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을묘왜변(1555)의 영웅들을 기리자(건공장군 김성조를 기리며)
[특별기고]을묘왜변(1555)의 영웅들을 기리자(건공장군 김성조를 기리며)
  • 뉴스N제주
  • 승인 2021.08.1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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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택 건공장군현양추진위원회 위원장
시인

◆다리 위의 표석

▲ 오현교 다리 상판 위에 제주시가 세운 을묘왜변전적지 표석. 전적지 비를 다리 위에 세운 사례는 세계에 유일하다. 2000년 12월에 세운 다리 위에서 1555년의 전쟁이 벌어졌나, 어떻게 다리 위에 전적비를 세울 수가 있는가.

다리 위에 비석을 세우는 일이 쉽지 않다. 이런 불가사의한 일이 오현교 다리 동단에 있다. <을묘왜변 전적지>임을 알린다고 2000년에 제주시가 세운 작은 표석이다. 다리 위에서 전쟁이 일어났는가? 그럴 리가 없다.

을묘왜변(1555년, 명종10년)의 현장은 다리 위가 아니고 남수곽 동쪽 구릉(丘陵)지대와 신산모루 일대였다. 왜구는 전남 해역에서 분탕질하다가 소득 없이 귀국하던 왜구 군단 70여척 1천여명이 을묘년 6월 화북포로 쳐들어 왔다. 이어 왜구들은 남수곽 동쪽 구릉에 망루를, 신산모루 일대에 3일간 진을 치고 성안 동태를 살피면서 결판을 내려던 참이었다. 우리로서는 제주성의 함락 직전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였지만 4인의 돌격대와 용호군(驍勇軍) 70인의 분전으로 왜구를 분쇄하고 승리로 이끌었다.

이것이 전적지가 된 이유였다.

오현교는 교통의 흐름을 무시하고 1992년도에 세운 이상한 다리다. 이 다리위에서 전쟁이 일어났는가? 공중전이 벌어졌는가? 제주시 공무원들이 역사적 사실을 얼마나 귀찮아하고, 오죽 세울 곳이 없었으면 표석 돌 하나를 처리하지 못하여 다리 상판 위에 표석을 세웠나 딱한 생각이 든다. <을묘왜변 전적지>는 실로 향토수호의 현장이었는데, 무식한 관계 공무원의 잘못된 판단으로 말미암아 1992년에 부설(敷設)한 다리 위에 표석을 세우고 1555년의 전적지라 생떼를 쓰고 있으니 실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을묘왜변 전승지는 김성조 장군의 투혼이 살아 숨 쉬던 향토수호와 충의의 현장이요 왜변을 극복한 민병(民兵)의 발상지였다. 김성조 장군의 우국충정과 창의(倡義) 정신이 제주도를 지켜냈듯, 도민의 가슴에도 향토 수호의 정신이 살아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시대적인 소명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을묘왜변의 역사적 사실과 격에 맞고 제대로 기리는 기념물을 건립할 필요가 있다. 시내를 조망할 수 있고 견학을 유도할 수 있는 기념사업이 이뤄지기를 바란다. 그래야 우리 향토가 다시 살게 된다.

이에 동운(東韻) 칠율(七律)로 ‘표석을 어데 세웠나(何處安表石)’ 영사(詠史) 한 수를 짓는다.

勝地于今立石空 (승지우금일편공) 이긴 곳에도 지금은 비 세울 곳 없으니
兵蹤死命作徒夢 (병종사명득하몽) 목숨 걸고 싸우던 자취는 한갓 꿈이었나.

馳馯一匹飛揚擧 (치간일필비양거) 사납게 달리는 말 한 필은 나는 듯 날뛰어
醜寇狂倭血灑風 (추구광왜혈쇄풍) 미친 왜구들은 피를 바람에 뿌렸네

守島爲誰窮海角 (수도위수궁해각) 바다 끝에서 누굴 위해 향토를 지켰나
蒼生救濟以丹忠 (창생구제유단충) 뜨거운 충정으로 창생을 구하고자 함이었네

乘涼世變南橋上 (승량세변남교상) 세태가 변하여 다리 위에서 바람을 맞으니
不信當時護國功 (불신당시호국공) 그 누가 믿을거나 그때 나라 지켜주신 공을

◆을묘왜변의 실체

을묘왜변은 두 차례에 걸쳐 발생했다. 1555년(명종 10) 왜구 선박 70여 척이 1차로 전라도 영암·강진·진도 일대를, 2차로 제주도 화북포로 쳐들어와 제주성을 노린 사건이다. 제1, 2차 을묘왜변의 왜구는 모두 동일한 무리들이었다. 그래서 2차 을묘왜변은 ‘제주을묘왜변‘이라고도 한다. 제주에서는 을묘년(1555)과 그 이듬해 병진년(1556) 두 차례 왜변이 발발했다.

일본의 제주 약탈은 고려 시대 이후 계속되었고 조선 전기만 하더라도 20여 차례나 있었다. 이 사건은 조선과 일본 원활하지 못한 외교 관계와 일본 내의 혼란으로 말미암아 발생하였다. 즉, 1510년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난 이래 조선 정부는 일본에 대한 세견선을 감축하여 교역량을 줄였다. 이로 인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 쓰시마섬[對馬島] 등지의 왜구들이 일본의 세견선(歲遣船)에 대한 조선정부의 엄격한 통제에 대해 불만을 품고 1555년 5월 11일 배 70여 척을 타고 전라도 남부 연안지방을 습격하였다.

먼저 영암(靈岩)의 달량성(達梁城)·어란포(於蘭浦), 진도(珍島)의 금갑(金甲)·남도(南桃) 등의 보루를 불태우고 만행을 자행하였고 장흥(長興)·강진(康津)에도 침입하였다. 이를 막던 전라병사 원적(元績)과 장흥부사(長興府使) 한온(韓蘊) 등은 전사하고,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은 사로잡혔다. 이에 조선정부는 호조판서 이준경(李浚慶)을 도순찰사, 김경석(金慶錫)·남치훈(南致勳)을 방어사로 삼아 왜구를 토벌, 영암에서 이를 크게 무찔렀다.

왜구들은 전라도 남해안에서 살생과 약탈을 일삼다가 퇴각하면서 같은 해 6월 제주를 본격적으로 침략했다. 제주지역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한 방어체계를 마련하노라던 시기였지만 김수문 목사는 부임한지 석 달에 수성군(守城軍)은 5백 명에 불과했다. 이 시기의 왜구는 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서 전라도-제주도-북구주를 잇는 해상권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제2차(제주) 을묘왜변은 제주도를 왜구의 본거지로 삼으려는 계획적인 침략이었다.

왜구는 1555년 6월 전라도 분탕질에서 패퇴(敗退)하는 길에 6월 25일 1,000여 명이 군선 70여 척에 분승하여 화북포에 상륙하였다. 이후 3일간 제주성을 둘러싸고 호시탐탐하고 있을 때 제주의 군민들은 이 왜구들을 여지없이 분쇄하였다. 이듬해 다시 쳐들어오자(병진왜변 1556, 명종 11년) 적선 7척을 불태우고 왜구 215명을 죽였다.

이렇듯 제주목사 김수문을 중심으로 제주 군관민들은 치열한 전투로써 왜구를 격퇴한다. 마침내 제주도를 해상 근거지로 삼으려는 왜구의 꿈은 좌절되었고, 1·2차에 걸친 을묘왜변으로 중앙 정부는 비변사를 중심으로 남해안과 제주 지역의 방위 체제를 한층 강화하게 되었다.

◆4인의 치마돌격대(馳馬突擊隊)

○濟州牧使金秀文狀啓: 六月二十七日, 倭賊無慮千餘人, 下陸結陣。 臣抄率驍勇軍七十人, 突入陣前, 相距三十步。 倭人中箭者甚多, 而尙未退兵, 定虜衛金直孫、甲士金成祖ㆍ李希俊、保人文時鳳四人, 馳馬突擊, 賊軍潰散。 有一倭將, 着紅毛頭具【盔也〭 】,自恃其能射, 獨不退北, 正兵金夢根射中其背, 卽顚仆。我軍乘勝追擊, 斬獲甚衆。(『명종실록』 19권 명종10년(1555, 명 嘉靖34) 7월6일 무술 4번째기사)

명종10년(을묘 1555) 7월 6일자 제주 목사 김수문이 왜적이 침공한 것에 대해 장계하다. 제주 목사 김수문(金秀文)이 장계(狀啓) 하였다. “6월 27일, 무려 1천여 인의 왜적이 뭍으로 올라와 진을 쳤습니다. 신이 날랜 군사 70인을 뽑아 거느리고 진 앞으로 돌격하여 30보(步)의 거리까지 들어갔습니다.

화살에 맞은 왜인이 매우 많았는데도 퇴병(退兵)하지 않으므로 정로위(定虜衛) 김직손(金直孫), 갑사(甲士) 김성조(金成祖)ㆍ이희준(李希俊), 보인(保人) 문시봉(文時鳳) 등 4인이 말을 달려 돌격하자 적군은 드디어 무너져 흩어졌습니다. 홍모두구(紅毛頭具; 투구)를 쓴 한 왜장(倭將)이 자신의 활솜씨만 믿고 홀로 물러가지 않으므로 정병(正兵) 김몽근(金夢根)이 그의 등을 쏘아 명중시키자 곧 쓰러졌습니다. 이에 아군이 승세를 타고 추격하였으므로 참획(斬獲)이 매우 많았습니다.” (이하 생략)

제주 을묘왜변에서 승전을 이끌었던 전략은 목숨 바칠 각오로 자원한 치마돌격대(馳馬突擊隊)의 등장이었다. 아군은 왜구 1천여명이 진을 친 남수곽 동쪽 구릉을 중심으로 성서동격(聲西東擊)의 작전을 폈다. 6월 27일 새벽 남수과 동벽을 기어오른 엄호 부대 70명 용호군의 벼락같은 함성과 함께 동쪽에서 바람같이 나타난 4인의 치마대(馳馬隊)의 칼날아래 혼비백산한 왜구의 진지는 여지없이 파괴되고 말았다.

치마돌격대는 정로위(定虜衛) 김직손(金直孫), 갑사(甲士) 김성조(金成祖), 이희준(李希俊), 보인(保人) 문시봉(文時鳳) 등으로 4인이었다. 고작 4명이 말을 타고 적진을 누비며 개인 전술로 싸워 공을 세운 것이다.

정로위는 조선 중종 7년(1512)부터 광해군 무렵까지 존속한 정예 군인으로 중종 5년 (1510)에 삼포 왜란을 겪으면서 만들어졌다. 김직손(金直孫)은 김수문 목사와 고령김씨 재종간(再從間; 6촌형제)으로 목사로 부임할 때 함께 파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갑사(甲士)는 조선 의흥부(義興府)에 딸린 군인으로 1401년(태종 1)부터 왕권 호위를 담당하는 중앙군의 기간병인 특수 병종으로 제도화하여 엄격하게 시취되었다. 김성조는 갑사로 시취된 바 없어 단순히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甲軍, 甲兵, 甲首, 甲卒)의 뜻으로 쓰인 것 같다.

이영권의 『새로 쓰는 제주사』(2012)에는 치마돌격대(馳馬突擊隊) 가운데 보인(保人)만을 지적하여 현역군인이 아니라 현역을 돕는 예비 병력에 불과했다고 하나 갑사로 지칭한 김성조와 이희준, 보인 문시봉(文時鳳)도 무관이 아닌 한량 출신으로 돌격대를 자원하여 ‘갑사’라는 임시직을 받은 것이다. 이는 일반인들도 이 전투에 적극 참여했음을 말해준다.

문시봉은 남평문씨 33세 입도 15세 제주사람이며, 영평동 제단비(1977)에는 건공장군으로, 문씨족보에는 그의 부 문윤창(文胤昌)이 전승공로로 건공장군행충무위부사직 을 수직했음을 기록하고 있어 오류가 있는 것 같다.

왜장을 사살한 정병(正兵) 김몽근(金夢根)은 아직 상세불명이다.

◆김성조(金成祖)의 등장

김성조(金成祖 1527 중종25년~1575)는 나주김씨의 현달한 대표적 인물로, 애월읍 엄장리(嚴莊里)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천품이 총명하고 강직한 기개가 있어 사람들이 후에 큰 그릇이 될 것이라 점지했다. 동네 말테우리를 하면서도 학문에 열심하여 문장이 뛰어났고 병학을 익혀 기마와 궁술에 능하니 문무겸전의 의기남아로 장성했다. 자라서 통훈대부 진사 교수관이요 석학통유(碩學通儒)인 김양필(金良弼)의 사위가 되었다.

이때 김수문은 제주목사부임 직후인 3월 조정에 보내는 보고문 관계로 임금의 뜻을 거슬려 제주목사인(濟州牧使印)을 판관인(判官印)으로 강등하여 사용 중이었다.

김수문은 군사조련시 교관을 맡고 있던 김성조를 제주영(營) 지방관의 관인(官印)을 맡아 토관(土官) 밑에서 지방행정과 군사에 관련된 일을 담당하는 지인(知印)으로 취업시켰다.

그해 6월 왜구 1천여명이 쳐들어와 남수곽 동편 구릉에 진을 치고 제주성 함락을 노리고 있었다. 목사 김수문(金秀文)과 판관 이선원(李善源)이 지휘하는 관군 5백여 명은 제주성을 포위당한 채 3일 동안 꼼짝할 수 없었다. 함락직전 28세의 열혈청년 김성조가 분연히 “향토가 급란을 당하매 대장부 마땅히 신명(身命)을 바쳐 왜적을 격퇴하리라.”하고 앞장서 창의(倡義)하자 김직손·이희준·문시봉 등 치마(馳馬) 4명과 정병 김몽근의 분투로 왜구를 통쾌히 격파한다. 『명종실록』에 나오는 사실(史實)이다.

김수문은 돌격대 4명을 동문 밖으로 나가 적진의 서쪽으로 쳐들어가게 하고, 정예부대 효용군 70명은 남수곽 서벽으로 올라가 동쪽으로 돌진시켜 소수인원으로 큰 피해 없이 왜구 천여명의 대군단을 몰살시켰다.

이렇듯 김성조은 제주도 출신의 뛰어난 용장으로 을묘⸳병진왜변 때 왜구를 격퇴하여 도탄에 빠진 창생을 구출함으로써 역사에 기록되는 위대한 공훈을 세우신 분이다. 제주도 출신의 인물열전을 더듬어 보면 문과에 급제한 이는 많으나 직접 무기를 들고 적중으로 돌격하여 향토를 지킨 인물은 극히 드물다.

공은 나주김씨로서 조선초(1403) 제주도에 은거한 고려유신 김인충 강화진 좌령낭장의 5대손이다. 1527년(중종 22)에 제주목 엄장촌(구엄리) 김윤형(金允亨; 증 가선대부병조참판) 전용교위의 장남으로 태어나 1575년(선조8)에 48세 나이로 별세하였다. 조부 김지손(金智孫)은 어모장군 충부부사직으로 가선대부 평조참판을 증직 받았으며, 증조 김여수(金麗水) 또한 어모장군으로 대를 이어 강직용맹하고 유서 깊은 무반의 가문이다.

▲ 건공장군 김성조의 묘비

◆을묘왜변 전승 공로에 대한 포상

을묘왜변의 전승보고와 포상은 왕조실록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김성조 등 결사대의 활약으로 을묘왜변을 물리쳤고 병진년 왜침을 막아 제주읍성을 지켜내었다는 전승보고에 명종 임금은 감열(感悅)하였고 그 공은 김수문 목사에게 돌아갔다. 1556년에 김 목사에게는 자헌대부로 가자(加資, 嘉義大夫)하고, 비단옷 한 벌까지 하사했다.

또한 교리 윤의중(尹毅中, 1524~?)을 제주로 파견하여 김수문에게 목사인(牧使印)을 다시 사용하게 했다. 이선원 판관을 군기부정(軍器副正)에, 대정현감 공사검(孔士儉)을 제주판관으로, 군관 강려(姜侶)를 대정현감으로, 최수장(崔水長)을 정의현감으로 승진시켰다.

그리고 지인 출신이었음에도 왜구를 통쾌히 격파한 김성조 등에 대해서는 명종임금은 일등군공이라 하여 종3품 건공장군(建功將軍) 가선대부도총부 부총관이라는 파격적인 벼슬을 제수하는 한편 그의 아우 김성지에게는 어모장군이라는 파격적인 직함을 내렸다.

가의대부는 종2품 문관의 품계이며, 도총부(都摠府)는 오위(五衛)의 군무(軍務)를 맡아보던 중앙의 최고 군사기관, 부총관(副摠管)은 오위도총부에 속한 종2품 벼슬이었다. 김성조는 전공에 의한 품계 포상과 증직으로 만족하고 건공장군에 따른 직책인 가의대부(嘉義大夫) 도총부부총관을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병진왜변에서는 김성조의 아우 김성지(金成祉)의 공이 커 ‘어모장군’을 증직 받았다. 심재 김석익의 「탐라인물고(耽羅人物考)」에는 김성조가 을묘왜변 전승의 공으로 건공장군 직을 받았다고 수록했다.

김성조의 장남 김용호는 임란 때 순천 방담첨사(防踏僉使)로 왜적을 토벌한 공이 있었다. 둘째 김용연은 승의부위로 기여했다. 존망지추의 향토를 수복하고 왜변을 극복한 데에는 최초 선봉장이었던 김성조 장군과 그 가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수문 목사는 을묘왜변의 전공을 인정하여 포상을 내린 임금의 은덕을 기리고 어의에 보답하는 뜻으로 그해 겨울(명종 11년, 1956) 제주목 관아 안 연희각 동북쪽에 망경루(望京樓)를 건립하고 왜구의 침입을 경계하던 보루로 삼았다. 망경루는 한말까지 보전되었다가 1913년 일제에 의해 헐렸다. 관덕정(觀德亭, 보물 제322호)와 인접한 제주목 관아는 사적 제380호. 지정면적 1만 9533㎡으로 특히 조선시대 제주목을 다스리는 정3품의 당상관 목사(牧使)가 집무하는 곳이다. 지금 망경루는 김영훈(金榮訓 1945~2018) 제주시장의 주장으로 2007년 2월 4일 복원 준공한 것이다.

▲ 망경루의 복원(2007.2.4.)

◆ 표석을 치우고 전승기념시설을 조성하라

2000년 제주시에서 세운 <을묘왜변전적지> 표석이 다리(오현교) 위에 있어 역사성으로 보나 제주시의 미관상 매우 잘못되어 있다.

을묘왜변(1555)은 왜선 70여척에 왜구 1000여명으로 전라도 염암 당량성을 점령하고 어란포 장흥 강진 진도 일대를 분탕질하다가 퇴각하면서 제주도를 점령하여 한반도와 중국침략의 교두보로 삼고자 일으킨 침략이었다. 제주성의 함락은 곧 제주도의 함락이었으므로 제주도의 흥망이 달린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전쟁을 전승(全勝)으로 물리친 이가 4인의 돌격대(馳馬突擊隊)로 명종실록에 이름이 명시되어 있어 이들의 공훈과 전투지역이었던 남수각 동쪽 구릉이 제주도 역사에 바로 기록되어야 한다.

전적지 표석의 현위치는 오현교 동쪽 교각 위의 인도를 가로막고 세워 있어서 사람들의 보행에 지장이 있을 뿐만 아니라 흡연지 내지는 소변소, 구두닦이 발판으로 쓰이고 있어 문화도시 혹은 역사의 도시라고 할 수 없다. 더구나 시민, 관광객, 관련 학자들로부터 ‘다리 위의 전적지’라는 손가락질과 가래침 질로 제주시장과 해당 동장을 비롯한 시청 요직자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을묘왜변전적지> 표석은 을묘왜변의 실제 주 전쟁터인 운주당 근처, 송의원 네거리나 신산모루로 옮겨야 할 것이다. 나아가 ‘전적지’가 아니라 김성조를 비롯한 4인 영웅들의 <을묘왜변 전숭지>로 표시하고 기념시설을 조성하여 도보여행 답사코스로 개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특히 4용사는 정로위 김직손 외에는 돌격대를 자원한 김성조 이희준 문기봉은 본래 제주사람 민간인이므로 관민합동 향토수호 작전의 전국표본이 될 만한 영웅들이다.

이 같은 사실을 토대로 김성조 건공장군의 정신을 발굴하는 콘텐츠로 신산모로 일대에 ‘장군로’ 조성, 위인전 발간, 뮤지컬 연극, 기념시설(탑, 동상, 공원), 을묘왜변역사관과 제주읍성 복원 등의 부대사업도 필요하다. 특히 제주읍성 복원과 연계하여 제주도민의 자립적 향토수호 정신을 확보하는 방안도 앞으로 진행해야 될 과제라고 생각한다. 이에 앞서 <건공장군김성조 현창세미나>를 통하여 외세침략 극복의 역사와 문화컨텐츠를 올바르게 제시하고 풍성히 해주기를 바란다.

자연자원에만 의존하는 제주관광개발에서 새로운 역사문화자원으로 전환할 수 있다. 나아가 다리위의 표석으로 그동안 훼손되었던 전현직 시장님과 공무원들의 명예를 회복할 수가 있을 것이다.


◆건공장군현양추진위원회 구성

김정택 건공장군현양추진위원회 위원장
김정택 건공장군현양추진위원회 위원장

지난 2021년 2월 26일 고문 회장단 회의에서 김광욱 회장의 제안에 따라 건공장군현양추진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한다. 나주김씨인충공파종친회 산하에서 발족하고 범시민운동으로 확대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우선 관련 역사자료를 수집하여 시민사회에 건공장군 김성조의 존재와 공헌을 알리는 콘텐츠 구축과 홍보작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최종목표를 건공장군 동상 건립과 주변 정화에 뒀다.

추진위원회 위원은 다음과 같다.
-.위원장: 김정택
-.위원 :김하종, 김정희, 김재환, 김시호, 김광욱, 김창해, 김병립, 김희현, 김장영, 김경국, 김영구, 김익수

이글은 김정택 건공장군현양추진위원회 위원장이 본사에 메일을 보내온 것을 실은 내용이다. 이후 건공장군 김성조에 관한 연구 논문 등 경과보고 자료를 찾아 계속 올릴 예정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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