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시인동네 시인선 211 이정은 시집, '평범한 세계' 
[신간]시인동네 시인선 211 이정은 시집, '평범한 세계' 
  • 현달환 기자
  • 승인 2023.08.26 23: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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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평범하지 않은 세계 이정은 시집, 『평범한 세계』(시인동네, 2023)
시인 이정은
시인 이정은

■ 책 소개

여기, 새로운 시인의 출현을 알리는 시집을 소개한다.

오랫동안 교직에 몸담고 있으며 시를 탐색하다가 2022년 《뉴스N제주》 신춘문예 당선으로 가능성을 확인한 이정은 시인이 첫 시집 『평범한 세계』를 출간했다.

‘평범한 세계’라고 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이정은의 세계야말로 시인에게는 일상적인, 그러나 끔찍한 아브젝트들의 집합이다. 이 시집의 모티프들은 로맨스보다는 끔찍한 스릴러의 배열원칙을 따른다.

그것은 이 시집의 목표가 주체 안에 주체의 일부로 들어와 고착된 아브젝트들을 잘라내고 버리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 시인의 말

아무도

나비의 유년에 대해 묻지 않는다

2023년 8월

이정은

■ 해설 엿보기

내 안엔 내가 아니어서, 내가 아니길 원해서 내가 버리고 싶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내 안엔 배설물, 썩은 음식, 죽은 동물, 절단된 신체처럼 더럽고 혐오스럽고 불결하며 심지어 무섭기까지 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것들은 내 안에 있지만 온전히 내가 아니므로 주체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온전히 내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니므로 대상도 아니다. 그러나 온전한 나-주체를 만들기 위해 나는 그것들을 떼어내어 버리고 싶고, 죽이고 싶고, 없애버리고 싶다. 그것들과의 완전한 단절을 통해서만 비로소 나-주체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주체가 주체성을 형성하기 위해 쫓아내고 버리고 밀어내야 하는, 이런 혐오스러운 존재를 줄리아 크리스테바(J. Kristeva)는 아브젝트(the abject)라 부르고, 그 떼어내 버리는 행위를 아브젝시옹(abjection)이라 한다. 이런 점에서 이 시집은 아브젝시옹의 시학이라 불릴 만한 것으로 가득하다.

깊도록 걸어도
발등으로 번지는 물결무늬
바람 소리에 쓰러져 누워
그물망에 스스로 묶이는
너는 바다가 아니라
너는 바람이 아니라
흰머리 풀어헤친 흐느낌
아기 발바닥 사이로 스며드는 소금 울음
가늘게 떠도는 습자지처럼
은박 입힌 오랏줄
걸어 나올 수 없는
푸른 얼룩

―「너는 바람이 아니라」 전문

위의 작품은 이 시집에 수록된 첫 번째 시이다. 이 작품은 마치 앞으로 전개될 사건들을 암시하는 영화의 첫 장면 같다. 시집 속의 “너”는 바다도 바람도 아니고, 바닷속에 “흰머리 풀어헤친 흐느낌”처럼, “은박 입힌 오랏줄”에 묶인 채 “걸어 나올 수 없는/푸른 얼룩”이다.

이 시집의 카메라는 물속으로 들어가 밧줄에 꽁꽁 묶인 채 물결에 흔들리는 어떤 시체를 훑는다. 그것은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울지만, 죽었으므로 물 밖으로 나올 수 없다. 이 갑갑하고 숨 막히며 충격적일 정도로 그로테스크한 장면은 이 시집 전체의 분위기를 압축한다.

■ 책 속에서

생식기 닮은 펜으로 이력서를 쓴다
샤워하다가 서서 배설하는 미묘함이랄까
세면대에 담배꽁초 비벼 끄다가
왜 남극에 사는 펭귄이 아프리카에 살지
아프리카 펭귄은 그 이유를 툭
장래 희망을 몽정하는 남자라고 쓴 이력서 때문
그림자가 달 귀퉁이에 매달리고 잔영들은 춤을 추니
깔깔대고 웃다가 제 머리에 빨간 멍울이 생겼다고
서슴지 않고 뱉는다
희미해지는 눈으로 서성거리던 내가
환청으로 꽉 찬 화장실을 잠그려는 손
그 손을 흔들었다
작은 환풍기 너머로 먼지가 날리는 걸 보았거든
여기 헐렁한 도시에는 푸른 버스가 지나가
노란 신호등 깜박, 아프리카 펭귄이 내렸다
욕조 바닥에서 흥건히 젖은 이력서
흘러내려 뜨끈하게

―「아프리카 펭귄 애인처럼」 전문

석고상 안고. 뒤따라오고 있다.
뒷걸음친다. 그림자 밟는다. 석관 속. 표류하는/그는. 떨어지는 국화꽃 향기를. 발가락 사이 휘어든다. 모래알. 차오른다. 바닷물. 언젠가/누워 유영한다.
발견//우연하게 꿰뚫기

마론 인형. 쇄골 도드라진 아이. 두꺼비. 연탄구멍. 코피. 괘종시계. 천장. 샤프심. 비닐대나무우산. 식칼. 쥐. 화상. 상봉터미널. 눈깔사탕. 제사. 수면제 사십 알.

약국은 4분의 1미터마다 존재한다. 손바닥에/동그라미 치고 걸음 수를 확인한다.

사이사이 걸음 수만큼 실어증을 넓혀간다.
졸피뎀을 발음할 수 없다./까지
마지막//의혹. 접혀 있다.

통.
통.

발자국이 가젤 마침표 같다///

―「가젤처럼 뛰었다」 전문

약재 냄새가 허공을 떠도는 날은
뒤꿈치를 붕대로 감고 싶었다

저편과 이편은 상처의 고리일까?

다친 문이 열렸다
양복 입은 마네킹이 걸어 나온다

방 속에 맺힌 둥근 침대는
문지방에 걸터앉아 웃는다

암컷을 낳았다
촛불이 켜져 있지 않은 케이크처럼

―「평범한 세계」 전문

시집 '평범한 세계'
시집 '평범한 세계'

옆에 앉아 같이 달빛 보실래요
빈 의자 펼쳐 놓으니 비가 살랑 내리려고 하네요
의자를 접지 않을래요 빗방울 떨어진 구석마다 색이 짙어진 멍든 멍울도 살갑게 바라볼래요
먹구름이 지나가고 바람이 불고 하늘이 보이면 의자는 설레겠죠
그러면 달을 슬쩍 내 주머니 속에 숨길래요
주머니 속은 달이 찾은 빈방
오늘은 뭐해 속삭이며
이별을 참 낭만적으로 견디는군요
헤어지며 헤어지기 직전의 감정을 부추겼어요
쓸쓸한 밤을 위한 이별 메뉴로 샐러드 어때요?
다녀간 모습은 사진에 담아 톡으로 보낼게요
구좌당근퓨레뽈뽀, 비풍당계새, 부라타치즈잠봉피자
우리가 우리일 때 먹었던 것들 적으려다
추가 물 주문은 셀프라는 걸 잊었어요
식사 후 커피는 10% 할인되고요

패스워드 알려드려야죠
주인이 없을 땐 달빛이 내가 된답니다
달빛은 맘대로 주문하고요 댓글은 잊으세요
아, 인증사진은……
QR코드 찍고 인기메뉴 확인하면 됩니다

―「패스워드 알려드려요」 전문

섹스하다가 땀방울 하나 떨어졌을까요 콘크리트 벽이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높은 천장은 내려앉았고요 방이 점점 좁아지는 거예요

꽉 끼는 코르셋을 입은 듯했어요 몸은 움직일 수 없었고요 숨은 느리고 더뎠지요 텔레비전 속에 못난이 삼형제 인형이 나를 보고 웃고요 걷지 못했던 앉은뱅이 남자아이가 성큼 다가왔어요

하얀 속옷이 옷걸이에 걸린 채 문 앞에서 흔들거렸지요 벽에 걸린 액자는 좌우로 움직여요 떨어져 산산조각 깨질 거야 파편은 너의 온몸에 박히겠지, 누군가 말해요

나신의 임산부예요 검붉은 땀이 흘렀을까요 돌아가신 엄마가 나를 당겨주었어요 나는 이제 살았을까요

―「떨어지는 것에 대하여」 전문

나에게 물어보세요 모든 것이 선명하게 기억나니까요

화분의 꽃나무 때문예요 검은 털로 수북했어요 각진 어깨는 무거웠고요 뜨거운 뭔가가 흘러내렸지요 비릿한 러닝을 뒤집어 입은 채 쇠 깎는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어요 밤새 쌓인 눈 때문에 발자국은 도망갈 수 없었죠 내 몸은 벼랑 끝에 매달린 고드름 같았지요 출구를 찾아야 했어요

가지는 부러졌고 껍질은 벗겨졌어요 신음이 들려오는 이명에 시달리던 나는 화분을 든 채 아파트 단지에서 쓰레기처리장까지 헤매 다녔죠 지릿한 바다 냄새가 생생하게 기억나요 화분을 먼 바다 떠나는 배의 화물칸에 실었어요 흉곽을 짓누르던 소리 나를 버리지 마세요 열리지 않는 문 밖에서 꽃이 떨어진다면 심장 뛰는 방향으로 묻히겠죠 모두들 잊었겠지만 난 잊지 않았어요

지금 내 앞에서 심장 뛰는 소리로 엄마, 하고 부르네요 누구세요? 화분을 버렸을 뿐이에요 화분을 실은 배는 기우뚱거리며 바다를 건너요 화분을 들었던 손엔 이제 검버섯이 피었어요 나에게 물어봐요 화분에 대해서요 선명하게 기억나니까요

―「화분」 전문

■ 시인의 산문

비밀번호

0257

나도 모르게 사랑할 거 같아

그때까지만 기다려

죽여줄게

■ 작가 소개

이정은 시인

서울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살고 있다.

고려대 교육대학원 국어교육 석사 졸업했다.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을 수료했으며, 2022년 《뉴스N제주》 신춘문예에 당선한 바 있다. 현재 제주작가회의 회원, 〈교육문예창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3년 제주문화재단 창작지원금을 수혜했다.

■ 차례

제1부

너는 바람이 아니라•13/OUT, 그 생물성에 관한 연구•14/아프리카 펭귄 애인처럼•17/밖은 장마입니다•18/그림자 연극은 아이들을 삼켰을까•20/As You Like It•22/카운터에 천사가 서 있었다•24/접시와 수세미•26/겨울의 계단•28/꽃잎 고르기•29/비번 열자 섹스 휘감는•32/샌드위치와 샐러드•34/가젤처럼 뛰었다•36/키스•38/홀수 52페이지•41/평범한 세계•44

제2부

공간•47/달맞이꽃의 망명•48/터키스 블루•50/그리하여 사라진다면,•52/사월의 조각•53/혜화•54/패스워드 알려드려요•56/백일몽 402호•58/아버지, 왜요•60/왠지 나른해질 수 없어•62/그래도 우울하지 않아요•64/당신은 해무가 좋다고 했어요•66/샤넬의 숲•68/기울어진 방•70/근조•72

제3부

떨어지는 것에 대하여•75/사람 목소리는 영역 표시에 불과해, 에드몽이 말한다 에드몽은 누구일까•76/빨간 망토•78/백야•80/동시•82/자오나 학교•83/혼자 남은 방•84/화분•86/비밀의 이름은 미시오•88/코스모스•90/나는 머리핀을 어디에 두었을까•92/숟가락의 얼굴•94/사과놀이•96/환청의 감각•98/다섯 개의 물의 장면•99/얘야, 양을 세야지•102

해설 아브젝시옹의 시학/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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