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께 드리는 매화 한송이' 자서전에서
허 변호사의 눈물과 집념 성공 인생 스토리
누구나 고향이 있다.
고향이란 사람들이 태어나 성장하는 동안 맺어지는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각자에게 고유한 정서를 만들어 주는 추억의 배경무대로써 그리움과 안타까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는 것은 곧 고향이라는 장소 또는 공간에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기에 어머니와 고향은 하나가 되는 것이고 고향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
그전에도 그랬지만 지난 5-60년대에 태어난 우리 제주 사람들은 가난이란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던히 노력을 했던 세대다. 지금 나이도 50대에서 60대인 이들이 과거를 돌이켜보며 당시 상황을 이야기 하라면 거의 먹는 이야기 뿐일 것이다.
모두가 먹는 것에 허덕이고 먹기 위해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출세'라는 목표가 강했고 부모들은 '가난'이란 것을 되물림을 하지 않기 위해 무척이나 고생했다.
가난했기에 당장 먹을 것을 구해야 하는 시절, '공부'한다는 것은 당시엔 사치일 뿐이었다.
그러나, 제주 사람들은 조상들의 유전자가 다른지 공부에 대한 집념도 강했다. 내가 못 배웠으니 자식만큼은 공부를 시켜줘야 한다는 생각, 그래서 처절하게 일하고 밤낮 가리지 않고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머니들은 일을 했다.
해가 다 질 무렵이야 뜨거운 물 삶을 땔감을 무겁게 지고 돌아오는 어머니 모습이 보이면 안심이나 하듯이 밖에 놀러 가기 일쑤였는데 어머니는 다시 묵묵하게 가족의 먹거리를 챙기며 저녁을 먹고 잠을 잔다.
자면서도 아픈 기색않고 얼마 후에 신음소리 들리면 그게 아픈 것인지 모르고 잠을 잤던 어릴 적 기억들, 어머니는 집안의 가정부처럼 혼자 모든 것을 처리했던 수퍼우먼이었던 것이다.
그 어머님께 매화 한송이를 드리는 한 사나이가 있었다. 바로 허용진, 1958년 9월생이다.
필자는 허용진 위원장에 대해 변호사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가 2015년에 지은 저서 '어머니께 드리는 매화 한송이'의 책에 관해 듣는 순간, "바로, 이것이다"라는 소리가 나왔다.
허용진은 서귀포시 호근동에서 5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마흔아홉, 어머니가 마흔넷에 태어난 허용진은 가난으로 인해 중학교는 부자애들만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담임선생님의 지지로 다행히 중학교에 입학한다.
이어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는 가지못하다 4년동안 막노동과 양봉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형님의 권유로 다시 고등학교 입학하는 순간을 맞는다.
친구들은 벌써 대학생인 상황에서 자신은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다닌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없었다면 힘들었을 것이다.
그의 굳은 의지로 인해 남주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입학생 300명 중에서 수석이다. 거꾸로.
4년 동안 공부 안한 탓이지만 이 결과는 그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한 큰 교훈이 되었다.
그는 어머니의 건강 악화로 인해 고향으로 돌아온 뒤 '어머니께 드리는 매화 한 송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매화'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실 매화는 만물이 추위에 떨고 있을 때 봄을 가장 먼저 알려준다. 이런 이유로 불의에 굴하지 않는 선비정신의 표상으로 삼아 왔다.
필자는 조상들이 과거급제하여 귀향해서 암행어사가 되어 돌아오면 매화 한송이를 들고 호령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절개로 살겠다는 의지로 자신도 곧은 절개와 고격과 기품의 상징으로 표현되는 매화를 어머니께 바친 것이라고 생각됐다.
허 변호사는 지난 출판기념회에서 "30여년에 걸친 타향살이를 접고 고향에 돌아온 지 3년이 흘러 고향 사람들에게 보다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해 법조인 생활, 고향의 추억 등 그동안 살아온 과정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다고 소박한 소감을 전했다.
앞으로 그가 어떻게 명문 고려대학교에 입학하고 변호사까지 하게 되었는지 칼럼을 통해 알 수 있겠다.
그의 불타는 집념으로 이뤄진 성공스토리를 통해 어릴 적 배고플 때보다 더 경제적, 멘탈 등 어려운 지금 이 시기에 젊은 청춘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편, 허 변호사는 서귀포시 서호동 출신으로 서호초등학교와 남주중·고교, 고려대학교를 졸업했으며 대학 3학년 때인 1985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인천·울산·광주·서울동부지검 검사와 대검찰청 검찰연구관, 조폐공사 파업유도 특검 특별수사관, 서울북부지검 부부장검사, 대구·의정부지검 부장검사 등을 역임했다. 의정부와 서울 등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다 2014년 서귀포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칼럼은 변호사 활동까지만 이어질 예정이다. 많은 응원과 성원바랍니다. [편집자 주]
책 머리에
'어머니께 드리는 매화 한송이'
서귀포시 호근동에서 5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나서 서호초등학교(22회)를 거쳐 남주중학교(4회)를 졸업한 후 4년 동안막노동, 미장 및 목공 보조원, 전파사 종업원, 양봉 등 생업활동을 하다가 '늦깎이'라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남주고등학교(23회)에 입학하였다.
다소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성실히 노력한 결과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여 재학 중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 수료 후 2회에 걸쳐 (부장)검사 및 변호사로 생활을 하며 30여 년 타향살이를 하였다.
그동안 남들처럼 치열한 생존경쟁을 하면서도 마음속에는항상 고향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들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러한 마음을 향수병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가난을 뚫고 치열한 삶의 경쟁에서 부모 형제의 생계를 걱정하며 생활하는 넉넉지 못한 사람들에게 향수란 자신의 삶에 대한 포근한 위안을 얻기 위한 애절한 그리움일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있어 향수란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다. 막내인 내게 모든 희망을 걸고 살아온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올 해 102세로 우리 마을 최고령이시다.
20여 년 전 광주지검 근무 시절에는 어머니를 약 한 달간 모시고 살았던 적이 있는데 고향을 떠나오셨기 때문인지 어머니께서는 광주 생활에 적응을 못하시고 노환이 악화되어다시 고향으로 내려오셨다. 물 맑고 공기 좋은 고향으로 돌아오자 다시금 정상적으로 기력을 회복하셨다.
나는 그때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연로하신 분들께는 고향의 깨끗한 물과 공기가 어떤 보약보다도 좋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한 이유로 어머니를 모실 수 없는 것을 늘 마음 아프게 생각하면서 생활해야 했다.
그러던 중인 2012년 어느 날 어머니께서 서귀포 의료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순간 고향을 떠난 지 벌써 30여 년이 흘렀다는 생각과 함께 어머니를 잊고 살아온 것 같은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모든 일을 제쳐두고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서귀포의료원으로 한 걸음에 달려가 어머니의 두 손을 꼭 잡았으나 어머니는 아무 말씀을 못하셨다. 그만큼 기력이 쇠약해져 위중한 상태셨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어머니께서 눈을 살며시 뜨고 내 얼굴을 바라보시더니 아무 말 없이 입가에 미소만 띄울 뿐이었다. 보고 싶던 막내를 본 안도감이라 생각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거동을 못하고 정상적인 대화도 어려울 만큼 이렇게 될 때까지 아무런 도움도 드리지 못한 회한의 눈물 말이다.
그날부터 전문 간병인의 도움을 받으면서 24시간 간호를 하기 시작했다. 약 일주일이 지나 어머니께서 기력을 상당히 회복하자 노인전문 요양병원으로 옮겼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내가 서울로 가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내가 보이지 않으면 식사도 하지 않으셨다.
그와 같이 막내아들과 더 이상 떨어져 생활 할 수 없다는 강한 의지를 내비치시는 어머니를 요양병원에 외롭게 두고 오로지 경제적 이해관계만을 따져 서울 생활을 계속하는 것은 차마 자식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변호사 생활을 포기하고서라도 여생 동안 어머니를 보살펴 드리겠다고 굳게 마음 먹었다.
그 이후 어머니를 간호하면서 1년 6개월을 사실상 실업자로 보내다가 앞으로 고향에 정착하여 살겠다는 결심을 굳히고서 변호사 사무실도 열었다.
어머니를 가까이서 보살피고 틈틈이 시간을 내 부족하나마 봉사활동도 하며 살아갈 수 있어서 좋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난 30여 년의 세월 동안 내 가슴속에 큰 응어리로 남아 있었던 각 순간의 모순들을 어머니 앞에서 모두 털어내고 싶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향사람들은 나를 그렇게만 바라보지 않는 것 같았다. 앞으로 영원토록 고향에서 살겠다는 내 생각과는 달리 상당수 사람들이 나를 잠시 서귀포에 머물다 서울로 올라갈 사람이라고 생각해 쉽게 마음을 열려고 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솔직히 나도 어느 순간부터 가끔 고향에 온 이방인의 느낌 또는 고향에서 앓는 향수병 같은 어색한 느낌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고향 사람들이 내가 고향에 정착할 것이라고 믿지 않는 한 그들과 같이 어울리며 즐거움도 슬픔도 함께 하기란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이 찾아와 떠날 줄 몰랐다.
그래서 내가 고향사람들에 손쉽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고 고민한 끝에 고향에서 태어나 성장하면서 겪었던 애환과 객지에서 생활하던 모습을 고향사람들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고향 사람들과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첩경이라는 결론을 내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누구나 자신의 글을 쓴다는 것은 참으로 쑥스럽고 내키지 않은 일이다. 공개를 전제로 하는 글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글을 쓴다는 생각을 감히 해보지도 못했고 글을 써야 할 필요성이나 동기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되어 오랫동안의 망설임과 고민을 거쳐 부끄러움을 뒤로 한 채 감히 없는 용기를 내서 내가 살아 온 모습을 글로써 정리하게 된 것이다.
그리 내세울 것 없는 세상살이에서 겪었던 선택의 순간들을 중심으로 엮은 이 글을 읽어주시는 것만으로도 매우 감사한 일입니다.
나아가 이 글을 읽는 동안 내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지금도 마음속에 그 모습이 온전히 자리 잡고 있으며 고향 사람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주신다면 저에게 그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이 늘 함께 하였기에 불의에 굴하지 않은 선비 정신을 지키면서 법조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아 책의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이 글을 쓰기까지 도움을 주고 격려해 주신 지인들이 없었다면 시작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 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