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관 칼럼](2)모든 게 감사..."세상에 공짜는 없다"
[현명관 칼럼](2)모든 게 감사..."세상에 공짜는 없다"
  • 현달환 기자, 강정림 기자
  • 승인 2021.04.10 12:20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도전과 나눔 고문
제34대 한국마사회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
2002년 삼성라이온즈 야구단 구단주
삼성물산 대표이사 회장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비서실장
삼성건설 대표이사 사장
인터뷰하는 현명관 회장
인터뷰하는 현명관 회장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완벽하게 장점만 부각되며 살고 있는 사람은 없다. 많은 단점 속에 장점이 부각되는 것이다. 장점이 많은 사람은 단점 하나로 얼룩지는 것이다. 단점이 많은 사람이 장점이 부각되는 것처럼.

신처럼 완벽하지 않기에 사람은 완벽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렇게 잘(완벽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거래는 그래서 중요하다. 나와 상대방의 거래, 나와 회사와의 거래가 이뤄지는 결과에 따라 나에 대한 평가가 드러나겠지만 나와 나와의 거래가 인생의 마지막을 장식할 때 마지막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평가가 달라진다.

뉴스N제주가 경제인칼럼을 통해서 배우려는 목적은 바로 '경제+인(人)' 이라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제1편을 통해 세상에 내보낸 현명관 칼럼은 바로 '인(人)'이라는 관점을 본다면 진행형이다. 현명관 회장의 삶을 그대로 답습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여기에 게재하는 것을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것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한 사람만이라도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 있기에 경제인 칼럼을 내보내는 것이다.

현명관 회장은 저서를 통해 감사의 말을 전했다. (뉴스N제주와 만남을 통해서도 감사의 말을 잊지 않았다)

비록 세대 간의 소통이 어렵다 하나 서로 국도를 초월하는 상생의 정신이 면면히 우리 사회에 흐르고 있는 것에 감사하다고.
새롭게 사회에 첫 발을 내 딛는 젊은이들이 이 노인에게 보내준 '도움이 되었다는 말에, 지난 30년 동안 산업 현장에서 쌓은 지식과 경험, 인적 네트워크가 쓸모없지 않았음을 감사하다고.
학교 다닐 때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은혜, 국가로부터 받은 지원과 투자에 감사하다고.

우리 젊은이들과 나의 아이들에게 물려줘야 할 사회적 유산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이것을 사회에 환원해야 하는 책무와 사명감을 가지게 됨을 감사하다고.
대한민국을 이끌고 세계무대를 주름잡는 도덕성과 리더십을 갖춘 젊은이들이 많아지고 있음에 감사하다고.

젊은이들이 간혹 무정부주의자 이거나 무책임한 개인주의자처럼 보이지만 내면에 도도히 흐르는 강력한 애국심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고.
2013년, 젊은이들을 위한 기성세대의 부채를 갚기 위해 설립한 사단법인 창조와 혁신을 응원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하다고.

현명관 회장은 책 말미에 감사의 말을 올리며 설립 초기 정신적 지주가 되어 우리를 이끌어 주셨던 전 한국은행 박 승 총재님, 젊은이들에게 열정과 헌신으로 멘토링 해주셨던 전 숙명여대 이경숙 총장님, 멀리 카자흐스탄에서 대한민국의 국가관을 심어준 키맵 대학교 방찬영 총장님, 그리고 부족한 법인설립을 위해 틈틈이 곳간을 채워준  친구 진철평 회장님, 지금은 고인이 되어 하늘에서 지켜볼 박내회 원장님은 제가 마사회장으로 임명된 후, 이사장 자리를 맡아 큰 힘 되어 주었으며 이 책을 쓰게 해 주었다며 깊이 감사를 드렸다.

특히 "늦었지만 감사원 공무원 시절에 도움 주신 모든 분들, 그리고 30년 삼성 생활 CEO로서의 시간을 무사히 마치게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며 전경련 상근 부회장 시절 도움 주신 모든 분들과 부족한 저를 제주도 지사로 만들기 위해 멸사봉공한 모든 분들께도 감사드렸다.

그리고 감사하다는 말로는 한없이 부족한 마사회 시절 동고동락 한 직원들, 독특한 기획으로 위대한 거래에 생기를 불어 넣고 나의 80평생의 순간들을 영상에 담아준 김남경 대표에게 감사하다고 전했다.

또한, 시간이 흐른 후, 홀로 남겨질 아내와 내 어린 아이들을 하늘이 끝까지 굽어 살펴 주시기를 간구하며 보석처럼 소중한 하루하루를 살게 해 주심에 감사드린다고 지난해 유월 그는 그렇게 감사, 감사, 감사를 올렸다.

학교 다닐 때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은혜, 국가로부터 받은 지원과 투자에 감사

제주가 낳은 인물, 서울대 출신으로 고시 합격 후 감사원 근무하다 과감하게 사표를 쓰고 일본 유학까지 다녀와서 그야말로 최고의 학부를 자랑해 당시에 장관까지도 갈 수 있는 길을 마다하고 기업에 근무하면서 최고 반열에 올라간 장본인,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님을 만났다.

뉴스N제주가 제주인 경제인을 찾아 칼럼을 연재중인 가운데 제1편 김택남 천마그룹 회장에 이어 두 번째로 현명관 회장의 스토리를 제주의 많은 젊은 청춘들과 공유하기 위해 연재를 부탁하기 위해 길을 나선 것이다.

인터뷰하는 현명관 회장
인터뷰하는 현명관 회장

만우절날 서울도 아닌 기흥구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기흥구'라는 말에 도시 이름이 귀에 익지 않아서 검색하고 난 뒤 수원 근처임을 알게 됐는데 조금은 걱정이 앞섰다.

서울에서 만났으면 좋았을 걸 하면서 서울에서 기흥구까지 택시를 대절하고 현명관 회장이 계신 카페에서 만났다. 거금 8만 원 정도의 택시비가 아깝지 않았다. 제시간에 맞춰 가기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현 회장은 제주에서 왔다고 반갑게 맞아줬고 자리에 앉자마자 멀리서(?) 올라온 손님이라고 자신이 차를 대접한다고 손수 계산대에 가서 극구 계산을 먼저 했다.

아메리카노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난 뒤 자신이 지은 자서전 ‘위대한 거래’라는 책에 직접 사인을 하고는 각각 선물로 나눠줬다.

사실, 현 회장은 제주출신이란 이유로 친근감이 생겼지만 살갑게 제주말도 쓰면서 대화가 이어지니 여기가 서울에 올라온 것인지, 제주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건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분위기가 좋아 대화하기는 편했다.

현 회장은 인터뷰에 대한 설명을 하자 "이 책에 내 삶이 다 있는데 뭘" 하며 자신의 인생 7-80%가 책속에 서술돼 있다고 했다. 단지 삼성물산과 삼성건설 재직 시 내용만  빠졌을 뿐이라고.

그러나, 그것만으로 인터뷰를 안 한다는 것은 너무 아쉬워서 몇 가지 궁금한 것을 질문했다. 그냥 질문이라기보다 살아왔던 이야기, 교훈적인 이야기 그런 내용을 듣고 싶었다.

그는 이건희 회장이 있을 때 같이 3년 정도 밤잠을 자지 않고 고민하면서 살았다고 했다. 당시 삼성은 국내는 1위를 차지했지만 세계 기업 순위로 보면 그렇게 높지 않아서 이건희 회장이 경계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 회장이 "직원들이 자만심에 빠져서 큰일났다."며 "신경영으로 혁신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제시해 가장 고생할 때라고 말했다.

인터뷰하는 현명관 회장
인터뷰하는 현명관 회장

특히 제일모직, 제일제당, 모든 게 '제일'이라는 상호로 자만심에 사로잡혀 있어서 이건희 회장은 어떻게 하면 세계일류 회사를 만들까 항상 고민이었다고 했다. 이러한 중심에 현명관 회장이 있었다는 점이다. 어떻게 보면 그때가 가장 힘들 때라고 술회했다.

현 회장은 삼성 이건희 회장에 대한 평가에서 "이건희 회장은 굉장히 게으른 사람"이라고 토로했다. 즉, 자신이 잠 잘 때 그는 깨어나 일하고 자신이 일할 때 그는 잠자는 식으로 하다 보니 어느 날 자고 있는데 호출하면 몸이 피곤해도 가다보니 항상 긴장 속에 살았다고 했다.

밤에 일하고 다시 집에 와서 새벽 한 두시 경에 전화 오면 다시 이 회장 집으로 가서 업무를 보고 아침 여섯시 정도 일 끝나 집에 와서는 다시 씻고 밥먹고 회사에 출근하다보니 엄청 피곤한 생활로 긴장의 연속이었다는 것이다.

이 회장의 그런 생활, 라이프사이클이 달라 적응하느라 고생했다고 토로했다. 그런데 그러한 습관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40여 년 동안 아침 5시에서 6시면 자동적으로 일어나 신라호텔로 가서 헬스클럽에서 운동하고 사우나를 한 뒤 아침밥 먹고 출근했으니 그런 생활이 자연히 습관이 됐다는 것.

지금은 은퇴해서 백수(?)인데도 시간이 충분한데도 그때의 습관으로 아직도 6시면 어김없이 일어난다고 했다. 지금은 신라호텔까지 거리가 멀어서 가지 못하고 동네 헬스장으로 가서 운동하는 것만 다를 뿐.

요즘은 약 세 시간 정도 운동하고 근처 식당에서 아침 먹고 다시 카페서 책 읽고, 신문 보고, 공부도 하고, 강연 원고 준비 등 하다보면 하루 일상이 그렇게 돌아간다고 했다.

인터뷰하는 현명관 회장
인터뷰하는 현명관 회장

자서전에 대한 책에 대해 질문을 하자 2006년 즈음 도지사선거 출마 전 선거용으로 ‘아직도 끝나지 않은 도전’이라는 책을 만들었는데 허술하게 급하게 만들어서 자금 만든 것이 진짜 책이라고 말했다.

현 회장은 잠시 과거를 회상하듯 머뭇거리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그때그때 '리스크 테이킹(Risk Taking:위험에 대한 것을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위험을 감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을 했다고 술회했다. 다시 말해 무모한 리스크테이킹을 했다는 것.

그 예로 감사원 재직 시 퇴직한 사례를 예로 들었는데 당시는 취직하기 어려운 상황인데 행정고시 합격해서 그만뒀다는 것. 사법시험 3회 낙방이라는 아픔을 겪은 뒤 행정고시에 합격해 감사관이 된 터라 더 소중하게 생각했을 것인데 집에서 아들의 성공을 바라보며 살던 어머니의 마음은 어땠을까? 

또한, 유학을 갔다 와서 다시 복직에 대한 과정이다. 고시합격에 일본유학까지 갔다왔으니 당시에 엄청난 양 날개를 달았는데 관에서 근무를 했으면 선배들이 끌어주고 밀어줘서 출세길이 보였는데 그런 선택을 안했다는 것이다.

이게 두 번째 무모한 것이라고 했다. 그 당시 기업들은 현재처럼 이 정도 크지 않은 상황에서 특히, 당시 삼성이란 기업은 관료들 사이에 냉정한 기업으로 인식됐을 때 그는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현 회장은 "당시에 감사원 사표 안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장관이나 했을까?", "그렇게 될 수도 있지."라고 내뱉었다. 그는 안정된 그런 삶을 오히려 '구속된 삶'이라고 여기는 듯 했다. 그런 삶은 자신의 도전과정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한 표정이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내 좌우명이야

특히 현 회장은 "내 좌우명은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 말은 이제까지 살아온 경험에서 온 함축된 말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제주인이라는 DNA는 아주 명석하고 뛰어나기에 다른 어떤 사람들 보다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했을 것이다. 

평소 커피 한 잔을 공짜로 얻어먹더라도 그게 결과론적으로 공짜가 아니다.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기에 절대 공짜가 될 수가 없다. 

그를 만나면서 특히 청년들이 새겨들을 만한 내용은 바로 이것이었다. "리스크테이킹하지 않으면 그냥 평범하게 사는 일이야"라며 "도전하지 않으면, 건방진 얘기지만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이지. 세상은 공평한 것이야"라고 말했다. 현 회장의 잘 생긴 얼굴에서 나오는 여유로운 미소(?)를 느꼈다. 그 여유로운 미소가 지난 삶을 반추하는 것 같았다.

(사실 책 속에 모든 내용이 있지만 몇 가지만 인터뷰 내용을 싣고 바로 책의 세계로 넘어갈 것이다.)

인터뷰하는 현명관 회장
인터뷰하는 현명관 회장

#. 남자로서, 아들로서 아버지에 대한 평가는?

현 회장은 아버지 이야기에 대한 소감을 묻자 감회가 새로운 듯 말을 잘 잇지를 못했다.

-. 아버지는 섬세하고 성격이 강하지 못한다고 했다. 집안이 중조, 고조 아버지가 성산, 온평리 최고 갑부였고 3대 독자였지. 전라도에 유학을 갈 정도로 곱게 자랐기에 성격이 유했고 법 없이 세상을 살 사람이었어.

그런데 공무원을 했지. 당시 김영관 도지사시절에 지금으로 치면 부교육감 정도의 직책으로 근무를 했어. 그런 공무원도 그만두고 다시 현재 수산업협동조합 제주지부장, 축산시험장의 장장 등을 역임했지.

아버지에 대해선 착하고 연했는데 어머니와는 정반대였지. 어머니는 성격이 강하고 그야말로 제주의 어머니다운 모습이었어. 내가 고시 공부한다고 자신의 죽음을 나에게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나에 대한 기대감이 컸던 거야. (부모님에 대한 생각에 잠기는 듯 눈가에 촉촉한 게 보였다.) 현 회장의 아버지는 당시 향년 55세의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본문에 나옴]

#. 현명관이란 이름으로 개명하게 된 동기는?

이름은 그 사람의 운명이다. 이름을 잘 짓는다는 것은 한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다. 그러한 것을 '밝을 명', '벼슬 관'으로 만들어진 '현명관'이란 이름에서 느낄 수 있다.

-. 내가 이름을 바꾸려고 한 게 아니야. 일제시대 이름이야. (본문에 책에 나오지만 이름을 개명한 이유를 묻자 처음에 수남(일본명. 히데오)인데 현명관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당시엔 이름을 바꾸는 게 어려웠는데 아버지가 법원에 사정사정해 현명관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사실 아버지가 직접 찾아와서 건네준 종이에 써준 현명관(벼슬을 얻어 세상을 널리 알린다)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아니 왠지 자신감이 생기고 공부를 안 할 수가 없을 정도로 뿌듯했다고 토로했다. 이름도 형제 중에 자신만 개명했다고 전했다.(책을 통해 서술 예정)

현명관 칼럼은 다음부터 자서전 첫 페이지가 나갑니다. 많은 응원바랍니다.[편집자 주]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