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칼럼](4)스페르웨르호가 난파된 지점은 어디일까?
[이용훈 칼럼](4)스페르웨르호가 난파된 지점은 어디일까?
  • 현달환 기자
  • 승인 2024.09.24 15: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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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표착지 규명을 위한 역사적 실체 분석
차귀진과 대야수의 위치는 어디인가?
하멜은 누구이며 어떻게 귀국하게 되었는가?
하멜 표착지 규명 추진 위원회 위원장, 서예가

'하멜' 하면 제주에서는 '채바다' 선생이 생각난다. 시인으로 활동한 채바다 선생이 하멜에 대한 역사를 알고 청소년들엑 도전과 꿈을 전했다면 그와 함께 하멜에 대해 평생을 연구한 사람이 있다. 바로 대정읍 신도리 출신 이용훈 위원장이다. 그는 하멜 표착지 규명 추진위원장으로 활동하며 그에 대한 많은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하멜 표착지 규명 추진 위원회는 지난 17일 대정읍 신도2리 도구리알 앞에서 제13회 위령제를 개최했다.

이 행사에는 지역 주민과 내외빈들이 참석하여 마을의 역사적 유산과 해양 안전을 기원했다.

이날 이용훈 위원장은 추념사에서 위령제의 역사와 목적을 설명했다. 그는 하멜 기념사업회와 함께 2012년부터 시작된 위령제가 13년째를 맞이했다고 소개하며, 이를 통해 28명의 영령을 위로하고 해상 안전과 발전을 기원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하멜의 기록과 연구 결과를 토대로 제주 지역의 표착지 지정을 촉구했다. 그러나 공식적인 표착지 지정을 받지 못했다고 언급했다.

그는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명확한 표착지 지정을 요청하며, 위령제가 국제 간 교류와 마을 발전의 기초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참석자들은 하멜 표착지의 역사적 중요성을 되새기며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다짐했다.

석천(石泉) 이용훈 선생은 제주대학교 중어 중문학과 중문학을 전공했고 수원대학교 미술대학원 조형예술학과 서예미술학 석사,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서예문화과정 서예를 수학했으며, 제주대학교 박물관대학, 제주대학교 유학지도자 과정을 수료했다.

또, 한국전력공사 정년퇴직했으며 대한민국미술대전 우수상 수상 초대작가 심사위원 역임했고, 제주도미술대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역임했고 제주특별자치도 서예 문인화 총연합회, 제주특별자치도 서예문화연구원 감사를 맡고 있다.

이와 관련, 긴긴 시간을 하멜표착지 규명에 나선 이용훈 위원장의 그동안 자료를 뉴스N제주를 통해 독자들에게 알리려고 한다.

그동안 모아놓은 자료를 이용훈 칼럼을 통해 매주 한 편씩 게재하게 됨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칼럼을 허락하신 이용훈 위원장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독자여러분의 많은 필독이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주]

이용훈 위원장
이용훈 위원장

◆스페르웨르호가 난파된 지점은 어디일까?

이익태 목사의 지영록 번역본 (제주문화원 발간)의 내용을 보면

[해설]

서양에서 표류한 사람들의 기록

때는 목사가 이원진이고 판관은 노정이며 대장 현감은 권극중이다.

계사년은 1653년이고 음력 7월 24일 새벽 서양 나라 사람 췬득얌신등 64명의 함께 탄 배 한 척이 대정현 지방의 차귀진 아래 대야수 연변에 이르러 부서졌다.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26명이고 병들어 죽은 사람이 두 명이며 산 사람이 36명이다.

이른바 옷은 검정 흰색 붉은색 삼색이 섞인 옷을 입었고 머리를 서로 향하거나, 앉아 있거나 서 있어서, 글로 써서 물으니 바로 십자 획 세 개에 나머지 수 6을 이어서 가슴에 손을 모아 빌고는 십자 획 두 개에 나머지 수 6을 그리고는 눈을 감고 쓰러지며 괴이한 형태를 한다.

의상이 다르게 지어졌고 언어가 통하지 않았으나 가슴에 빈 것은 산 사람의 수이고 눈을 합하여 쓰러진 것은 죽은 사람의 수다. 그대로 조사해 보니 생사의 수가 과연 그렇다. 한왜역과 유구국에 표류했다가 돌아온 자들도 모두 불통하여 물어볼 길이 없어 남만 서양 사람일 것이라는 의심이 들어 조정에 아뢰어 물으니 남만 표래인 박연이 와서 언문으로 물어 번역하여 임금에게 올렸다.

이상과 같이 「지영록에 차귀진하 대야수 연변이다.」라며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산방산 아래는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면 정확한 난파 지점은 어디인가?

필자가 연구하여 본 스페르웨르호의 난파 지점은 그 배의 서기였던 하멜이 스케치한 삽화 속이 그림에 있다. 이 난파 현장의 모습을 담은 이 그림은 그냥 가상해서 그린 그림이 아니다.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은 누구든 현장을 스케치하기 마련이다.

스케치 화면에 한라산과 녹남봉이 일치하는 그 직선상의 신도2리 해안가에서 배가 부서졌다고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차귀진하 대야수 연변에서 한라산과 다른 화산봉이 일치하는 산이 있는지 확인해 보면 난파 상선의 위치를 알 수가 있다.

하멜은 이 섬은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높은 산이 하나 있고 나머지 산들은 모두 민둥산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계곡들이 많이 있다」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배를 타는 선원이면 누구나 내가 있는 위치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그 주위의 지형과 지물을 이용한다. 배 위에서 좌측의 직선상에 건물과 지형을 기억하고 우측으로 직선상의 건물과 지형을 기억하면 언제든 그 자리를 찾아갈 수가 있다.

하멜은 이 그림을 통하여 차후 난파된 위치가 알려지고 바다에 수장된 동료 선원들의 한을 풀어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표착지 비교 사진 참조)

이 난파 그림을 믿을 수 없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1668년도 귀국하여 하멜표류기가 발간되면서 조선과 제주도가 처음으로 서양에 알려지기 시작했다는데 어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 봐 보지도 않은 제주도의 지형 환경을 사진처럼 똑같이 그려 넣을 수가 있겠는가?

역사학자들은 그 시대의 상황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정황까지도 세세히 분석하고 파악하여 수수께끼를 풀듯 역사를 엮어가야 한다.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호불호에 따라 취사선택하여 역사를 말하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멜은 난파 현장의 이 그림 말고도 현지 주민들이 도둑질하다 관원에게 걸려 매를 맞는 모습에서 조선 군사의 모자와 의복의 모양, 활과 창을 든 모습까지 자세히 사실대로 그려 조선을 서양에 알렸다. (매 맞는 그림 참조)

매 맞는 그림

당시 네덜란드의 화풍은 할스나 렘브란트에 의해 사실주의적 그림으로 사진기처럼 그리는 것이 유행이었던 시기로 의뢰인의 말 몇 마디면 바로 사실적 순간을 포착하여 그 장면을 그려 내었다.

한 장의 그림이 전하는 메시지는 당시의 모든 역사를 증명하는 기록서가 된다. 프랑스의 대혁명 당시의 작가 마라를 암살한 그림이나,

조선시대 신윤복의 그림에서 우리는 당시의 사회상을 읽어 볼 수가 있다. 이처럼 그림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다양하다.

둘째 난파된 장소에서 대정현 청사까지 이동했는데 말을 타기도 하고 환자는 들 것에 실려 갔는데 걸어간 시간이 점심을 먹고 나서 반나절을 걸어 도착했다고 하니 아마도 10km는 족히 걸렸을 것이다. 4리그를 걸었다고 하는데 마일로 환산하면 약 12마일이고 km로 환산 하면 18km 정도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 거리이다. 

지금의 지도상에서 도로를 따르면 10km 정도가 되어서 아마 4~5시간은 족히 걸었을 것으로 본다.

셋째 8월 18일 일등항해사가 난파 지점에서 위도를 측정했는데 ‘33도 32분의 위치에 있는 켈파트 섬이란걸 알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의 현대 장비인 해상 플로터로 측정한 난파 지점의 위도는 33도 16분 40초이다.

제주시 화북포구의 위도가 33도 31분 52초로 당시의 위도 측정은 제주목을 기준으로 측정한 것 같다.

넷째 사체들이 널려있는 곳은 모래밭이다. 선장의 시체는 팔베개하고 죽어 있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면 장소가 바위틈이 아니고 바닥이 평평한 모랫바닥으로 추정된다.

배가 난파된 이곳의 안쪽은 위 농남봉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현재 간이 해수욕장으로 쓰는 모래밭이다.

채 바다 선생의 『하멜 표착지 어디인가?』라는 논문에서 난파 현장의 지형 조건을 보면

첫째로 모래사장이 넓게 펼쳐진 곳.
둘째로 선원들을 구출하기 위해 올라섰던 바위들이 발달하여 있는 곳
셋째로 최초 좌초된 지점 200여 미터 앞에 암초들이 있는 곳
넷째로 부서진 선체를 모아 불사를 수 있는 넓은 곳
다섯째 천막을 치고 병사들이 둘러싸 감시할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이러한 조건들이 모두 합당한 장소가 바로 신도리 리민들이 주장하는 도구리알 원깍이다.

이제 제주도청 문화정책과에서는 이러한 정황들을 참고하여 문화재위원 회의를 소집하여 조속히 하멜 표착지를 확정지어야 할 것이다.

산방산 아래가 표착지라고 주장했더라도 그것은 역사적 사실 정황이 미미한 상태에서 착오가 있었던 것이고 이제 모든 정황이 확실해졌으니, 역사를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표착지 지정에 주저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학계의 정설로 굳어질때 까지 지정을 못하겠다는 발상은 이제 접어주시기 바란다.

네덜란드와의 국제적 교류에서도 자발적 실천이 중요하고 하멜을 통한 세미나 등 민간외교 활동에도 그 폭이 넓어질 수가 있도록 기관의 표착지 지정 의지가 중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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