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주 칼럼](9)재미있는 설화 – 혼인지 삼 선녀탕②
[장영주 칼럼](9)재미있는 설화 – 혼인지 삼 선녀탕②
  • 뉴스N제주
  • 승인 2021.03.08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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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주 교육학박사/명예문학박사
한국해양아동문화연구소장/한국사진작가협회회원
혼인지 삼 선녀탕 사진스토리텔링
장영주 설화전문박사가 새롭게 쓴 혼인지 삼 선녀탕(2)
첫번째 연못

선문대공주선녀의 환생

선문대공주선녀는 설문대하르방을 만나 신혼살림에 단꿈에 젖어 세상 돌아가는 줄 모르게 알콩달콩 잘살고 있던 어느 날이었어요.

“네 동생이 살 곳을 찾아보아라.”

옥황상제가 나타났어요.

“아! 아바마마.”

선문대공주선녀는 너무 반가웠어요.

지상나라에 내려와 혼자 수백 년을 살다가 설문대하르방을 만나 겨우 외로움에서 벗어났는데 이제 동생이 지상나라에 내려온다 나요?

“가까운 곳에 거처를 마련해 주어라.”

옥황상제의 분부에 선문대공주선녀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어요.

한마디로 전셋집 구하러 다닌 듯 돌아다닌 거죠.

선문대공주선녀는 그래도 동생들이 살 곳인데 좋은 곳을 고르고 싶은 언니 맘이었어요.

‘옳거니.’

물웅덩이 세 개를 찾았어요.

세 부부가 살아야 하니 방이 세 개 있는 전셋집을 찾은 이치였어요.

그곳은 신풍목장도 가깝고 사장굴과도 가까우니 안성맞춤이었지요.

주위를 살펴보니 ‘미와미못’이라는 이름표가 붙은 연못이래요.

선문대공주선녀가 찾은 연못에는 아름다운 숯이 우거져 동생들이 살기에 안성맞춤이었어요.

“그래, 네가 살아보니 물웅덩이는 꼭 있어야 했어.”

선문대공주선녀는 연못이 없으면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란 걸 벌써 경험상 알고 있었으니깐요.

미와이못

그럼요, 선녀들에게 물웅덩이가 생명줄인걸요.

모든 선녀가 나오는 이야기에는 연못이 빠지질 않는 건 그 때문이지요.

‘가만?’

선문대공주선녀는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하나가 빠져 있었어요.

‘신혼을 차릴 굴이 없는 게 흠이군.’

선문대공주선녀는 연못과 굴이 함께 있어야 생활이 편리하다는 걸 눈치학상으로 알고 있었으니까요.

주) 선문대공주여신을 연못과 굴이 세 개 있는 곳을 찾아 눈도장 찍어 두고 있었어요. 그게 어딘지 아시겠죠? 전셋집 찾아 헤매다 보면 좋은 조건이 맞는 곳이 있잖아요. 그게 ‘미와미못’ 연못보다 좀 나은 혼인지 연못을 찾은 게지요. 아마 전세금은 더 많이 냈을걸요.

선문대공주선녀는 주문을 외워 삼 노루로 변했어요.

제일 큰 노루는 첫째 탐라국 왕자선남 옆에, 두 번째 노루는 둘째 탐라국 왕자선남 옆에, 세 번째 노루는 셋째 탐라국 왕자선남 옆에 서더니 삼 선녀에게 인도하는 거예요.

산방굴 입구

그들은 오곡 씨앗을 나누어 가지고 짝을 지어 준 노루 따라 혼인지에 갔어요.

노루가 혼인지 연못을 가리키니 그들은 그곳에서 목욕재계하고 노루가 데려다준 ‘신방굴’에 차례로 들어가 신혼 생활을 시작하니 노루 세 마리는 불현듯 사라지고 마는 거예요.

“동생들아, 잘 살거래이.”

하늘에서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렸어요.

△새로운 삶의 터전

벽랑국 삼 공주는 탐라국 삼 왕자와 나이순으로 짝을 지어 혼인지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거예요.

혼인지는 문화재 지정 제주특별자치도 시도기념물 제17호 연못으로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에 있다.

삼성혈에서 솟아난 고·양·부(高·梁·夫: 梁은 良으로 고려사에 기록) 또는 양·고·부 삼 신인이 동해나라 벽랑국에서 온 삼 공주를 맞아들여 혼례를 올렸다는 연못이다.

세 개 연못이 다 보이는 유일한 곳

여기서 잠깐,

고·양·부인가? 양·고·부인가?

제주 고 씨 집안과 제주 양 씨 집안이 ‘삼성신화’에서의 두 성씨의 서열을 두고 법정에 까지 가는 일이 생겼다. 이는 고려사와 영주지에 따라 양·고·부와 고·양·부 순으로 쓰여 있기 때문이다.

고려사에는 장왈 양을나(長曰良乙那) 차왈 고을나(次曰高乙那) 삼왈 부을나(三曰夫乙那)로 양·고·부 순서로 되어있으나, 영주지에는 고·양·부 순서로 설화채록 기록되어 있다.

1786년(정조 10년) 제주목사 이명준이 고 씨와 양 씨가 그 순서를 놓고 다투는 일에 대하여 임금에게 시조위차(始祖位次) 변경에 관한 장계를 올렸다.

이명준 목사는 이 장계에서 ‘고·양의 두 성씨가 각기 그 선조를 숭상하는 마음으로 서로 다투고 누차 천창을 번거롭게 하니 지극히 외람스러운 일’이라면서도 시중의 여론을 따라 고·양·부 순이 좋을 것이라는 의견을 징계했다. 이때에는 제주에서 고 씨 영향력이 컸을 때 일이다.

주) 네이버 지식백과에 의하면, 고려사는 조선시대 1449년에 편찬하기 시작하여 1451년에 완성된 고려시대에 대한 역사서이다. 총 139권이며 기전체로 되어있다. 연세대학교 도서관 소장이며, 편저자는 김종서, 정인지이고 간행·발행은 1613년(광해군 5) 번각한 목판본이다.

고려시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인물 등의 내용을 기전체로 정리한 관찬사서로 고려시대 역사연구의 기본 자료이다.

주) 향토문화전자대전에 의하면 영주지는, 제주도에 대한 기록설화지로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기로 나오는데 거의 조선 초기가 유력하지 않나 생각해 본다.

연혼포 선녀탕

제주의 삼성신화(三姓神話)가 수록된 문헌으로, 저자는 미상이나 문장구성이 돋보여 한문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의 저작물임을 알 수 있으며 사서의 기록과 부합되는 구체적인 사실도 있으므로 『영주지』가 다만 전설을 채록만 했다고 보기엔 좀 안타까움이 있다.

편찬·발간 경위는, 단간본이 아니라 1416년(태종 32) 정이오가 저술한 『성주고씨전』, 1450년(세종 32) 고득종이 저술한 「서세문」 등과 관련 지어 서술하였다.

구성 내용은 탐라의 개벽 설화를 시작으로 삼 신인의 삼 공주와의 결혼 정착 생활과 농경 사회로 형성하는 시초가 되었고 이후 간행된 문헌들의 탐라 개벽 신화 등은 모두 『영주지』를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영주지』는 제주도 역사 자료로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문헌이다. 제주도의 개벽 설화와 조선 초기까지 천 수백 년의 역사적 사실 배경을 이루고 있으므로 제주도 고대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정리하면, 삼성혈 관련 두 서적을 본 결과 고려사지는 1449년에서 1451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서적으로 양·고·부 순이고 영주사지는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사지 보다 오래된 서적으로 고·양·부 순으로 나타나니 두 성씨(양고고양) 집안 다툼의 되고 있는데 과연 어느 성씨가 먼저 태어났는지에 대한 실제의 기준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순서를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외냐면 탐라국 건국 당시에 고 씨 양 씨 부 씨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례로 연못을 정하여 공주선녀는 옷을 훌훌 벗어 왕자선남에게 맡기고 목욕했으니 나무꾼에게 옷을 잊어버릴 걱정은 안 하게 되었겠지요.

두번째 연못

든든한 부군이 옆에서 지켜주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굴 크기가 큰 차례로 신방을 차렸고요.

이제 신혼여행을 떠나야 할 차례죠.

그들은 배를 만들어 동해나라 벽랑국으로 신혼여행을 단체로 가게 되었지요.

탐라국에서 생산한 특산물 감귤을 한배 가득 싣고 말에요.

신혼여행 온 사위를 그냥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은 동해나라 벽랑국 왕은 답례로 마소를 세 마리씩 배에 실어 주었지요.

앞서 오곡 씨앗은 이미 사자로부터 받았고 마소를 선물 받아 서해나라 탐라국에 돌아와 이젠 분가하여야 할 시간이 도래 한 거죠.

삼 신인은 활을 쏘아 살 곳을 정했는데 그 화살이 떨어진 자국을 ‘삼사석’이라 부린답니다.

화살이 박힌 세 돌을 한 곳에 모아 둔 제주시 화북동 삼사석 지에 ‘삼사석’이라는 이름으로 현존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의하면 삼사석은, 문화재 지정 제주특별자치도 시도기념물 제4호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화북1동 1380-1 소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화북동에 있는 탐라국 신화와 관련된 돌로, 탐라가 개국하고 고·양·부 삼성신인(三姓神人)이 삼성혈에서 솟아나 벽랑국의 세 공주를 배필로 정한 뒤 활을 쏘아 거처할 터전을 정할 때 그 화살이 꽂혔던 돌이다.

지름 55cm 내외의 2개의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1735년(영조 11) 목사 김정이 삼사석 전설과 유적을 돌아보고 높이 113㎝, 너비 43㎝의 삼사석 비를 세웠다. 비 옆면에는 ‘毛興穴古矢射石留神人異蹟交暎千秋(모흥혈고시사석류신인이적교영천추)’라고 새겨져 있다. 1813년(순조 13) 제주 사람 양종창이 높이 149㎝, 앞 너비 101㎝, 옆 너비 67㎝의 석실을 세워 삼사석을 보존하였다.

탐라 삼 신인이 벽랑국 공주와 혼인한 후 생활할 장소를 정하기 위해 각자 활을 쏘아 화살이 박혔던 돌로 예전 화북동 주민들은 삼사석이 있는 자리를 ‘살쏜디왓’이라고 불렀다 한다.

삼사석을 보관한 석실은 양종창(梁宗昌)이 1813년(순조 13년)에 화살 맞은 돌을 수습하여 이를 보관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혼인지 전체 풍경

석실 좌우 기둥 판석에는 “삼신 유적이 세월이 오래되었으므로 남은 것을 거두어 이제 수습하여 석실에 합하였다(삼신유적 세구잔렴 금언보즙 가이석실 三神遺蹟 歲久殘斂 今焉補葺 加以石室)”. 라고 새겨져 있으며 밑의 도리 판석에는 “가경계유 봄에 석실을 만들다(가경계유춘석실 嘉慶癸酉春石室)”. 라고 쓰여 있다. 가경계유는 1813년에 해당한다.

비석 앞면에는 “옛날 모흥혈에서 활을 쏘아 맞은 돌이 남아있으니 삼 신인들의 기이한 자취는 천추에 서로 빛날 것이다(모흥혈과 시사석유 신인이적 교영천추 毛興穴古 矢射石留 神人異蹟 交映千秋)”.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경오(庚午) 3월에 고한룡·고대길·고성전·고승훈 등이 고쳐 세웠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경오(庚午)년은 1780년이거나 1930년인데 안내판에는 1930년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렇다면 1930년 이전의 비석은 언제 누가 세웠으며, 또 지금은 어디로 간 걸까? 기록에 따르면 원래의 비석은 1735년(영조 8년)에 제주목사 김정이 세운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금 남아있는 글귀도 김정 목사가 남긴 것이라고 한다. 물론 그가 세웠던 비는 마모가 심해 교체되었으며 지금은 새로 세운 비 바로 앞에 묻혀있다(출처: 인터넷).

세번째 연못

영주지에 탐라에 따른 설화 형식이 잘 나타나 있는데,

제주도는 옛날 탐라국이었다. 탐라국은 4,300여 년 전에 삼성혈에서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삼 신인이 태어났다.

이들은 사냥하여 육식하고, 짐승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살았다.

어느 날 온평리 연혼포에 나무상자가 떠올랐다.

나무상자 안에는 사자와 삼 공주가 송아지, 망아지, 오곡의 종자를 가지고 있었다.

사자가 이르기를 “나는 벽랑국 사자입니다. 우리 왕께서 말씀하시기를 ‘서해 가운데 신자 3인이 나라를 열고자 하나 배필이 없구나’ 하시고서는 신에 명하여 삼 공주를 모시고 왔으니 배필로 삼아 대업을 이루소서”하고는 구름을 타고 사라져 버렸다.

이에 삼 신인과 삼 공주는 나이순에 따라 짝을 지어 혼인지에서 혼례식을 올리고 신방굴에서 신방을 차리고 활을 쏘아 삶의 터전을 마련, 목함에서 나온 송아지·망아지를 기르고 오곡의 씨앗을 뿌려 태평한 생활을 누렸고, 이로부터 농경과 목축 생활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유적지로는 삼성혈(제주시 이도 일동 사적 제134호), 연혼포(성산읍 온평리 해변), 혼인지(성산읍 온평리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17호), 사시장올악(제주시 화북동), 삼사석(지방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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