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 계속]
◇ 미국 대학 교육제도는 자유경쟁 시장이다
미국대학은 주에 따라 학기제, 혹은 term 제를 택하는데, UNM은 학기제로, 8월 하순에 1학기를 시작했다.
첫 학기는 적응기간이고 영어도 잘 안 들리니, 쉬운 과목으로 세 과목을 신청하라고 선배들이 추천했다. 등록금은 과목 당 300달러. 기숙사비는 한 학기 700달러 정도였던 걸로 기억된다.
모든 강의마다 첫머리는 숙제를 내주고 숙제를 받는 순서로 시작한다. 숙제와 과제를 통해서 기초와 기본을 다지고, 응용까지 철저히 공부를 시킨다. 교수들이 강의내용에 얼마나 통달해 있는지, 가르치는 기계, 슈퍼맨처럼 느껴졌다.
또 수업진도가 매우 빨랐는데, 어떤 교수의 경우는 오른손으로 칠판을 지워나가면서 왼손으로 필기하며 설명하면서 진도를 나가서, 필기를 따라 하기가 쉽지 않았다.
16주 강의에 4주마다 중간시험을 치르고, 수시로 예고 없이 쪽지 시험을 보며, 기말에는 기말고사 외에 프로젝트를 따로 부과하는 강좌도 많았다.
기말이 가까워지면 학생들은 거의 녹초가 되어갔다. 나도 내용이 어렵다기보다는, 많은 숙제와 과제를 마감 시간 내에 해결하기 위해 잠자는 시간을 줄여야 했는데, 학기말이 다가 올 때마다 체력의 한계를 절감하였다.
미국대학은 입학은 쉬운 편이지만 졸업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학부 1학년 과목의 경우 100명이 처음 수강을 시작했다면 첫 시험에서 30여명이 떨어져 나간다.
두 번째 시험에서 20여명 떨어져 나가고 세 번째 시험에서 10여명 쯤 떨어져 나가다 보면 나중에 기말고사 볼 때에는 30여명이 남는다.
물론 대학과 강좌마다 차이는 있지만 유형은 비슷하다. 3, 4학년 쯤 되면 자신이 있는 학생들만 남기 때문에 50명이 시작했다면 10여명쯤 나가고 나머지는 끝까지 성적을 받는데 성적분포를 보면, A 는 5~6명, B 10여명, C, D는 다수, F 몇 명하는 식이 대부분이다.
미국대학 교육제도는 학생들을 무한 경쟁시켜서 최종 생존자를 가려내는 자유 시장 제도이며, 표현을 강조한다. 미국은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기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 말을 안 해도 속마음까지 다 이해하는 한국의 겸양문화와는 전혀 다르다.
석사과정은 요구 학점을 이수하고 자격시험을 통과하여 공학석사로 졸업을 하였다. 박사과정은 좀 더 복잡한데, 일단 학점을 추가로 수강하고, 박사자격시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두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
모든 과목에서 B학점 이상을 받아야 하며, 만일 C 학점을 두 과목 이상 받게 되면 탈락하기 때문에, 학점취득이나 자격시험을 통과하는데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나 역시도 꼭 박사학위를 받아야 하겠다는 집념 때문에 매 단계를 잘 통과하기 위해서 능력과 체력의 한계까지 다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내가 공부한 분야는 전기공학과에서 자동제어와 로봇공학 분야이다. 미국에는 전자공학과가 따로 있지 않고, 전기공학과 내에서 전기, 전자, 통신, 반도체, 컴퓨터 분야를 다 가르치기 때문에, 학과 규모가 매우 크고 분야가 다양하다.
나는 국과연에 근무할 때 컴퓨터 소프트웨어 분야를 연구했었는데, 당시에 컴퓨터 분야의 발전 속도가 워낙 빨라, 새로 나온 책으로 공부하고 나면 얼마 안 되어 또 새로운 내용이 나와 따라가기가 바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수학이 많이 들어가는 분야를 공부하리라 작정하여, 당시 핫 이슈로 떠오르던 로봇제어 분야를 선택하게 되었다.
논문주제는 기존에 발표된 자료를 조사하고 문제점을 찾아내서 그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내겠다는 제안을 정리하여, 심사교수들 앞에서 발표를 하여 통과하여야 했다. 누구나 공부기간 중 힘들어하는 논문예비심사 과정이다.
평균적으로 다른 어느 나라에서 온 학생들보다도
한국학생들이 더 열심히 공부해
최종 논문은 세계 최초로 창의적이거나, 개선된 방안을 제시해야만 박사 학위논문으로 받아들여진다. 제안한 방법을 수학적으로 증명해내거나 실험을 통해서 입증하게 되며, 심사하는 교수들은 이 전 과정에 거짓이나 논리적 오류 등이 없는지를 따져 보는 것이다.
나는 ‘87년 가을에 학위논문 최종 심사를 통과하였다. 이때는 자신감이 최고조에 달한 상태라 어떤 어려운 전공문제도 다 풀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마치 온갖 고난도 훈련을 마친 특공대원이 어떤 진지라도 다 정복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자신감 같을 것이다.
경제적인 문제는 나도 아내도 조교 장학금을 받아 빠듯이 꾸려나갔지만, 어린 딸아이를 돌보며 부부가 같이 공부하려니 서로가 너무 바빴고, 둘 다 박사학위과정을 마칠 때쯤에는 정신과 체력, 통장잔고까지도 바닥상태가 되었던 것 같다.
오늘날은 한국의 교육수준이나 경제력, 체력 등이 매우 좋아져서, 80년대 초 이전의 유학생들 이야기를 요즘 학생들이 듣게 되면 완전히 딴 세상의 이야기라고 생각할 것이다.
◇ 교수와 학생들
미국에서 공부를 하며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났는데, 앵글로색슨계의 교수들은 강의나 인간관계에서 원리원칙대로 약속한대로 하는 편이다.
만일 과제물 제출 마감시간을 5분이라도 넘기면 받지를 않거나 감점하고, 성적이 떨어져 학교를 떠나야 할 형편이 되어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유학생들의 절박한 처지를 고려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대체로 이민자출신 교수들에 비해서 추진력은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태리 또는 남미계의 교수들은 원칙을 따르면서도 비교적 인간적 친밀감이 느껴졌다.
유태인들은 자기네들끼리 서로 상부상조하는 경향이 느껴졌다. 동양인 교수로는 한국, 중국, 인도 출신 교수들이 많으며, 일본계는 교수나 유학생이 거의 없는 편이다. 한국계 교수라도 미국의 법을 엄격히 지켜야하기 때문에 특별한 배려나 친절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학생들도 미국출생자들은 대체로 원리원칙대로 공부하고 인간관계를 맺는다. 당시에 한국학생들은 대만학생들과 잘 어울렸는데, 대만학생들은 시험이나 취업정보를 비교적 잘 공유하며 서로 많이 돕는 편이다.
그런데 한국학생들은 자존심을 내세우고 경쟁하느라 협력이 잘 안 되는 편이었다. 과도하게 의존하려거나 반대로 혼자만 하려는 경향이 있다.
대만학생들은 석사만 마치고 취업하는 실용적 선택이 많은데 비해서, 한국학생들은 박사학위까지 취득하지 못하면 인생이 실패한 것으로 여기고 크게 낙심하곤 했다. 평균적으로 다른 어느 나라에서 온 학생들보다도 한국학생들이 더 열심히 공부했다.
◇ 아내도 대학원 공부를 하다
아내는 나보다 한 학기 지나서 미국에 도착하여, 1982년 8월 중순부터 같은 대학 화학과 대학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내의 지도교수는 부스타만테 박사라는 분으로 UC 버클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는데, 그의 UC 버클리 지도교수의 말로는, 그가 배출한 제자 중 가장 열심히 공부한 제자였다고 한다. 나와 가끔 이야기할 기회가 되면, 자기는 잠잘 시간이 부족하여 샤워하면서도 잠깐씩 잔다고 했다.
잠잘 때는 꿈속에서도 공부한다고 했다. 그는 인문학 지식과 언어구사력도 탁월한 학자였다. UC 버클리에서 같은 지도교수 밑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켈러 박사도 화학과에 있었는데, 이 사람은 그 지도교수의 제자 중 가장 명석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너무나 겸손하고 정직하며, 성품이 온유하여, 지금까지도 너무나 선한 인간의 표상으로 내 마음에 기억되고 있다. (다음편에 계속)
□프로필
1972년에 세화고등학교 17회로 졸업하고, 부산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하여, 1976년 졸업 후 국방과학연구소에서 근무하고, 1981년 8월부터 1988년도까지 미국 뉴멕시코대 전기공학과에서 공학석사,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88년부터 한국전자통신연구소에서 근무하고, 1992년부터 2019년까지 한남대학교 전자공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워싱턴대학 방문교수로 1년, 하와이 열방대에서 반년을 지냈다. 현재 명예교수로서 기술자문, 인공지능 강의 등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