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관 칼럼](24)납치 감금 폭행
[현명관 칼럼](24)납치 감금 폭행
  • 현달환 편집장
  • 승인 2021.09.10 21:4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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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전과 나눔 고문
제34대 한국마사회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
2002년 삼성라이온즈 야구단 구단주
삼성물산 대표이사 회장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비서실장
삼성건설 대표이사 사장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

엊그제 와흘에 있는 목장에서 만난 양00 회장님과 대화 중에 현명관 회장님의 이름이 언급되어서 현 회장님과 통화를 하던 중 현 회장님이 굉장히 젠틀한 사람임을 느꼈다. 그는 사람을 무시하지 않는 인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몇년 전에 만난 양 회장님을 기억하고 있으며 반갑게 인사하면서 제주에서 한 번 만나자고 약속했다.

현명관 회장이 삼성물산 회장으로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일본 유학, 즉 우물안 개구리가 아닌 호수로 나온 개구리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 기회가 생겼다고 술회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배우고 느껴야 자신의 목표가 단단해지고 신념이 더욱 굳세게 되는 것이다.

비전도 없는 삶은 얼마나 단조로운 인생일까? 모험을 하는 심정으로 자신이 스스로 달걀속의 병아리가 되어보자. 스스로 깨어나지 못하면 결국 잡어 먹히는 프라이가 될 뿐이다.

우리에겐 너무나 큰 시간과 세상이 주어졌다.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선물이다. 이러한 밑거름 속에서 여행을 통해 혹은 유학을 통해 세상을 알고 자신을 알면 나라의 미래와 건강한 사회가 이뤄지는 것은 자명하다. 자신의 영달도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다.

후회없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우리에게 남은 인생은 바로 한 번 뿐이다. 여러 번이나 기회가 생기는 것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자신의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

'납치', '감금', '폭행'이라는 다소 거친 낱말들이 제목으로 채워졌다. 이러한 관심도 결국 같은 곳에서 그러한 상호아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동떨어진 곳에서 이러한 일들이 진행됐다면 관심도는 약했을 것이다. 우리 주위에 벌어지고 있는 것은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가장 민감한 것이다.

그러한 민감한 부분에 어떻게 잘 이견느냐에 따라 자신의 운이 좋게 이어지기도 한다. 굳센 환경속에서 살아본 사람들이 지혜가 생기고 혜안이 생기는 것이다.

지금 어두운 상황을 스스로 잘 이겨내자. 자신만이 이 상황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가위가 성큼성큼 달려오고 있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가족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모두 함께 잘 지냈으면 좋겠다. 현명관 칼럼은 이제 극적으로 달려가고 있다. 많은 필독이 있기를 바랍니다.[현달환 편집장]

현명관 회장님과 카페에서 만남
현명관 회장님과 만남

현명관이 일본에 도착해서 겨우 1달 정도가 지난 1973년 8월 8일, 그는 빠징코 상품 교환원, 러브 카페 점원 일에 이제 막 적응하기 시작했다.

한 달 만에 엄청난 변화를 겪으며 정신이 없던 그때 그날, 또 다른 한국인이 자신에게 닥칠 절체절명의 위기를 알지도 못한 채, 도쿄 '그랜드 팔레스' 호텔 로비로 들어서고 있었다.

하늘색 남방셔츠에 갈색 줄무늬 바지를 입은 남자는, 한국에서 온 정치인 양일동과 김경인을 만나기 위해 2211호로 올라갔다.

그 남자도 현명관처럼 한 달 전인 7월, 일본에 왔다. 그전에 미국에 있었던 이 남자는 1972년 10월 비상계엄령 아래 유신이 선포되자,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사실상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1971년4월에 대통령 후보가 되어 539만 6천표를 얻기도 했다.

일본인들은 그를 '긴다이쥬'로 불렀다. 그의 이름은 김대중이었다.

김대중, 양일동, 김경인, 이 세 사람은 양일동의 호텔방에서 식사를 주문해 함께 먹었다. 이야기를 마치자 김대중은 자기 방으로 돌아가겠다며 자리를 떴다.

김경인이 배웅하겠다며 김대중과 함께 방을 나섰다. 김대중이 바로 옆방 2210호에 들어서려는 순간, 양복을 빼입은 일곱 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김대중, 김경인을 에워쌌다.

"당신들 뭐 하는 사람들입니까.” 김경인이 저항했다.

괴한 두 명이 김경인의 양팔을 전광석화처럼 낚아챈 후 방금 나왔던 2211로 끌고 들어갔다.

괴한 두 명과 김경인이 들이닥치자 양일동은 크게 놀라 급하게 전화기를 들었다. 괴한 둘은 완력으로 양일동을 제지하고 조용히 시켰다.

그때부터 양일동, 김경인은 2211호에 20분 동안 감금되었다. 그와 동시에 5명의 양복 입은 괴한은 정중한 서울말로 김대중에게 부탁 한 가지를 했다.

"우리는 서울에서 왔습니다. 떠들면 우리나라 수치고 국제적으로 곤란해지니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방에 들어가시죠. 할 말이 있습니다.”

김대중은 5명의 괴한에 둘러싸여 자신이 묵고 있던 2210호로 들어갔다. 20분 후 양일동, 김경인은, 자신들을 감금하던 양복 입은 괴한들이 방을 떠나자 급하게 뛰어나가 2210호 김대중의 방문을 두드렸다.

1973년 8월 14일 경향신문 1면
1973년 8월 14일 경향신문 1면

“선생님, 괜찮으십니까?" 대답이 없었다.

마스터키를 가져오게 하여 두 사람과 호텔 종업원이 방문을 따고 들어갔다. 강한 병원 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김대중이 애용한 파이프, 북한산 담배꽁초 2개, 커다란 배낭, 노끈 그리고 테이블에는 권총 탄창까지 있었으나 김대중과 괴한들의 흔적은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일본 경찰은 사건 발생 1시간 후, 신고를 받고 대대적인 수사를 벌였으나 실종된 김대중의 어떠한 이동 경로도 찾지 못했다.

한국의 외교차관은 일본 대시를 초치하여 이 사건을 엄중 항의까지 했다.

그로부터 5일 후인 8월 13일 밤 10시 20분, 김대중은 대한민국의 자택 근처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다.

해상에서 삼일, 육지에서 이틀을 끌려다니며 입술은 터지고 눈썹 위 부위는 3cm나 찢어진 상태였다. 일본에서 갑자기 사라진 거물 야당 정치인이 홀연히 5일 후, 한국에서 발견된 것이다.

발목에는 심하게 노끈에 묶였던 자국도 있었다. 김대중의 증언은 더 충격적이었다. 공해상에 떠 있던 배로 끌려가 바다에 던져질 뻔했다고 한다. "해외에서 계속 한국을 비방하면 죽일 수밖에 없다"라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했다.

사건 초기부터 일본은 발칵 뒤집혔다. 전 신문사, 방송국이 하루종일 이 사건을 취재하고 보도했다. 초기 실종에서, 납치로 사건의 성격이 바뀌자 전 일본인은 분개했다.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개입하여 일본 한복판에서 반대파 정치인을 제거하려고 납치라는 범죄를 감행했다면, 이것은 명백한 주권 침해이기 때문이다.

일본 경찰은 사건 해결에 총력을 기울였다.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담배꽁초의 지문을 채취하고 주일 한국대사관, 주일 총영사관의 한국인 직원을 피의자로 지목하고 수사 협조 요청을 했다.

한국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중앙정보부 직원으로 의심되는 피의자를 즉시 한국으로 귀국시켜 버린다. 이렇게 되자 일본인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식민 지배를 받던 놈들이 감히 일본을 무시해! 그것도 일본의 심장 도쿄 한복판에서 납치 극을 벌이다니! 이건 일본 주권에 대한 도전이다.

게다가 적반하장으로 일본이 책임지고 사건의 범인을 잡아야 한다는 둥 터무니없는 주장을 펼치다니! 조센진은 상대할 수 없는 족속이다." 라는 생각이 강하게 전 일본을 강타했다.

그 자는 스파이일거야!

김대중 납치 사건의 불똥은 엉뚱하게 내게 튀었다. 함께 공부하던 게이오 대학교의 일부 한국인 유학생들은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20대 청년도 아닌데, 한국의 정부에서 일하던 사람이 갑자기 대학에 와서 공부를 한다?"
나를 잘 모르는 일본 학생들도 중앙정보부 직원이 신분을 위장한 것이라며 쑥덕거렸다.

다로우(心)'는 일본어의 조동사로서 '아마 그러할 것이다' 라는 뜻이다. 강의실에서 수업을 기다리던 중, 그 말끝이 멀리서 언뜻 들렸다. 그자는 스파이일 거야!(소노 히또와 스파이다로!) 억울한 일이지만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구석도 있었다.

김대중 납치 사건의 수사가 진행되면서 점점 한국의 중앙정보부의 개입 정황이 드러나자 내게 쏟아지는 일본인들의 차가운 눈초리는 더욱 매서워졌다.

사건이 하루하루 쇼킹한 스토리로 전개되었고 일본 전 언론의 뉴스는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더불어 전국의 일본인들은 대한민국에 대해 두 단어를 알게 되었다. 김대중, 한국중앙정보부 KCIA, 초등학교 어린이조차 자국의 수상 이름은 몰라도 긴다이쥬(김대중)'는 알고 있을 정도였다. 일

본인들은 후진국인 한국이 일본의 국법을 무시하고 활개치고 다닌 것을 아주 불쾌하게 생각했고 한국인을 전보다 더 멸시했다. 특히 한국에서 온 공무원들을 향해 혹시 중앙정보부 사람이 아니냐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비록 우리나라 중앙정보부가 부끄러운 짓을 저질렀지만 일본에서 일본인들에게 비난과 멸시를 받으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고노야로, 이놈들 내가 한국에 돌아가면 우리나라를 반드시 네희들보다 잘 사는 나라로 만들어 본때를 보여주겠다."

나는 과거 서울 고등학교 시절처럼 이를 갈며 공부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도 투잡 쓰리잡을 마다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돈도 벌었다. 오기가 발동한데다, 서서히 일본의 하수구 문화가 시간이 지나면서 눈에 들어왔고 그걸 보면서 오만함도 싹텄다.

일본의 뒷골목은 필설로 옮기기 부끄러운, 난잡한 성문화가 넘쳤고 신주쿠의 무질서한 젊은이들은 삶을 포기한 듯 길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대중가요계도 영혼이 팔려나간 듯 외국 가수들이 주름잡고 있었다.

대만 가수 등려군이 '굿바이 마이 러브'를 히트 치며 가요계를 평정했다. 자국 밴드보다 별 이름도 없는 서양의 신인 그룹인 '퀸(우리가 알고 있는 퀸이 맞다) 같은 밴드에 사족을 못 쓰며 열광했고 공연마다 만석에 만석을 거듭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이 나라는 미래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젊은이들이 썩었다는 생각도 했다. 대학은 대학대로 도쿄대 사상 투쟁의 잔해가 널려있어 어지러웠다.

미일 군사 방위조약 반대 시위가 매일 벌어졌다. 반면 극우 운동도 만만치 않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4년 전인 70년 11월 25일 자살한, 금각사의 작가미시마 유키오의 망령은 도쿄 시내 곳곳에 우익들의 선전 포스터를 장식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나란가? 한심하군."

그러나 열등감 속에서 솟아난 나의 자부심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대학생들은 한국 학생들보다 무섭게 공부하고 있었으며 지하철 어디를 가나 시민들은 책을 놓지 않았고 철저하게 공중도덕을 지켰다.

당시 한국은 흑백 TV 방송을 하고 있었는데 일본은 14년 전인 1960년 9월 10일, 아시아 최초로 컬러 방송을 하고 있었다.

한 자루의 연필(一本鉛筆]

빠징코 선물 교환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쇼윈도에 전시된 컬러 TV를 발견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다가가 무심코 TV를 시청했다. 일본의 쇼 프로그램이었는데 외부에 설치된 스피커로 노래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문득, 한국과 일본의 차이를 확연히 깨달았다.

"저들은 이미 다양한 컬러의 문화를 수용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흑백의 단순한 유신 독재 체제였구나. 저들의 문화를 뛰어넘지 못하면 우리는 일본을 이길 수 없다."

TV에서는 일본의 국민 엔카 가수 '미소라 히바리'가 '한 자루의 연필(一本鉛筆)'을 열창하고 있었다.

"한자루의 연필이 있다면 나는 당신에 대한 사랑을 쓴다."
"한자루의 연필이 있다면 나는 전쟁은 싫다고 쓴다."

무심히 지켜보던 나는 어느새 미소라 히바리가 이 노래를 하게 된 사연까지 듣게 되었다. 이 곡은 원폭이 떨어진 히로시마에서 열린, 음악 축제에 참가하면서 부르게 된 노래였다. 미소라 히바리는 관객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제 아버지도 징병되었었죠. 어머니는 혼자 힘들게 저를 키웠습니다. 저도 요코하마 대공습을 어린 시절에 경험했고 전쟁이 싫었습니다.

어렸을 때 저도 그 전쟁의 공포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함께 하기 위해 음악 축제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매우 덥습니다만 히로시마 사람들은 그때 더 뜨거웠다지요? 참아보겠습니다"

나중에 게이오대학 친구들에게 들은 톱스타 미소라 히바리 이야기는 나를 더 놀라게 했다. 그녀는 냉방된 대기실을 거부하고 뜨거운 무대 옆에 있었다고 한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무서운 진심이다. 누가 보던 안 보던 스스로 뭔가를 지키고 있는, 일본인들의 밑바닥에 흐르는 소프트파워를 꺽지 못하면 우리는 일본을 이길 수 없다. 그때까지 고노야로는 아껴둔다."

상대를 미워만 하면 자칫 왜곡된 허상으로 자만에 빠질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채근담의 교훈은 아주 명쾌하게 이 원리를 짚어준다.

머리에 늘 관대함과 후함을 생각한다는 것은 봄바람이 너그럽게 길러냄과 같아서 만물이 이것을 만나면 살아난다. 머리에 늘 증오와 해칠 일만 생각한다는 것은 북쪽 지방의 눈이 음산한 기운만 뭉치게 하는 것과 같아서 만물이 이것과 만나면 죽는다.

염두관후적  여춘풍후육  만물조지이생
念頭寬厚的  如春風煦育  萬物遭之而生

염두기각적  여삭설음웅  만물조지이사
念頭忌刻的  如朔雪陰凝  萬物遭之而死
                                채근담 / 前集 제163장

무심히 읽어보면 크게 감흥이 없는 말이다. 관대한 마음은 만물을 길러내고 증오의 마음은 만물을 죽인다는 것은 상식 수준의 말 같다.

그러나 이를 실생활에 적용하고 일상에서 부딪히는 온갖 종류의 분노와 질투, 시기 등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스트레스에 비추어 본다면, 보통 실천하기 어려운 말이 아니다.

매우 심오한 말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우리는 나를 괴롭히는 상사나 거래처의 갑질로 견디기 힘든 고통을 받게 된다. 누구나 이런 상황을 만나면 분노가 치솟고 상대를 증오할 수밖에 없다. 극단적인 상황이 되면 살인까지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곧바로 자신을 죽이는 일이다. 일도 더 안 풀리고 운도 막히게 된다. 왜냐하면 스스로의 마음이 만물을 죽여 버리는 쪽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물이 봄바람에 싹트 생기를 찾게 만들어야 발전할 수 있는 게 당연하다. 자신의 주변 환경이 살아나야 하는 것인데 스스로 북극의 눈보라같이 어두운 음기가 응어리지게 되면 (삭설음웅) 나의 주변 환경, 인간관계는 모두 죽어버리게 된다. 무서운 진리가 아닐 수 없다.

채근담의 홍자성 선생이 지적하고 싶은 바가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선생은 '염두'라는 말을 쓰며 강조한다.

염(念)이란 늘 반복해서 머리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염(念)이다. 염불이라는 말을 할 때, 그래서 이 '염'자를 쓴다. 머리에 박아 넣고 늘 지침으로 삼으라는 뜻이다.

왜 살면서 분노와 증오의 마음이 생기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것은 내 주변의 만물을 죽이는 행위이므로 염두에 두어서 경계하라고 한다.

이 원리는 사람이 아닌 국가로 확대해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 경구를 가장 어려운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적 본성을 극복하고 우리는 관대함과 후덕함을 염두하고, 봄바람 같은 에너지로 나의 환경을 모두 살아나게 하고, 스스로도 발전시킬 수 있을까? 개인이 확대된 국가 대 국가에서도 이것은 가능한 것인가 자문해 본다. 물론 어렵다.

그러나 나를 살리고 대한민국이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관대함과 후덕한 마음으로 상대를 보고 일본을 바라봐야 한다.

나중에 다시 보복하고 응징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그들을 이기고 싶다면 관대하게 긍정하며 일본을 봐야 한다. 그때 강점도 보이고 내가, 우리나라가 발전하고 살아난다고 믿는다. 극일의 시작은 증오를 버리고 후덕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먼저다. 혐일은 극일이 될 수 없다.

나에게 모든 것이 거지 같게 만 보이던 일본이라는 나라가, 어느 순간 바늘구멍만큼 열린 관대한 마음 때문에 새롭게 보였다.

그리고 일본을 이길 방법을 찾게 만들었다. 10년 후 신라 호텔에서 근무할 때 악착같이 일본의 호텔을 벤치마킹을 하며 일본보다 더 나은 호텔을 만들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노력한 것도, 그 시작은 일본 유학 때였다. 우리가 채근담에서 말하는 것처럼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만에 빠져서 지고 만다.

2019년부터 일본과 무역 전쟁을 치르고 있는 한국이 조금 더 냉정하게 일본을 바라보고 준비해야 이 전쟁에서 우리가 이길 수 있다.

어설픈 증오나 폄훼는 우리 스스로를 죽이고 창조의 싹을 자를뿐이다. 음기가 잔뜩 뭉친 상태로, 어떻게 우리보다 앞선 기술이 있는 상대의 강점을 찾을 수 있고 그걸 뛰어넘으려는 노력을 할 수 있겠는가?

고순도 불화수소를 생산하는 기술을 일본이 갖고 있다면, 일단 그들을 관대하고 후덕하게 바라본 후에야 강점이 그대로 보여 우리도 따라 만들 수 있고, 나아가 그들을 우리 발아래 둘 수 있게 된다.

흔히 요즈음 말로 국뽕 한 사발 기분 좋게 들이킨다고 그들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유튜브에는 온갖 거짓 정보를 버무려 일본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포장하는 콘텐츠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나도 가끔 보는데 일단 보면 기분은 좋아진다. 그러나 잠시 생각을 해 보면 이들 콘텐츠들은 대부분 모두 상대를 깎아내리고 공격하려는 (기각刻) 마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하게 된다.

홍자성 선생이 지적하길 이렇게 되면 음기가 뭉쳐서 만물을 죽인다.고 했다. 경계할 일이다.2

고급 스파이가 되어

유학을 떠나기 전 나의 관심사는 '한국경제가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발전할 수 있을까'였다. 일본은 어떻게 지금과 같은 경제 발전을 할 수 있었으며 모든 것이 열악한 대한민국은 일본의 발전 전략을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게이오대학원의 경제학부에 등록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연구 방향도 그래서 '한국경제의 발전 전략'으로 정하고, 관련 자료와 서적을 닥치는 대로 수집하고 읽었다.

다행인 것은 이곳에서, 이념 문제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사회주의 계획경제학의 대가를 만난 것이었다.

가토 칸 교수가 그 주인공인데 그는 소련의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관한한 일본에서 일인자였다. TV 토론자로도 자주 나왔던 그는 나의 연구 주제에 관심을 갖고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유신체제였으며 사실상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워 정부 주도의 계획경제를 실천하던 때였기에, 계획경제의 대가가 전해 주는 지식은 내가 우리나라의 경제 정책을 새롭게 보고 문제점을 찾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매스컴이나 길거리에서 만나는 혐한 주의자들만 일본에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일본의 엘리트 중에는 괜찮은 사람이 상당히 많은데 그중 한 사람이 가토 칸 교수였다.

그분 외에도 많은 실력파일본인 교수들에게 도움을 받았고 한국의 고시 인맥을 동원하여 경제기획원으로부터 각종 자료를 구해 연구를 진행했기 때문에는 순조롭게 마칠 수 있었다.

모순되게도 처음 게이오대학에서 '스파이'로 의심 받으며 난처한 유학생활을 시작했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한국의 발전을 위해 일본을 배우고 정보를 정리한 '고급 스파이'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왔다.

태산을 본 사람은 다시 뒷동산에 오를 수 없고

3년간의 2학을 마치고 귀국을 찾을 때 나는 한국 경제에 관한한 전문가가 되었다고 자부했다. 일본에 대해서도 당연히 전문가 급지식을 얻게 되었으니 뭔가 더 큰일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귀국하던 1977년, 대한민국의 경제는 최악이었다. 거리는 실얼자기 넘치고 넘치고 갈 곳은 없었다.

처음 유학을 갈때부터 공부해서 어떤 직업을 얻었다는 명확한 계획이 없다 보니, 유학을 마친 상황속에서도 극한 일을 하게 되었다. 할 수 없이 예전 직장인 감사원에 복직을 신청했다.

미정하기 후직을 받아주지 않고 직을 하리고 던 감사의 사층장이, 미안한 마음에 인사담당 과장을 통해 증 복직을 제안했던 것도 작용했다.

그거 하던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시간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것은 3년 전의 일상이었으나 나는, 그때 그 현명관이 아니었다. 1년이 10년처럼 지나갔다.

점점 공직 생활이 괴롭고 지루한 시간으로 변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이미 일본이라는 큰 세상을 보았고 지식을 바탕으로 뭔가 직접 일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 과거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커져버리자, 도저히 감사원의 공무원 생활을 견딜 수 없었다.

태산을 본 사람은, 다시 시시한 동산에 올라 등정했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없는 법이다.

'세상은 팍팍 돌아가고 있는데 서류나 뒤지며 남의 잘못이나 잡고 있다니……. 이것은 시간 낭비다. 이런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때 삼성으로부터 제안이 왔다. 처음 삼성의 비서실장으로부터 받은 제안은 중앙일보였다. 나는 싫다고 했다.

두 번째 제안은 삼성그룹 중 상장 1호 기업이면서 안정된 경영실적을 자랑하는 전주제지였다.

나는 전주제지를 선택했다. 전주제지는 원래 삼성제지라고 해야 맞지만 지역민들의 요구에 의해, 전주제지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하고 있었던 삼성그룹의 계열사였다.

나는 미련 없이 사표를 던지고 민간 기업인 삼성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본 유학이라는 겁 없이 시작한 도전이 아니었다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앞으로 한국은 민간 기업의 역할이 커질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어야만 나라가 발전한다고, 일본 유학 생활을 하면서 깨우쳤기 때문에 가능했던 또 한 번의 도전이자 결단이었다.

당시 고시 출신이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언제 잘리거나 망할지 모르는 불안한 민간 기업으로 간다는 것은 분명 모험이었지만, 일본 유학 덕분에 큰 세상을 체험한 나는 미련 없이 새로운 인생을 선택할 수 있었다. 젊은이들은 나의 이 말에 선뜻 수긍이 가지 않을 수도 있겠다.

삼서이 오라는데 무조건 가야 하는 것 아닌가? 전혀 그렇지 않다. 지금 우리가 아는 삼성과 1978년의 삼성은 전혀 다른 회사였다.

현재는 그룹의 위상은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이후 만들어진 것이다. 1978년의 삼성은 글로벌 기업도 아니었고, 언제라도 망할 수도 있는 그렇고 그런 대기업 중 하나였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일본에서의 경험을 밑천으로 38살에 공무원 생활을 마치고, 민간 기업에서 새로운 도전이 나설 수 있었다.

그로부터 23년 후, 나는 삼성물산의 대표이사 회장이 된다.

공무원으로 시작해서 그룹 회장이 된 결정적 계기는 무엇이냐고 내게 누군가 묻는다면, 일본 유학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큰 세상에 나가보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인지, 호수에 사는 개구리인지 알지 못한다. 일단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알아야 꿈을 꿀 수 있고 목표가 생긴다.

우들 안 개구리에게는 좁은 원에서 떨어지는 상쾌한 빗물이 꿈의 전부일지 모르지만, 호수로 나온 개구리는 석양의 지는 해와 드넓은 지평선이, 자신이 헤엄칠 무대라는 것을 알고 자유를 느낀다. 물론 호수에는 뱀도 많다.

일본을 이기는 극일 꿀팁

한일 무역 전쟁에서 성숙한 불매 운동과 극일을 외치는 젊은이들에게, 젊어서 여러분들과 똑같이 끓는 피로 굴욕적인 한일수교회담을 반대하고, 일본에 대한 적개심으로 불타는 심장을 가졌던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일본을 이기는 길은 무엇일까 고민해 보았다.

요즈음 젊은이들의 표현을 빌려 "일본, 이렇게 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극일 꿀팁을, 내가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일화에 실어 전한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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