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주 칼럼](29)재미있는 설화 – 범섬 선녀탕⑤
[장영주 칼럼](29)재미있는 설화 – 범섬 선녀탕⑤
  • 뉴스N제주
  • 승인 2021.07.25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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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주 교육학박사
명예문학박사
한국해양아동문화연구소장
한국사진작가협회회원

□ 범섬과 최영 장군

○ 범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법환동 남쪽 1.3㎞ 해상, 삼매봉 아래에 있는 외돌개에서 바로 오른쪽으로 건너다보면 보이는 무인도이다.

역사적으로 고려를 지배했던 원나라의 마지막 세력인 목호들이 난을 일으키자 최영 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제주에 온 후, 그들의 마지막 본거지로 삼았던 이 섬을 완전 포위해 섬멸시킴으로써 몽고지배 100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곳이기도 하다. 섬 주위에는 크고 작은 해식동굴들이 있다.

또한, 섬 위쪽은 평평하며 남쪽 가장자리에서는 용천수가 솟는다. 동북쪽 절벽에는 콧구멍처럼 생긴 바위도 있다. 정상부에는 사람들이 거주하였던 흔적과 ‘애기물’이 있어 억새가 무성하다.

○ 최영 장군 이야기

우리나라에는 훌륭한 명장들이 많다. 풍전등화 같은 시기에 즉 난세는 영웅을 만들어 냈다. 그 중 최영 장군은 고려 말 명장이다.
원나라의 지배로부터 구국의 일념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그의 숭고한 정신은 탐라(제주)에 흔적이 나타나 있기에 그의 발자취를 찾아 나선다.

출처 네이버, 최영 장군 묘 뒤편에 부친의 묘가 있다

● 추자도 최영 장군 사당

최영 장군 사당 출입문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11호(1971년 8월 26일 지정),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추자면 대서 4길 3-13에 위치 해 있다.

고려시대 최영(1316∼1388) 장군은 고려 공민왕 때 명장으로 묵호가 난을 일으키기도 하고 목사로 온 관리들이 폭정이나 피납 등으로 백성들이 힘들어 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최영 장군으로 하여금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군사를 이끌고 탐라로 원정을 가는 도중에 거센 풍랑을 만나 잠시 피해 추자도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 때 최영 장군이 바람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도민들에게 어망편법 및 그물로 후리질하는 방법, 주낫질하는 방법 등 조어(釣魚) 기술을 가르쳐 생활에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러한 장군의 위덕을 잊지 못하여 사당을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춘추에 봉향하고 있다.

최영 장군 사당은 면적 16.5㎡, 평면 세 칸의 우진각이며 기와지붕 형태이며 현판에는 ‘최영대장신사(崔瑩大將神祠)’라고 썼고 내부에는 영정과 돌 위패를 모시고 있다.

주) 동주(철원) 최 씨 홈페이지에 의하면
2012년(壬辰) 11월 7일(음력 9월24일)  동주 최 씨 최영장군 후손 (금학회) 15명이 제주도 추자도 최영대장신사에 참배하였습니다.

고려 말 최영 장군이 제주(탐라)도가 100여 년간 원나라에 지배를 받으면서 목호족들의 온갖 횡포와 핍박을 받던 백성들의 주권을 찾기 위하여(牧胡討伐) 1374년(공민왕 23년) 음 9월 23일 추자도에 상륙한 이래 후손들이 662년 만에 처음으로 참배하였기에 더욱 뜻깊었습니다.

이때에 최영 장군은 추자도 백성들에게 어망을 만들어서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었음으로 그 은의를 생각하여 지역민들이 사당을 건립하고 “조국군통대장 최영 장군”이라는 신위를 봉안하고 또한 옆에는 武愍公 최영 장군 영정을 봉안하고 해마다 제향을 지내왔으며, 그 옆에는 “신묘금지비(神廟禁地碑)”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처음 사당을 건립한 년도는 알 수 없지만 1935년1차로 재건축하고 1974년 2차로 복원하였으며, 2011년 다시 재 건립하여 지역민들이 운영 관리하여 깨끗하게 보전되어 있을 뿐 아니라 유명한 영광굴비가 이곳에서 잡아 세계적으로 출하된다 하니 최영 장군의 은덕이라 믿기에 지역민들의 더욱 윤택한 생활함이 보여, 후손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되어 더욱 감회가 깊었습니다.

고려 말 삼도도통사 최영 장군은 군사를 거느리고 선박(목선)을 타고, 여러 섬(탐라도, 추자도)등을 폭풍으로 수차례 건너다니면서 전쟁하여 승리를 하여 이곳 백성들이 100여 년간 원나라에 지배를 벗어나 명실상부한 자주성을 회복하였기에 “최영의 목호토벌군 전승 기념비”라도 세워 제주도 또는 대한민국의 민족문화 계승 발전의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그 후 전승 기념비가 세워 졌다).

왼편에는 영정을 그 앞 오른편에는 위패가 있다.

사당 안에는 비석 모양으로 만들어진 위패가 높이는 1m가량이며, 표면은 검은색이며 ‘조국도통대장최영장군신위
(朝國都統大將 崔瑩將軍 神位)’라 쓰여 있다.

1964년 사당 단청 및 담장을 보수하였고, 1970년 국고보조에 의하여 건물이 복원되었으며, 대서국민학교 북서편 기슭에 위치한 사당은 건평 5평, 평면 3칸으로 제실(祭室)을 마련하였는데 지붕은 기와이며 우진각 형태이다.

사당 안에는 1m 높이의 비로 만들어진 위패가 있는데, 사당 안에는 ‘조국도통대장최영장군신위(朝國都統大將崔瑩將軍神位)’라고 새겨져 있다.

사당 남동쪽에 세워진 안내판 바로 옆에 최영사당금표(崔瑩祠堂禁標)가 있는데, 비의 앞면에는 ‘신묘금지비(神廟禁地碑)’라 음각되어 있으나 측면 글자는 많이 마멸되어 있다. 지금도 추자도민은 최영의 은덕을 기리고,  풍어와 농사가 풍작이 되도록 기원하고 있다.

대제는 본래 여름철이다. 여름철 멸치 어장의 형성과 최영 장군을 모시는 것이 관련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수협에서 대제와 관련 사항을 맡고 있다. 대제를 맡으면서부터 祭日을 봄철로 옮겨 제사를 모시기 시작했다.

이는 주요 어업 자원이 조기로 바뀌었고 그 성어기가 봄철이기 때문이다(1999년에는 양력 4월 1일에 제를 올렸음). 「큰새미」라고 하는 샘에 3∼4일 동안 금줄을 쳐 두었다가 그곳의 물을 떠다 제사에 썼고, 금줄을 쳐서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았다.

제물로는 삼치·시루떡·시금치·산나물·듬부기·녹두나물 등을 준비한다. 돼지고기를 쓰지 않는 것도 특징이라 하겠으며, 최영 장군에 대한 제사뿐만 아니라 불의의 사고로 생명을 잃은 어업인의 넋을 위로하는 제를 지낸다.

● 최영의 일대기
최영(崔瑩, 1316년 ~ 1388년)은 고려 말기의 장군, 정치인이다. 본관은 동주이고, 시호는 무민(武愍)이고, 최원직(崔元直)의 아들이다. 우왕의 왕비인 영비 최 씨는 그의 서녀였다. 이인임 등을 멀리하였고 1388년 이인임, 염흥방을 제거하였다.

유교 사대부와 동맹을 맺은 이성계와 대립하다가 명나라가 서북 면을 요구하자 요동정벌을 주장하여 요동정벌군 총사령관 겸 팔도도통사에 임명되었으나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의 반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최영 장군 사당 앞 전경

최영 장군 사당 앞으로 항구가 보인다.

● 최영 장군과 범섬

출처 새안교 다리 옆 안내문
서귀포항에서 남서쪽으로 5㎞해상에 위치한 범섬은 멀리서 바라보면 큰 호랑이가 웅크리고 앉은 모습과 같아 붙여진 이름이다.
수려하면서도 면면이 기괴한 섬의 자태는 신비함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명소로 유람선으로 섬을 둘러 볼수 있다.
섬 주변에는 기복이 심한 암초가 깔려 있어 참돔, 돌돔, 감성돔, 벵어돔, 자바리 등이 많다.

● 막숙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일어선 다음에도 묵호들은 천성이 난폭하고 호전적이어서 제주도를 점거하고 난동을 부렸는데 이를 ‘묵호의 난’이라 한다.
명나라가 제주에서 기르는 말을 보내 줄 것을 요구하자 조정에서는 말을 가지러 제주목에 관리를 파견하였으나 원나라의 목자들은 원세조께서 기르는 말을 명나라에 보낼 수 없다고 하면서 관리들을 죽이고 난을 일으키자 공민왕 23년(1374)에 임금은 최영에게 군사를 주어 토벌케하니 최영 장군은 군사 25,605명을 병선 413척을 태우고 명월포로 상륙하여 그들을 격퇴하자 목호 잔당들이 후퇴하여 오음벌판(지금 강정)에 진을 치고 최후의 결전을 하였다.

목호군은 대패하였고 목호군의 대장 석질리필사와 그의 가족 및 장수들이 법환 마을 앞 바다에 있는 범섬으로 도방을 갔다.
이에 최영은 법환 포구에 막을 치고 군사를 독려하며 묵호의 잔당을 섬멸했는데 서 유래하여 ‘막숙’이라고 한다.

해녀체험센터

국가지정문화재 공개 제한 안내문

● 배염줄이

고려 공민왕 23년(1374년) 최영 장군이 이끈 정예군이 몽골족 목호군을 쫓아 이곳으로부터 앞의 범섬으로 건너갔다는 사설에 유래해 배염(배연)줄이라는 지명이 붙여졌다.

최영 장군은 제주도 사회를 장악했던 몽골족 목호세력과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목호군 수뇌부가 계속 밀리다가 범섬으로 도망쳐 들어가자 최영 장군의 지휘 하에 고려군은 다수의 전함 등을 이어 범섬으로 건너갔다.
이들 고려군과의 전투에서 묵호군 수뇌부가 궤멸되었다.

이로써 고려는 100여 년 간 몽골족에게 빼앗겼던 제주도 지역을 되찾는 결정적인 계기를 맞았다.
여기는 고려군과 몽골족 목호군 간 벌어졌던 범ㅅ검 전투의 출발지라는 역사적 사연이 깃들어진 곳이기에 표석을 세운다(김일우). 서기 2002년 7월 3일 서귀포문화원 법환동 마을회

 

● 오다리

법환동 1517번지 일대의 넓은 남쪽 해변이다.
오다리라는 유래는 명확치 않다. 도망친 목호두목과 잔병들을 소탕하기 위한 군사 주둔지이자 군사 요충 지대였는데 그 때 ‘오달’이라는 장군이 이 곳 일대에서 사병을 훈련시키고 말을 조련 시켰다고 한다.

이에 군사 훈련을 맡았던 장군의 이름을 따서 불린 이름이라고도 한다. 지금도 성을 쌓았던 흔적을 몰 수 있다.
또 하나의 유래로는 ‘옷’은 갈매기나 오리를 ‘도리’는 다리를 나타내는 제줏말로 지형의 생김새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 섬속의 섬 전설

○ 문섬 전설
옛날 어느 사냥꾼이 한라산에서 사냥하다가 그만 활집으로 옥황상제의 배를 건드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에 크게 노한 상제가 한라산 봉우리를 뽑아 던졌는데 그 조각이 흩어져서 서귀포 앞바다의 문섬이 되었고 뽑힌 자리는 백록담이 되었다고 한다.

○ 섶섬 전설
뱀이 용이 되려 노력한 흔적이 있다는 유래가 전해 온다.
 
○ 범섬 전설
큰섬과 새끼섬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멀리서 보면 큰 호랑이가 웅크려 앉은 형상 같아서 범섬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콧구멍처럼(설문대할망의 발길질 흔적이라 한다) 생긴 바위도 있다.

○ 새섬 전설
한라산이 화산 폭발하면서 봉우리가 깎여 이곳으로 날아와 섬이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 외돌개 전설
예전에는 외돌괴라 했었다. 괴는 돌을 이르는 제줏말이다. 이제는 외돌개라 한다. 개는 혼자라는 말이다.

삼매봉 앞바다에 가면 외돌괴 바위가 우뚝 서서 남쪽 바다를 노려보며 늠름하게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제주도 서귀포시 천지동에 있는 바위섬. 명승 제79호이다. 지정일 2011년 6월 30일 크기 면적 7,931㎡ (해역부 88,607㎡) 

2011년 6월 30일 문화재청이 쇠소깍, 산방산과 함께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으로 지정했다. 높이는 20m로 삼매봉 남쪽 기슭에 있으며 바다 한복판에 홀로 우뚝 솟아 있다고 하여 ‘외돌개’라 한다. 150만 년 전 화산 폭발로 섬의 모습이 바뀔 때 생긴 바위섬으로 꼭대기에는 작은 소나무들이 몇 그루 자생하고 있다. 오르기에는 너무 위험한 기암절벽의 형태이며, 보는 방향에 따라 모양이 다르게 보인다.
 
장군석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름에 얽힌 전설이 전해진다. 고려 말기 탐라(제주도)에 살던 몽골족의 목자(牧子)들은 고려에서 중국 명(明)에 제주마를 보내기 위해 말을 징집하는 일을 자주 행하자 이에 반발하여 목호(牧胡)의 난을 일으켰다. 최영 장군은 범섬으로 도망간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외돌개를 장군의 형상으로 치장시켜 놓고 최후의 격전을 벌였는데, 목자들은 외돌개를 대장군으로 알고 놀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할망바위로도 불린다. 한라산 밑에 어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았는데, 어느 날 바다에 나간 할아버지가 풍랑을 만나 돌아오지 못하자 할머니는 바다를 향해 하르방을 외치며 통곡하다가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최근에는 차귀도에 있던 설문대할망의 5백 아들(막내)이 여기로 왔다는 설화도 있다.

○ 추자도 용범 전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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