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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금이 칼럼](7)아, 옛날이여
[현금이 칼럼](7)아, 옛날이여
  • 뉴스N제주
  • 승인 2018.10.06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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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lden Maple, 토론토에서
"자신의 성찰기회 자주 가질 때 근자감 느껴"
1988년 여름 경주에서(좌에서 3번재 필자)
1988년 여름 경주에서(좌에서 3번째 필자)

나는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 학번을 지닌 50대 여성이다. 286이었을때는 386세대라는 신조어의 탄생을 예측하지 못했고, 386이었을때 나는 결혼제도의 불합리성에 화가 나 있었으며 486이 되어서는 노후에 자식들 덕 볼 요량으로 자식농사에 여념이 없었다. 이제 586이 되어보니 세상사 내 의지대로 되기 힘들고, 비록 내가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 내지는 못했으나 세상 또한 나를 크게 변화시키지는 못했다란 결론을 얻게 되었다.

대학시절 기약했던 영원한 우정은 서로의 부모님 경조사조차 챙기지 못하는 사이로 전락했고, 여성에게 평생 불이익일 것 같았던 결혼은 중년을 거치며 남편에서 아내로 자연스레 권력이양이 이루어짐을 몸소 느꼈다. 또한 자식들 성공시켜 덕 좀 보고자 했던 기대는 오히려 자식이 평생 부모등골 빼먹지 않을 까 전전긍긍해야 할 정도가 되었으니 …

문득 얼마 전 추석을 보낸 50대 남성들의 안부가 걱정된다. 특히 아내들의 명절증후근으로 인해 욕받이 노릇을 감내해야 하는 그들로서는 그런 날이 그리 달갑지 않을 것임이 분명하다. 방송의 많은 프로그램이 남성보다는 여성의 스피커 역할을 더 많이 해주는 요즘 그들이 느끼는 소외감은 더할 것으로 보인다.

갱년기에 접어들면서 모든 화가 입으로 모인 폭발직전의 아내, 젊어서는 가족보다 회사나 친구들에게 에너지를 쏟아 부은 덕에 소원해져버린 자녀, 가장의 책임을 지느라 혹사당한 몸뚱어리로 은퇴후의 삶을 계획하는 그들의 머릿속은 무척이나 분주할 것이다.

또한 자신들은 부모들에게 효의 의무를 지니는 반면 자식들에게 효심을 바라는건 언감생심인 지금 세태의 변화를 한탄하기보다 빨리 현실을 자각하고 적응해 나가는 게 정신건강에도 좋을 듯하다.

그래도 난 나와 동시대를 경험한 그대들을 응원한다. 내 찬란한 젊음을 서로 다른곳에서 공유했던 그대들을. 지금은 찌질해 보여도 그대들도 한 때가 있었고 지금의 젊은이들보다 더 뜨거운 가슴이 있었던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어느 세대보다도 많은 걸 경험했고 때론 좌절도 했으나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 그대들이 진정 승자인 것이다.

너무 늦게 지도자가 되었던 훌륭한 이를 선택했고, 너무 일찍 온 이를 알아보지 못해 그를 버리기도 했고, 잠시 눈이 멀어 어리석은 선택으로 엄혹한 시절로 돌려놓기도 했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현명함으로 결국 살아남은 그대들은 대단하다.

요즘 젊은이들처럼 깜짝 이벤트 안해주고 멋진 프로포즈 할 줄 모르는 그대들이 좋고, 아내 위해 차문 열어 주지 않고 의자 빼주지 않아도 나는 괘념치 않는다. 썰렁한 아재개그하며 스스로 대견해하고 자식에게 주눅들지 않으려 똥고집 부리는 꼰대의식, 증명할 수 없는 자신의 과거를 완벽하게 포장하는 뻔뻔함 조차도 기꺼이 수용할 수 있다. 본질은 겉으로 보여지는 허세가 아니라 그대들이 지닌 가치와 철학이기에.

50대의 그대들을 보면 내 찬란했던 젊음이 떠올라 그냥 이유불문하고 이해해주고 편들어주고 싶다. 물론 이 글은 갱년기 증상이 잠시 누그러진 때에 쓰는 것임으로, 1분후에 맘이 변해 그대들을 공공의 적으로 명명할 지도 모르겠다.

노래방에서 아무리 트랜디한 노래가 흘러나와도 우리시대의 대학가요제 음악이 내 머리에 평생 맴돌고 그 시대의 친구가 늘 그립고 그때 쌓인 지식으로 평생 울겨먹고 우리만이 이해하는 우리만의 언어로 떠들어대도 전혀 쫄리지 않아서 좋다.

앞으로 내 인생에 어떤 새로운 일들이 펼쳐질 지는 모르겠으나, 그닥 기대되지 않는 이유는 이젠 크게 감동할 일도 크게 놀랄 일도, 또한 그리 실망할 일도 많지 않을 것 같아서이다. 지금껏 겪은 것 이상의 사건들을 감히 예측해 본다면 부모님의 죽음 정도가 아닐까 싶고 그 슬픔의 정도는 상상불가이므로 언급조차 꺼려진다.

뜻을 세운다는 나이에 특별히 세울 뜻이 없었고, 유혹을 물리치기는 커녕 늘 물욕과 명예욕에 휘둘렸으며, 지천명의 나이가 되었다고 해서 하늘의 뜻을 알리는 만무할 것으로 사려되는 바 60, 70이 되어서도 결코 공자의 길을 걸을 수는 없음을 확신한다.

시대와 문화가 변해도 사람이 걸어가는 본질적인 길은 같음으로, 성인들의 지혜를 간접적으로 학습하고 자신을 성찰하는 기회를 자주 가질 때, 비로서 지나간 시절에 대한 아쉬움에서 벗어나 일보 진전된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것이다.

행여 내키는 대로 살아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는 70세의 삶을 60세에 미리 맛 볼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근자감(根自感)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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