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일 2024-03-29 02:29 (금)
>
[경제인 칼럼](26)윤전기 소송
[경제인 칼럼](26)윤전기 소송
  • 현달환 편집장
  • 승인 2021.01.23 23: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편집장이 만난 제주인, "아, 제주마씸?"
[김택남 자서전]제주 소년, 꿈을 투망하다
(주)천마그룹 김택남 회장의 인생 스토리
주말 총각 시절 자취할 적에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던 솜씨를 발휘해 임직원들에게 간식 라면을 끓어주는 김택남 회장 모습
주말 총각 시절 자취할 적에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던 솜씨를 발휘해 임직원들에게 간식 라면을 끓어주는 김택남 회장 모습

뉴스N제주가 창간기념에 맞춰 '제주경제인 칼럼'을 게재하는 가운데 그 첫 순서로 선보인 김택남의 자서전, '제주 소년, 꿈을 투망하다'라는 내용이 독자들로부터 많은 울림을 주고 있다.

이번에 올린 내용은 '윤전기 소송'이라는 제목으로 김택남 회장이 제민일보를 인수하면서 생긴 과정을 그렸다. 

사업가들이 제일 답답한 것이 새로운 회사를 인수하는데 전혀 생각치도 못한 일들이 생겨 장벽이 생기는 경우이다.

대개 갈등이란 것이 이런 경우에 발생하는데 여기서 리더의 모습이 평가된다. 열정적으로 사업을 추진하는데 있어 부가적으로 다시 갖추어야할 것이 바로 '냉정'이다.  들떠 있는 상황에서 올바른 판단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더욱이 소송까지 하면서 치열하게 싸우고 나서 화해와 용서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흔히 화해와 용서는 강한 사람이 해야 한다. 약한 사람이 용서와 화해를 한다는 것은 맞지 않다. 앙금이란 것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김택남 회장이 모든 것을 용서하고 이해하고 화해를 하면서 소송비용 등을 포기한 것은 그만큼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배려가 없었다면 하기 힘든 결정이다. 직원 등 주위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 듣고 외면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전 회장이 첫만남을 통해 인상에 대해 말했는데 이미지라는 것은 오랫동안 남는 것이다. 키가 큰 김택남 회장과의 만남은 누구나 '무섭다'라는 인식을 갖지만 그건 큰 오해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사진으로 보고 처음 만나본 사람들은 무척이나 놀란다.

나이가 많다거나, 무섭다거나 그런 이야기를 한다. 그만큼 부드러운(?) 남자라는 것이다. 물론 일을 하는데 있어서 대기업에서 배운 완벽한 업추 추진 등을 몸에 익혀 자신의 기업에도 접목하고 있지만 강한 사람에게는 강하고 약한 사람에게는 더욱 약한 사람이 김택남 회장이라고 생각된다.

본문을 읽으면서 김택남 회장의 늘 상대방에 대해 포용하는 마음과 직원들의 직언을 받아들이는 귀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다.

우리는 사업을 하면서 생긴 소송에서 이겼을 때 상대방에 대해 무한한 용서를 할 수 있을까. 리더는 말로만 베푸는 것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리더라고 생각된다.

제민일보 전 회장의 말씀 중에서 "인생을 살면 좋은 날도 나쁜 날도 있습니다. 제민일보 명예회장이 된 오늘은 내게 아주 기쁜 날입니다"라는 말은 우리에게 통용되는 말이다. 늘 좋은 날로 만들어 살기를 바라면서 아울러 제민일보가  이 기회를 통해 더욱더 발전하는 제주도의 자랑스러운 언론사로 남기를 기원해 본다.

오늘도 좋은 시간이 되기를 빌면서 많은 필독이 있기를 바랍니다[편집자 주]

김택남 회장(좌)
김택남 회장(좌)

“키가 참 크시브니다.”

이제는 제민일보의 명예회장인 된 김효황 회장은 서로 인사가 끝나고 나의 첫 인상을 털어놨다

“사진으로 봤을 때는 무섭게 보였는데, 실제로 보니, 전혀 무섭지 않습니다.”

일본어 억양이 섞인 채 서툰 우리말로 띄엄띄엄 속내를 이야기하는 김효황 명예회장을 보며 나도 김효황 회장과 같은 생각을 했다.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면 어려운 문제도 쉽게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을, 왜 4년이라는 시간을 원망 속에서 보내야 했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처음 내가 제민일보를 인수한다고 나섰을 때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몰렸다. 외지에서 사업을 성공하고 귀향한 내가 토종기업인 ‘천마’를 인수한지 1년 만에 ‘제민일보’까지 인수한다고 하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권력의 한 축이라고 일컫는, 칼보다 강한 펜의 힘을 어떻게 쓸 것인가 시선이 집중됐다.

하지만 나는 언론을 한번도 권력의 한 축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언론, 특히 지방언론은 지역 사회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를 도민과 연결하는 소통의 장이라고 생각했다.

제민일보를 보다 폭 넓은 제주 소통의 장으로 발전시키고 싶었고 특히 주민 간의 첨예한 갈등으로 분열된 제주에 제민일보를 통해 통합의 길을 모색하고 싶었던 것이 제민일보를 인수한 이유였다.

통합과 화합, 양보와 겸손을 매번 강조하던 내게 제민일보를 인수한 바로 다음날, 민망한 소장(訴狀) 하나가 배달됐다. 제민일보의 전 사주, 김효황 회장이 윤전기를 반환해 달라며 민사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언론사를 인수하자마자 언론사의 유례없는 윤전기(*원통형의 판면과 이와 접촉하면서 회전하는 인압원통(印壓圓筒) 사이에 둥글게 감은 인쇄용지를 끼워 인쇄하는 기계로 한 번에 양면을 인쇄할 수 있어 신문, 잡지 등의 대량 인쇄에 쓰인다.) 반환소송으로 전국적인 뉴스거리가 되었다.

인간중시·정론구현을 목표로 도민의 힘을 모아 건립된 제민일보

2008년 내가 인수하게 된 제민일보는 도민주로 시작한 제주 언론의 자존심이었다. 1도 1사의 언론정책에 1987년에 이르러 민주화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제주언론에도 언론민주화 투쟁이 시작됐다.

당시 제주의 유일한 신문사였던 제주일보의 기자들은 편집권 독립을 위해 80여 일에 걸쳐 거센 파업을 진행했고 결국 파업에 동참했던 100여 명의 기자들과 직원들은 해직을 당했다.

해직된 기자들은 1990년 도민주주를 모으고 퇴직금을 보태서 참언론을 표방한 ‘제민일보’를 창간했다. 도민주주라는 자부심과 참언론의 자존심으로, 제주에서 둘째라면 서러울 정도로 대나무처럼 곧은 신문이 바로 제민일보였다.

인간중시·정론구현을 목표로 도민의 힘을 모아 건립된 제민일보
인간중시·정론구현을 목표로 도민의 힘을 모아 건립된 제민일보

하지만 모든 지방지의 경영은 지역경제의 성장에 달려있다.

특히 제주는 제조업이 부재해 신문에 싣는 광고가 다른 지역에 비해 부족한 형편이었다. 광고가 부족하니 신문사의 운영이 어려워졌고 한 사업가가 제민일보를 돕기 위해서 나섰다.

하지만 경기침체의 여파로 제1대 회장의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그 여파가 제민일보까지 미쳤다. 전국언론사 초유의 신문사 부도사태 직전 도움을 준 사람이 바로 재일교포 김효황 전 회장이었다.

당시 비상근 이사로 근무하던 김효황 전 회장은 고향 제주에 대한 애정으로 제민일보가 가장 어려웠던 시절에 기꺼이 손을 내밀었다.

인간중시·정론구현을 목표로 도민의 힘을 모아 건립된 제민일보
인간중시·정론구현을 목표로 도민의 힘을 모아 건립된 제민일보

그러나 일본의 장기적인 경기침체로 인해 더 이상의 투자가 어려워진 김효황 전 회장은 지역 언론을 투자, 육성할 인수자를 찾았고, 제주언론에 관심을 갖게 된 나와 제민일보의 매각협상을 진행하게 됐다.

추진력 있게 일을 진행하는 내 성품에 오랫동안 인수자를 찾고 있던 김효황 회장의 뜻이 합쳐져 인수협상은 빠르게 진행됐다.

고령의 재일교포인 김효황 전 회장은 직접 인수를 진행하지 않고 당시 제민일보의 대표이사였던 진성범 사장을 대리인으로 내세웠고 나는 진성범 대표의 고등학교 동기인 내 사촌형을 대리인으로 내세웠다.

나는 다른 사업체를 인수할 때와 달리, 제민일보를 인수하면서 자산대장이나 재무제표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내가 인수하는 건 제민일보의 진정한 자산인 신뢰성, 공정성, 자부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민일보의 역사는제주 언론민주화의 역사이고도민의 힘으로 도민의 목소리를 만들어 온 과정이었다.
민일보의 역사는제주 언론민주화의 역사이고도민의 힘으로 도민의 목소리를 만들어 온 과정이었다.

언론사를 인수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에 협상조건도 내 뜻보다는 김효황 회장 측에서 주장하는 조건을 대부분 수용했다.

인수가 마무리되면 오랫동안 제민일보를 위해 사재(私財)를 출현한 수고를 잊지 않기 위해서 김효황 회장을 명예회장으로 추대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을 김효황 전 회장에게 전달하기도 전에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갑자기 김효황 전 회장은 윤전기를 돌려달라며 제민일보에 민사소송을 건 것이다.

당시 제민일보가 사용하던 윤전기는 일본 오키나와 타임즈에서 사용하던 윤전기를 2000년 김효황 회장이 사재로 구입해온 것이었다. 또한 제민일보의 자산대장에 윤전기가 기재되어 있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기자들이 신문의 두뇌라면 윤전기는 신문의 심장이다. 윤전기 없이 신문발생은 불가능했고 신문사를 매각하면서 윤전기를 매각대상에서 제외한 것은 시쳇말로 팥 없는 찐빵을 파는 것이었다. 소장을 받고 당황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허탈해졌다.

도민의 화합과 통합을 위해서 시작한 일인데, 시작하자마자 도민의 눈에는 사사로운 이익으로 전 회장과 현 회장이 다툼을 벌이는 것처럼 비춰질 것이 뻔했다.

나는 인수를 담당했던 진성범 사장을 만났다. 신문사 경영을 10년 넘게 해 오신 분이 이런 소송을 갑자기 내실 리 없다, 매각협상에서 서운하신 점이 없었는지 물었다.

하지만 나보다 더 당황하고 서운했던 사람이 진성범 대표였다. 함께 고생하며 제민일보를 이끌며 오랫동안 어른으로 모신 김효황 회장의 소송은 진성범 대표에게 상처가 됐다.

매각협상이 끝나자마자 소송을 제기해 제민일보와의 인연을 마무리 지으려는 김효황 회장이 야속하기도 했을 것이다.

오랫동안 가까이 모신 어른이니 서운한 점이 있다면 무엇인지 얼굴을 찾아뵙고 말씀을 듣고 오라 부탁했지만 마음의 상처를 입은 진성범 사장은 내 부탁을 거절했다.

비록 자산대장에 윤전기가 빠져 있지만 신문사를 매각하며 윤전기를 매각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시시비비(是是非非)는 법정에서 가려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진성범 대표의 바람과는 달리 법원에서는 화해를 권고했다. 자산대장에 윤전기가 기재되지 않았으니 김효황 회장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신문과 언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법원의 판결이었고 순리대로, 상식선에서 판결이 나올 줄 알았던 제민일보 가족들의 상심이 컸다.

그렇지만 나는 법원의 권고안을 받아들이려고 했다. 소송이 진행되면서 전국언론에 언론사 초유의 윤전기소송이 계속 보도되는 것이 안타까웠다.

좋은 일을 하자고 인수한 언론인데 정작 사내에서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 부끄러웠다. 비록 부당한 소송이었지만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선 양보가 필요했다.

제민일보 경영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법원의 권고안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김효황 전 회장 측에 전달했다. 그러나 상대편에서는 법원의 권고안을 수용할 수가 없어 항소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다시 길고 지루한 법정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네가 일본에 좀 다녀와야겠다.”

나는 김효황 회장을 가깝게 모신 현민철 기자를 불렀다. 주관이 뚜렷하고 영민해 전임 회장에게도 신임을 받았고 나 또한 친동생처럼 아끼는 친구였다.

판결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만남과 대화로 서로의 입장을 조율해 해결해 나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현 기자는 중간에서 거간꾼 역할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회장님을 뵙고 이야기 좀 듣고 와. 소송을 제기하신 진짜 연유를 알아야 내가 양보를 하든지 대응을 하든지 할 거 아니냐.”

소송이 오래 지속되자 사내 안팎으로 갈등이 증폭되는 것을 안타까워했던 현 기자는 내 부탁에 서둘러 일본행을 준비했지만 결국 일본을 가지 못했다. 원고 측은 재판의 결과만이 중요할 뿐이라며 현기자와의 만남을 거절했다.

갈등을 풀기 위해서 서로 얼굴을 맞대고 속내를 털어놓은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서로에 대한 서운감과 원망으로 마음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다행히 항소심과 상고심에서 모두 제민일보의 손을 들어주었다.

신문사 운영의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설비로서 윤전기 없이는 영업자체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신문사 주식을 매각할 때 윤전기의 소유권도 이전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는 것이 판결의 요지였다.

순리대로, 상식적인 판결이 나왔다고 그동안 사람들 마음에 쌓인 상처를 한꺼번에 씻어 낼 수는 없었다. 2년 여의 재판기간 동안소송을 준비하기 위해 제민일보 가족들은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재판결과에 대한 부담감에 시달렸다.

나 또한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전 회장에게 원망이 쌓이기 시작했다. 몇 번의 만남도 거절하고 자기 입장만 고수했으니 나 또한 좋지 않은 마음을 갖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윤전기소송이 끝나고 김효황 회장과 나의 입장은 반대가 됐다.

대법원 판결에 따라 제민일보는 윤전기소송에 소요된 재판비용을 청구할 권리를 갖게 되었다.

그 뿐이 아니라 김효황 회장에게 받을 세금도 남아 있었다. 김효황 회장은 제민일보의 주식을 매매한 후, 증권거래세를 납부하지 않았다.

증권거래소는 외국인인 김효황 회장의 세금을 거래 당사자인 천마에 청구했고 소송에 앞서 천마가 김효황 회장의 증권거래세를 대신 납부했었다.

그러나 윤전기 반환소송이 시작되면서 증권거래세를 청구하지 못했고 대법원 판결이 난 후에야, 재판비용과 증권거래세 청구를 위한 절차를 진행했다.

국내 세금이나 법률사정에 어두웠던 김효황 회장은 제민일보 측에서 거액의 금액을 청구하자, 예전 윤전기반환소장을 받을 때의 나처럼 당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윤전기소송을 진행했던 변호사나 주변의 누구 하나 청구된 금액에 대해서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다. 답답해진 김효황 회장은 청구된 내용과 이후의 절차를 문의하기 위해 제민일보로 연락을 했다. 김효황회장의 소식을 듣고 온 현민철 기자는 나에게 부탁을 했다.

“전 회장님은 회장님 오시기 전까지 사재를 투자해서 제민일보를 운영하셨습니다. 그 간에 상처도 있지만 회장님이 포용하시면 언제나 말씀하신 화합의 기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현 기자는 많은 사람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윤전기소송의 매듭을 한 번에 풀 기회가 될 수 있다며 나에게 한발 양보하는 것이 좋겠다, 직언했다.

금전상의 손해도 적잖이 있었지만 내심 그동안 여러 차례 만남을 거절한 김효황 회장에 대한 서운함을 한꺼번에 털어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내 곧 현 기자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늘 갈등보다 화합이 발전의 밑거름이 된다고 기회가 될 때마다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도민주주라는 자부심과 참언론의 자존심으로, 제주에서 둘째라면 서러울 정도로 대나무처럼 곧은 신문이 바로 제민일보였다.
도민주주라는 자부심과 참언론의 자존심으로, 제주에서 둘째라면 서러울 정도로 대나무처럼 곧은 신문이 바로 제민일보였다.

내가 먼저 아깝고 서운한 것을 털어야 화합이 시작된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명확한 회계처리를 위해 대신 납부한 증권거래세를 제외한 재판비용과 법정이자의 청구를 취소했다.

입장이 바꿨는데도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나의 태도에 변화가 없자, 김효황 전 회장도 그제야 내 진심을 알게 됐다.

비록 오랜 세월 오해로 갈등이 빚어졌지만 그동안 제민일보를 위해 헌신한 뜻을 기려 명예회장으로 추대하고 싶다는 나의 제안에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로 그 간의 심정을 담았다.

2012년 10월 23일 제민일보에서는 김효황 회장을 명예회장으로 추대하는 작은 행사가 벌어졌다. 4년 만에 제민일보를 찾은 김효황 회장은 회사로 들어가지 못하고 잠시 주변을 살폈다. 4년 전의 모습과 달라진 것이 있는지 살피며 가슴에 품은 그리움을 풀어내는 듯이 보였다.

해직된 기자들은 1990년 도민주주를 모으고 퇴직금을 보태서 참언론을 표방한 ‘제민일보’를 창간했다
해직된 기자들은 1990년 도민주주를 모으고 퇴직금을 보태서 참언론을 표방한 ‘제민일보’를 창간했다

언론사를 인수하고 긴 시간 동안 송사를 진행했지만 초면이었던 나와 김효황 전 회장은 잠시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렇지만 제민일보라는 귀중한 자산을 주고받은 사이기에 어색함은 금세 사라졌다. 10년 동안 제민일보를 경영하며 좋았던 일, 어려웠던 일을 나누며 김효황 회장과 나는 오랜 세월에 쌓인 오해를 풀었다.

4년 동안 한번도 제민일보를 잊어 본 적이 없다고, 명예회장으로 추대해줘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는 김효황 회장에게 앞으로도 제민일보의 발전을 위해 애써 달라 부탁했다.

대법원 판결로 끊어졌다 생각한 제민일보와의 인연이 이어지면서 아이처럼 기뻐하는 김효황 전 회장을 보며 후회가 몰려왔다.

사진으로는 내가 무섭게 보였다는 김효황 회장의 말처럼 얼굴을 맞대고 속을 털어놓지 않았으니 김효황 회장과 나 사이에 오해가 쌓였던 것이다. 중간에 거간꾼 노릇을 하던 사람들이 김효황 회장과 나의 이익만을 헤아리느라, 진심을 전달하지 못했다.

우리말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속담이 있고 말은 건네지면 부풀어지고 과장되는 것도 사실이다. 왜곡과 과장 속에서 나는 사람의 진심을 잘 살펴보고 있는지, 모두 다 행복한 결말을 맺은 윤전기소송이 내게 준 교훈이다.

김효황 제민일보 명예회장
김효황 제민일보 명예회장

인생을 살면 좋은 날도 나쁜 날도 있습니다. 제민일보 명예회장이 된 오늘은 내게 아주 기쁜 날입니다. -김효황 제민일보 명예회장 취임사 중에서-

매일 나오는 신문이지만 한 신문을 만들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도민의 입장에서 정치, 사회, 경제, 문화에 대한 소통의 장을 만드는 것이 제일일보민 모든 가족들의 목표다.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