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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택 칼럼](4)을묘왜변(1555)의 영웅들을 기리자(건공장군 김성조를 기리며)
[김정택 칼럼](4)을묘왜변(1555)의 영웅들을 기리자(건공장군 김성조를 기리며)
  • 뉴스N제주
  • 승인 2021.09.18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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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공장군 김성조에 관한 연구 경과보고
김정택 건공장군현양추진위원회 위원장
수필가
제주문인협회 회원인 홍창국, 김정택, 현글 작가 세 명이 한국에이즈퇴치연맹제주특별자치도지회(회장 김순택)와 뉴스N제주(대표 현달환)가 공동으로 주최.주관한 ‘2020 제1회 청소년 글짓기 공모전’ 심사를 진행했다
김정택(순택) 건공장군현양추진위원회 위원장(수필가)

김정택(순택) 건공장군현양추진위원회 위원장(수필가)이 본지에 특별기고로 올린 '을묘왜변(1555)의 영웅들을 기리자(건공장군 김성조를 기리며)'라는 내용을 싣고 본사는 '건공장군 김성조에 관한 연구 경과보고'에 대한 자료집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고 추진위원장 이름으로 칼럼을 게재하기로 했다.

내용은 거의 자료집 그대로 싣는데 조금 부가적인 내용을 첨가할 예정이다.

한편, 추진위는 '을묘왜변의 영웅들을 찾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영웅들을 찾고 있다.

남수곽 동쪽 구릉에서 을묘왜변(1555)의 승전을 이끌었던 4인의 치마돌격대(馳馬突擊隊)! 정로위(定虜衛) 김직손(金直孫), 갑사(甲士) 김성조(金成祖), 이희준(李希俊), 보인(保人) 문시봉(文時鳳) 용사와, 왜장을 사살한 정병(正兵) 김몽근(金夢根).

이 분들을 아시거나 조상으로 두신 종친회에서는 제보 바란다며 함께 현양사업을 추진하고자 한다고 전했다. (제보 HP 010-6608-6925 ,Fax 064-712-3064 ,stkiimsj@hanmail.net)

이와 같이 지금 우리 주위에는 과거 제주를 살린 위인, 혹은 이름 없는 영웅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한 영웅들을 찾지 못하기도 하지만 만약 찾더라도 별 뾰족한 수가 없이 그냥 묻히고 마는 사례가 왕왕 있다. '건공장군 김성조'의 비만해도 전쟁터와 전혀 관계없는 다리 위에 세워놓아 관심은 커녕 오히려 퇴색되고 있다고 추진위원회에서는 언급하고 있다.

좀 더 우리 제주에 위대한 인물이 탄생했다는 것을 알리고 그 후손이라도 잘 관리할 수 있도록 행정에서도 관심을 가져주기 바라는 마음으로 연재한다. 많은 응원과 관심바랍니다.[편집자 주]


나주김씨인충공파 회가(會歌)

나주김씨인충공파종친회 회가는 애족심(愛族心)을 북돋우고 혈족간의 화목과 종친회 단결을 위해 모임 때마다 기쁨과 만남의 감동을 새롭게 노래하자는 취지로 2018년 6월 제정되었다. 종친회의 성격과  정신, 종훈이 이 회가에 들어있다.

나주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손자 나주군 김운발(金雲發)을 시조로 모시고 있으며, 제주 입도조는 14세 고려 충신 강화진 좌령낭장(江華鎭左領郎將) 김인충(金仁忠)으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정을 지키기 위해 1403년경 제주도로 낙향했다. 현조(顯祖)는 을묘왜변 때 남수각 동편 구릉에서 왜병을 단신으로 격퇴하여 제주목(牧)을 구하고 나주김씨의 충의(忠義)로운 명성을 날리신 김성조(金成祖) 건공장군이다. 그 이후 위남(衛南) 수남(秀南) 두남(斗南) 진남(珍南) 동남(仝南)의 다섯 계열로 뼈대 있는 가문으로 뿌리를 내리고 번성해 나아갔다.

우리 『회가』는 1, 2, 3절로 되어 있으며 각 절마다 4개의 구절과 후렴 2구절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은 가문의 역사와 실천요목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특히 2절은 건공장군 김성조 할아버지가 을묘‧병진왜변(1555~1556 명종10~11년)을 당하여 왜적을 단신으로 무찌르시고 향토를 수호함으로써 만대의 터전을 남겨주신 공로를 기리고자 한 것이다.

건공장군 선조님 우리 할아버지
을묘왜변 못된 왜군 홀로 무찌르고서
향리를 수호하여 만대 터전 남기시고
세상을 이끌면서 보람 있게 잘 살라고
아 우리는 나주김씨 가운(家運) 따라 무궁하리
충효정신 이어받고 세세토록 돈목하세

음악적인 색깔은, 4분의 4박자에 비교적 높은 음으로 계몽적 성격이 강한 노래이다.

김정택 작사에 작곡가 박경규가 작곡했다. 처음 이 노래를 부른이는 성악가 이춘기 권영희이다. 노래는 감성적이고 아름답게 느껴지기보다 경쾌하고 반복적이며, 행진곡 풍이어서 익히기가 쉽다.

김찬흡의 『제주인물대사전』 금성문화사 209頁(2016)

김성조(金成祖 1527 중종22~1575 선조8)= 무신, 건공장군(종3품). 나김 19세. 애월읍 엄장리(嚴莊里)에서 태어나 교수 김양필(金良弼)의 사위가 되다. 젊었을 때부터 용력이 대단하여 말 타고 활쏘기를 잘 하였다.

본시 집안이 가난하여 제주영營에 소속된 지인知印이었다. 1555년(명종10) 여름에 왜적 80여척이 몰아닥쳐 연이어 호남의 장흥 강진 등 8진(鎭)을 함락하고 또 제주의 화북포를 침범하여 들어와 제주-성안을 3일이나 포위하였다.

이에 목사 김수문(金秀文)과 판관 이선원(李善源) 등이 힘껏 항거할 때 김성조는 재주와 용기로 군사를 모아 후군을 맡아 정예부대를 거느려 추격, 적을 남수구에서 크게 무찔렀다. 적을 죽이고 포로를 잡은 것이 많아 조정에서 포상하고 작위를 내렸으며 목사 김수문 이하에게도 승진이 내려지고 그에게는 건공장군(종3품) 의 칭호를 내렸다.

제주서쪽 상가리 연화지 못가 언덕에 장사하였다. 그의 아들 김용호도 왜변에 아버지를 따라 전공을 세워 전라도 순천의 방답첨사防踏僉使(종4품 무관)에 제수되었다.

을묘‧병진왜변; 「제주도지」 제1권(1993)

제주에서는 1555년(명종10년) 3월에 남치근(南致勤) 목사가 동지중추부사로 영전되고 후임으로 김수문(金秀文)목사가 부임하였다. 이 해 5월에 왜구가 70여척으로 달량포 이진포 등에 침입하였는데 병마절도사 원속(元續)과 장흥부사 한온(韓蘊) 등이 전사하였다.

왜구들은 영암까지 침입하여 노략질을 자행하므로 전주부윤 이윤경(李潤慶)이 내원(來援)하여 이들을 격퇴시켰다. 왜구들은 패퇴하면서 방향을 바꾸어 을묘년 6월 27일 40여척으로 제주에 침입하였다.

이때 김수문 목사가 치계(馳啟)하기를 「6월 27일에 왜적 무려 천여 명이 하륙하여 진을 만들었습니다. 신이 효용군(驍勇軍) 70인을 골라 거느리고 진 앞으로 돌입하여 거리가 30보 정도이었는데 왜적이 화살에 맞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그러나 왜적들이 오히려 퇴병하지 않으므로 정로위 김직손(金直孫), 갑사 김성조(金成祖) 김희준(金希俊), 보인 문시봉(文時鳳) 등 4인이 말을 타고 돌격하니 적군이 궤산하였습니다. 그러나 홍모 투구를 쓴 왜장 한 놈이 활을 잘 쏘는 것을 믿고 혼자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이 때 정병 김몽근(金夢根)이 그의 등을 쏘아 맞추니 곧 엎드려 쓰러졌습니다. 우리 군사들이 승세를 타서 추격하여 참획한 무리가 심히 많았습니다.」(명종실록 10년 8월 임신)고 하였다.

임금은 김수문 목사에게 하서하기를 「왜적이 경계를 범하였다는 말을 들으면서부터 멀리 떨어진 외딴 섬에서 병력은 단약(單弱)하고 구원병도 때를 맞추어 보낼 수 없으니 어찌 방어할까 몰라서 마음이 편치 못하고 잠을 이룰 수 없는 날들이었다. 지금 경의 치계를 보니 지난 27일에 전승의 상대를 알게 되어 내 근심하던 마음이 10에서 7,8은 감하였다. 이는 경이 평소에 충의로 복종하고 나라를 죽음으로 고수하겠다는 마음이 없다면 어찌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을 격파하여 이 대첩을 이루었겠는가.

김직손 등 4인이 돌격한 공, 또한 적지 않다. 그러나 이는 경이 몸소 사졸에 앞장서서 백인(白刃)을 무릅쓰고 달려 나가 그들의 용기를 고무하여 준 소치가 아니겠느냐, 내 심히 기뻐하여 경에게 일자(一資)를 올려주고 또 비단옷 한 벌을 하사하니 경은 받으라. 」(명종실록 10년 9월 갑신)고 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홍문관 부교리 윤의중(尹毅中)을 재주선무사로 보내어 군관민을 위로하였다. 김수문 목사에게 전지(傳旨)하기를 「태평세월이 오래 계속되니 군령이 해이되고 장수들은 전법(戰法)을 모르고 백성은 병무(兵務)를 알지 못하였다. 변장(邊將)은 성실히 방비할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단지 좋은 일만을 서로 숭상하고, 세상인심은 날로 박하니 내가 항상 개탄하였다.

금년에 갑자가 참흑한 변을 당하였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겠느냐. 왜구가 분탕하는 때를 당하여 비록 장수에게 가서 정벌하라 명하여도 오로지 힘써 싸우지 않고 단지 생명을 보존할 계책만을 생각하여 한 곳에 머물러 나가지 않았다. 영암에서 소첩(小捷)에 그치었을 뿐이니 어찌 수치를 씻었다고 하겠는가.

국가의 치욕이 이보다 큼이 없으니 한심스럽도다. 오직 경은 청렴근면하고 명망이 증후하여 해외의 관원으로 제수하니 사졸과 더불어 일심이 되어 방비를 근면히 조치하는데 힘을 다하여 능히 적병을 격퇴시켰으니 그 공이 매우 크다. 그러므로 이미 가자(加資)하고 사의(賜衣)하도록 명하였다.

지금 또 시종신(侍從臣)을 특별히 파견하여 연회를 베풀어 술을 하사하여 나의 기쁨과 위로하는 뜻을 표시하노라. 경은 마땅히 더욱 충성을 돈독히 하고 군졸을 무휼(撫恤)하여 방비에 마음을 다하여 영구히 해도지읍(海島之邑)을 보전하라.」(명종실록 11년 6월 임인)고 하였다.

이 왜변은 처음 전라도 해변을 침범하였으므로 병마절도사 원적과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 장흥군수 한온이 대적하였으나 모두 포위되어 원적과 한온은 전사하고 이덕견은 항복하여 보명하였다. 해남현감 변협(邊協)은 군졸 3백명을 거느리고 전 무장(茂長) 현감 이남(李楠)과 함께 달량성을 구하러 갔다가 이남은 전사하고 변협은 후퇴하여 겨우 목숨만 구하였다.

또 우수사 김찬(金贊)과 진도군수 최린(崔潾)도 어란포를 구하려고 왔다가 구하지 못하고 왜적들을 영암까지 침범하였으므로 전주부윤 이윤경이 내원(來援)하여 왜적들을 격퇴하니 퇴각하면서 제주를 침범한 것인데 김수문 목사가 이를 격파했던 것이다.

김수문 목사는 군관 강려(姜侶)를 서울로 보내어 전리품과 함께 전승상황을 경회루에서 보고하였는데 임금이 전황을 묻자 강려가 말하기를 「왜적들이 바다를 건너와서 작모(作耗)하고자 꾀하였으므로 김수문 목사가 신 등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승선하여 총통으로 공격하여 전선을 불사르고 격파하니 모두 물에 빠져 죽었고 54급을 참하였습니다.」(선조실록 26년 4월 경유)고 하였다.

왜구는 다음 해인 1556년(명종 11) 5월 전도에 걸쳐 침입하자 김수문 목사는 군관민을 독려하여 항쟁하였으므로 왜선 5척을 포획하여 불사르고 제주에서 33급, 정의에서 31급, 대정에서 30급을 참하여 왜구침입 상황을 치계하였다.

임금은 전교하기를 「제주목사 김수문은 항상 방어하는 일에 마음을 다하여 조치하고, 적이 나타나기만 하면 모두 섬멸하여 남김이 없었다. 5척의 배를 한 척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 공은 적지 않으며 가상하다. 특별히 한 가급(資級)을 얼려주어 장려하는 뜻을 보하라.

또 해마다 방비하는 모든 일을 여러 방면으로 규획(規劃)하였으니 이와 같은 방략도 또한 가상하다. 승정원에서 별도로 작성하여 아름다움을 포상하는 뜻을 표시하라. 강려, 이선원(李善源)의 공도 아울러 논하여 기록하라.」(선조실록 26년 4월 경유)고 하였다.

또 의영고(義盈庫)에 명하여 「후추(胡椒) 10말을 내려 상하 장졸들에게 나눠주어 피서열(避暑熱)에 사용하도록 하고 전상인(戰傷人)에게는 복용할 약물을 속히 하송하라. 군관 강려는 몸소 사졸에 앞장서서 적이 휘두르는 칼을 무릅쓰고 힘을 다하여 참획하였으며, 판관 이선원도 전년부터 누차 전공을 세웠고 지금 또 칼날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싸워 사살한 것이 역시 많았는데 전상(箭傷)을 입었으니 이깉은 사람은 특별히 상을 주지 않을 수 없다. 3품에 승직(陞職)하라.」(선조실록 31년 1월 경유)고 하였다.

또 7월에도 왜적선 2척을 포획하여 75급을 참하였다. 이러한 전공으로 김수문 목사는 자헌대부로 가자하여 첨지중추부사로 영전되었고, 판관 이선원은 군기부정(軍器副正)에 서하고, 대정현감 공사검(孔士儉)은 제주판관으로, 군관 강려는 대정현감, 군관 최수장(崔水長)은 정의현감으로 승진시켰다.

이를 제주에서는 을묘왜변, 병진왜변이라 하는데, 군관민이 합심하여 목숨을 걸고 국토를 수호한 영예스러운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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