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김승립 시인, 시집 ‘벌레 한 마리의 시’ 발간
[신간]김승립 시인, 시집 ‘벌레 한 마리의 시’ 발간
  • 현달환 기자
  • 승인 2021.11.25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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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립 시인이 노래하는 사랑은, 어떤 때는 개인의 실존 차원에서 그리고 어떤 때는 구체적 대상에 대한 감정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그만큼 시인이 사랑의 기운에 휩싸여 있다는 실증이기도 하면서, 시적으로는 ‘사랑’에 대한 변주와 깊이를 향하는 반복으로 읽어야 마땅하다.

왜냐면 김승립 시인은 구체적 개인의 정서 상태인 사랑과 현실에 대한 역사적/윤리적 태도로써의 사랑을 일치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김승립 시인은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살고 있다.’ 이 시집의 3부와 4부는 제주라는 공간과 제주의 역사를 통한 시 쓰기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데, 앞에서 시인이 ‘사랑의 힘으로’ 시를 쓴다고 말했듯이, 제주의 시공간에만 머물지 않는 시인의 시각을 독자들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제주의 역사와 제주라는 공간에 대한 시편들에서도 변함없는 ‘사랑의 힘’을 발견할 수 있다.

목차

시인의 말•5

제1부
사랑의 이름으로·12
벌레 한 마리의 시·14
라라에게·15
라라를 위하여·16
무지개·17
불씨·19
군고구마·20
서둘지 않아도·21
가을볕·23
어메이징 그레이스·24
햇덩이를 굴리는 아이들·27
오래전 그대에게·29
기막힌 시·31
비·33
존재의 이유·34

‘벌레 한 마리의 시’ 표지<br>
‘벌레 한 마리의 시’ 표지

제2부
배경(背景)·38
대설주의보 1·40
대설주의보 2·41
가을·42
권정생 살던 옛집·43
밥심·45
마음의 죽(粥)·47
초파일·49
풋것의 사랑·50
어떤 사랑·52
전등사·54
장엄·55
폭포·57
11월·58
어떤 가을날·60
겨울 서정·6

제3부
가자, 우리 그리운 숲으로·64
제주에 오면·66
제주 바람·68
바람과 잎새·69
생기·71
열애·72
경(經)·73
시월·74
흰털괭이눈·76
눈물의 내력—시인 문충성·78

제4부
붉은 섬·82
검뉴울꽃—진아영·84
이덕구의 숟가락·87
태극기·89
어떤 이력·91
우리는 우리에게 거듭 물어야 한다
—세월호 참사 3주기에 부쳐·94
피가 내리는 마을·98
베트남 피에타·103
용병·106
꽃을 피우지 않는 까닭·109
사랑의 사상·111

제5부
우리가, 끝끝내, 살아내야 할, 정든 땅, 이 길 위에서·114
한가위의 시·116
바람이 향기를 종소리로 울려 퍼지게
한다·118
그 배롱나무·121
그 나무의 눈동자·123
마음을 잃다·126
상처·128
지루한 상처·130
마른 꽃·132
문(門)에 대하여·134
해설
벌레 한 마리의 사랑(김대현)·136

책속에서

들녘, 아직 추위 강파른데
어디선가 벌레 한 마리
움 열고 대가리를 내민다
칼바람조차 아무렇지 않은 듯
한 줌 온기의 작은 몸짓으로
꽝꽝 언 땅을 씩씩 밀어낸다
저 무모함!
오랜 잠에 묶여 있던 어린 풀씨들
한 마리 벌레의 대책 없는 꼼지락거림에
간지럼 타며 아아아 기지개 켠다
온 세상이 그만 봄빛으로 가득하다
나, 그대에게 벌레 한 마리의
온기를 전해주고 싶다
지구를 온통 파랗게 뒤흔들어놓는
무모한, 썩지 않는 사랑을

_「한 마리 벌레의 시」 전문

가령, 네 눈물 같은 거
삶이 버거울 때, 입술 깨물다가
간신히 방울방울 맺히는
보석 같은 거

사랑해본 일이 있는가

가령, 네 콧등의 뾰루지 같은 거
예고 없이 불현듯 돋아
귀찮게 삶을 간지럽히는
확증(確證) 같은 거

사랑해본 일이 있는가

꽃은 외려 바람의 시샘으로 피어나는 법
언뜻 흐리다 개고
다시 흐려지는
네 마음의 풍경

사랑해본 일이 있는가

뜨락에 비 듣고
꽃잎 파르르 떨릴 때
비로소 꽃잎으로 눈뜨는
네 순결한 성(性)의 깊이

_「존재의 이유」 전문

당신은 늘 배경으로 앉아 있다
멀리서 물소리가 들린다
해가 설핏 기울고 나뭇가지들이
서쪽으로 몸 돌리는 시간
비로소 새들은 날개를 접고 보금자리를 튼다

그래도 당신은 배경으로 남아 있다
배경 속에는 간혹 흐리고 등 뒤로
비가 내리기도 한다
어떤 슬픔도 함께 젖는다

언젠가 당신의 무거운 그림자를 본 적이 있다
헐겁고 초라한 표정이었다
때로 그림자를 가만히 흔들면
수많은 새 떼들이 우르르 쏟아져
온 하늘을 수놓기도 했다
그 아아로운 비상이라니

-「배경」 전문

불타버린 산 하나 내려와
나를 깨우네

이미 헐거워진 가죽 껍데기
벗어놓고 그만 내려서라고

세상 덧없이 빛나던 잎, 잎들
식은 들판에 맨발로 눕고

어디선가는 우리 발 담가
삶을 희롱하던 계곡 물소리도
문득 끊어지네

바람은 한기를 데불고
사방팔방 미망을 두드리는데

생각건대, 저 한기에 몸 그냥 내주면
정신은 눈매 곱게 세우고
차운 물소리로 돌아오리라

_「11월」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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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현 (문학평론가): 김승립 시인은 벌레의 눈으로 사랑을 이야기하는 시인이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사랑은 다정하고 부드러운 사랑만은 아니다. 자신의 몸을 내어 타인에게 밥을 먹이는 사랑, 찢기고 피흘리는 타인의 고통을 눈물을 흘리며 기록하는 사랑이 시인의 사랑이다.

“산들바람”이 불어오면 언제라도 “산들바람”이 될 수 있는 “유연한 몸짓”을 가지지 못한 그는 힘의 중심에 포획되지 않은 채 마지막까지 “반국민”(「어떤 이력」)으로 남는다. 그의 시를 추동하는 “결코 지워서는 안 될 가슴속 붉은 표식”이 언제까지나 그를 주변인으로 머무르게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비극적 사건의 기억을 기꺼이 자신의 언어에 기입한다. 그리고 이는 고스란히 우리에게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_김대현(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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