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석의 자전 에세이 칼럼](5)청년, 세상의 길목에서
[고충석의 자전 에세이 칼럼](5)청년, 세상의 길목에서
  • 현달환 기자
  • 승인 2024.02.18 12: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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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장이 만난 제주사람, "아, 반갑수다!"
고충석 자전 에세이' 어느 행정학자의 초상'
고충석 전 제주대학교 총장의 인생 스토리

제주대학교 제7대 고충석 총장의 자전적 에세이 칼럼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장 마지막 글 어머님과의 이별 이야기에 필자는 꽤 많은 눈물을 흘렸다. 섬속의 섬 우도에서 태어난 고충석 총장의 삶의 궤적을 따라 지난 일대기를 쓴 자전 에세이 제2편 '소년, 둥지를 떠나 한 발짝 벗어나'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어릴 적 잠시 '타락'의 생활에서 벗어나 성장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이번 3편은 그야말로 대학 생활의 진면목이다. 

이 과정에 많은 사람들이 스쳐갔지만 그래도 잊지못할 분들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고마움을 전했다. 내용을 보면 당시 만나는 사람마다 고충석 총장의 우도 소년의 객기도 ㅗㄹ 수 있는 장면도 나온다. 

교괏에나 나오는 인물들 여러 분들을 만나고 배우고 느낀 바를 고 총장은 서술하고 있다. 우리는 간접 체험을 통해 그 분들과 다시 만난다.

그중에도 김관식 이라는 사람을 필자는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데 아주 멋진 분이셨다. '대한민국 김관식' 나도 이처럼 살아야지 하면서 지난 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행동은 검소하게, 꿈은 고상하게 꾸면서, 그렇게 늙어가고 싶다"고 말하는 고충석 전 총장의 자전적 에세이를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응원과 필독 바랍니다[편집자 주]

5번 째 이야기

청년, 세상의 길목에서

대학시절

고충석 전 제주대학교 총장
고충석 전 제주대학교 총장

나는 한 해를 재수했다. 서울에 올라가 입시학원인 대성학원도 다녀보고, 그러다 제주로 내려왔다. 절에 들어가 공부도 해봤지만, 대학 입학시험 준비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여름이 지나자 다시 상경해서 학원에 다녔다. 그때 제주 교육계의 어른이신 허두구 선생님의 사모님이 이문동에서 하숙을 치고 계셨는데 그 집에 가서 살았다.

지금은 두 분 다 고인이 되었다. 사모님은 내 절친한 친구 고희범 군(전 한겨레신문사 사장, 전 제주시장)의 외사촌 누님이다. 나는 항상 '여자 삼촌님'이라고 불렀다.

여자 삼촌은 그 어려운 생활을 잘도 참고 사신 분이다. 정말로 나에게도 잘해주셨다. 덕분에 4, 5개월 정도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실력이 쑥쑥 오르는 것을 느꼈다. 대학 본 고사 시험이 있기 며칠 전에 삼촌이 이화여대 입구로 이사했다. 나도 따라갔다. 거기서 연세대 입학시험을 치렀고, 합격했다.

대학에는 합격했지만, 대학 등록금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문제였다. 우도에는 금융기관이라곤 우체국밖에 없었다. 더욱이 요새처럼 온라인 송금 시스템도 없던 때였다.

우도에서 등록금을 서울로 보내려면 우편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버지는 우편환 송금은 겨울 날씨 등으로 인해 기일 안에 도착한다는 보장이 없다고 생각하시고는 일단 부산에 가서 중부님께 융통해 등록금을 해결하라는 전보를 보내왔다.

중부 님께는 미리 연락을 해두었다고 했다. 전보를 받자마자 부산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맡겨놓은 돈을 찾는 것 또 아니라서 등록금을 마련하는 데 사나흘의 시간이 흘렀다.

등록급 마감일 하루를 남겨놓고 겨우 돈을 마련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여자 삼촌은 나를 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등록일은 다 돼가는데 너가 나타나지 않으니 애가 타서 혼났다"고 말씀하셨다. 돈은 없지만 정말 따뜻하고 인간적인 분이셨다.

이렇게 후덕한 사모님이 계셔서 허두구 선생께서 교직에 계실 때 따르는 학생들이 많았다고 한다.

허두구 선생이 이문동에 사실 때 오현고등학교 교사 시절 가르쳤던 제자 한 분이 며칠 투숙하셨다. 그분은 오현고 다닐 때 천재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서울 법대를 나와 사법시험에 떨어져 좌절의 세월을 보내셨다고 했다. 겨우 마음을 잡아서 교편을 잡고 '반공 도덕' 등의 과목을 가르쳤다.

당시 이런 과목 담당 교사들은 이문동 소재 중앙정보부에 와서 반공 교육 단기 과정을 받아야 했다. 하루는 교육을 받고 오는 길에 만취해서 밤늦게야 집으로 돌아왔다.

고주망태가 된 그는 선생님 내외가 자는 안방을 화장실로 오인하고 시원하게 오줌을 싼 일이 있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호통을 쳤을 텐데 선생님은 고함 한번 치지 않고 조용히 일어나서 술에 취한 제자를 방에 데리고 가서 눕혔다. 그 후 내외분이 그 일에 대하여 누구에게도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교육이 무엇인지, 사제지정이 무엇인지를 아는 많이었다. 선생님은 일본 유학 시절 일제강점기에 '독서회(讀書會)'사건으로 구속도 당한 적이 있고 진보적 사상으로 정치도 하셨다고 들었다.

글나 정치 입문 후 인생이 잘 풀리지 않아 고생을 많이 하셨다. 두 내외분을 생각을 때마다 인간에게 닥친 불운의 의미를 반추하게 된다.

정치학과 대신 행정학과

나는 정치를 하고 싶어 정치학과에 입학하려고 했다. 그러나 주위에서 강력하게 행정학과를 권하는 바람에 그만 그 학과에 지원하게 됐다. 아버지도 "공무원이 돼라! 국가에 봉사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라고 늘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돈보다도 명예를 중시하는 분이었다. 우도에 사는 김군봉 형도 가끔 방학 때 고향에 가면 꼭 고시를 봐서 공직에 진출해야 한다고 하셨다. 아마도 당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내가 이루길 바랐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군봉 형은 어린 시절 나의 데미안(Demian)이었다. 그의 집과 우리 집은 대 문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같았다. 그만큼 가까운 이웃이었다. 우도중학교 1 학년 때는 군봉 형이 새벽마다 우리 집으로 건너와서 나에게 영어를 가르쳐주었다. 그 형은 우도 사람들 사이에 '우도 천재'로 불렸는데 부산고를 나와 서울 법대를 다니다 귀향한 뒤, 그저 허송세월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의 집안은 부친이 부산에서 상선인가 어선의 기관장이어서 경제적으로는 꽤 잘사는 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자 경제적 어려움이 시작되었다. 그 시대에는 대부분의 대학생이 가난했다. 그렇지만 어려움을 잘 극복해서 학사 학위를 받고 대학을 졸업해 사회로 진출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러나 군봉 형은 일찍 모친을 여의어서 그런지 감성적이고 의지박약 했다. 고난을 극복하지 못해서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일찍 결혼한 미모의 부인과도 마찰이 생겼다.

그 부인도 결국 어려움을 이기지 못 하고 고향의 어느 갈대밭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후 군봉 형은 재혼도 하고 상경해서 학업도 계속해보았지만, 의지박약, 알코올중독 등으로 인해 재혼한 부인에게도 버림받고 다시 우도에 들어와 살다가 쓸쓸하게 인생을 마감했다.

박제된 수재로 살다가 간 셈이다. 군봉 형은 문인이 아니어서 소설이나 시같은 문학작품은 남기지 못했지만, 박인환이나 김관식처럼 최후가 너무 비극적이다. 나는 모더니스트였던 박인환의 시도 좋아하지만, 김관식의 시가 절창이다.

김관식이 말년에 쓴 시들을 읽으면 너무나 비참했던 군봉 형의 말년이 연상된다. 서정주의 동서였던 김관식은 한때 최남선으로부터 신동으로 불렸 고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해 장면 박사하고 경쟁까지 했던, 객기가 대단했던 사람이다.

불행한 여생을 보내다 비참한 삶을 마감한 그의 말년의 시 「병상록 (病床錄)』을 읽다 보면 김관식에 대한 연민으로 가슴이 쓰리다.

병명도 모르는 채 시름시름 앓으며
몸져 누운 지 이제 10년
고속도로는 뚫려도 내가 살 길은 없는가?
간(肝), 심(心), 비(脾). 폐(肺). 신(腎)··
오장이 어디 한 군데 성한 데 없이
생물학 교실의 골격 표본처럼
뼈만 앙상한 이 극한 상황에서
어두운 밤 터널을 지내는 디젤의 엔진 소리
나는 또 숨이 가쁘다 열이 오른다.
기침이 난다.
머리맡을 뒤져도 물 한 모금 없다
하는 수 없이 일어나 등잔에 불을 붙인다.
방 안 하나 가득 찬 철모르는 어린 것들
제멋대로 그저 아무렇게나 가로세로 드러누워
고단한 숨결은 한창 을크러졌는데
문득 둘째의 등록금과 발가락 나온 운동화가 어른거린다.
내가 막상 가는 날은 너희는 누구에게 손을 벌리랴?
가여운 내 아들딸들아
가난함에 행여 주눅 들지 말라
사람은 우환에서 살고 안락에서 죽는 것
백금 도가니 넣어 단련할수록 훌륭한 보검이 된다.
어하, 새벽은 아직 멀었나 보다


군봉 형님이 돌아가신 후 이런 생각을 했다. 왜 이 두 집안의 자식들, 특히 큰아들들이 사는 꼴이 이랬는가를 생각해봤다. 두 집안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로도 비슷했다.

내가 제주대 총장으로 있을 때, 제주대 평생교육원 강사인 풍수사에게 두 집의 터를 보인 적이 있다. 그 풍수사는 일단 집이 앉은 방향인 좌향(坐向)이 좋지 않고, 또 우리 집과 군봉 형 집에 접한 골목길이 확장되면서 사람의 두상에 해당되는 땅을 차들이 짓밟고 다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 부질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부모님도 큰형도 군봉 형도 가고 이제는 집마저 허물어져 터만 남아 있다.

가끔 영욕의 세월을 견뎌낸 우도의 옛 집터를 들를 때마다 우리 집안의 가족사와 군봉 형의 서러운 인생이 오버랩되면서 씁쓸한 '골목사'가 상기 되곤 했다.


술과 낭만에 대하여


행정학과를 나오면 다 공무원이 되는 줄 알고 들어갔지만 정작 행정학 공부가 영 재미없었다. 4년 내내 전공과 상관없는 다른 책들을 읽었다.

연세대학교 4년 다니면서 공부보다는 사람 사귀고 술 먹는 일에 더 열중했다. 2학년 초에는 사법시험 공부를 해보겠다고 고시도서관에서 공부했던 적도 있다. 그러나 법률 자체가 너무 딱딱했고 난해한 법을 용어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 길로 도서관을 나왔다. 대학 졸업 후에는 직업 정치인으로서의 수업을 받는 것이 오히려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 도 해봤다.

2학년 때는 교련 반대 시위를 하며, 중간 주동자가 되기도 했다. 많은 학생이 군집한 노천강당에서 "역사는 자유를 향한 진보의 거대한 도쟁"이라는 헤겔의 말을 인용하며 연설했던 기억이 난다.

그로 인해 예상보다 빨리 입영 통지서가 날아와 육군동합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시력이 너무 나빠 보충역으로 편입되었다. 군대로 끌려가는 것은 일단 면했다.

MRI(도덕재무장운동) 동아리도 비교적 열심히 다녔다. 이 동아리의 지도교수가 요새 더욱 유명해진 김형석 교수님이다. 가끔 세배도 간 기억이 있는데 사모님이 매우 친절한 분이었다.

교수님이 쓰신 『영원과 사랑의 대화』는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이미 베스트셀러였다. 나도 그 책을 읽고 10대의 고민을 담은 편지를 저자에게 보낸 적이 있었다. 일종의 팬레터였다.

당시에는 책을 감명 깊게 읽으면 저자에게 편지를 보내는 게 유행이었다. 교수님은 내 편지에 성의 있는 답장을 적어 보내주셨다.

고충석의 자전적 에세이 '어느 행정학자의 초상'
고충석의 자전적 에세이 '어느 행정학자의 초상'

편지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단지 한 글 맞춤법이 영 엉망이었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다. 그 세대 분으로서는 당연한 것 아닌가 생각했다. 나도 아직까지 한글 맞춤법을 어려워한다.

나는 나의 서툰 그 맞춤법을 두고, 아내에게 "당신처럼 명문 '제주북초등학교' 나왔으면 맞춤법 같은 것을 틀리지 않을 텐데" 하고 농담을 하곤 한다.

참으로 인연은 필연인 것을, 대학에 입학한 후 교수님을 동아리 지도교수로 뵙게 되니 더 반가웠다. 교수님께 몇 년 전에 이러이러한 내용으로 편지를 보냈던 제주의 고등학생이라고 말씀드렸더니 다행스럽게 나를 기억해주셨다.

문과대학생들이 주도하는 독서 모임인 '인간걱정회'에도 가끔 참석했다. 클래식 음악에도 눈을 뜨기 위해서 음악 감상실에도 다녔다. 예술적 허영이랄까, 그런 것도 있었던 것 같다. 주일날 드문드문 대학교회에 가보기도 했다.

동아리 MT도 재미있게 다녔다. 3학년이 되어서 연세대 총학생회 총무로 활동 하기도 했다. 술도 많이 마시고 명동에도 가끔 놀러 갔다. 학생회 일을 하면서 동료 학생, 성공한 선배, 실패한 선배 등 많은 인간 군상들을 만났다.

특히 그중에서도 안성혁 형을 잊을 수 없다. 불행한 노년을 지내다가 몇 년 전 시신을 세브란스 병원에 해부용으로 기증하고 저세상으로 가셨다.

나이는 9년 차이지만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다. 나이 차이를 넘어 나와는 우정이 매우 깊었다. 성혁 형은 통금이 있던 시절 술자리가 파하는 것이 아쉬워서 장가 안 간 후배들을 이끌고 여관방으로 향했다.

밤새워 마신 맥주병이 여관방의 사방을 다 채울 때까지 술자리는 이어졌다.

그가 송강 정철의 「장진주사」나 노산 이은상의 「가고파」를 낭송할 때는 참석자 모두 시에 취하고 술에 취하고 인생의 덧없음에 취해 격한 공감을 나눴다.


한잔 먹세그려 또 한잔 먹세그려.
꽃 꺾어 술잔 수를 세면서 한없이 먹세그려.
이 몸이 죽은 후에는 지게 위에 거적 덮어
꽁 졸라 묶여 (무덤으로) 실려가거나,
화려한 상여에 많은 사람이 울며 따라가거나,
억새풀, 속새풀, 떡갈나무. 버드나무가 우거진 숲에
한번 가기만 하면 누런 해와 흰 달이 뜨고,
가랑비와 함박눈이 내리며. 회오리바람이 불 때
그 누가 한잔 먹자고 하겠는가?
하물며 무덤 위에 원숭이가 놀러 와 휘파람을 불 때
(아무리 지난날을)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송강 정철의 「장진주사』

지금도 그때를 회상하면 아련한 세월이지만 애잔함이 가슴속에 밀려온다.

그 시절이 그립다. 성혁 형은 한.일 회담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으로 굴욕외교 반대를 주도하다가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해서는 대일 굴욕 외교 반대의 선봉에 섰던 그때의 대학생들이 사회인이 되어서 결성한 6.3동지회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시를 사랑하고 글도 잘 쓰며 말도 잘했다. 술자리에서 하는 일종의 음담패설에 가까운 격조 높은 와이담(Y)은 가히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다.

정치 거물이던 김상현 의원과도 술자리를 같이 한 적이 있는데 그 유쾌했던 술자리가 오래오래 기억된다. 참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능력이 출중한 분이었다.

성혁 형은 국회의원에도 세 번인가 출마했지만 번번이 낙선했고, 차관급 공직에 취임도 했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고 영어의 신세가 되기도 했다.

그 후 건강까지 망가져서 매주 혈액 투석을 하며 살았다. 그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것이다. 총장 취임식에 아픈 몸을 이끌고 내외분이 참석해주었다. 너무나 병들고 초라한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더는 희망을 담보해내지 못하는 삶, 그것이 그에게는 어쩌면 죽음과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성혁 형은 타인의 기억 속에 오래오래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라고 했다. 출세하고 돈이 많다고 해서 타인이 기억해주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이 나이까지 살아보니 매우 수긍이 가는 이야기다.
지금도 가끔 성혁 형을 따랐던 그 시절 사람들을 만난다. 고인에 대한 추억이 안개꽃처럼 만발하다. 성혁 형은 세속적으로 출세도 못했고 삶은 남루했다. 그러나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다.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성혁 형을 회상할 때마다 슬픔에 젖은 행복감에 취한다. 그러한 감정으로라도 기억하는 것은 우정에 보답하는 나만의 방식이기도 하다.

부디 권모술수가 없는 저세상에서 순수한 열정이 활짝 꽃피기를 빈다. 

내가 대학 시절 총학생회 간부로 활동할 때 고교 동창인 문정인은 대학신문인 『연세춘추』 편집장을 맡아 아름다운 필봉을 펼치고 있었다. 이미 문 교수는 대학 재학 때 단독으로 시화전을 열만큼 문재(文才 )가 대단했다.

10월유신 때 군대가 캠퍼스 안으로 진입해 들어오는 것을 두고 "나목의 틈새 사이로 군화의 울림이 해일처럼 일었다"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하였다.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보에 실렸던 그 명문은 수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까지도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글재주가 없는 나는 당시 대학생이 어떻게 이런 미문을 쓸 수 있나 너무나 부러워했다.

유창한 영어 구사와 탁월한 글쓰기 능력 그리고 일상생활에서의 부지런함 등이 제주섬 몽생이 문정인을 한국의 대표적인 정치학자로 만들었다.

나는 가끔 강의에 연사로 초청받아 교육 문제를 이야기할 때 수학을 잘하지 못해도 문정인 교수처럼 크게 성공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수학, 과학 못 한다고 기죽을 필요가 없다고 역설한다.

그 근거로 문 교수를 활용하기도 한다. 사실 중•고등학교 때 문 교수는 영어와 국어 실력은 탁월했지만 수학은 그리 잘하지 못했다. 그러나 책을 읽는 습관과 글쓰는 훈련이 이미 고교 때 부터 몸에 배어 있었다.

글쓰기 능력은 4차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하면서 더욱 중요해졌다. 육체노동은 기계가, 정신노동은 AI가 대신하게 될 앞으로의 시대에는 컴퓨터가 복제할 수 없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두각을 나타낸다. 대표적인 부문이 글을 잘 쓸 수 있는 능력이다. 이런 점에서 기존의 교육 방식에 큰 전환이 와야 한다.

대학 시절 은사님들

나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 총학생회 활동을 시작한 3학년부터 장학금을 받 았다. 대학원에 입학할 때도 입학금 전액 면제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중학생회 일을 하면서는 박대선 충장님과 심치선 여학생처장님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았다.

박 총장님은 학생회 MT에 가끔 참석하곤 하셨는데 제주 또 고군" 하고 불러내 나에게 기도를 청하기도 했다. 그때 박 총장님 앞에서 했던 기도 실력이 아직도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는지 만취했을 땐 발휘되어 좌중을 압도하곤 했다.

총장님께 가난한 제주 학생들을 위해서 장학금을 부탁드리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례하기 짝이 없는 짓인데도 박 총장님은 흉허물 없이 받아주셨다.

나의 주선으로 총장 장학금을 받은 제주 출신 학생들도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서울에서 아들 혼사에 축하금을 보내왔기에 학생 때 받은 장학금에 대한 답례냐고 하면서 한참 웃었다.

총장님은 사모님이 돌아가신 후 제주도에 한 번 오셔서 식사를 같이했는데 왠지 모르게 측은해 보였다. 아무리 하느님이 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참  어진 사모님께서 일찍 소천하셔서 총장께서 많이 가슴 아프셨을 것이다.

총장 공관에 갔을 때 가끔 사모님께서 해주신 밥을 먹었던 기억이 새롭다. 박사 논문을 들고 찾아 뵈었을 때는 칭찬과 함께 여러 격려의 말씀도 해주셨다.

대학을 떠난 후 감리교 감독 일을 하셨던 박 총장님은 내가 홍모의 은혜를 갚을 기회도 주지 않으시고 오래전에 돌아가셨다.

심치선 선생님도 은혜를 많이 베풀어주신 분이다. 그는 연세대를 떠난 후 이화여고 등지에서 교장을 지내다가 퇴임하셨다. 내내 건강을 잘 유지하셨다. 내가 교수직을 퇴임하면서 기념으로 스승의 은혜가 생각나서 변변치 않은 용돈을 보내드릴 때만 해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고맙다며 기뻐하셨다.

그러다가 2017년 추석에 보낸 선물이 반송되어 와서 선생님을 돌봐주시는 분께 연락했더니 병원에 입원한 지 꽤 되었다고 했다. 어렵게 통화가 연결되긴 했지만, 건강 상태가 나빠서 원활하게 대화가 이어지진 못했다. 내내 병원에 계시다가 결국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눈을 감으셨다. 이북 땅에서 혈혈단신으로 내려와 독신으로 평생을 살다가 시신마저 세브란스병원에 기중하고 이 세상을 떠나셨다.

심치선 교수님은 대학 때 내가 고향에 내려간다고 하면 측은히 여기며 여비를 보태주시곤 했다. 제주대학 교수로 부임한 후에도 미국에 공부하러 갈 때 쓰라고 꼬깃꼬깃 보관했던 US달러를 내 손에 쥐여주기도 하고 아이들 옷 사입히라며 옷값까지 주시곤 했다.

내가 총장에 당선되자 교수님은 크게 기뻐 하셨다.

"임자가 근무하는 대학에 꼭 한번 가보고 싶구나."

선생님은 내가 총장으로 있을 때 퇴직한 연세대 여교수 여러분과 함께 제주 대학교를 방문하셨다. 여기저기 학교를 둘러본 후 뿌듯해하시는 선생님께 정성을 담은 봉투를 하나 마련해 드렸더니 같이 온 동료 교수들 앞에서 어찌나 자랑스러워하시며 기뻐하셨는지 모른다.

어머니처럼 나를 세심하게 챙겨주셨던 선생님을 오래도록 그리워할 것이다.

당시 학생처장이셨던 법학과 이근식 교수님도 잊을 수 없는 분이다. 강의를 열심히 듣지는 않았지만 행정학과 교수님들도 나를 많이 사랑해주셨다.

당시 행정학과에는 노정현, 김영훈, 유종해, 이종익, 양승두 교수님이 계셨다. 이분 들 중 이종익 교수님은 다른 대학으로, 지금은 고인이 되신 양승두 교수님은 본래 자리인 법학과로 복귀하셔서 두 분 교수님과는 아쉽게도 사제지정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학부 시절의 은사는 노정현, 김영훈, 유종해 세 분 선생님이 남았다.

김영훈 선생님은 공부는 등한시하고 돌아다니는 나의 생활 태도를 몹시 못 마땅해하셨다.

"고군! 잔가시에도 찔리면 금방 쪼그라드는 고무풍선 같은 자존심을 버려야 되네."

선생님은 가끔 꾸짖으면서도 애정을 거두지는 않으셨다. 그분은 깐깐한 선비이고 상아탑에 걸맞은 진정한 학자였다. 그 이미지를 나도 조금은 닮고 싶다. 그러나 마음이 약해서 잘 안 된다. 내가 박사 과정에 진학할 때는 추천서를 써주려 하지 않아 안병영 교수께서 중재한 덕에 간신히 얻어낼 수 있었다.

유종해 선생님은 온화하고 다정하신 분이다. 나를 미군 부대에 있는 서양식 레스토랑에 데리고 가서 밥도 종종 사주곤 했는데 부친께서는 자유당 정권 때 제주도 경찰국장을 지낸 인연이 있어 제주를 많이 사랑했다.

유 교수님은 부친의 칠순을 기념하여 미국에 사시는 부친을 모시고 제주에 오션 적이 있다. 내가 제주에 내려와 군 복무 중일 때였을 것이다. 부친에게는 제주에 근무하실 때 사랑한 여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과거에 부하였던 사람이 근무하고 있는 경찰국을 방문해서 그 여자를 한번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먼발치에서만이라도 한번 보고 싶다고 간청을 하는 것이었다.

"지금 그 여자는 새로운 가정을 꾸려 잘 살고 있는데 봐서 뭐하겠습니까?" 그 부하는 냉정하게 거절했다.

유 박사님 부친의 눈에는 여인을 향한 그리움이 가득했다.

유 박사님이 화장실 간 틈을 타 부친은 과거의 부하와 그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들이 나타나자 시치미를 뚝 떼시더니 얼른 대화의 주제를 전환하는 것이었다.

그때 내가 느낀 것이 있다. 부자지간이란 나이가 들어도 역시 체면과 일정한 형식을 요구하는 관계라는 것을.

그 여인을 절박하게 보고 싶어하던 유 박사님 부친의 애절한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후 나도 나이가 들어보니 공감가는 면이 있어 그 러브 스토리를 오랫동안 기억의 창고 속에 저장했다가 유 교수님께 간접적으로라도 전하고 싶어 오늘에야 용기를 내어 그때의 일을 적어본다.

그런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유 박사님 부친은 미국에서 타계하셨다. 아마 죽는 날까지 그 여인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 여인도 유 박사님 부친을 그리워했을까? 이 대답엔 난 '글쎄올시다'이다. 남자에게는 첫사랑이 있다.

그러나 여자에게 첫사랑이란 없다. 여자에게는 지금 만나서 사랑하는 사람이 첫사랑이고 최고의 사랑이다. 여자는 현실적인 존재다. 지금 만나고 있는 이성이 사랑하는 사람이면 과거의 남자에 대한 연모의 앙금은 남아 있지 않을 게다.

그래서 자고로 남자와 달리 여자가 바람나서 문지방을 건너면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속설도 있지 않은가.

남자는 다르다. 남자는 현재 사랑하는 이성이 있느냐 없느나에 관계없이 과거 사랑했던 여자와의 추억을 회상하기도 하고 그리워하기도 한다. 이는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에서 오는 것으로 생각된다.

남자는 종족 본능이 강한 동물이다. 그 힘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해서 많은 종족을 생산하기 위해서 여러 여자와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 그래서 복수의 여자를 동시에 사랑할 수도 있고 현재 사랑하는 이성이 있음에도 과거의 여자를 기억에서 지우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 여자는 유전자가 우수한 한 사람만을 선택하여 종족을 생산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현재 사랑하는 그 사람 외에는 관심이 없다.

여기에서 우수한 유전자란 외모일 수도 있고 돈, 학벌, 지식, 명예, 권력, 체력일 수도 있다.

유 교수님 부친의 과거 여자도 당시 현실에 만족해서 살고 있었다면 이미 머릿속에서 유 교수님 부친을 지웠을 것이다. 아니 마음속에서 꺼내어 저 멀리 놔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여자에게 과거란 냉정한 것이라고들 한다.

지금은 우리 둘 다 나이가 들어 교수님께 가끔 안부나 물을 정도이다. 나도 젊고 교수님도 젊던 시절에는 서로 속마음을 다 털어놓을 만큼 인간적으로 가까이 지냈다.

당신도 주책이라고 하시면서도 이런저런 시답잖은 이야기까지 나에게 다 들려주셨다. 나는 유 교수님의 그런 천진난만함이 좋았다. 그런 스승을 가진 나도 참 행복한 사람이다.

2010년 12월 노정현 선생님이 오랜 투병 생활 끝에 소천하셨다. 빈소에 가서 참배하는데 울음이 복반쳐 올라왔다. 매우 엄격한 분이었지만 나에게는 기대도 많이 하시고 늘 따뜻한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제주대 총장에 당선됐을 때 선생님은 이미 매우 편찮으셨다. 그 와중에도 축하 전화를 하셨는데기쁨을 감추지 못하셨다. 무척이나 기뻐하시면서 훌륭한 총장이 되려면 직원들을 잘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도 해주셨다.

그도 연세대 계실 때 총장만 빼고 여러 보직을 거치셨기 때문에 대학 행정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고려대 출신만 아니었으면 총장을 하고도 남을 분이었다.

여러운 학창 시절, 방학이 되어 고향에 가는 나에게 비행기 표 사는 데 보태라하면서 편도 여비를 챙겨주시곤 하였던 선생님은 이렇게 아름답게 사제지정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랑을 주셨다. 

제주대에 부임한 후 상경해서 가끔 찾아뵐 때마다 고급 호텔에서 저녁을 사주면서 여러 가지 이야가를 해주시곤 했다.

내가 박사 학위는문을 쓰기 위해 연세대에 1년간 머물고 있을 때 공부할 거처를 마련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나에게 도시문제연구소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해주셨다.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고 객지에서 명절을 보내는 나를 안타까워 하시면서 집으로 초대해 명절 음식까지 대접해주셨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 겨우 전화 통화를 했는데 이야기를 이어가지 못하셨다. 그것이 그분과의 마지막이었다. 나도 젊고 모든 것이 희망으로 보였을 때는 은사님들의 은혜를 잘 몰랐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은사님들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소중한 것이었는지 느낀다. 깊은 병환 중이라 전화 통화도 여의치 않고 해서 이런 소회를 카드에 써서 작은 선물과 함께 보내드렸다. 선생님께서 내 글을 읽으면서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셨다고 사모님께서 전해주셨다.

돌아가시고 몇 달 후에 꿈속에서 선생님을 뵈었다. 생전의 단정하고 환한 얼굴이었다. 아마 이승에 대한 영원한 고별인사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다소 무뚝뚝하신 사모님도 남편 없는 세상을 살아내기가 버거웠던지 바로 선생님을 따라가버리셨다. 나이가 들수록 선생님들이 그립다. 이분들과 교해보면 나의 제자 사랑은 얼마나 보잘것없는가? 초라함을 느낀다.

촌놈 콤플렉스

이 글을 쓰면서 어이없는 추억담이지만 신입생 때 에피소드 하나가 생각난다. 나는 신체적으로 키가 작은 데다, 지역적으로 보아도 제주 섬에서 올라 온 촌놈이라는 콤플렉스가 있었다.

서울 학생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언제 한번 속칭 '깡다구'를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중국집에서 새로 만난 친구들하고 술을 마시다가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쯤 나는 조각난 소주 컵을 입속에 넣고 잘근잘근 씹어댔다.

과거에 가끔 친척 형이 술에 취해서 유리컵을 씹는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힌트를 얻지 않았나 생각한다.

"야 인마! 나 제주서 좀 놀던 놈이다. 이 씹던 컵 조각 너희들 얼굴에 확 뿌리면 너희 얼굴 다 곰보 된다. 나 제주에서 좀 놀다 온 놈이거든."

사실 나는 속으로 잘할 수 있을까 매우 불안했지만, 잔뜩 허세를 부리느라 무게를 잡은 터에 다행히 별 실수 없이 해냈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기 그지 없는 배짱을 부렸지만, 그것이 젊음이 아닌가 생각한다.

"고충석이는 제주 뒷골목에서 좀 놀았던 놈이라더라. 그런 녀석이 어떻게 연세대에 들어왔지? 분명 뒷구멍으로 들어왔을 거야!"

그 무모한 객기 연출이 있은 후로 그 일화를 들은 친구 중에는 연세대학교에 들어온 실력을 의심하는 이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국가대표로 주목받던 연세대학교 유도 선수, 럭비 선수와 친하게 지냈고, 담배도 피우지 않으면서 대마초를 피우는 소위 불량(?) 학생과도 스스럼없이 자주 어울려 다녔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그들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어떻게 사는지 가끔은 그리워진다. 대마초 피웠던 친구는 대학 재학 중에 학교를 자퇴해서 그 후부터 소식이 끊겼다. 자식들 혼사 때라도 연락이 오는 친구들도 있지만, 전혀 연락이 안 되는 학우들도 있다.

또 하나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제주출신 거물 국회의원 현오봉 의원이 제주장학회의 이사장이었다. 대학에 입학하자 나는 제주장학회 장학금을 받아보려고 했다. 그때는 요새처럼 장학회에 접근하는 통로가 공식적으로 개방되지 않을 때라 사적인 통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현 의원과 같은 공화당에 소속된 연세대학고 출신 이만섭 국회의원을 찾아가서 제주장학회를 연결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만섭 의원의 소개로 현오봉 의원실을 찾아갔다.

지금 생각하면 대학 1학년 학생치고 상당히 당돌한 것이었다. 나는 현오봉 의원의 비서관을 만날 수 있었다. 마침 그 비서관은 우도의 김군봉 형님과 서울 법대 선후배 간이었다. 군봉 형이 이야기도 해놨다고 해서 내심 친근감을 갖고 찾아갔던 것이다.

그런데 그 비서관은 처음 본 나에게 화장실에 가서 물을 떠오라는 등 잔심부름을 시켰다. 나는 순순히 심부름을 다 해주며 고맙다는 인사까지 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정작 장학금 수혜 대상에서 제외됐다. 아쉽고 섭섭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 문제는 그대로 잊어버렸고 재신청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10여 년이 흐른 어느 날 우연히 그 비서관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제주대학교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조문부 교수님(제주대 제6대 총장)을 수행해 서울에 갔는데 거기서 그와 조우했다. 알고 보니 두 분은 막역한 고등학교 동기동창 사이었다.

그는 멋쩍어하면서 그때 일을 사과했다. 궁한 형편으로 찾아간 나에게 엉뚱한 잔심부름을 시키고는 정작 장학금 혜택을 주지 못한 미안함이 쭉 내면에 잠재해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뭐 다 잊어버린 지난 일이니 괘의치 말라고 말씀을 드리긴 했지만 "처음 나온 것이 나중 되고 나중에 나온 것이 처음 된다"는 성경 말씀이 생각났다.

맹자는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라면 인()을 베풀라고 했다. 누구에게라도 이치에 합당한 부탁을 받게 되면 상대방의 처지를 생각하여 결과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교훈을 얻었다.

대학 시절 명강의들

대학 재학 시절 들은 명강의들이 생각난다. 행정학에는 취미를 붙이지 못했지만 좋은 강의를 들을 기회는 많았다. 사학과 김동길 교수, 철학과 김형석 교수, 정치학과 이극찬 교수의 강의가 소위 말하는 연세대 3대 명강의였다.

김형석 교수님은 역사철학을 강의했는데 너무나 쉽게 가르치셨다. 이극찬 교수님은 나를 많이 아껴주신 데다가 정치학을 너무 재미있게 강의해서 내가 정치학과에 갔어야 했나 하는 후회도 했다.

오형석 교수는 대령으로 예편한 군의관 출신인데 그분이 하는 보건학 강의가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었다. 한국 역사학회의 거두 홍희섭 선생님의 강의도 들을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특히 김동길 교수의 강의는 당시 침울한 정치 분위기와 연결되면서 대중적으로 매우 인기가 있었다. 그분에게 교양과목을 하나 들었는데 학점은 매우 짰다.

C 학점인가 받은 기억이 난다. 지금도 인상적으로 각인된 장면 하나는 만추의 어느 날 강의실에 들어오시더니 칠판에 테니슨, 예이츠의 시를 쓰고는 이와 관련하여 인생과 철학에 대해서 강의를 하셨다.

아, 대학교수라면 강의는 저렇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했다. 행정학과 교수님은 아니지만, 가끔 김동길 교수님 댁에도 놀러 갔다. 제주대학교에 부임한 후 선생님 께서 강연차 제주에 오셨을 때 만나 뵙기도 하고 내가 행정대학원장으로 있을 때는 연사로 여러 번 초청하기도 했다.

연세대학교 개교기념일 모교 방문 (Homecoming Day) 때는 우리 70학번이 뽑은 최고의 은사로 선정되어 학창 시절로 돌아간 기분으로 교수님 강의를 다시 한 번 듣기도 했다.

최근에는 교수님을 뵙지 못했지만 '보수 꼴통'이라는 등 말이 많다. 그러나 나는 이것만은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분의 고향은 북한 땅이고 종교는 기 독교다. 고등학교까지 평양에서 보냈다. 그는 고향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 얼마나 뼈아픈 상처인가.

그는 철저한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이고 기독교적인 선악관을 가지고 계신다. 그분만이 지닌 이러한 물리적 정신적 배경이 작용해서 남북 문제를 보는 시각이나 체감하는 온도 차가 고향이 남쪽인 사람하고는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요사이 '왕'보수로 분류되는 서정적 목사의 경우도 비슷하다. 그는 경실련을 만들었고 사무충장을 지냈다. 내가 제주경실련 대표 때, 서 목사는 중앙 경실련 사무총장이었다. 그는 가장 주목받았던 시민운동가였다.

머리 좋고 공공봉사에 대우 헌신적이었다. 한때는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꼬마민주당을 창당해서 사무동강을 지내기도 했다. 서 목사도 고향이 이쪽이고 개신고 목사이다. 그래서 나같은 사람하고는 남북 문제 등을 보는 시작자가 클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대로 존중한다. 지식사회학 (知識社會學)에서도 그런 절을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명동의 대성빌딩에서 흥사단이 주최하는 강의도 가끔 들었다. 거기에는 유명한 거장들이 등장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뿐만 아니라 함석헌, 김성식, 김지 하, 백기완, 신상 선생 등의 강의가 기억난다.

한참 세월이 흐른 후 제주도 에서 백기완 선생과 식사를 하면서 디젊었던 선생의 엣 강의를 상기시켜드 렀더니 당신께서 살아온 인생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다. 김지하 선생은 내가 총장에 취임할 때 오셔서 취임 축하 강연도 해주셨다. 나는 그처럼 동 서양철학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은 본 적이 없다.

함석헌 선생 이 쓰신 뜻으로 본 한국 역사」는 대학 시절 내가 감명 깊게 읽은 책 중의 하 나이다. 여러 번 읽은 기억이 난다. 강창일의 누님 집에서 하숙할 때 원효로 131번 버스에서 가끔 귀가하는 선생님을 우연히 뵙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다 가가 인사하면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그는 격조가 높은 선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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