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CEO 송주온 칼럼](8)나는 99번 긍정한다 ... “경애 동무는 미제 같아요!"
[행복한 CEO 송주온 칼럼](8)나는 99번 긍정한다 ... “경애 동무는 미제 같아요!"
  • 현달환 국장
  • 승인 2023.07.30 04: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편집국장이 만난 시대의 경제인
행복한 CEO송주온 성공 이야기
끊임없이 긍정하고,또 긍정하라

학생때 김일성만 죽으면 북한이 망하고 곧 통일이 될 것이라고 교육을 받아 그렇게 믿고 살아 왔다.

그러나, 김일성이 죽고 그 아들 김정일 마저도 죽어도 북한은 여전히 전체주의 국가로 존재하고 있다. 아마 북한이 전세계에 가장 위대한 고구려의 후예로 고구려 기질이 있어서 그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가. 21세기가 된 현재 시점에서도 모든 개인의 생활조차 국가에 의해서 철저하게 감시, 통제, 억압이 이루어지는 지구상에 유일한 국가.

현재까지도 독재정치를 고수하는 중국, 베트남, 이란, 싱가포르 같은 국가들도 북한과는 비교해 보면 수준에서 차이가 난다.

이런 까닭에 북한을 한 번 여행다녀 온다는 것은 꿈이고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이 아닐까? 물론 과거 현대그룹에서 북한의 금강산 여행을 주도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수학여행하듯 다녀왔지만 북한이 일방적 폐쇄로 인해 실향민이나 국민들의 실망감, 그리고 주도했던 기업이나 관계자들이 큰 타격을 입었다.  

만약에 그 여행이 지금까지도 이어졌다면 북한은 지금처럼 어렵지 않게 수입을 얻고 경제, 문화 등 큰 혁신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문호개방을 통해 북한은 전 세계인들이 가장 가보고 싶은 곳으로 인생에 있어서 마지막 여행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뉴스N제주가 창간 5주년을 맞아 마련한 '행복한 CEO 송주온 칼럼'의 8번째 '나는 99번 긍정한다'의 핵심은 바로 '기회'이다.

1987년 스물다섯의 나이로 자본금 250만 원으로 시작한 비티앤아이(BT)를 2600억 원대의 항공권을 판매하는 코스닥 상장기업으로 성장시킨 송주온(경애) 대표, 25년간 국내 최고의 기업체 전문 여행사로 성장하기까지 여행업 한길로 매진하여 자연스럽게 한국의 여행 전문가 그룹의 오피니언 리더로 우뚝 섰다.

제14회 여성경제인의 날 모범여성기업인상 대통령상 표창, 제12회 여성경제인의 날 국세청장상, '2011 한국 경제를 움직이는 인물 40인(<포춘코리아> 주최)'에 선정되기도 했고 현재 어린이재단 이사를 겸하고 있는 송경애 대표는 건전한 기부 문화 환경을 조성하는 데도 앞장서고 있으며, 대통령 소속 사회통합위원회의 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미국에서 발간되는 <포브스>에서 발표한 '아시아 기부 영웅 48인' 중 한 명에 선정되어 진정한 기부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준다.

특히, 여성 CEO로는 처음으로 1억 원 이상 고액 기부자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기도 한 그녀는 나눔과 봉사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치면서 '행복한 CEO'란 별명에 걸맞게 주변에 행복바이러스를 전파하고 있다.

송주온(경애) 대표는 여행업이라는 틈새시장에서 성공하기까지 어려운 순간들이 많았지만, 그때마다 긍정적인 생각은 '내일은 반드시 나아질 거'야!'라는 희망을 주었고 위기를 견뎠다.

또한 '덕분에'라고 감사하고, '때문에'라고 남을 배려하면서 나눔과 봉사 활동을 통해 행복을 경영할 수 있었던 것도 긍정의 힘 덕분이라고 강조한다.

송주온(경애) 대표는 나눔과 봉사로 인해 그의 인생에 가장 큰 기회, 즉 '북한'이라는 곳을 방문했다.

(북한은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국호를 사용한다. 북한에서 자국의 국호를 줄여 말할 때에는 '조선', '공화국' 등을 사용한다. '조선'이라는 단어 외에 '공화국'이라는 단어도 많이 쓰이는데 주로 '우리 공화국'과 같이 쓰인다.

대한민국은 북한을 반국가단체 및 미승인국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또는 '조선'이라는 정식 국호를 사용하고 있지 않으며 '북한'이라고 통칭한다.

거의 모든 한국인들이 '북한'이라고 부르는 것이 습관화돼있기 때문에 배경지식이 없거나 무심한 사람은 북한 사람과 대화하면서도 '북한'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북한 사람들은 '북한'이라는 표현을 공적 석상에서는 모멸적으로 받아들인다.)

만약에 남과 북이 통일이 되어 자유롭게 된다면 송 대표는 어떤 사업으로 북한에 다가설지, 나눔의 선봉장에서 활약할 것 같다. 경험으로 본다면 이 분야에 많은 애착을 가질 것 같다. 북한은 미래의 기회 땅이다. 즉,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 믿는 것이 성공의 발판인 것이다.

송 대표의 마인드를 보면 긍정이란 마음을 가질 때 불행을 행복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무엇이 가장 행복한 인생을 만드는가?"
그 답이 이 안에 있다.
중꺾마(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행복한 성공을 위한 43개의 멘토링. 앞으로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이번에 게시되는 글은 '북한'이라는 기회의 땅에서 앞으로 내가 사업을 한다면 어떤 사업을 할 것이고 어떻게 할 것인지 한 번 되새겨보는 좋은 기회의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미리 구상하는 사람이 바로 실천할 수 있다. 세상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앞으로 매주 만나게 될 '행복한 CEO' 송주온(경애) 대표이사의 스토리를 통해 많은 분들이 기회 포착을 잘 한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송주온 대표의 긍정적인 생각을 바탕으로 모두다 성공자가 되길 빌면서 많은 필독과 응원바랍니다 [편집자 주]

송주온 BT&amp;I그룹 대표
송주온 BT&amp;I그룹 대표

8

“경애 동무는미제 같아요!"

세계 각지로 여행을 다닐 기회가 많았는데, 가장 인상 깊은 곳이 바로 북한의 평양이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2007년 10월 12일부터 3박 4일간의 일정으로 어린이재단 후원자 130명과 함께 북한에 다녀왔다. 당시 어린이재단에서 북한에 '어린이종합식료공장'을 준공하면서 방문하게 되었다. 낯설고 특별한 북한 여행으로 북한의 실상을 생생히 알게되었고, 내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북한 방문을 위해 이용했던 고려항공 여객기 Air Koryo는 김포공항을 출발해 서해를 경유, 평양의 순안 공항으로 바로 날아간 최초의 북한 항공기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항공기의 편명은 'TU154편'이다.

북한 방문을 앞두고 떨리는 마음으로 김포공항에 아침 일찍 도착했다. 함께 방문하는 사람들과 출국수속을 하고, 김포공항을 아침 10시 50분에 출발해 평양 순안공항에 12시경쯤 도착했다.

한 시간 남짓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 휴전선을 넘어 직선거리로 가면 더 가깝겠지만 서해를 경유하는 항로를 이용했다. 심리적으로 느끼는 서울과 평양의 거리는 너무나 멀었지만, 실제로 날아간 그곳은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였다.

순안공항에서 느끼는 평양의 공기는 서울보다 더 차가웠다. 지금도 순안공항에서 고 김석산 어린이재단 회장님과 찍은 기념사진을 보면 두근거렸던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공항에서 입국수속을 마친 후 북한 측이 마련해 준 버스를 타고 바로 이동했다.

우리가 방문할 곳은 어린이재단에서 지원 · 운영하는 '어린이종합식료공장'으로, 공장시설을 견학하기로 되어 있었다. 평양시 만경대구역 금성동에 위치한 4층 건물로, 총 면적 504m² 규모의 어린이종합식료공장에서는 제과 제빵 기술자들을 포함해 50여 명의 직원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하루 최대 1만 개씩 연간 300만 개의 빵을 생산하는 것이 가능하며, 2~3층에는 각각 과자와 사탕을 만들 수 있는 시설을 구비해 놓고 있다고 했다.

2005년에 처음으로 빵 생산이 시작되었고, 2006년에는 사탕, 2007년에는 과자 생산을 하며 시설을 늘려 나갔다고 한다. 사탕제조 시설을 보니 우리가 60~70년대에 먹던 왕사탕 같은 것을 수작업으로 만들어 내고 있었다.

담당자의 말로는 재료가 충분치 못해 많지 않은 수량이지만 정성이 담긴 제품들을 만들어 낸다고 했다.

빵 생산 2년 만에 열린 뒤늦은 준공식은 참석한 사람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처음에 기계를 보냈지만 기술진이 사스 때문에 방문을 못해 방치되었다고 한다.

설치된 기계들이 녹이 슬어 쓸 수 없었고,다시 녹을 제거하고 기름칠을 새로 하는 등 생산을 시작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고 한다. 가동 이후 평양 시내 교육시설에 있는 1만여 명의 어린이들에게 빵이 공급되었다.

아이들의 영양과 급식을 위해 통일빵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네다. 아울러 어린이종합식료공장이 정상으로 가동될 수 있도록 기계와 제빵 원료를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남조선의 후원자들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네다."

하얀 가운을 입고 있던 담당자의 인사말을 듣고 공장 안으로 들어가니 각종 붉은 글씨로 만들어진 선동구호가 어지럽게 공장 안 여기저기를 장식하고 있었다.

'어린이종합식료공장'은 굶주린 북한 어린이들에게 하루에 두 번 먹을 수 있는 빵을 만드는 제빵시설이다. 이곳은 어린이재단에서 맡고 있는 '통일빵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남측이 북한 현지에 빵을 굽기 위한 제빵 기계와 기술을 지원하고, 밀가루, 계란,우유 등의 재료를 직접 공급하는 형태로 남쪽의 지원에 의지하고 있다. 이것은 빵이나 재료들이 다른 곳에 사용되는 것을 막는 효과가 있다.

이곳에서는 우리 빵과는 달리 빵 속에 팥 없이 구워내고 있었다. 방문한 우리를 위해 시식할 기회를 주었는데, 방금 기계에서 라인을 따라나온 노르스름하게 구워진 빵을 너무나 맛있게 먹었다. 지금도 그 때의 사진을 보면 맛있게 먹었던 빵과 함께 가슴 아픈 어린이들의 모습이 기억난다.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빵을 공급받는 '평양 육아원'이었다.

평양에서 제일 큰 단 하나뿐인 평양육아원은 부모가 없거나 장기간위탁된 250여 명의 아이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는 곳으로 그나마 북한 사회에서 선택된 아이들이 들어오는 곳이다.

벽에 쓰여 있는 '세상에 부럼 없어라!' 라는구호가 무색하게 언뜻 보아도 의류와 식품, 의약품, 어린이를 위한 영양제 등이 부족해 보였다.

어린아이들은 담요를 덮고 일렬로 나란히 누워 눈만 뜨고 있었다. 북한에는 유난히 쌍둥이, 세쌍둥이, 네쌍둥이들이 많은데,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영양이 부족하거나 엄마의 몸에 문제가 있으면 호르몬 균형이 깨지면서 쌍둥이들을 임신하게 된다고 했다.

워낙 아이들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아이들을 돌보면서 즐겁기도 했지만 안쓰러워 눈물이 나기도 해서 웃다가 울다가 정신이 없었다. 함께 방문한 여성들도 엄마와 할머니의 마음을 가졌기에 모두 가슴들이 먹먹해진 것 같았다.

우리의 모습을 본 북한의 안내원 동무는 동정심을 표하거나 불쌍하다는 감정을 표현하지 말라고 신신당부 했다.

"위대하신 어버이수령님 감사합니다."

무표정한 얼굴을 한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었는데 그냥 먹지 않고 눈치를 보더니 바로 나오는 한마디였다.

많아야 두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아이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 놀란 쪽은 오히려 나였다. 한창 사랑받고 어리광을 피울 어린아이들 입에서 나온 그 말에 나는 할 말을 잃고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여기서 우시면 안 됩니다. 울음을 거두십시오. 동무"

당시 우리를 데리고 다니던 안내원 동지가 그렇게 말했다. 지금도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있을지 궁금해서 북한에 대한 뉴스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찌릿찌릿하다. 직접 눈으로 보고 온 것이기에 더욱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행복한 CEO 송경애 대표
행복한 CEO 송경애 대표

다음으로 방문했던 평양 제2인민병원은 겉모습만이 아니라 내부시설도 매우 열악해 보였다.

이곳에서는 수술실을 사지전투실'이라 부르는데 기본적인 의료도구들만 있었다. 천장에는 수술실에서 쓰는 무영 등이 있고 수술을 위한 침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우리가 병원에서 흔히 보는 소독기나 기타 의료장비들을 볼 수 없었다. 언뜻 보기에도 이곳에서 수술한 지도 오래된 듯 수술실은 방치된 느낌이었다. 너무나 끔찍한 일은 의약품이 부족해 일부 환자들은 마취약 없이 수술한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죽음 사이에서 전투를 했을 환자를 떠올리니 고개가 절로 흔들어졌다.

내게 다가온 북한은 황망한 회색빛 도시로, 사람도 별로 없고 자동차도 없는 1960년대 도시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북한에는 전봇대가 없다고 한다. 우리처럼 미관상 지중화 공사를 한 것이 아니라 전기가 부족해서 그렇다고 한다. 북한의 호텔은 전기가 들어오기는 하지만 너무 어두워 글씨를 읽을 수가 없을 정도다. 불을 켜도 방이 컴컴해서 책 읽는 것을 아예 포기해야 했다.

호텔이라고 하지만 더운물이 나왔다가 끊겼다가 해서 머리를 감는데 몇 번씩 '앗 차가워'를 연발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최고급 호텔하고는 너무나 다른 시설에 충격을 받았다.

“경애 동무는 인민 배우가 되지 왜 안 그러셨습니까? 경애 동무는 잘생겼으니 인민배우를 하시라요."

북한의 안내원 동무는 나에게 유난히 많은 관심을 가지며 친근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평양에서 돌아오는 날 '심장 속에 남는 사람' 이라는 북한 가요를 적은 쪽지를 나에게 주었다.

인생의 길에 상봉과 이별/ 그 얼마나 많으랴! 헤어진대도 헤어진대도/ 심장 속에 남는 이 있네 / 아- 그런 사람 나는 못 잊어 // 오랜 세월을 같이 있어도/ 기억 속에 없는 이 있고/ 잠깐 만나도 잠깐 만나도 심장 속에 남는 이 있네 / 아- 그런 사람 나는 귀중해

한번 만나도 심장 속에 남는 사람이 있다는 가사가 의미심장했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그 노래가 북한에서 상당히 유명하다는 것을 알았다.(정설향이 부른 애절한 그 노래를 꼭 들어봤으면 한다.)

가사로만 봐서는 연애편지를 받은 기분이었다. 서로 체제가 다른 곳에서 살지만 한동포라는 생각 때문인지 유난히 정 표현을 잘하는 안내원이었다.

"경애 동무는 미제 같아요. 다리도 길고 손발도 길어서 미제 같아요"

진짜 롤렉스시계를 차고 조지 알마니 수트를 입은 호남형인 안내원은 줄곧 말을 걸어왔다. 나 역시 궁금한 게 있어 질문을 했다.

"수트는 진짜(브랜드)예요?"

"우리는 가짜 없습네다. 수령님께서 주신 것이니 말입네다."

그러나 같은 옷을 3일 내내 입고 우리를 안내하던 그는 단벌신사였으며 말투나 행동으로 보아 북한에서도 잘나가는 인물 같았다.

북한을 돕자고 방문한 평양에서 여러모로 작은 해프닝이 있었다. 묘향산 방문 길에 휴게소가 없는 산속 풀숲에서 본의 아니게 노상방뇨를 해야 했던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그것도 안내원 동무의 주도 하에 말이다.

지금은 북한 돕기가 어려운 상황이어서 안타깝기 짝이 없다. 기회가 된다면 보육원에 있던 아이들을 보러 다시 가고 싶다. 지금은 이미 자라서 그때의 아이들이 그 자리에 없고 다른 아이들이 있겠지만, 그 아이들을 다시 품에 안아주고 싶다. 그리고 그때 먹었던 우리가 지원하는 통일빵을 다시 아이들에게 먹이고 싶다.

그때 감격스레 맛보았던 담백하고 따뜻한 빵의 온기가 아직도 손에 남아 있는 듯하다.

안내원 동무가 따로 챙겨준 빵, 다른 모든 사람들이 빤히 보고 있는데 내 손에 가져다 준 빵, 작지만 따듯한 빵 하나가 북한과 나를 연결시켜 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슬프지만 기억에 남았던 북한 방문이다. 이제 짙은 추억의 부스러기로 남아 많은 생각과 고민을 남겨 주었다. 나눔의 통일빵을 심장에 새기며 아이들을 만날 그날을 기대해 본다.[다음에 계속]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