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일 2024-03-29 02:29 (금)
>
[오정옥 칼럼](7)"병원비 감당 어려워 다시 제주로"
[오정옥 칼럼](7)"병원비 감당 어려워 다시 제주로"
  • 뉴스N제주
  • 승인 2019.06.12 00:31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정옥 프로텍션메드 제주 공동대표
건축.인테리어 '생활 속의 향기' 대표

▲"병원비 감당 어려워 다시 제주로"(7)

어느덧 경희대병원에 한 달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 푹푹 찌는 무더운 여름 한방병원은 뜸 치료를 하기엔 병실이 다른 병원보다 덥게 느껴졌다.

한방병원에서 침치료. 전기침치료. 뜸치료. 물리치료. 언어치료 등으로 하루를 마치고 저녁이 되면 체력이 고갈이 됐다. 병실이 5인실이라 휠체어에 남편을 태우려면 비좁아서 옆 침대를 밀어 놓고 태워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런 와중에 입원 환자 보호자들이 예민해져서 서로 언쟁이 자주 일어났다. 뇌졸중으로 인해 언어장애가 되고 오른쪽 마비 된 할아버지가 우리침대 옆으로 입원했다.

할아버지는 언어장애로 말을 못하니까 기저귀 채워놓은 것을 왼손으로 자꾸 풀어 놓으면 간병사가 혼을 냈다.

또 커튼을 치면 꼬집는 것을 커튼 한 장 사이라서 남편 귀에 들렸는지 수간호사 선생님에게 말을 하라고 일러 줬다.

옆에서 언쟁이 생길 때마다 남편은 자신이 환자인 것을 망각한 채 중재 역할을 했다.

젊은 청년이 뇌출혈이 돼서 재활치료를 하고 있었다. 청년의 어머니가 "우리아들은 밤새 컴퓨터만 하다가 새벽에 갑자기 쓰러져 못 일어나서 병원에 왔어”라고 말했다.

환자 보호자들이 모이면 사연 없는 사람이 없다.

교회 전도사님이 제주보리빵을 사고 경희대 병원까지 찾아 오셨다. 제주 보리빵이 인기가 좋았다. 내가 재활치료 가서 자리를 비웠는데 앞 침대 환자 보호자가 나의 스토리를 듣고는 퇴원해서 외래 진료 왔는데 내손을 잡고 휴게실로 데리고 갔다.

가방을 열면서 “제주도댁, 내가 김치하고 밑반찬하고 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먹을 수 있게 해왔어. 열흘에 한번 오니까 그때마다 가지고 올 테니까 밥 잘 챙겨 먹어요.”

“잘 챙겨 먹어야 간병도 하고 애들도 보지”

전도사님의 그 말에 나는 애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목이 메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남편은 입으로 밥을 먹으면서 살이 좀 오르고 힘이 생겨서 일으켜 세우면 조금은 설 수 있었다.

특수구급차
특수구급차

어느덧 두 달이 지나 매주 화요일 150만 원 이상 병원비를 결제했다.

나는 병원비 결제 감당이 어려웠다.

“이제는 제주도 가서 치료 하면 걸을 수 있겠지” 하고 생각하고 경희대 교수님에게 말씀 드렸다. “교수님! 저 이제 제주도 내려가고 싶은데 아빠가 일반비행기를 탈수 있을까요?” 물었다.

“올라 올 때는 배타고 고속도로 타고 13시간이나 걸렸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이제는 알고 나니 두려워서 배 못 타겠어요.”
교수님이 “검사를 해보고 혈압이 안정 되서 가능하면 비행기로 가야죠. 이틀 후에 알려 드릴게요.”라는 말에 희망을 얻었다.

나는 퇴원할 준비를 하면서 의료기상에 들러서 제주에서 살 수 없는 기구들을 샀다.
드디어 이틀이 지나 교수님이 말했다.

“일반 비행기 타서 가도 되요. 그런데 이륙 할 때는 괜찮은데 착륙 할 때 뇌압이 올라 갈 수 있으니까 잘 지켜보세요.”

교수님은 한약과 공진단을 챙겨 주셨다.
나는 특수구급차에 전화를 걸어 “선생님, 애들 아빠 제주도에 가요. 의사선생님이 일반 비행기 탈 수 있다고 했어요. 우리, 김포공항까지 구급차 이용할게요”라고 말했다.

제주에 간다는 소식에 마음이 들떠 있었다.
나는 퇴원 수속 마치고 구급차를 타고 무사히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대한항공에 탑승하고 비행기가 이륙 할 때 나는 온몸이 긴장이 됐다.

한 시간 후 제주공항 활주가 보였다. 남편의 얼굴은 상기 돼 있고 나는 남편의 손을 꼭 잡고 기도했다.

의사 선생님의 말을 기억하며 혈압이 상승 할까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참으며 무사히 제주공항에 도착 했다.

시동생이 공항으로 차를 타고 와서 같이 차를 타고 한마음 병원으로 달렸다.

병원에 도착하자 혈압을 먼저 체크를 했더니 정상이었다. 애들하고 가족들이 모두 나와 있었는데 얼굴들이 다들 굳어 있었다.

이전의 아빠(남편)의 모습을 기대했는데 그전보다 많이 변해 있는 애들 아빠 얼굴을 보면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세브란스병원 재활의학과 교수님이 제주도 한마음병원 장지찬 과장님과 대학동기라고 말씀해서 재활시스템이 세브란스병원과 같다는 얘기를 듣고 한마음 병원에 입원한 것이다.

그동안 애들하고 떨어져 있었지만 애들하고 같이 잠도 못자고 집에 짐을 풀어놓고는 바로 병원을 향해 달려왔다.

다음 날 검사를 하면서 의사선생님이 이렇게 말씀 하셨다.

“하늘이 감동해서 남편을 살렸네요. 뇌출혈이 또 한 번 됐던 거 알고 있어요?”

“네? 처음 듣는 얘긴데요.”

그전에 제대병원 CT결과와 세브란스 병원의 CT 결과가 다르다는 얘기였다.
의사는 헬기타고 이송할 때 뇌압이 상승하면서 또 한 번 뇌출혈이 됐다는 것이다.

물리치료 선생님이 정해졌는데 아빠(남편)를 치료하지 못하겠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남편은 소뇌가 거의 손상이 돼서 운동 조절 능력이 떨어진다. 눈은 사물이 흔들려서 보이고 몸이 흔들거려서 중심을 잡기가 어렵다.

물리치료 선생님들이 치료하는 동안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아주 어려운 환자인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야무진 여자 선생님이 하게 돼서 나는 옆에서 세브란스병원에서 어깨 너머로 배운 걸로 보조를 했다.

그때 물리치료 선생님이 “보호자님 이쪽 공부를 하셨어요? 나는 웃으면서 “아니에요. 나는 인테리어 디자인 일을 해요.”

“정말요? 그런데 환자 치료를 너무 잘해요”
“제가 서울 병원에서 열심히 어깨 너머로 배웠어요.”

물리치료 선생님이 결혼을 하면서 집을 지었다. 그런 인연으로 인해 그 집을 지을 때 내가 일을 맡게 됐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일은 최선을 다해서 해야만 마음이 놓인다.

어느새 시간이 많이 흘러 그 선생님도 결혼해서 세 아이 엄마가 됐다. 세월이 많이도 흘러갔다.

우리가 한마음병원 온지도 열흘이 되어 가는데 뉴스에 태풍소식이 있었다.

2007년 9월16일 일요일 아침,
병원 입원실에서 5층 창가를 보고 있는데, 북쪽 소나무동산에 모래주머니를 쌓는 것이 보였다. 곧 태풍 ‘나리’가 온다고 해서 대비를 하고 있었다.

아침식사 마치고 아빠(남편)의 목욕 준비를 했다.

오전 11시쯤에 목욕침대에 남편을 이동해서 장애인 욕실에서 목욕을 마치고 나와서 병실에 들어왔는데 병실이 물바다가 돼있었다.

1시간 동안 목욕을 마치고 나왔는데 생각지도 않은 전혀 다른 세상이 벌어진 것이다.

태풍 ‘나리’는 비를 바가지로 쏟아 부어내는 것처럼 온통 창문틀로 비가 폭포같이 넘치고 있었고 사람들은 이불과 시트로 창문틀을 막아 놨다.

나는 순간 셕션기가 머리에 떠올랐다. 병실에 있는 쓰레기통을 준비해서 셕션기 호수를 입에 물고 힘껏 한번 입으로 빨고 쓰레기통을 받쳤다.

쓰레기통에 물이 바로 가득 찼다. 쓰레기통을 다 모아 교체해서 받고 하다 보니 비가 약해져서 물 받는 일은 멈췄다.

다른 병실들을 보니까 이불과 시트. 비닐봉지로 하고 있었다.
이불하고 시트는 면 소재이기 때문에 물을 먹어서 무거워서 들을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병원은 아수라장이 됐고, 그때 시간이 점심시간 환자도 식사를 못하고 침대에 옮겨 놓고 5층에서 창밖을 내다보는데 시커먼 흙탕물이 도로를 점령했고 자동차에 타 있는 여자 분이 차량에 탄 채 떠내려 오고 있었다.

약국도, 식당, 주위에 식당 모두 물에 잠겼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됐다.
약국 앞 사거리에 땅을 파놓고 공사하다 멈춘 트럭 한 대가 거꾸로 박혀 있었다. 트럭을 중심으로 다른 자동차들이 도미노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아! 영화에서만 보던 장면이 지금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었다.

승강기도 멈추고 전기도 끊기고 나니 계단을 통해서 1층 편의점 까지 내려왔다. 나는 생수를 먼저 사고 조금 남아 있는 빵과 과자를 샀다.

편의점 물건들은 순식간에 동이 났고, 사람들은 컵라면을 사재기 하고 있었다.

“전기가 공급이 안 되는데 저 라면을 어떻게 끓이려고 하지!”

우리가 필요한건 물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긴급한 환자들은 다른 병원으로 옮겨야 돼서 계단으로 들것에 내려왔다.

저녁이 되어 갈 무렵 물과 전기 공급이 안돼서 화장실에서 냄새가 나고 이불과 시트가 물에 젖어 있어 환자들이 사용할 이불과 시트 공급도 멈춰 버렸다.

자동차채 떠내려 온 사람도 병원 앞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다른 병원으로 옮겨지고. 그 당시 한마음병원 지하실에 모든 기계들이 물에 잠겨서 태풍으로 인한 피해액이 엄청났다. 태풍으로 인해 자동차들도 많이 망가졌다.

저녁 무렵 의사선생님이 왔는데 입은 옷은 진흙탕으로 오물들이 묻어 있었다.

“OO 환자분은 집에 한 번도 못가 보셨죠?
“이번기회에 집에 가면 더 좋아 질 겁니다.”

“병원이 복귀되려면 한 달 정도 있어야 돼요. 약은 20일분 처방 해드리겠습니다“

“내가 오래 환자들 진료 해봤는데 가족들하고 스킨십하고 만져주는 것이 환자는 빨리 완치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마음병원 재활의학과 장지찬 과장님은 훌륭한 의사 선생님이었다.

휴일에도 외출했다가 회진을 왔는데 환자들 손을 일일이 잡아 주시면서 제주말로 “오늘은 어떵허꽈? 열시미 운동 헙써예”

나는 제주도 와서 과장님이 회진 올 때마다 모든 환자들을 가족같이 대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고 제주도에도 이렇게 따뜻한 의사 선생님이 계셔서 안심이 되었다.

다음날 아침 아빠(남편)는 퇴원해서 집으로 가야 되는데 구급차 지원이 안 되었다. 병원에서 퇴원 할 때는 119 구급차를 부를 수 없다. 우리 집은 승강기 없는 4층인데 집으로 가는 것이 어려웠다.

119에 사정해서 어렵게 구급차가 병원으로 왔다.

우리 집 앞에서 들것에 밸트를 고정하고 네 사람이 4층까지 들어 올렸다. 그때 알게 되었는데 119는 퇴원할 때는 구급차 이용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집에 도착해서 아빠(남편)를 휠체어에 태우고는 ''당신, 6개월 만에 집에 왔어요.“ 남편은 거실을 둘러보며 눈물이 맺혔다.

“살아서 집에 오지 못할 줄 알았는데. 당신 정말 대단해! 고마워요. 입장을 바꿔서 당신이 나 같이 되었다면 난 이렇게 못했을 거야!”

“내가 열심히 운동해서 걸으면 당신 꼭 업어 줄게요.

아이들하고 나는 쏟아지는 눈물을 참으려고 아무 말을 못했다. 침묵이 흐르는데 남편이 “하나님이 나에게 휴가를 주었네요. 집에서 가족들하고 추석을 지내고 오라고”

남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반짝 거렸다.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