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김수열 작가의 '달보다 먼 곳'
[신간]김수열 작가의 '달보다 먼 곳'
  • 현달환 기자
  • 승인 2021.03.10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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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열 작가
김수열 작가

나는 내 언어를 교과서에서 배웠다. 모르는 언어가 눈에 띄면 표준이 되는 언어만 실려 있는 국어사전에 기댔다. 그러나 어머니는 당신의 언어를 삶에서 체득했다. 바닷물에 절고 바람에 씻겨 오로지 알갱이만 남은 언어로 어머니는 울고 웃고 사랑하고 또 싸웠다.

한때 나는 그런 어머니가 싫었고 미웠다. 부끄러웠다. 문학에 뜻을 두고 제주의 속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어머니의 언어가 귀에 들어왔다. 어머니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그 언어의 소중함을 알았다. 더불어 내가 배운 언어에는 감정도 느낌도 진정한 분노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언어로는 어머니가 온몸으로 살아온 삶을 제대로 담을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새벽별을 보며 밭에 나갔다가 허리 한번 펼 틈도 없이 다시 바당밭으로 나가야 하는 고단한 삶을, 교과서에서 배운 언어로는, 더군다나 표준만을 강요하는 국어사전에 실린 언어로는 도무지 그 깊이와 너비를 헤아릴 수도 담아낼 수도 없었다.

_「본문」 중에서

>>> 책 소개

제주의 ‘아픈 진실’과 시

김수열 시인의 세 번째 산문집 『달보다 먼 곳』은 시인 개인의 내면이라기보다 제주의 내면에 가깝다. 몇몇의 글에서는 개인의 과거를 돌이보기도 하지만, 과거에 경험했던 일 자체가 제주라는 구체적 장소에서 벌어진 일이다 보니 결국 다시 제주로 오롯이 귀환한다. 물론 아주 처음부터 어떤 신념을 가지고 고향에 머물기로 한 것은 아니다. 시인의 고백대로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은 고등학교만 마치면 섬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지만 “육지에 있는 대학 진학에 실패하고 고향에 있는 대학을 다니게” 된 것이다.(「무언가 아슴하게 보이는 날들을 위하여」) 그런데 이 ‘어쩔 수 없음’이 시인에게 다른 길을 가르쳐준 시작점이 된다. 시인의 이야기는 이렇다.

술기운이 차올랐는데도 이상하게 그 말이 잊히지 않았다. ‘내가 제일 값싸게 대학을 다니고 있다면 그 나머지는 누가 대신 내고 있는 건 아닐까? 그게 혹시 이 섬사람들은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면서 호주머니에 돈이 생길 때마다 시외버스를 타고 무작정 섬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시내를 벗어날 일이 별로 없었던 나로서는 내 앞의 펼쳐진 섬의 풍광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 그런데 유독 어느 지점에 가면 이야기를 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물어버리곤 했다. 알 필요 없다고 손사래 치면서 먼산바라기만 하다가 말꼬리를 다른 데로 돌리는 것이었다. 그 지점에 4·3이 있다는 것을 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무언가 아슴하게 보이는 날들을 위하여」 중

위 진술이 중요한 것은, 시인이 제주의 ‘아픈 진실’과 마주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를 고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어느 지점에 가면 이야기를 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무는 촌로를 만나지 못했다면 현기영의 「순이 삼촌」이 그렇게 깊이 파고들어오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제주의 ‘아픈 진실’을 알고 있는 이름 없는 촌로들과의 만남이 시인의 내면에 새로운 토양이 되었다는 점은 어떤 공부나 사실의 습득에 앞서는 중요한 사건이다. T. S. 엘리엇이 “인간은 너무 많은 진실은 감당하지 못한다”고 했다지만, 어떤 진실이 되었건 그것과 떨어져서는 성립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시’이기도 하다. 따라서 마당극을 통해 제주 지역에서 문화운동을 하던 김수열이 결국 시를 쓰게 된 것은 김수열 개인의 의지일 수도 있지만 제주의 ‘아픈 진실’이 강제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번 산문집에 실린 글들 중에서 그 증거는 차고 넘친다. 어떻게 보면 이번 산문집에서 시인은 왜 시를 쓸 수밖에 없는지 스스로 실토하고 있는 것만 같다. 시인이 자신의 시를 곳곳에 인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은 자신의 시를 쓰게 한 외부의 힘이 무엇인지 밝히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자신의 고향 아름다운 제주, 그것도 70여 년 전에 있었던 4·3이었던 것이다.

지금 제주도는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관광지이다. 그러나 그 속살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아직도 학살의 흔적이 고스란히 암매장되어 있다. 성산 일출봉이 그렇고 표선 백사장이 그렇고 모슬포 송악산이 그렇고 서귀포 정방폭포가 그렇다. 무엇보다 제주의 바다 관문인 제주항도 어김없이 무고한 양민을 수장한 학살터였다는 것이다.

―「섬에서 시인으로 살아간다는 일」 중

이 절규에 가까운 발언 이후에 시인은 “그러나 아들아/ 나보다 훨씬 굽어버린 내 아들아/ 젊은 아비 그리는 눈물일랑 그만 접어라/ 네 가슴 억누르는 천만근 돌덩이/ 이제 그만 내려놓아라”(「물에서 온 편지」)는 자신의 시를 인용한다.

제주 시인이 말하는 제주의 내면과 속살

'달보다 먼 곳' 표지
'달보다 먼 곳' 표지

하지만 김수열의 4·3은 현재진행형이다. 국가의 사과와 ‘제주4·3특별법’이 만들어지고 또 미비한 부분이 개정되었지만, 그것으로 4·3이 종료된 것은 아니다. 또 서귀포시 강정마을에 들어선 해군기지는 4·3의 기억을 되살아나게 하는 악몽이다. 그 점을 시인은 명확히 인식하고 있거니와 특별히 ‘작가의 말’에서 “그때 그 글을 쓸 수밖에 없을 때의 제주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제주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고 오히려 더 망가진 채 황량해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강정 해군기지가 그렇고, 성산 제2공항이 그렇고, 대정 송악산 개발이 그렇고, 선흘 동물테마파크가 그렇고…”라고 언급한 것도 그렇지만 「섬에서 시인으로 살아간다는 일」, 「4·3이 평화라면 강정은 희망입니다」, 「시를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는 어느 시인을 생각한다」에서는 집중적으로 강정을 말하고 있다. 4·3이 특별법 제정으로 종료된 게 아니듯이, 강정 마을에 해군기지가 ‘이미’ 들어섰다고 강정의 희망이 끝난 것도 아니다.

한편 시인이 한때 몸담았던 제주 마당극 운동에 대한 소중한 증언을 남겨놓음으로써 제주 지역의 문화 운동에 대한 기록자의 역할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특히 「‘제주 마당극의 회고와 전망망’을 대신하여」 같은 글이 그에 해당된다. 또 먼저 가버린 친구 정공철에 대한 「심방 정공철을 말하다」나 최정완을 기리며 쓴 「멀리 있는 건 언제나 그립다」는 함께 읽어볼 만한 글이다.

그때, 그렇게 해서 선술집 ‘이산저산’에서 만났지. 기억나는 건 정말 오랜만에 그 자리에서 광주 강희를 본 거야. 너무 반갑더라고. 아프다는 소식만 듣고 있었는데 그렇게 얼굴을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지. 강희는 술잔을 받아 들고 한쪽 구석에 앉아, 야윈 얼굴로 가만 엿듣고만 있었지. 내 기억으론 어떻게 하면 민족극한마당을 생산적으로 운영할 수 있을까를 안주 삼아 얘기하지 않았나 싶다.

―「멀리 있는 것 언제나 그립다」 중

이밖에도 김수열 시인이 발언한 제주에 대한 이야기는 제주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시인이 술회하는 어릴 적 기억을 통해 제주 사람들의 삶과 풍속도 접할 수 있지만, 곶자왈을 훼손하려는 움직임에 맞선 지역민들의 투쟁 이야기라든가, 시바 료타로의 『탐라 기행』, 장한철의 『표해록』, 이강희의 『탐라직방설』 등의 독서를 통해 제주의 뿌리를 더듬어가는 노력도 보여준다.

이 책의 제목은 시인이 쓴 시의 제목이기도 한데, 이 시에서 시인은 ‘재일조선일’ 시인 김시종이 그동안 조국과 맺어온 관계를 네 편의 에피소드를 통해 전해주면서, 김시종 시인에게 고향인 제주는 ‘달보다 먼 곳’이었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4·3항쟁 당시 한라산 무장대의 연락책으로 참여했다가 죽임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한 김시종 시인이 “돌아가신 지 40년” 된 양친의 무덤에서 “송아지처럼” 울어야만 했던 일을 담담히 묘사하고 있다. 어쩌면 김시종 시인의 경우를 들어 김수열 시인에게 4·3은 아직 ‘달보다 먼 곳’일지도 모르며, 시인 자신이 바라는 평화와 희망이 가득한 시간도 그만큼 멀다는 무의식을 내비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수열 시인에게는 고향 제주라는 존재의 근거 혹은 토대가 있다. 비록 ‘아픈 진실’은 식지 않았고, 그 ‘아픈 진실’과 ‘평화와 희망’ 사이의 거리가 달보다 멀 수도 있지만 말이다. 모어(母語)를 아직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근대사에 비추면 아픈 일이기도 하지만 지복이기도 한 게 틀림없다.

문학에 뜻을 두고 제주의 속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어머니의 언어가 귀에 들어왔다. 어머니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그 언어의 소중함을 알았다. 더불어 내가 배운 언어에는 감정도 느낌도 진정한 분노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언어로는 어머니가 온몸으로 살아온 삶을 제대로 담을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섬에서 시인으로 살아간다는 일」 중

>>> 저자 소개

제주에서 태어나고 『실천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어디에 선들 어떠랴』 『신호등 쓰러진 길 위에서』 『바람의 목례』 『생각을 훔치다』 『빙의』 『물에서 온 편지』 『호모 마스크스』 『꽃 진 자리』(4 · 3시선집)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김수열의 책읽기』 『섯마파람 부는 날이면』이 있다. 제4회 오장환문학상과 제3회 신석정문학상을 받았다.

>>> 책머리에

아직도 산문을 쓰는 일은 적지 않은 부담으로 다가온다.

하물며 산문집으로 묶어 세상에 내놓는 일은 나에겐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다.

내가 끼적거린 대부분의 산문이 내 안에서 오롯이 움트고 자라나 한 편의 글이 되었다기보다는 이런저런 사연으로 청탁을 받고 마감 시간에 쫓기듯 쓰게 된 글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내가 받은 글 청탁의 대부분은 내 유년의 기억이 아스라이 스며 있는 원도심 무근성에 대한 이야기이거나 제주 4·3항쟁과 관련하여 보고 듣고 느낀 이야기거나 시를 쓰면서 미처 시라는 그릇에 담아내지 못한 이야기들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책을 내면서 부끄러움이 앞선다.

이렇게 책으로 묶을 요량이었다면 애당초 고민은 더욱 깊었어야 했고 생각은 보다 넓었어야 했다. 원고를 정리하면서 뚜렷해진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그때 그 글을 쓸 수밖에 없을 때의 제주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제주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고 오히려 더 망가진 채 황량해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강정 해군기지가 그렇고, 성산 제2공항이 그렇고, 대정 송악산 개발이 그렇고, 선흘 동물테마파크가 그렇고….
무지막지하게 변모해가는 시대에 맞서 제주의 제주다움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생업을 뒤로한 채 동분서주 발품을 팔고 있는 많은 분들의 노고에 미안함과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엉성한 글을 꼼꼼하게 읽으면서 바른 지적을 해준 삶창의 황규관 시인에게 다시 한 번 빚을 진 기분이다.
바람이 있다면 구순을 훌쩍 넘겨 병약해진 노모가 이 책을 받아 들고 활짝 웃음꽃 피웠으면 좋겠다.

2021년 이른 봄

김수열

>>> 책 속으로

골목에서 놀다가 지치면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당으로 내달렸다. 골목을 벗어나 한 이백 미터 거리다. 바당에 도착하자마자 훌러덩 옷을 벗고, 벗은 옷은 먹돌로 잘 눌러두고 첨벙첨벙 바당으로 들어간다. 엄격한 동네 형의 가르침에 우리는 초등학교 2학년이 되기 전에 개헤엄을 배웠다. 물속에서도 눈을 부릅뜨고 보말이며 구살이며 구쟁기를 잡았다. 가끔은 포구로 자릿배가 들곤 했는데 그럴 때면 형들은 특공대를 조직해 몸을 날렸다.

자릿배에 올라 자리를 한 움큼 서리를 하곤 바당으로 뛰어들어 배 밑창을 통과해 멀리멀리 도망치곤 했다. 여기저기서 마른 가지들을 주워와 대꼬챙이에 꽂힌 자리를 구워 먹는 맛이란! 먹다 보면 입 주위가 검게 그을렸고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그때쯤이면 방파제 위에서 어머니들이 나와 “수열아, 밥 먹으라!”, “준수야, 집에 글라!” 하고 외자기는 소리가 어김없이 들려오곤 했다.

―「내가 두고 온 그때」(20)

설문대 여인이 길쌈을 할 때 밝혔던 접시불의 받침대인 성산일출봉 등경대. 길쌈은 씨줄과 날줄의 직조와 이어지며 천지의 질서를 잡아나가는 과정과 같다. 설문대 여인이 솥을 걸어 밥을 지어 먹었다는 애월리 솥덕바위. 밥 짓기는 불의 사용이며 직조와 더불어 새로운 문명의 열림을 의미한다. 소중이 한 벌을 해주면 목포까지 다리를 놓아주겠다는 약속을 못 지키자 쓰고 있던 족두리를 벗어두었다는 오라동 족두리바위. 설문대여인의 빨래 바구니였다는 김녕리 두럭산. 심심파적으로 가지고 놀았다는 상가리 공깃돌. 명주 백 동을 채우지 못해 육지까지 다리를 놓아주려다 그 흔적만 남아 있는 조천리 관곶…. 돌아보니 안타깝게도 성한 곳이 없었다 한다. 깨지고 방치되고 제멋대로 옮겨져 신성(神性)을 잃은 채 물성만 남아 덩그마니 놓여 있었다 한다.

―「내 숨결이 바람이며 내 몸이 곧 섬이다」(46)

백살일비(百殺一匪), 백 명을 죽여서라도 한 명의 공산주의자를 잡겠다는 것이고, 시산혈해(屍山血海), 즉 그들에 의해 억울하게 죽어간 시신이 산같이 쌓였고 섬사람들이 흘린 피가 바다처럼 흘렀다. 그리하여 살아서 공산주의자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섬사람들은 죽어서 공산주의자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60여 년이 흐른 것이다. 지금 제주도는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관광지이다. 그러나 그 속살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아직도 학살의 흔적이 고스란히 암매장되어 있다. 성산 일출봉이 그렇고 표선 백사장이 그렇고 모슬포 송악산이 그렇고 서귀포 정방폭포가 그렇다. 무엇보다 제주의 바다 관문인 제주항도 어김없이 무고한 양민을 수장한 학살터였다는 것이다.

―「섬에서 시인으로 살아간다는 일」(100)

지금은 교통수단이 발달해서 마을에 낯선 사람이 와도 아무런 반응이 없지만 그때만 해도 낯선 사람이 찾으면 어디서 왔느냐, 무슨 일로 왔느냐 하면서 관심을 보이십니다. 미리 준비한 소주병을 까면서 마을의 역사에 대해 알고 싶어서 왔다고 하면 마치 제 일처럼 자세히 찬찬히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다가 어느 지점에 오면 이야기가 딱 끊기고 마는 겁니다. “에… 그때 일은 몰라도 좋아. 다 지나가분 일인디… 고라봐야 소용도 없고….” 더 이상 말씀이 없으십니다. 다른 마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더 이상 이야기를 할 수 없는 바로 그 지점이 ‘제주 4·3’이었음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문학으로 재기억되는 젊은 4·3」(245~246)

‘내’가 들은 할머니의 사연은 그야말로 4·3을 겪은 제주도 여인들의 삶 그 자체입니다. 경찰을 도왔다는 이유로 부모를 잃고, 살기 위해 육지로 가서 모진 고생을 하고 돌아와보니 고향집은 이미 토벌대에 넘어가버리고 맙니다. 한마디로 죽지 못해 살아온 세월입니다. 그런 할머니의 생애를 손주인 ‘내’가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 깊은 슬픔을 어찌 알 수 있을까요?

―「4·3의 아픔, 시어와 시어로 잇다」(317)

>>> 차례

작가의 말 … 4

1부

내 문학은 거기서 시작되었다•12
내가 두고 온 그때•18
어느 할머니의 거룩한 생애•23
돌아갈 수 없어서 그리운 것들•29
멀리 있는 건 언제나 그립다•35
내 숨결이 바람이며 내 몸이 곧 섬이다•44
언어와 역사로 읽는 제주의 삶, 제주의 문학•52

2부

바다에 스민 기억들•60
추억 속의 무근성을 만나다•71
무언가 아슴하게 보이는 날들을 위하여•85
섬에서 시인으로 살아간다는 일•95
|심방 정공철을 말하다•108
‘제주 마당극의 회고와 전망’을 대신하여•119
더불어 곶자왈과 함께 사는 법•132
‘존재’와 ‘인식’의 경계에서•148
이내 먹먹해져서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158
제주를 닮은 섬, 모리셔스를 가다•171
한반도의 대척점, 콜롬비아를 보다•183
『탐라 기행』을 기행하다•195
바다에서 길을 잃다•210
양제해를 다시 생각한다•226
3부
문학으로 재기억되는 젊은 4·3•242
4·3이 평화라면 강정은 희망입니다•264
시를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는 어느 시인을 생각한다•285
4부

4·3의 아픔, 시어와 시어로 잇다•310
제주작가회의 20년을 회고하며•320
• 구 분 문학 > 산문
• 제 목 달보다 먼 곳
• 저 자 김수열
• 출판일 2021년 3월 3일
• 판 형 135×205mm
• 면 수 336쪽
• 책 값 15,000원
• 펴낸곳 삶창
• ISBN 978-89-6655-131-6 (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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