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용진 변호사 칼럼](4)중학교 졸업 후 4년 막노동과 양봉일로 생계를 유지하다
[허용진 변호사 칼럼](4)중학교 졸업 후 4년 막노동과 양봉일로 생계를 유지하다
  • 현달환 기자
  • 승인 2023.08.31 17: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편집국장이 만난 제주사람, "아, 반갑수다!"
'어머니께 드리는 매화 한송이' 자서전에서
허 변호사의 눈물과 집념 성공 인생 스토리

생각해보면 과거 제주는 일자리가 없어 돈이란 것을 구경하기가 참 어려웠다.

귀덕에서 어선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는 80세 된 선주님을 알고 있는데 그 분이 하는 말, 자식들이 자라 학교에 다니면서 학비를 내야하는데 돈을 벌기가 참 어려웠다고 헸다.

동네에서 농번기에 일을 도와줘서 일품으로 돈을 받아야 하는데 돈은 커녕 곡식을 걷어들인 보리 등을 품삸으로 줘서 아이들 공부시키는데 굉장히 어려웠다고 했다.

그래서 어이들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배를 탔는데 매달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에 굉장히 즐거웠다고 했다. 열심히 한 덕에 아이들 공부를 다 가르치는데 불편함이 없었다고 했다. 아이들도 제각기 공부도 잘하고 국비 학교로 진학해서 좋은 직장생활을 다니고 있으니 지금은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했다.

과거엔 열심히 노력하면 돈도 벌고 부자가 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라 열심히 일해도 월급이 정해져서 부자되기가 참 어렵다.

그런 상황에서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 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당시에 희망이란 것은 잘 먹고 잘 자야하는데 그런 생활은 꿈의 세계다. 먹지도 못하고 그때 키가 지금 키라는 허용진 변호사의 설명에 설마?라고 하겠지만 그럴 수 있겠다 생각하니 연민의 정이 나왔다.

그러나, 허용진 변호사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허용진 위원장은 4년 후 친구들은 대학에 가서 놀고 있을 때 고등학교 신입생으로 입학하는 것초차 대단한 스토리다.

허용진 변호사 칼럼은 변호사 활동까지만 이어질 예정이다. 허용진 변호사의 성공 스토리, 많은 응원과 성원바랍니다. [편집자 주]

허용진 국민의힘도당위원장
허용진 변호사

중학교 졸업 후 4년 막노동과 양봉일로 생계를 유지하다

누구에게나 굴곡과 고난은 함께 하기 마련인 것 같다. 중학교 졸업 이후 어려웠던 4년 동안의 경험은 향후 마주치는 난관들을 극복하는 강인한 인내심과 의지의 원천으로 작용하였다.

은사님의 배려로 뜻하지 않게 진학한 중학교 시절도 어느덧 막바지에 다다랐다. 배고픔을 견디면서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고 뛰어놀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때로는 공부하기 싫기도 했으나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을 유지해야 학비를 면제받을 수 있었기에 나에게 있어서 공부는 싫더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어쩌면 일종의 의무였다.

집에서 공부할 형편이 못 되었기 때문에 수업을 충실히 듣고 이해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공부의 전부였다. 운이 좋았는지 3년 내내 학비 전액을 면제받을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만약 성적을 유지하지 못해 학비를 내야만 했었다면 중학교 졸업은 어려웠을 것이다.

이제 3년의 중학교 생활을 뒤로 하고 졸업이 다가왔다. 졸업을 앞두고 고등학교 진학을 고민하였으나 더 이상 공부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 은사님들은 학비를 면제해 줄 터이니 고등학교에 진학하라고 권유하셨고 일부 친구들도 같은 권유를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참으로 고마운 말들이었지만 내 생각은 완전히 달랐다.

중학교 3년 동안 점심을 꼬박 거르고 나니 더는 점심을 굶어가면서 공부할 엄두가 도저히 나지 않았다.

공부를 계속한다고 생활고가 해결되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점심시간마다 운동장 모퉁이에 홀로 있어야만 했던 쓸쓸함과 겹쳐지자 고등학교 진학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또한 3년 동안 점심 도시락을 준비해 주지 못한 부모님의 마음은 오죽 아팠을 것인가! 굶주림으로 인한 내 고통보다 자식의 굶주림을 바라보면서도 아무런 대책을 마련해 주지 못하는 부모님의 마음은 훨씬 쓰라리게 아팠을 것 아닌가? 온통 이러한 생각만 들었다.

막노동이라도 해서 내 스스로 끼니를 해결하여 부모님의 부담을 다소라도 덜어 드리는 것이 최소한 자식된 도리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지만 선생님들과 친구들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공부의 소질을 살려 학업을 계속하면 더 나은 미래를 보장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어서 진학을 포기하는 나를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그와 같이 권유하였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 보아도 당시 선생님들과 친구들의 생각은 객관적으로 매우 옳다고 보여진다. 참으로 고맙고 아름다운 그들의 마음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부득이 이러한 애정 어린 권유를 뿌리치고 과감하게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어쩌면 고등학교 진학을 완전히 포기하였다기보다는 우선급한 배고픔을 해결하고 난 후에 진학 여부를 다시 생각해 보기로 미뤘다는 것이 좀 더 적절한 설명일지도 모르겠다.

진학을 포기하기로 굳게 결심하고 나서 마음속에서 한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면서 스스로 다짐했다. 지금 고등학교를 가지 않는다고 해서 영영 공부할 기회를 놓치는 것은 아니라고.

가능하면 모든 결정에 있어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상황이 어려울 경우 차선책을 선택하는 것도 좋은 대안이 되는 경우가 있다.

최선만이 항상 능사는 아니다. 그러한 생각을 하면서 어려운 상황을 타개할 때까지 공부를 잠시 중단한다는 생각으로 차선의 선택을 하였던 것이다.

비록 지금 가는 길이 가시밭길이라 하더라도 강한 의지로 잘 헤쳐나가다 보면 희망의 빛이 보일 날이 올 것이다.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고 비관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절망을 넘어 희망이 보일 때까지 성실히 노력하는 것만이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짙은 먹구름이 지나고 나면 오히려 더욱 밝은 태양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스스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중학교 졸업 이후 처음으로 시작한 것이 묘목을 파서 가식하는 일이었다.

당시 우리 마을 인근에는 농가에 보급하거나 식목일에 벌거숭이 된 오름 등에 심을 묘목을 공급해 주는 영림서(산림청 산하 관서)가 있었다.

나는 보리밥과 된장이 전부인 도시락을 들고 그곳에 가 오전 8시부터 저녁 5시까지 삼나무와 소나무 묘목을 캐고 가식하는 일을 했다. 내 키와 거의 비슷한 삽을 들고 말이다.

그 일을 하면서 받은 일당 팔백 원은 나에게 매우 소중한 것이었다. 잠시나마 행복해 질 수 있었다. 배고픔이 해결되어 느끼던 행복감은 참으로 오래오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때 내가 캔 삼나무 묘목들이 아직까지 서귀포 일원 과수원의 방풍림 역할을 하고 있고 소나무 묘목들은 어느새 아름드리나무가 되어 조경수로 이용되거나 벌거숭이였던 오름을 울창하게 덮고 있다.

40여 년이 흐른 지금 서귀포 일원에 자라는 삼나무와 소나무들을 바라보면서 가끔 그 옛날 보리밥을 먹으며 묘목 캐던 때가 떠올라 묘한 감흥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것을 두고 추억이라 했던가. 지나간 세월은 소리 없이 아름다운 추억을 선사하기도 하니 어찌 과거의 아픔이 치유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영림서 일은 한두 달이면 끝이 나기에 다른 일을 찾아야만 했다.

영림서 일이 끝나고 난 후에는 미장일을 하는 막내 형님을 따라다니면서 미장 보조로 일하기도 하고 때로는 목수 일을 하는 동네 어른을 따라다니면서 목수 일을 배우기도 하였으며 또 한동안은 전파사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전기장판을 만들어 판매하는 일도 하였다.

그때의 전기장판은 조절기가 부착되지 아니한 전기장판이었다. 당시 내 인생도 조절기가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다가 겨울이 다가올 무렵이면 귤나무를 심는데 필요한 구덩이 파는 일도 했다. 당시는 귤나무 식재 붐이 일던 때라 일거리가 아주 많았고 그 일은 친구 아버지가 도급 받아 온다. 그러면 친구와 함께 친구 아버지를 따라가 구덩이를 파는 일을 하였다.

구덩이 한 개를 파면 십 원을 받는다. 일반 성인들이 온종일 일하면 통상 백 개 정도의 구덩이를 팔 수 있어 하루 일당이 천 원이 되는 셈이었다.

나는 절박한 심정이니 남들보다 더욱 열심히 일했던 것 같다. 친구가 백 개의 구덩이를 파는 동안 나는 백십 개 정도의 구덩이를 팠다.

지금 생각해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열심히 일했다. 어디서 그러한 힘이 나왔는지 알 수 없다. 굶주림에 대한 쓰라린 고통을 맛보면서 성장한 만큼 정신력이 강해졌던 것이리라. 강인한 정신력이 육체적 능력을 향상시킨 것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물론 육체적 고달픔이 항상 따라다니기도 했다.

고달픈 막노동 속에서 유일한 즐거움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이소룡이 나오는 영화를 가장 좋아해서 이소룡 영화는 몇 번씩이나 반복해서 보기도 했다.

당산대형, 맹룡과강, 용쟁호투, 사망유희(대역 배우가 촬영하여 마무리)라는 제목의 영화다. 지금도 그 시절의 추억을 되새기며 가끔 그 영화들을 본다.

그 영화들은 정의의 이름으로 나타난 주인공이 어려운 환경에서 열심히 일하는 약자들을 괴롭히는 거악을 단죄하는 권선징악적 요소를 많이 담고 있었는데 그래서 내가 대리만족을 느끼며 더 좋아했던 것은 아닐까?

어쨌든 중학교를 졸업하고 그렇게 2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열심히 일한 결과 배고픔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또 다른 고민을 하게 되었다. 지금 하는 일들이 당장의 끼니는 해결해 줄 수 있어도 평생 이런 일들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장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지금보다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는 직업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지만 어린 나이에 뾰족한 묘안을 찾기란 매우 어려웠다.

그러한 고민과 방황 속에서 생활하던 중 당시 제주시에서 약국을 운영하며 대규모로 양봉업을 하던 분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그 분이 양봉기술을 배워볼 생각이 없느냐고 의사 타진하였다.

양봉기술을 배울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기에 앞서 우선 양봉이 무엇인지, 내가 감당 할 수 있는 일인지, 지금 하고 있는 막노동 보다 훨씬 돈을 잘 벌 수 있는 일인지, 성인이 된 다음에 계속해도 다소 여유로운 생활이 가능한 일인지 의문이 생겼다.

며칠 후 그 분에게 그 의문점에 대하여 물어봤는데 그 분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양봉업은 전망이 매우 밝다.

다른 직업에 비해 수입도 많다. 특히 로열젤리 채취 기술을 습득하면 매우 전망이 밝다. 지금 제주에는 로열젤리 채취 기술 도입 초기라 전문가가 거의 없고 사실상 내가 유일한 전문가인데 모든 기술을 전수해줄 테니 양봉업을 배워 보라고 말이다.

그 분의 말씀이 사실인지 여부를 판단할 능력이 되지 아니하였던 나는 오로지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에 솔깃한 나머지 그 분을 따라다니며 양봉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양봉업은 3월부터 11월 초까지 때마다 피는 꽃을 쫓아다니며 꿀을 채취한다. 이른 봄에는 유채꽃, 5월 중하순에는 밀감꽃, 6~7월까지는 한라산 중턱까지 올라가 때죽나무 꽃 등에서 꿀을 얻는다.

이후 11월 초까지는 콩, 참깨, 메밀꽃이 피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일종의 방랑 생활을 해야 한다. 11월 중순 이후에는 월동 준비를 하고 이듬해 봄까지는 할 일이 없어진다.

밀감 꽃이 지고 나면 한라산 중턱으로 벌들을 옮겨 약 2개월간 때죽나무와 그 밖의 야생 꽃으로부터 꿀을 채취하는데 그때는 장마철과 태풍이 오는 시기와도 겹친다.

한라산 중턱에 혼자 천막을 치고 생활하다 장대비와 함께 강한 태풍이 불 때면 천막이 부서지지 않도록 밤새 비를 맞으면서 천막을 붙잡고 있어야 했고, 이때 어딘선가 방향도 모르는 곳에서 수시로 들려오는 짐승들의 울부짓는 소리와 근처에서 금방이라도 내게 달려들 듯한 강렬한 눈빛과 마주해야 하는 공포감과 외로움을 극복하는 것도 어린 나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오로지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한 집착과 의지가 있었기에 그러한 것들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는 무서움에 한없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때의 기억 때문에 천막(텐트치고 야영한다는 생각을 접어둔지 오래되었다. 지긋지긋한 천막생활, 잠시라도 다시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어쨌든 2년 간의 양봉업에 종사하면서 기술을 거의 습득한 덕분에 나름대로 양봉 전문가가 되었다.

중학교 졸업 이후 4년 간 생업에 종사함으로써 배고픔은 해결할 수 있어 좋았고 한때나마 행복했지만, 한편 교복 입고 학교 다니는 또래 고등학생들을 마주칠 때면 그들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부러움에서 그치지 않고 내 스스로와 그들을 대비하여 볼때면 초라함과 부끄러움이 밀려오기도 하였다. 길을 가다가학생들이 보이면 나도 모르게 골목길에 숨어 있다가 모두 지나간 후 한참이 지나서야 슬며시 나와 길을 가곤 했던 나의옛 모습..…

고등학교를 가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과 부끄러움으로 인한 반작용이 아니었을까? 공부와 학교라는 것에 대한 강렬한미련이 남아 있었던 것이라 생각해 본다.

청소년기의 막노동 생활, 꿀을 따러 산과 들을 찾아 헤매던양봉인 생활, 그렇게 4년이란 세월은 어느새 거센 강물에 휩쓸려가듯 훌쩍 지나가 버렸다.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뛰어든 경험들이 이후 내 인생의난관들을 극복하는 강인한 인내심과 의지의 원천이 될 것임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소중한 4년이었다.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