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산 시인•평론가
■토요시 깅좌(121)
□ 시인은 말하지 않고 그리는 사람
시를 쓰는 사람이 체험했거나 보이는 현상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내용으로 썼다면 그 글은 비시(非詩)이거나 재미없는 시가 될 것이다. 합리적인 외면 풍경은 산문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 참여 시는 현실에 대한 냉철한 판단과 분석이 전제되지만 참여시라고 할지라도 이성적 사유, 즉 시인의 진술(철학)이 들어간다.
그 진술은 종주먹을 흔들 듯하는 것이 아니라 서정적 자아다. 이것이 없으면 격문(檄文)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작곡을 하는 사람에게 기막힌 선율이 떠올라도 그것을 악보에 옮겨서 연주를 하지 않는다면 그 아름다움을 알 수 없거니와 음악으로 승화되지 못한다.
또한 사람들에게 음악을 듣는 즐거움을 주기는커녕 듣기 싫은 불협화음을 음악이라고 우겨서 연주하면 되겠는가? 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좋은 시상이 떠올라도 제자리에 맞는 언어로 표현되어야하고 그것을 시로 읽어주는 독자가 있어야 비로소 시의 생명을 갖게 되는 것이다.
시로 승화되지 못한 것을 시라고 내어 놓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시의 완성이란 어떤 것인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시의 완성에서 중요한 것은 독자가 읽을 맛이 나는 시다. 이것은 시에 관심 있는 독자를 배려하는 마음이다.
언어예술인 시가 독자로부터 인정을 받기위해서는 우선 읽는 즐거움을 느끼게 하든지 뭔가 끌리는 것이 있게 해야 된다.
제대로 된 시는 이해를 다 하질 못해도 시의 깊이나 그 꼴이 시로서의 흡인력을 갖고 있다. 어려운 시라도 꼴이 제대로 갖추어진 시는 읽을수록 맛이 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는 정보전달의 목적이 아니라 상상력으로 세워진 언어의 건축물이다. 그런데 이 언어의 건축물을 짓기 위해서 재료를 멀리에서 찾으려고 하면 시 쓰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시적인 순간은 일상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일상에서 지나쳐 버리기 쉬운 보잘것 없고 하찮은 것에 많은 시가 숨어있다.
평소에 보이지 않는 시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이 힘들어도 주변에 있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루만지고 말을 걸어야 한다. 시적 대상이 여기저기에서 응답을 할 것이다.
또한 시는 '말하기(telling)'가 아니다. '보여주기(showing)'다.
'말하기'는 현상을 설명하거나 푸념, 넋두리, 또는 추상적인 것이라면 '보여주기'는 언어로 집을 지어서 '이런 형태의 집'이라고 명징하게 독자 앞에 내어놓는 일이다.
우리의 시가 진실하게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려면 남에게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이야기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체면을 던지고 나를 가리고 있던 가식을 던져버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삶의 진실이 오롯이 드러나는 시를 쓸 수 있다.
이것은 시 쓰기의 본질적 방향이며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시를 쓴 사람이나 독자에게 따뜻한 위로와 긍정적인 힘이 되는 시작법(詩作法)이기도 하다.
이 작법도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약간 겸연쩍한 내용이나 많이 부끄러웠던 일들도 시가 된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직접 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물을 데려와서 대신 말하게 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특별히 기억해야 한다. '
시를 짓는 일은 사물을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깊은 관심으로 정확하게, 또는 새롭게 보는 작업이다.
좋은 옷을 만드는 사람은 오랜 시간동안 봉제 기술을 배우고 익힌 것처럼 독자에게 좋은 시를 내어놓는 일도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여야만 된다.
다시 말하거나와 시인은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눈으로 그린 그림 속의 화자가 독자와 공감(말 걸기)을 나눌 수 있는 상태가 되도록 시를 꾸미는 사람이 되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 이주의 디카시 한 편
마음의 소리
낯 뜨거워서 차마 하지 못한 말
하늘 높이 올리고 나니
갑자기 없던 용기가 생겼다
바람 불기 전에 고백해야지
하늘만큼 사랑해
_ 박송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