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산 시인, 평론가
■ 토요 시 창작 강좌(108)
□ 시 잘 쓰는 시인의 시 읽기
올해의 마지막 강좌는 최영철 시인의 시를 소개하는 것으로 마치려고 한다.
지난 1년 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주시고 격려하여 주신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1996년 진주신문 가을문예 시상식에서 소설 부문에 당선된 부인 조명숙 작가와 함께 온 최영철 시인을 필자는 처음 만났는데 첫 인사를 서로 나누면서도 겸염쩍해 하는 모습이 상당히 소심한 사람으로 느껴졌다.
말도 조용조용하고 걷는 것도 조용조용했다.
그가 시를 잘 쓰는 시인이라는 주변의 추천이 있어서 당시 책임을 맡고 있었던 문학단체에서 매달 개최했던 '이달의 시인 초청강연'에 그를 강사로 모셨다.
그런데 역시나 조용조용한 그의 강의는 잠 오기 딱 좋았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는 중학생 때 교통사고를 크게 당하여 세 번의 수술 끝에 목숨을 건져서일까 겁도 많고 시도 왠지 소심하게 보였다. 그런 그가 열 권의 시집을 내었지만 내 스타일이 아니어서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시단에서는 최영철 시인을 '시 잘 쓰는 시인'으로 인정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렸다. 결정적으로는 필자와 관련이 있던 '이형기문학상' 최종 수상후보로 거론 되었을 때 나는 그의 시집을 비로소 정독하기 시작했다.
그는 소심한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모두가 하찮게 여기는 것들에 대한 애정 어린 눈길, 부산의 변두리이던 양정동에서 어렵게 사는데는 이골이 난 전업 시인인 그는 그래도 이만하면 부자라는 생각으로 살았다는데 "빈손이어야 삼라만상을 소유할 수 있고, 좋은 차 타고 흙길 밟지 않은 사람에게는 들꽃이 보이지 않는데 나는 실컷 구경한다"는 그의 삶의 방식을 들여다보다가 나는 그에게 빠져들기 시작했다.
다음의 시 세 편을 읽어보자.
한국문학 생생 프로젝트
최영철
집 근처 폐가로 방치된 군인 아파트
나는 날로 기울어져가는 그걸 바라보며
날로 기울어져가는 우리 문학을 생각했던 것인데
그걸 정부보조금으로 빌려 한국문학 부활 프로젝트
간판 붙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인데
군인아파트니까 보초는 군인들이 서는 게 좋겠지
아무 쓸모없는 꼬투리나 물고 늘어지는 글쟁이들에게
모종의 적개심 또는 열등감을 키워온
그래서 인정사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그리고 또 한 부류
웬만한 글 앞에서는 미동도 않는 노장들로 심사위를 구성해
잘 써야하는데 배가 불러지면서 잘 못 쓰고 있는 놈
잘 쓸만한데 뚜렷한 전기가 없어 허송세월하는 놈
백 명쯤 추려 쥐도 새도 모르게 체포해 오는 거야
모든 우아한 소지품 압수
사흘 정도 냅다 굶기고 두들겨 패는 거지
지랄발광들을 하겠지 눈을 시퍼렇게 뜨겠지
이유라도 알려달라며 통사정이겠지
잎_푸조나무 아래
최영철
잎 하나 피우는 내 등 뒤로
한 번은 당신 샛별로 오고
한 번은 당신 소나기로 오고
그때마다 가시는 걸 바라보느라
이렇게 많은 가지를 뻗었답니다
잎 하나 떨구는 발꿈치 아래
한 번은 당신 나그네로 오고
한 번은 당신 남의 님으로 오고
그때마다 아픔을 숨기느라
이렇게 많은 옹기를 남겼답니다.
오늘 연초록 벌레로 오신 당신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이렇게 많은 잎을 피웠답니다
특이체질
최영철
막차 전철을 보낸 두실역
쇠문을 닫는 역원은 지하도 입구를
슬쩍 올려다 본다
거기 시골 차림의 노파가
바닥 한 편에 늘어놓은 채소와 함께
시들어있다 꼭
막차 전철이 아니더라도
지하도 입구에서서 송편을 파는
아낙을 보면 나는 갑자기
배가 고프다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 특이체질
더운 땡볕 속에서 한참 상했을지 모를
그것들을 방 가득 풀어놓고
걸신 들린 듯 먹고싶은 허기
별로 즐기지도 않은 오징어 바나나
옥수수 고구마 길에 엎드린
이것들을 몽땅 사버리면
오늘 서로 마음 편하게
잠들 수 있을까
아니다 돈만큼 사서 몇조각
배를 채우고도 누워 있자면
다시 허기 진다
과학으로 설명 될 수 없는 특이체질
오늘밤 미처 사들이지 못한
남은 송편들 때문에
쇠문 닫긴지 이미 오래된 지하도 입구
웬 할머니가 앉아 있을지도 모른다
다 팔아야 국밥 한 그릇 될 것 같지 않은
웬 아낙이 시들어 있을지 모른다.
※최영철 시인
1956년 경남 창녕 출생
19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호루라기》등 10권의 시집과 3권의 수필집 등이 있다.
<이형기문학상> <백석문학상> <최계락문학상> <설송문학상>등 수상
위에 먼저 소개한 <한국문학 생생 프로젝터>는 내가 최영철 시인에게 가지고 있던 선입견을 깨는 시론이었다. "아무 쓸모없는 꼬투리나 물고 늘어지는 글쟁이들"을 질타하는 소리였다.
우리의 문학이 가장 왕성했던 시절은 조선왕조의 선비들이 귀양살이의 고초 속에서, 일제의 암울함 속에서, 군사독재에 항거하면서 꽃을 피어 왔었는데 지금은 폐가가 되어가는 군인아파트처럼 한국문학이 기울어져가고 있다는 외침이었다.
쓸데없이 꼬투리 잡는 글쟁이, 배가 불러서 헛소리나 하며 농땡이나 치는 글쟁이들을 "사흘 정도 냅다 굶기고 두들겨 패는 거지/지랄발광을 하겠지 눈을 시퍼렇게 뜨겠지" 두들겨 맞는 이유도 모르는 그 글쟁이들을 향한 일침! 그에게 이런 면이 있다니?! 통쾌했다.
'잎 - 푸조나무 아래'는 자기가 살던 집 근처인 수영공원에 있는 오백 살이 넘는 국가지정 보호수인 푸조나무와 사계절, 아니 그보다 훨씬 오래 대화하고 세심하게 살피다가 시인의 귀로 들었던 나무의 고백을 옮겨 놓는 것인데 그의 귀 밝음에 손뼉을 치게 되는 것이다.
우리 밴드의 토요 특강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에서 내가 몇 번이나 강조했던 애인을 제대로 정해놓고 사랑을 오래도록 뜨겁게 나눈 후 그 결과물인 시를 낳으라고 강조했던 것도 사실 최영철 시인의 시작 과정을 떠올려 보면서 쓴 말이었다.
'특이체질'은 최 시인의 시선이 머물고 있는 지점을 말해주고 있다. 지하도 입구의 바닥에 채소와 함께 시들어 가는 노파와 다 팔아야 국밥 한 그릇 될 것 같지 않은 웬 아낙이 시들어 있을지 모르는 그곳을 생각하면 배가 고파오는 시인, 그는 특이체질의 시인이다.
그리고 따뜻하다. 그리고 죽비 같은 눈을 가진 그의 시린 마음에 햇볕 쏟아져 들어올 날을 염원해 보는 것이다.
그는 2009년부터 김해 생림면 '도요림'에 새 터전을 잡았다. 교통사고 후유증이 남아있는 최 시인은 평생 반려자이며 소설가인 조명숙 씨도 어릴 때 앓았던 소아마미로 다리를 절었지만 35년의 결혼 생활은 서로를 부축하고 격려하면서 글만 써온 여정이었고 가난하지만 진정성이 있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어두운 곳을 찾아서 같이 아파하고 배고파하면서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는 삶을 살아온 그는 어느덧 한국 시단의 중견시인이 되었지만 지금도 마음이 가난한 시인의 자세와 꿋꿋한 시인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는 시인이다. 최영철 시인의 건안과 건필을 진심으로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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