 6월에 창단됐다.]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 기행'은 문 이사장이 2017년에 발간한 수필집으로 제주를 사는 이땅의 많은 제주인들도 잘 모르는 제주의 지역에 대해 간접체험을 통해 제주를 알고 제주를 생각해 보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 연재를 하게 됐습니다. 게재를 허락해주신 문 이사장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독자여러분의 많은 성원과 필독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 주]

1. 차귀현(遮歸縣)의 비경(秘境)과 비사(秘史)을 찾아서

봄볕이 따사롭게 비추던 날, 올레길에 동행할 고교 동창들과 합류하려 제주종합경기장으로 갔다. 주변 도로에는 수많은 차량들로 북새통이었다. 주말이면 벌어지는 진풍경이다. 아침 일찍부터 모여드는 사람들은 이곳에 차를 세우고, 끼리끼리 모여 어디론가 떠난다. 몇 대의 차에 동승한 동창들이 푸른 기운이 더해가는 가로수와 그 너머로 펼쳐지는 초록의 향연에 눈을 주다보니, 이내 한경면 용수리 바닷가에 닿았다.

세계지질공원인 수월봉과 차귀도로 가는 길
세계지질공원인 수월봉과 차귀도로 가는 길

(1) 절부암(節婦庵)의 마을 용수리

절부암 마을인 용수리는 옛 이름이 지삿개(瓦浦), 벗개(牛浦), 군영개(軍營浦), 범질포(范叱浦) 등 다양하다. 옛 대정현 관내에 소재했던 이 포구는, 고산리와 신평리에서 생산되는 기와와 옹기들을 육로로 옮겨와, 해로로 제주성으로 실어 날은 데서 지삿개라 불렀다 한다.

일주도로에서 용수리로 가는 새로운 도로가 최근에 단장되었는데, 도로명이 성김대건해안로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1821-1846) 신부를 기리기 위해 이름이 붙여졌다.

1845년 중국 상하이에서 사제품을 받고 귀국 도중 태풍으로 이곳 용수리 해안에 표착한 신부 일행은 첫 미사를 이곳에서 봉헌하였다 한다. 천주교 제주교구에서는 제주선교 100주년을 맞는 1999년에 김대건 신부가 타고 온 라파엘호를 복원하고 성지를 조성하여 기념성당과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세계지질공원인 수월봉과 차귀도로 가는 길
거인형상의 차귀도와 수월봉이 보이는 용수리 바닷가와 방사탑

우리 일행은 바다와 섬의 멋진 풍광을 볼 수 있는 해안에 주차하고 그곳에서부터 올레길 걷기에 들어갔다. 우두연대가 있었다는 용수리 바닷가, 그곳에 서있는 방사탑이 우리를 먼저 반겼다. 마을 해안가 곁에 위치한 명품바위 절부암은, 남편 따라 목숨을 버린 열부의 절개를 후세에 기리는 바위 제단이다.

조선 말엽 차귀촌 출생의 19세 고씨 처녀가 같은 마을에 사는 어부 강사철에게 출가하여 단란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남편이 고기잡이 나갔다가 거센 풍랑을 만나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부인은 식음을 잊고 시신이나마 찾으려 밤낮으로 해안을 배회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 했다. 결국 부인은 소복단장하여 속칭‘엉덕동산’숲의 큰 나무에 목매달았다.

그러자 홀연히 남편의 시신이 바위 아래 떠오른 것이 아닌가. 1866년(고종 3년) 당시의 판관 신재우는 부인이 자결한 바위에 절부암(節婦庵)이라 새기게 했다. 그리고 그곳에 부부를 합장하고 그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제전(祭田)을 마련하여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매년 3월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 제사는 지금도 계승되고 있다 한다.

17세기 말 제주암행어사 이증의 남사일록에 의하면, “제주순무어사인 이선(李選)이 1675년(숙종 1년) 3월에 내도, ‘우두포 연대가 있는 벗개에 이르러 보니, 차귀진은 여러 여건이 적합한 지형인 벗개로 이설하는 것이 좋겠다.

대정현 사람이 소세(小勢)여서 공력이 허비될 까 걱정된다.’라고 했다. 그러나 후일 진성을 이설하지 못하고 우포는 군령(軍令)포로 군사를 주둔했던 것 같다. 우포의 우두연대 는 대정현 서쪽 25리에 있고, 동쪽의 서림연대로, 서쪽은 제주목 두모연대로 교신을 주고받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 대한 역사를 엿본 것은 후일이지만,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도 이 길에 들어서면 역사와 신화가 어른거린다. 해안 길을 따라 걷다 숨은 절경을 찾아낸 우리는 환호성을 질러야 했으니. 누워있는 거인과 비상하려는 독수리가 환상처럼 나타난 것이다. 차귀도 섬들이 잠자는 거인의 형상으로도 보이고, 독수리가 비상하려는 자세로도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환호성을 지르며 우리는 길을 재촉하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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