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주 칼럼](30)재미있는 설화 – 돌하르방 선녀탕①
[장영주 칼럼](30)재미있는 설화 – 돌하르방 선녀탕①
  • 뉴스N제주
  • 승인 2021.08.01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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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주 교육학박사
명예문학박사
한국해양아동문화연구소장
한국사진작가협회회원
장영주 설화 작가의 탐사 현장 모습
장영주 설화 작가의 탐사 현장 모습

"남극사인박계첨 추사체 진품명품에 보내자."

설화 따라 맞춰가는 퍼즐 추사 길

계첨 박규안(朴奎安)

조선 시대의 명필가라면 추사 김정희 선생을 꼽는다. 그의 문장 솜씨며, 글솜씨야말로 전대의 대가였기 때문이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문촌리라는 소식을 듣고 어느 마을(곽지리)에 들렸다.

이때 추사 선생이 박규안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의 두뇌가 영특함을 높이 평가하여 박규안을 수제자로 삼았다.

그때부터 박규안은 추사 선생과 같이 생활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히게 되었다.

“자네의 재능이야말로 으뜸이로세. 여기서 그냥 썩기는 아까우이. 그러니 나와 함께 한양으로 올라가게나.”

추사 선생은 박규안의 재능을 너무 아까워한 나머지 한양에 갈 때 데리고 갔다.

박규안은 한양에서 밤낮으로 추사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과거 시험에 응시한 결과 장원 급제하였다.

과거 시험장에서 시험관들은 모두 추사 선생이 쓴 글인 줄 알고 심사를 하는 데 시간이 걸릴 만큼 워낙 뛰어난 솜씨였다.

추사 선생이 썼는지 박규안이가 썼는지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딱 두 사람 추사 선생과 박규안이었다.

“체, 저런 촌놈에게 장원 자리를 내주었다니….”

한양의 선비들은 모두 박규안을 시기했다.

“저놈을 그냥 두었다가는 우리들의 체면이 말이 아니니 저놈을 없애버리자.”

한양의 선비들은 무서운 계략을 세워 박규안을 죽이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추사 선생은 사흘 낮, 사흘 밤을 슬피 울다 박규안에게 친필로 ‘남극사인’이라 써서 유골과 함께 마을로 보냈다고 전해 온다.(출처 장영주, 민족전래동화, 아동문예, 1991)

주) 위 설화에서 파란색으로 표시된 부분에 주목하고자 한다.
여러 자료를 통해 필자가 어렸을 때 들은 이야기를 통해 퍼즐을 맞춰보면 계첨 박규안은 계첨 박계찬으로 추사 김정희 제자로 전해오고 있는 인물로 볼 수 있다. 즉 박계찬이란 인물은 가상 인물로 박규안이 계첨이란 아호를 썼기에 그냥 성에 아호를 붙인 것으로 추정되는바(박혜원이란 설도 있다) 여기서 계첨은 김정희의 아호를 뜻하기도 한다는 말이 있다.

또한, 남극사인이란 남쪽(제주도)에 있는 자신의 이름을 적은 것으로 남극사인박계첨이라 써 준 글이 박계안 후손(증증손자) 박치순이 소장하고 있다는 설도 있는데 여기서 박치순은 혹 곽지 박치@ 또는 박기@의 선친이 아닌가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이는 필자가 곽지리 출신으로 어렸을 때 박치선 또는 박기정 댁에서 나온 붓글씨(박규안이 김정희와 함께 서체를 연구하던 때 연습 했던 글씨)가 있는 창오지(당시엔 선화지가 아닌 창오지에 붓글씨를 쓴 거로 기억한다)를 얻어다 정년(연의 종류)을 만들어 띄우며 연싸움을 하던 기억을 되살려 본다면(추사 김정희의 글씨 병풍을 소유하고 있다는 동네 어른이 증언도 있다.

다만 박치순과 필자의 나이 차가 68세로 생가에 드나들기엔 너무 간격이 큰 것은 사실이나 박치순이 필자 나이 20세에 사망했다는 정황에 비춰 본다면 그 집에 묻혀 있던 당시(궤짝 밑 바닥이라 들음) 박규안이 김정희와 함께 서체를 공부하던 창호지일 가능성이 영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 여겨진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 유배 9년을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가면서(귀양 올 때 조천포구를 통해 제주에 들어왔다.) 거기서 대정골까지 서쪽 한길(일주도로)을 통해 간 거로 추정되는바 귀양이 풀려 한양으로 귀향할 때도 왔던 길 즉 서쪽 한길을 통해 조천항으로 갔을 거란 추론을 해 보면 대정골에서 조천 포구로 가는 도중 곽지현(제주도에 현이 고려 시대에 17군데 있었는데 곽지리가 행정의 중심지였던걸 생각해 내서, 곽지리에 문촌이란 소식을 듣고 중간에 휴식을 취할 양으로 곽지리에 머물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본다)이 문촌이라 알려졌기에 곽지리에 들려 박치@ 선생 또는 섯동네 박기@ 선생 댁에서 며칠 머무르면서 박규안을 제자로 삼아 소일하다가 그를 한양에 데리고 가서 과거 시험에 응시하게 하여 장원 급제하니 그곳 한양 선비들의 모함으로 죽임을 당해 그 시신을 곽지리 박치@ 또는 박기@ 댁에 보내며 ‘남극사인박계찬’이란 글을 동봉한 것으로 추정되는바 장영주, 애월읍 역사설화스토리텔링에는 어느 마을을 곽지리로 표시하는바 이에 따른 약간의 보충자료는 뉴제주일보에 기제 되었기에 그 자료를 제시하고자 한다(필자는 설화 학자로 스토리텔링에 주안점을 두고 있어 혹여 역사성에 보탬과 수정이 있을 시 이는 사학자들이 근거를 제시하며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덧붙여 말한다면 김찬흡, 제주애월읍명감, 제주향토연구회, 2011. 12 쪽에도 추사 문하생 박계첨을 곽지리 저명인사로 분류해 놓고 있다. 필자는 이사로 참여했다. 141쪽에 나와 있는 자료를 옮겨적으면 다음과 같다.

「박계첨 (1824-몰) 곽지, 서예가, 호는 자기, 일명 박규안, 본관은 밀양 박 씨 규정공파 24세손 연안공계(곽지 박 칩), 곽지 마을 ‘구린질-동네’에서 박수건 朴秀建 아들로 태어나 한학을 즐겼다.

1840년 추사秋史 김정희가 9년 제주 유배 때에 문하생으로 들어가 수준급 서예가로 성취한 세 사람을 추사삼문秋史三門이라 한다. 첫째 박계첨과 김구오金九五(제주 성안)는 추사체를 완숙할 정도로 키우고, 강도순姜道淳(대정 성안)은 글씨도 잘 썼을 뿐만 아니라 그림도 잘 그렸다.

추사는 제주 성안에 들러 김구오를 격려하고 돌아가다가 곽지 마을에 들러 박계첨 댁에 며칠 머물고 갈 정도로 친숙하여, 전해지는 말이 많으며 이 마을에는 추사체의 글씨가 많이 남았던 것을 일본강점기에 일본인의 매우 좋아해 그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박계첨은 문과 급제한 장령 박수룡(1829-1861)의 조카이며 그 영향을 받아 대성한 것이다. 후손은 곽지 마을에 없고 다만 장령의 증손 박경후朴京厚(1928-)는 4·3사건 직후 상가리에서 고내리로 옮겨 산다.<제주사 인명사전 >을 보라.」

장영주 설화 작가의 탐사 현장 모습
장영주 설화 작가의 탐사 현장 모습

● 뉴제주일보 승인 2021. 03. 15. 20:11

추사 유배길 3코스 - 사색의 길(완)

당시 그의 제자가 3000명이 된다는 말은 추론일 뿐이고 다만 대표적인 제자로 강사공 박계첨 이시형 김여추 이한우 김구오 강도순 강기석 김좌겸 홍석우 김병욱을 들 수 있다.

그중 박혜백(朴蕙百)은 곽지 사람으로 호가 계첨(癸詹)인데 추사로부터 글씨와 인장 새기기, 붓 만들기 등을 배워 제주필원으로 꼽혔다. 그는 추사의 인장 180여 개를 찍고 이름 붙인 ‘완당인보(阮堂印譜)’를 만든 것으로 알려졌고, 상경 길에 따라가 그의 재주를 시샘하는 이들로부터 독살을 당했는데, 애석해하며 추사가 써준 ‘南國詞人朴季詹(남국사인박계첨)’이라는 신판 글씨가 그의 후손에 전한다 한다.

네이버에 김정희 제자를 검색해 보니 노재준의 박혜련과 관련된 글이 있기에 몇 자 인용해 보면,

박혜백을 위해 써준 신판 글씨 <南國詞人朴季詹(남국사인박계첨)>를 추사기념관에서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다.

주) 확인차 추사기념관에 갔으나 곽지리란 말은 처음 듣는다며 이런 귀중한 사료를 그냥 넘어 갈리 없다는 말에 다시 곽지리 향토지를 만들 때 직접 후손이라는 사람을 만나 자초지종과 남극사인박계첨이란 글씨를 확인해 볼 생각이다. 이 글씨체가 남아 있다면 진품명품에 의뢰해 진위를 판명받아 보는 것도 한 방편일 것이다.

● 박혜백

박혜백은 자(字)가 계첨(癸詹)이다. 《완당전집》에는 박혜백에 관해 쓴 시 ‘차계첨(次癸詹) 3수’, ‘蕙百將歸 病懷甚無憀 取其袖中舊白毫 書贈’, ‘癸詹從漂船歸人 得日本刀而見示 漫此走呼贈之’ 등이 실려 있다. 그리고 박혜백이 추사에게 글씨의 원류(源流)를 터득하는 방법을 청하자 답한 글도 실려 있다.

무엇보다 박혜백은 추사의 인장을 찍어 엮은 《완당인보(阮堂印譜)》를 남긴 인물이기에 주목되어 온 인물이다. 이 《완당인보》는 추사의 인장이 무려 180방이 실려 있어 추사 글씨의 진위를 판단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다.

1975년 8월 30일 동아일보에는 “대정 추사의 적거지에 따라가 수학하던 박계첨은 추사가 육지로 돌아갈 때 데리고 갔으나 뜻을 펴지 못하고 요절했다. 박 씨 가문에 전해오는 말로는 박계첨이 어느 날 ‘유정(柳亭)’이라는 시제를 걸고 서울 선비들과 재능을 겨뤘는데 그의 시작(詩作)이 너무나 뛰어난 통에 서울 선비들의 시기를 사 술잔에 독을 타 독살을 했다는 것이다”

2012년 제주의 한 신문의 ‘제주사 인물 이야기’란 연재에서 박혜백의 생몰을 ‘1824~1850’이라고 쓰고 있다.

1969년 6월 14일 자 경향신문에는, 신판 글씨는 예서로 쓴 <南國詞人朴季詹(남국사인박계첨)>이다. ‘제주도 문인 박계첨’이란 뜻이다. 여기서는 계첨을 ‘季詹’으로 쓰고 있다.

이 글씨는 1975년 당시 박혜백의 종증손이 되는 박치순(당시 88세) 옹이 소장하고 있었다. 박치순 옹은 세상을 떠났을 것이기에 지금은 후손이 소장하고 있을 것이라 한다.

○ 제주유배문학연구에서
양순필, 제주유배문학연구, 도서출판 제주문화, 1992.에서 얻은 추사 김정희 유배자료

추사의 불우한 유배 생활 제주도와 북청 등지에서의 11년 지루한 세월은 서간이 아니었다면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서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풀어 놓았다.

추사의 한글 서간은 34통 발굴 정리되었는데 그중 15통은 제주도 대정현 유배 생활 동안 쓰인 것으로(유보 6통 별도) 두 번째(첫째 부인 한산 이 씨가 변을 당해) 부인 예안 이 씨(32통)와 며느리(2통)에게 쓴 서간을 위 계첨 박규안과 연관성에서 몇 건을 들여다보면,

1)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되어 대정 적거소에 도착한 후 부인에게 쓴 편지에 해남을 떠나 제주도로 오는 과정에서 풍랑을 만났다고 적었지만 어디에 도착했는지는 편지에 나와 있지 않다. 다만 양 학자는 제주도 화북진 포구에 당도했다고 풀이하고 있다.

여기서 필자와 다른 연구자는 조천포구로 들어 왔다(추사 김정희는 그나마 조정에서 상당한 배려를 해준 인물로 본다면 조천포가 맞는 것이다. 조천포구에 내리면 조천관이 바로 인접해 있어 높은 직책의 양반들이 귀양이나 장사꾼들이 오갈 때 조천관에서 묶었다.

장한철 표해록에도 조천관에 묶었다는 기록이 있고 그곳에는 연북정이란 정자가 있어서 한양에서 임금이 부름을 받으면 곧장 올라갈 준비를 할 수 있는 곳이다. 다만 광해는 조정에서 아주 위험한 인물로 봤기에 유배 올 때 조천포구가 아니 어등포로 배를 검은 천으로 드리운 채 귀양 온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2) 9월 27일 하루 만에 해남에서 제주에 도착하여 제주성에서 대정성 까지는 서쪽으로 팔십 리 떨어져 있는데, 이 부분에서는 필자의 소견과 대동소이하다. 당시 제주도는 일주도로(한길) 하나밖에 없는지라 그 길을 통해 유배 가는 데 나무가 울창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이 묻어 나는 내용의 있어 이를 뒤 받침 한다고 본다.

3) 10월 1일 대정현에 도착한 추사는 포교 송계순의 집 밖거리를 반분하여 생활하였다고 하는데 필자가 대정우물터 앞 추사 적거지로 예상되는 집을 살펴본 결과 이와 거의 대동소이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4) 후일 추사는 강도순의 집으로 적거지를 이동, 마찬가지로 밖거리에 생활한 것으로 현재 고증되어 밀랍이 제시되어 있다.

5) 1848년 12월 6일 석방 명을 받았으나 추사에게 전해지기는 12월 19일이었다 한다. 다음 해 1849년 정월 7일에 대정을 출발하여(서쪽으로 돌아왔다는 가설을 필자와 동일) 조천포구(여기서는 나타나지 않음)로 가는 도중 제주성 김리 집에서 묶었다는데, 여기서 필자와 다른 일이 생겨난다.

필자는 서쪽 한길을 통해 동쪽으로 돌아가는 도중 곽지현(곽지리)에 들려 계첨 박규안 집에 들려 며칠을 소일했다고 보는 데 여기에는 그런 기록이 편지에는 없다. 이 부분이 핵심 분야이다.

○ 추사 김정희, 유홍준, ㈜창비, 2018.에서

서장,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

유홍준은 본 책을 쓰며 양순필, 제주유배문화연구, 제주문화, 1992.를 참고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본 내용은 앞 양순필 내용과 비슷한 점이 많은 관계로 그냥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 오는 길과 적거지 관련, 유배가 풀려 한양으로 되돌아가는 길의 관련성을 이기 하는 차원에서 설화의 넋두리를 조금 가미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이리하여 석양 무렵에 곧바로 제주성 화북진에 당도했네, 여기가 바로 하선하는 곳인데 구경 나온 제주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 “오늘 풍세가 배를 이토록 빨리 몰고 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라고 했다네. 그래서 나 또한 이상하게 여겼네 (전집 권2, 아우 명희에게, 제1신)」

(편지 내용에 화북진이란 글자가 있는지? 여러날 걸려야 완도에서 제주로 올 수 있는데 하루 만에 다다랐다는 것은 가장 가까운 거리를 택했다는 것인데, 그건 관곶(조천 소재)이라면 조천포구가 될 상 싶기도 하고, 구경나온 사람들이 나오는 데 그 당시 구경나올 사람들이 있다는 건 화북진보다는 조천포구(조천관이 있어서)가 많은 사람이 왕래하고 기와집이 수십 채 있었다는 말과 연관성에서 본다면 가능한 가설이라 본다.)

장영주 설화 작가의 탐사 현장 모습
장영주 설화 작가의 탐사 현장 모습

추사가 풍랑 속에 제주로 건너간 사실은 이내 하나의 건설로 미화되어, 훗날 민규호는 「완당 김공 소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주는 옛 탐라인데 큰 바다가 사이에 끼어 있어 이곳을 건너가려면 보통 열흘에서 한 달 정도가 소요되곤 했다. 그런데 공이 이곳을 건널 적에는 유독 큰 파도 속에서 천둥 벼락까지 만나 죽고 사는 것이 순간에 달린 지경이었다.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 넋을 잃고 서로 부둥켜안고 통곡했고, 뱃사공도 다리가 떨려 감히 전진하지 못했다. 그러나 공은 뱃머리에 꼼짝 많고 앉아서 소리 높여 시를 읊으니 시 읊는 소리와 파도 소리가 서로 지지 않고 오르내렸다. 공은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키며 “사공이 힘껏 키를 끌어당겨 저쪽으로 향하라!” 했다. 그러자 항해가 빨라져 마침내 아침에 출발하여 저녁에 제주에 당도하니 제주 사람들이 “날아서 건너온 것 같다” 라고 했다.(전집 권수, 완당 김공 소전)

당시 제주는 유배객이 들어오면 그것이 한차례 구경거리가 되었다. 추사는 ‘영주 화북진 도중’이라는 시를 지어 이렇게 읊었다.

마을의 아이들이 나를 보고 몰려듦은/쫓겨난 신하 생김새가 가증스러워서겠지./마침내 백 번 꺾여 천 번 갈린 곳에 오니/남극성 은혜로운 빛 바다에 파도 없네.

(남극성이란 말이 나온다. 노인성이라고도 하는데 이 남극노인성은 제주도 서귀포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상서로운 별이다. 이 별을 보면 무병장수한다는 말이 곧잘 중앙에 알려져 제주로 귀양 오든 문인들의 풍류 차 오든 이별을 보고 싶어 하는 건 인지상정이다. 추사도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던 거로 기록되는데 데 아마 노인성에 대한 설화를 들은 것 같다.)

「대정으로 가는 길의 절반은 순전히 돌길이어서 인마(人馬)가 발을 붙이기 어려웠으나, 절반을 지난 뒤부터는 길이 약간 평탄했다네. 그리고, 또 밀림 속으로 가게 되어 하늘빛이 겨우 실낱만큼이나 통했는데 모두가 아름다운 수목들로 겨울에도 파랗게 시들지 않는 것들이었고, 간혹 모란꽃처럼 빨간 단풍 숲도 있었는데 이것은 또 육지의 단풍과는 달리 매우 사랑스러웠으나 정해진 일정에 황급한 처지였으니 무슨 느낌이 있었겠는가.(전집 권2, 아우 명의에게, 제1신)」

(당시 중산간 길이 제주현에서 대정현까지 이어져 있었는지는 알아볼 필요가 있다. 제주에는 한길이라 해서 길이 하나밖에 없던 시절이라 중산간 길이 만약 있었다면 그 길은 아주 좁고, 꼬불꼬불하여 한길(180여 킬로미터, 현재 해안도로 240여 킬로미터)로 가는 것보다 몇 배 힘이 더 들었을 것 같은데, 가는 길 며칠 동안 숙박 관계며 위치추적 관계며 불편함이 있었을 거란 추론을 해 본다.

필자도 어렸을 때 곽지에서 제주 성내까지 20킬로를 울퉁불퉁 돌길을 걸어서 가 봤는데 6시간 걸렸다. 당시 추사 일행은 대정현까지 25시간쯤 걸리지 않았나 보면 중산간 도로라는 게 좀)

그런 쓸쓸한 늦가을의 서정을 안고 추사는 1840년 10월 2일 대정현에 도착했다.

● 가시 울타리를 두르고

추사가 대정현에 와서 처음 유배 처로 삼은 곳은 대정읍성 안동네(안성리 1682번지) 송계순의 집이었다.

「정군(鄭若)이 먼저 가서 군교(軍校)인 송계순의 집을 얻어 여기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 집은 과연 읍 안에서는 약간 나은 집인 데다 꽤 정갈하게 닦아놓았더라네.

온돌방은 한 칸인데 남쪽으로 향하여 가느다란 뒷마루가 있고, 동쪽으로는 작은 부엌이 있으며 부엌 북쪽에는 또 두 칸의 부엌 칸이 있고 곳간이 한 칸 있네. 이것이 바깥채라네.

또 안채로 이와 같은 것이 있어 주인은 전처럼 안채를 쓰고 내가 바깥채에 기거하기로 했다네. 다만 바깥채는 이미 절반으로 갈라서 경계를 만들어놓아 손님을 맞이하기 충분하고, 작은 부엌을 장차 온돌방으로 개조한다면 손님이나 하인 무리가 또 거기에 들어가 기거할 수 있을 것인데, 이 일은 변통하기가 어렵지 않다고 하네.(같은 글)」

이후 추사는 무슨 사연에서인지 거처를 대정현 안성리 강도순의 집으로 옮기고, 또 유배가 끝날 무렵 식수의 불편 때문에 안덕계곡이 있는 대정현 창천리로 한 번 더 옮긴 것으로 전해진다.

서귀포시에서는 1983년, 추사의 유배지 가운데 그가 가장 오래 거주했던 강도순의 집(안성리 1662번지)을 복원하고 그 앞에 추사 유물전시관을 세웠다. 고증에 따라 60평 대지에 안거리 밖거리 모거리 이문거리라는 초가를 지었다. 2007년에는 유물전시관을 헐고 승효상이 설계한 제주 추사관을 새로 지었다. 이 건물은 세한도 그림에 나오는 집을 모델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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