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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옥 칼럼](5)믿음, 불가능을 가능케 하다
[오정옥 칼럼](5)믿음, 불가능을 가능케 하다
  • 뉴스N제주
  • 승인 2019.05.27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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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옥 프로텍션메드 제주 공동대표
디자인의 명품 '생활 속의 향기' 대표

- (5)믿음, 불가능을 가능케 하다 -

이 책을 읽으면서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믿음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도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은, 예수님을 믿고 온전히 순종한 하인들이 행동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 누가 연회장에 자신들이 길어온 물을 포도주로 믿고 내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인들이 예수님의 말씀 앞에 자신들의 경험과 지식을 모두 내려놓았다.

언제나 기적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에게 나타남을 확신한다.

중국차마고도 추락, 리상시~서울 삼성병원

나는 책을 읽고 남편에게 설명을 해주면, 기대 이상으로 말문이 열리면서 그동안 일어났던 일들이 입술과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언하며, 널리 퍼뜨리며 기쁨으로 살아가게 되는 그 시간들을 기대하며 언어치료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기적! 순종하는 자를 통한 기적이 단지 성경 속의 이야기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일어남을 확신한다.

시간을 되돌려 100주년이라는 단어가 머리에 맴돌았다.

남편이 다니는 교회100주년 기도원 신축공사 계획안을 맡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생활 속의 향기’ 인테리어샵을 운영했기에 남편의 하는 일을 팩스 주고받는 것만 내가 도와줬다.

평상시 깔끔하고 완벽해야 하고 남에게 조금도 피해를 주면 안 된다고 나에게 늘 얘기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현장 일을 마치고 왔는데 남편의 얼굴이 백지장 같이 하얗게 분노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결혼하고 그런 모습을 처음 봤다.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는지 내색 하지 않고 혼자 삭힐러니 얼마나 힘 들었을까?

그 후로 남편은 교회 관련된 전화를 받지도 않고 교회도 4주를 쉬었다. 근 30년 가까이 다니던 곳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때 진행 했던 건축 설계 도면과 자료들을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잠을 설치기도 하면서 지낼 즈음 4주후 이러한 일이 생겼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영화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뇌출혈, 태안~부산대학교 병원

2007년 12월 25일은 제주도 한마음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교회 장로님이 병실을 방문했다. 남편은 “장로님! 100주년 준비는 잘 돼가고 있나요? 내가 그때는 꼭 참석 할 겁니다.” 라고 말했다.

그때 남편의 그 말에 나는 ‘100주년 행사를 어떻게 참석할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지? 하나님이 일어나서 걷게 만들어 주시려나? 남편의 소원을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앞섰다.

어느 날 서울에 계신 의사선생님하고 통화중에 교회 100주년행사를 가고 싶어 한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2008년 2월1일이 100주년인데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 준다는데 산사람 소원을 못 들어 줄까라는 생각에 여러 방면으로 수소문을 했다.

그러나 생각대로 되지 않았고 교회예배 참석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날짜는 점점 다가오는데 남편의 모습은 변하지 않았고 나는 걱정이 앞섰다.

“저러다 우울증이 오면 어떻게 하지?”

그러던 중 전화 한통화가 걸려 왔다. 응급 구조사 선생님의 전화였다.

“여기 목포입니다. 특수 구급차 2대와 선생님 세분이 제주도에 내려갑니다”

나는 “이게 꿈이 아니겠지, 선생님 애들 아빠가 내일 100주년행사 참석한다고 매일 기도 했는데 정말로 소원이 이뤄지겠네요. 고맙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남편에게 ”당신 내일 100주년 예배에 참석 할 수 있어요“라고 말을 꺼냈다.

그런데 남편은 “가지 못해. 일어 설 수도 없는데 여러 사람 힘들게 하면서 가지 못하지” 남편이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여보! 특수 구급차 2대하고 선생님 세분이 제주도 내려온다고 방금 목포에서 배 탔다고 전화가 왔어요.”라는 내말에 남편은 갑자기 눈이 커지고 흥분된 목소리로 “여보 집에 가서 양복 준비하고 손수건도 챙기고 와요”라고 말했다.

교통사고, 대만~한양대학교병원

나는 남편을 설득 시켰다. “양복을 입는 건 무리예요. 내가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 준비하고 올께”

병원을 나와서 집으로 달려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양복과 편한 옷 두벌을 준비하고 병원으로 다시 갔을 때, 목포에서 내려온 응급구조 선생님들이 구급차량과 남편을 옮길 수 있는 장비를 가지고 한마음 병원에 도착했다.

나는 병원에 환자 외출허가를 받으려 담당의사 선생님을 만났다. 담당 의사선생님은 “어떻게 이런 일이?”라며 놀랬다.

물리치료사 선생님이 “남편 분은 무슨 빽이예요”라고 묻자 나는 웃으면서 “나도 모르겠어요, 하나님 빽이네요”라며 맞장구를 쳤다.

우리는 오후3시까지 외출 허가를 받고 병원에서 남편을 들것을 이용해서 계단을 오르는데 마치 가마를 타고 간다는 생각이 들었고 구급차에 태우니 남편도 전문가들의 손길에 아주 편안해했다.

그날 10시40분 구급차가 다니던 00교회에 도착 했을 때, 하나님은 간절한 믿음으로 불가능을 가능케 만드셨다.

아시아권을 의료전용기 이송할 embraer ERJ 145 jet 항공기

이날 많은 성도와 지인들이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리며 반겨줬다.

선생님들이 들것을 들어 올려 2층 맨 뒷자리에 카트를 접었는데 휠체어로 바뀌면서 아빠가 앉아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함께 했던 응급구조 선생님들을 목사님이 직접 소개까지 해주셨다.

남편이 한 시간 반 동안 휠체어에 앉아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놀라웠다.

예배가 끝나고 사람들이 먼저 자리에 일어나서 빠져나가는데 아빠는 뒷자리에서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가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여보, 소원을 이뤘어요. 나 같으면 변해 있는 얼굴 보이고 싶지 않을 건데 당신 참 대단한 사람이네요”

예배 후 100주년 기념비 제막식이 이어져 교회 마당으로 내려왔는데 함박눈이 날렸다. 우리는 구급차에 올라 앉아 차 뒷문을 열고 행사를 지켜보는데 아빠가 손짓을 했다.

남편은 “오늘은 100주년이 주요 행사니까 우리 빨리 자리를 피해 드리자. 나 같은 사람이 있으면 행사 진행하는데 도움이 안 돼”

우리는 교회에서 점심을 포기하고 병원으로 차를 돌렸다.

남편은 전복죽을 사다 드리고 선생님들을 모시고 식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때 식당에서 시동생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이 떨어졌다. 장의사 명함이었다. 시동생은 명함을 보면서 “형수님 고맙습니다. 이 명함을 아직도 가지고 있네요”

시동생 눈에서 반짝이는 눈물을 보았다.

지금 생각하니 이게 소원을 들어주는 구급차인가, 오래 전부터 “소원구급차, 소원구급차, 소원구급차” 하셨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소원구급차’ 일을 후배들이 계속하고 있고 2019년도에 두 번의 ‘소원구급차’를 제주도민을 위해 제공했다고 했다.

환자이송하는 장면
미국 센프란시스코 이송 중

그런 소원구급차의 생각을 하는 사람들처럼 우리에겐 간절한 것들이 있다.

특히 임종을 앞둔 분들이나 누군가는 추억이 깃들어져 있는 특정한 장소 심지어는 부인의 묘지를 가보고 싶어 했던 분도 있다고 선생님이 말씀했다.

긴병에 장사 없다는 말이 맞다. 그땐 자금 사정이 무척이나 힘들었고 그래도 선생님이 올라가실 때 빈손으로 보내기가 힘들어 생각 끝에 한라봉을 차량에 실어 주었다.

시간이 흘렀다. 여러 병원을 옮겨 다니며 남편의 간병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이었다.

제주도 병원은 좁은 곳이다. 조그마한 일들도 다 아는 곳이다. 어디는 어떤 환자가 들어왔고 사실 간호사 선생님 인수인계 보다 먼저들 안다고 보면 된다.

남편의 이야기를 다들 알고 있었다. 당시 일간지 00일보에 기사가 나왔고 죽음에서 살아난 사람인데 소문이 얼마나 무성 했겠는가.

그때 제주도에서 서울로 가야 되는 환자가 있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고 그분을 직접 만나게 되었다. 구급차를 연결시켜 도움을 주려고 선생님께 전화를 했었다.

내게 구급차 도움을 선생님은 지금은 구급차 업은 하지 않고 응급환자 항공기 이송 업무를 한다고 했다.

다행이 귀국한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전화를 받았다. 환자에 대한 자초지종을 얘기를 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문제가 있다”라고 했다.

이유는 “일정기간 항공기는 장비를 받아야 하는데 항공기가 정비를 받기 위해 이륙을 해서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라고 했다.

보호자하고 통화를 한번 해보고 싶다고 해서 연결을 시켜 드렸고 선생님이 통화를 한 후 항공기를 회항시켜 4시간 후에 제주도에 도착을 했다.

그날이 2008년 5월10일경으로 기억이 된다. 제주공항에 도착했을 때 당시 내차가 9인승 승합차인데 달려가서 의료장비를 싣고 제주대학 병원 모셔다 드렸다.

나는 헬기를 탔을 때 4시간 동안 하늘에서 있었지만 19인승 비행기는 보호자도 다 같이 탈 수 있었다.

환자분을 무사히 모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서울까지 이륙 후 1시간 10분 정도 걸렸다. 알고 보니 우리가 아는 헬기가 아니었고 제트플롭 비행기였다.

시속 550킬로까지 날 수 있고 19인승에 2000km이상까지 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진짜 외국TV 나오는 에어 엠블런스 이구나” 하며 감탄했다.

이어 “해외까지도 갈수 있었구나”

그때 나는 몇 가지 선생님에게 들어 알았다.

미국에어메드 몽골이송 후

헬기는 국가와 국가 간 이동을 하지 못하고 해수면에서 100km까지 해양경찰 그 이외에는 해군 닥터헬기도 방경 40km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악천 후에는 헬기가 날지 못한다. 그런데 제트기는 헬기보다 악천 후에 강하다.

제주도 날씨에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헬기보다는 엠블런스 시스템을 갖춘 제트기가 더 적합하다고 판단이 된다.

이것이 최초로 19인승 비행기로 제주에서 세브란스 병원에 이송 하는 연결고리가 되었다.

비행기, 헬기, 특수구급차, 배구급차 이송, 소원 구급차, 이모든 것들이 제주도가 꼭 필요 하다는 것을 하나하나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정말 제주도에 필요한 비행기인데 전혀 소중함을 모르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나는 무엇인가 제주도민을 위해 도움을 주고 싶고 그 일을 직접하고 싶었다.

남편이 그렇게 고생을 해서인지 “나 같은 입장에 놓인 사람들에게 어쩌면 많은 생명에 빛을 줄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도 생겼다.

그렇게 꿈을 꾸니 나는 피곤한 마음인데도 전혀 피곤하지가 않았다.(계속)

헝가리에서 국립 왕립구급대 팀장과 한국인 환자 이송 국경을 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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