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비판적 4‧3 연구 2 속삭이는 내러티브
[신간] 비판적 4‧3 연구 2 속삭이는 내러티브
  • 현달환 기자
  • 승인 2024.03.23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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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만 엮음/ 장은애, 허민석, 송혜림, 고성만, 김상애 공저/
140*195/ 344쪽/ 18,000원/ 979-11-6867-157-7 (03300)/ 한그루/ 2024. 3. 15.
남성, 가부장 중심에서 탈구된 목소리들
비판적 4‧3 연구가 포착한 음각陰刻의 서사敍事
[신간] 비판적 4‧3 연구 2 속삭이는 내러티브

지난해(2023년), “완전한 해결로 환유되는 현실과의 불화를 꾀하고, 비판적 시각과 목소리를 확보하기 위한 시도”로 시작한 ‘비판적 4‧3 연구’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이다.

김석범의 대하소설 『화산도』의 여성주의적 독해를 시도한 장은애, 4‧3 다큐멘터리 영상에서 재일제주인 여성의 재현을 살핀 허민석, 여성의 4‧3 증언에서의 침묵을 통해 그 공백을 읽어나가는 송혜림, ‘친족지의 정치’로서 학살 이후 친족 집단 기록의 양상을 살핀 고성만, 부계 혈통 중심주의에서 탈구됨으로써 ‘가족관계 불일치’를 경험하는 이중 희생자로서의 ‘딸’들의 자리를 묻는 김상애 등 이번에는 문학과 영상, 증언과 기록, 여성과 가족‧친족에 관한 다섯 편의 글을 모았다. “그 가운데서도 여성을 행위자로 하는 학살 이후의 세계가 각 장마다 등장하다는 점에서, ‘여성’은 이번 『비판적 4‧3 연구』의 공통된 관심 주제”라 할 수 있다.

책을 엮은 고성만 교수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리고, 때로는 그러한 목소리로 인해 더 들리지 않게 되고, 여러 다양한 방식을 도입하여 존재를 발견하고 전파를 모색하는 때이지만, 필자들의 관심은 단순한 수집과 전시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내셔널리즘, 남성 중심주의와 가부장성, 신고주의와 실증주의, 인정투쟁,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같은 ‘청산’과 ‘해결’을 지탱해온 논리와 거기에 번롱되는 그녀들의 역사와 현실, 연대와 저항 가능성에 대한 비평적 분석을 추구한다. 그 점에서 필자들의 문제의식은 ‘청산’, ‘해결’ 담론과 긴장을 일으키며 팽팽하게 맞선다.”고 전한다.

책의 말미에 필자 소개와 더불어 에필로그를 덧붙임으로써 수록된 글들이 쓰인 배경과 의도를 정리하고 독자들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가고자 했다. 무크지 형식으로 기획된 “비판적 4‧3 연구”는 앞으로도 날카로운 비판과 그에 기반한 공고한 연대를 지향하며, 젊은 연구의 장을 마련하면서 새로운 4‧3 연구의 길을 열어 나갈 계획이다.

■ 저자 소개

장은애(국민대학교 한국어문학부 강사)
허민석(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송혜림(연세대학교 비교문학협동과정 박사과정)
고성만(제주대학교 사회학과 부교수)
김상애(제주대학교 사회학과 박사과정)

■ 목차

15 『화산도』의 여성주의적 독해: 4·3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장은애)
85 희생자의 얼굴 너머: 4·3 다큐멘터리 영상과 재일제주인 여성(허민석)
137 증언-공백으로 읽기: 여성의 기억이 말해질 때의 침묵에 대하여(송혜림)
189 학살 이후의 친족지(親族誌): 친족지(親族知)의 생성과 실천(고성만)
235 아버지의 기록, 딸의 기억: 4·3과 딸의 가족사(김상애)
286 참고문헌/ 298 주석/ 328 에필로그/ 340 필자 소개

■ 머리글

두 번째, 비판적 4·3 연구를 열어가며

4·3 특별법이 제정 21년 만에 전부 개정되면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실현에 초점을 맞춘 혁신적인 조항이 신설, 보강됐다. 그 가운데서도 보상과 재심, 가족관계 관련 조항은 매년 보완 입법을 통해 ‘완전한 해결’, ‘정의로운 해결’ 담론을 강화하는 데 핵심적으로 역할하고 있다. ‘해결’ 운운하는 시대가 성큼 다가오면서 ‘희생자·유족’ 중심주의에 입각한 과제가 최우선으로 선별되고 발 빠르게 착수되는 등 머지않아 ‘해결’ 선포식 같은 대형 이벤트를 상상하는 일도 불가능하지 않게 됐다.

‘해결’ 가능성은 어떠한 조건에서 타진되며, 어떠한 상태에 이르렀을 때 공표되는 것일까. 법률에 명시된 목적, 세목화된 의제가 달성됐을 때 이루어지는 것일까. ‘해결’의 시간적, 공간적 범위는 어떻게 설정되며 그 주체와 대상은 누구인가. 그러할 때 논의의 장에 참여할 자격은 누구에게 어떻게 부여되는가. 그리고 그러한 판단이나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합의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한편, ‘해결’ 이후의 사회에서는 어떠한 질문이 가능 혹은 불가능, 필요 혹은 불필요해질까. 어떠한 보이지 않는, 들리지 않는 상황이 연장되거나 새롭게 추가될까. ‘해결’ 공표 이후에는 필요 없어질 질문, 혹은 그때까지 더 집요하게 캐물어야 할 질문은 무엇일까. 그러할 때 4·3 연구는 ‘해결’의 산물들을 어떻게 비평적으로 분석하고, 생존자·유족의 생활세계 가까이서 어떠한 자세로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기록해야 할까.

4·3 연구의 질문이 동시대성을 갖추되 당대적 요청에 비판적으로 응답해야 한다는 지적은 더 이상 새롭지 않다. 4·3 연구의 추이와 성과를 점검하고 방향성을 가늠하는 근래의 연구들에서도 새로운 과제를 탐색하기 위한 시도로서 4·3의 현재성에 주목한다.

그 가운데서도 박찬식은 “당시의 상황을 실증적으로 확인하는 역사주의적 접근 방식의 유효성”을 지적하면서도 “4·3이 미친 정치·사회·경제·문화적 영향에 대한 분석도 제주 현대사를 연구하는 데 필수적”이며 이는 “문화사적 시각과 해석, 감성 체계의 도입을 통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허호준 역시 지역적 틀을 뛰어넘어 보편성을 확보하기 위한 시도로서 국내적, 국제적 차원으로의 연구 영역 확대가 필요하며, 집단 기억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분석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제주 사람들에게 가해졌던 이중적 억압구조와 그에 대한 주체적 저항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한국 사회에 뿌리 박힌, 심지어 소장 학자들의 4·3 연구에도 적용되는 레드컴플렉스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양정심의 통찰이나, 국가 주도로 쓰인 제주 개발사에서 4·3의 폭력성을 읽어 낸 김동현이 4·3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는 저항의 기억을 소거시키는 로컬리티의 폭력적 재편성을 직시해야 한다는 분석 모두 당대의 소임과 책무에 조응하려는 시대정신과 연구 질문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연구자들의 견해처럼, 4·3 연구에서 필요한 질문은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혹은 예견되는 현상과 관계를 맺고 문제를 직시할 때 더 탄력적으로 모색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4·3 연구 역시 자기 주제에 대한 탐색적 질문을 통해 연구 세계를 독창적으로 일구어 나가면서도 동시에, 현대 사회의 다양한 변화를 시야에 두며, 특히 ‘해결’ 전야 곳곳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비판적으로 개입하고 분석하려는 시도를 병행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흩어진 기록을 모아 전사(全史)를 재구성하는 작업에서 그가 가장 역점을 두었던 것은 ‘광범위한 재일 제주 동포로부터 들은 증언에 따라 상황을 충실히 밝히는’ 일이었다. 일본 전역으로 사라져 버린 사람들을 찾아 체험담을 청해 듣고 자료를 수소문하는 일은 사람과 정보의 이동이 지금처럼 빈번하지 않았던 당시에 그가 구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연구 방법이었다. 밀항선에 의지해 일본으로 잠입해 들어온,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처지의 인터뷰이들은 그의 4·3 연구가 상상력과 실증력을 갖추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던 것이다. 파편화된 기억을 찾아 그는 무엇을 경유하여 어디서 어떻게 사람들을 만나 4·3과 그 이후의 제주를 추체험했을까. 무엇을 듣고, 무엇을 듣지 못한 채 4·3을 재구성했을까.

1947년 3·1 사건에 연루했다는 혐의로 수배선상에 오르자, 관 속에 숨어 도피했던 그가 오사카에 안착할 때까지의 여정, 그곳에서 맞닥뜨린 위기 상황과 소소한 실패들, 그에 맞선 궁리와 분투 노력이 책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밀항해 온 제주 사람들과 자신의 처지를 겹쳐 읽어 냄으로써 비로소 일단락 맺을 수 있게 된 그의 4·3 연구를 통해 우리는 그 바탕에 재일성(在日性)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4·3 연구의 토대에는 이처럼 고도성장기 일본 사회 속 제주 출신 밀항자에 대한 복합적인 이해와 배려가 바탕에 깔려 있고, 초창기 4·3 연구를 파악하는 데에도 그러한 맥락과 정황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필자들의 연구는, 4·3 특별법에 토대를 둔 과거사 해결이 ‘역사의 도도한 흐름’으로 정착되는 시기에 시작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죽은 자들은 말이 없고 산 자들은 더 말이 없는” 시대를 지나 많은 말들이 사방에서 분출하는 시대. 경험, 관계를 터부시하는 시선과 억압을 피해 말을 숨기거나 비트는 시대가 아닌, 당당한 말들이 넘쳐나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러한 환경에서 필자들은, “연구가 나에게, 4·3에 어떤 의미인가?”와 같은 자기 반영적 질문을 구체화하고 4·3(의 유산)과 관계 맺는 방식을 익히며 각자의 자리에서 고뇌와 성찰을 거쳐왔다. 최근에는 ‘청산’과 ‘해결’이 임박했다는 신호가 곳곳에서 감지되면서 법과 제도, 정책의 변화, 그에 따른 사람들의 태도와 감정을 냉철히 관찰하고 분석해야 할 문제의식도 시야에 넣게 됐다.

이번 『비판적 4·3 연구』가 문학과 영상, 증언과 기록, 여성과 가족·친족에 관한 글로 엮이게 된 것은 포스트 ‘희생자’ 시대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그 자체로 시대상을 반영하는 현상일지 모른다. 그 가운데서도 여성을 행위자로 하는 학살 이후의 세계가 각 장마다 등장한다는 점에서, ‘여성’은 이번 『비판적 4·3 연구』의 공통된 관심 주제라 할 수 있다.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리고, 때로는 그러한 목소리로 인해 더 들리지 않게 되고, 여러 다양한 방식을 도입하여 존재를 발견하고 전파를 모색하는 때이지만, 필자들의 관심은 단순한 수집과 전시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내셔널리즘, 남성 중심주의와 가부장성, 신고주의와 실증주의, 인정투쟁,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같은 ‘청산’과 ‘해결’을 지탱해온 논리와 거기에 번롱되는 그녀들의 역사와 현실, 연대와 저항 가능성에 대한 비평적 분석을 추구한다. 그 점에서 필자들의 문제의식은 ‘청산’, ‘해결’ 담론과 긴장을 일으키며 팽팽하게 맞선다.

지난해 『비판적 4·3 연구』 서문에서 밝힌 “알량한 자존심과 능력 부족으로 변변찮은 고료조차 마련하지 못하는 상황”은 올해도 개선되지 못했다. 한편 다른 마음으로는, 공적 자금의 지원 없이는 운동도 연구도 채택되지 못하고, 그래서 발견도 되지 못한 채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현실에서 보란 듯이 책을 엮어 독자들과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것은 필자들의 헌신 없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필자들은 두 번째 『비판적 4·3 연구』의 방향성을 구체화하기 위해 폭염이 한창이던 2023년 7월에 모여 원고를 같이 읽고 수정 방향을 구상했으며 독자들에게 좀 더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해 고쳐쓰기를 반복했다. 그 결과 초출(初出)에서 짧게는 2천 자, 많게는 2만 자를 추가로 집필했고, ‘에필로그’와 ‘필자 소개’도 새롭게 덧붙일 수 있었다.

장은애 선생님, 허민석 선생님, 송혜림 선생님, 김상애 선생님께는 더 세련된 기획과 안정감 있는 환경으로 귀한 문장을 엮지 못해 송구한 마음이 크다. 4·3 연구하는 설렘을 새로 깨닫게 해준 진지한 벗들에게 글로는 다 담지 못하는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책이 대중의 관심과 기호에서 멀어져 가는 세태 속에 두 해 연속 『비판적 4·3 연구』가 출판될 수 있었던 것은 한그루의 결단 없이 불가능한 일이었음을 밝힌다. 해가 갈수록 쌓여 가는 빚을 어찌 갚을지, 갚을 수는 있는 것인지 난감해할 때마다 되레 “앞으로도 10권 이상은 더 내야 한다.”는 격려를 해주셨다. 시류에 과감히 역행하는 한그루가 울창한 숲을 이루기까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 여정에 함께하고 싶다. 김영훈 대표님, 김지희 편집장님을 비롯한 한그루 구성원들에게 필자들을 대신하여 깊이 감사드린다.

■ 책 속에서

『화산도』를 경유하여 4·3과 여성에 관해 이야기할 때 새롭게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화산도』는 기본적으로 남성인 이방근을 중심으로 직조된 서사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여성 인물에 주목함으로써 남성 중심적 시각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4·3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통찰해 내기도 하는데, 그러한 인식은 여성 인물의 불안정한 실존적 자리로부터 출현한다.

남성만이 인식과 발화의 정통성을 가질 때 여성은 예외적이고 ‘비정상’적인 자리에서 4·3을 조망한다. 여성은 자신이 처한 불안정하고 취약한 실존적 지위로 인해 남성을 중심으로 직조된 4·3 인식에 위화감을 느낀다. 이 경우 여성의 위치는 4·3에 대하여 기존과는 다른 방식의 탐색과 사유를 산출하는 조건이 된다. 그뿐만 아니라 여성은 현실과 연결된 유·무형의 자원으로부터 소외된 탓에 기존 질서에서 벗어난, 이질적인 방식으로 현실을 재구성한다. 따라서 여성의 자리에서 송출되는 목소리는 주류 역사의 이해(理解)와 충돌하고 어긋나며, 기존의 언어로는 번역할 수 없는 형태로 굴절되면서 낯선 언어로 재구성되고 채워진다.

여성의 현실은 안정된 질서를 교란하고 위협하면서 4·3의 새로운 면모를 드러낸다. 따라서 여성주의적 시각을 통해 4·3을 재인식하려는 시도는 여성이라는 존재의 실존적 취약성 때문에 대단히 대범하고 전위적인 기획이 된다. (장은애, 35-36쪽)

4·3 재현에서 되풀이되는 ‘여성=희생자’ 표상은 희생자에 대한 인정과 보상을 중심으로 축적되고 있는 한국의 과거사 담론의 산물이다. 이런 표상의 매개로 ‘4·3은 무고한 희생의 역사’라는 제도화된 기억이 재생산되는 한편, 국민국가 성립의 정당성을 되묻는 내전 및 항쟁으로서 4·3의 기억은 억압된다. 상기한 문제의식 위에서, 지금까지 이 글은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와 다큐멘터리 영화를 주요 분석 대상으로 삼아 4·3의 문화적 기억에서 재일제주인 여성이 어떻게 표상되고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했다. 재일제주인 여성에 주목한 이유는 디아스포라 여성 서사가 각광을 받고 있는 동시대 학술장 및 문화계의 동향을 고려함과 동시에, 국민국가의 남성 중심적인 시선에 의해 회수되지 않는 4·3의 기억법을 모색하기 위함이었다. 궁극적으로 이 글에서는 재일제주인 여성의 표상을 경유하여 국민국가라는 중심을 탈구하는 공간론적 관점을 도입할 때, 희생자 서사로 일원화된 4·3의 기억을 갱신할 수 있음을 주장하고자 했다. (허민석, 129쪽)

‘말하지 않음’은 어떤 이가 하느냐에 따라 그 ‘효과’가 달라진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권위나 지위를 가진 사회적 ‘주류’에 속하는 이들의 침묵은 더 명시적으로 그 의미와 감정을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이 대부분 사회에서 통용되는 지배적 관념을 생산하고 소유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반응은 일반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구태여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맥락 속에서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그러나 주변화된 존재, ‘소수자’의 경우 침묵은 완벽한 공백에 가깝다. 맥락을 유추할 수 있는 설명이 보태어지지 않는 이상, 통상적인 이해 범주에 빗겨난 그들의 경험과 감정을 가늠하기 어렵다. 언어 그 자체도 지배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산물일 뿐, 힘없는 자들의 것이 아니었다. 여성, 아동, 퀴어, 장애 등 중층적인 차별과 폄훼 아래 놓인 고유한 경험과 감정을 서술하기에 언어라는 도구는 늘 불충분할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이들의 증언에서 돌출되는 모순, 비정합성, 감정의 과잉 등은 권력에 의해 전유될 위험 또한 크다. 그러므로 이 침묵이 가닿을 수 있는 가정적 진실의 층위를 탐구하는 것이 이들의 증언을 배반하지 않으려는 노력 중 하나일 것이다. (송혜림, 169-1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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