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용진 변호사 칼럼](6)새로운 인생의 출발점, 4년 늦은 나이에 고등학교에 입학하다
[허용진 변호사 칼럼](6)새로운 인생의 출발점, 4년 늦은 나이에 고등학교에 입학하다
  • 현달환 국장
  • 승인 2023.09.16 13: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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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장이 만난 제주사람, "아, 반갑수다!"
'어머니께 드리는 매화 한송이' 자서전에서
허 변호사의 눈물과 집념 성공 인생 스토리

허용진 변호사의 인생이 새롭게 쓰여지는 장면이 이번에 펼쳐진다.

허 변호사는 4년의 공백속에서 오로지 노동으로 돈을 벌기에만 시간을 할애했기에 새로운 장, 교실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그는 볼수록 효자다. 당시에 어머님을 위한 공경으로 공부도 안하고 오로지 살림에 보탬이 되도록 생활비 등 용돈도 드리고 했는데 학비로 다 모은 돈을 써버리면 어덯게 될 것인가 하는 고민속에 그는 공부라는 목표에 방점을 찍었다.

그의 성격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대부분 돈을 벌기 시작하면 그 돈을 그만 벌고 공부하기가 어려운데 과감하게 도전한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이 바로 좋고 아름다운 길이 아닌, 주위 사람들의 비양거림과 수입 중단 등 모든 안 좋은 것을 참아야 하는 상황이다.

그래도 그의 탁월한 선택으로 4년의 공백을 이겨내면서 후배들과 함께 같은 반에 다니면서 공부하는 것은 쉬운 것 같지만 말 못할 상황들이 많이 노출된다. 어디 가서 변변하게 물어보지도 못하고 혼자 해결해야 되는 상황에 외로움이 밀려온다. 사실 공부는 외로운 것이다. 그 외로운 길을 선택한 허용진 변호사는 결국 성공한 것이다.

4년의 공백을 깨고 그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다음 이야기가 더욱 기대되는 대목이다. 허용진 변호사의 열정, 끈기, 용기 등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행동에서 우리는 가슴에 불을 당겨야 한다. 무엇이 그리 환경을 바꾸게 했는지. 그 배고픔이 결국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만드는 것이다.

허용진 변호사 칼럼은 변호사 활동까지만 이어질 예정이다. 허용진 변호사의 눈물젖은 성공 스토리, 많은 응원과 성원바랍니다. [편집자 주]

허용진 국민의힘도당위원장
허용진 변호사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 4년 늦은 나이에 고등학교에 입학하다

늦깎이로 고등학교 진학을 결심하면서 인생은 선택의 연속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 진로의 선택에는 뚜렷한 목표 의식과 실천의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꿀벌들의 월동을 위한 준비를 마치고 잠시 집에서 쉬고 있던 초겨울 어느 날 셋째 형님이 느닷없이 고등학교 진학 얘기를 꺼냈다. 처음에는 꽤나 당황했다. 공부에 대한 아쉬움이 마음 한 구석에 늘 자리 잡고 있었지만 무거운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은 때부터 '진학' 문제를 애써 외면해 왔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고 보면 중학교 때 공부를 곧잘 했었다. 특히 방과 후에 공부할 여건이 갖춰지지 않았었음에도.… 그래서 셋째 형님은 내가 고등학교에 가지 못한 걸 무척이나 안타까워했다.

그날 밤잠을 설치며 늦었지만 이제라도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어떠냐는 형님의 말씀을 수없이 곱씹었지만 쉽게 결론을 내리기 어려웠다. 1~2년 늦어도 어려운 일인데 다른 친구들보다 무려 4년이나 늦게 진학한다는 것은 결코 마음먹기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참 어린 동생들과 학교생활을 해야 하는 부끄러움도 그렇고 공부를 손 놓은 지 오래 되었는데 따라갈 수나 있을까? 하는 걱정도 그렇거니와 고등학교 과정을 마친다고 하여 과연 미래가 달라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생겨나 온통 혼란스럽기만 하였다.

고등학교를 가면 대학교도 가야하는 것 아닌가? 대학교를 가려면 많은 돈이 필요한데 가능할까? 고등학교만 마치고 다시 양봉업으로 돌아올 것인가? 양봉업을 평생 직업으로 삼을 것인가? 괜히 공부한답시고 3년을 허비하는 것은 아닐까? 차라리 지금 하는 양봉을 계속하는 것이 훨씬 실속 있지 않을까? 등등

형님의 갑작스러운 한마디는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고민의 세계로 나를 이끌었다. 셋째 형님도 질문만 던졌지 구체적으로 그 어떠한 해법도 제시하지는 못할 일이었으니 특별히 조언을 구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 4년 늦은 나이에 고등학교에 입학하다

중학교 졸업 무렵 내 혼자의 판단으로 스스로 진학을 포기한 것처럼 오로지 스스로 결정해야만 했다. 물론 결정에 따른 책임도 온전히 내 몫이겠지만 말이다. 다만 차이라면 4년 전진학을 포기할 때보다 훨씬 어려운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약 한 달 동안 내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 앞으로 무엇을 한 것인지 등에 대해 스스로 많은 질문을 던졌다. 생각을 거듭한 끝에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중간 결론에 겨우 이르렀다.

4년의 경험으로 볼 때 양봉이나 노동이나 적어도 남들만큼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경험이 일천하여서 그런지 남들보다 훨씬 더 잘한다는 확신을 갖지는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공부 분야는 남들보다 혹시 잘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중학교 시절에 학교수업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경험이 자신감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비록 4년이나 쉬었지만 남들도 다하는 고등학교 공부라고 생각하자 3년 공부해보고 안 되면 다시 양봉업으로 돌아오면 되지 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공부로 인생의 승부를 한번 걸어보자는 가상한 생각까지 하였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이번에는 새로운 걱정이 고개를 들었다. 4년간 모아놓은 돈으로 3년 학비는 해결되겠지만, 대신 3년 동안은 돈을 벌지 못하니 생활비 걱정을 다시 안겨드려 부모님의 어깨를 무겁게 할 것 같아 죄송스러웠다.

해결된 듯 했던 고민은 계속되었지만 모두 시원스런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그때 고민만 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결국은 나의 선택과 의지로 귀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을 만족시킬 수 없는 상황에서 인생의 승부를 걸자면 어느 하나는 잠시 잊어버릴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 선택이 부모님의 어깨를 무겁게 하는 것이라도 어찌하겠는가! 지금의 고통을 인내하고 더 좋은 결과로 보답하면 그 또한 효도가 아니겠는가라고 다짐하며 스스로를 위안하였다. 결국 고등학교에 진학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부모님께는 고등학교 최종 입학을 코앞에 두고서야 겨우 말씀드리고 허락 받았다. 사실 말이 허락이지 제 스스로 학비를 대서 고등학교에 다녀 보겠습니다라는 의지를 선언한 것에 가깝다.

중학교 3년 내내 점심 도시락 한 번 못 챙겨주시고 어려운 형편 탓에 고등학교 진학을 권유조차 못하였던 부모님께 말이다. 진학 선언을 들은 부모님 마음은 얼마나 걱정이 앞서고 마음이 괴로웠을까? 그때 자식 얼굴만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히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뚜렷하다. 자식에게 모든 것을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 4년 늦은 나이에 고등학교에 입학하다

주고 싶고 부족함 없이 뒷바라지 하고 싶지만 그렇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아픔이 그 날 어머니의 붉어진 얼굴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고등학교에 가기로 마음먹을 당시 내 계획은 이랬다.

졸업 후 대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1차 목표지만 만일 대학에 못 가더라도 적어도 5급 공무원(지금의 9급 공무원) 시험은 자신이 있었다.

지금은 공무원 시험이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워졌지만 당시만해도 경쟁률이 그리 높지 않았다. 특히 감귤농사 수입이 꽤 괜찮아서 집에 웬만한 농장을 가진 친구들은 농장만 물려받아도 먹고 살기 충분했던 터라 초급 공무원 시험은 그리 인기가 없어서 지금에 비하면 훨씬 수월하였다.

한편 진학을 결정한 이후 어디선가 밀려드는 부끄러움과 부정적 시선을 극복하는 것도 커다란 용기를 필요로 하였다. 이미 내 친구들은 대학생이 되어 상아탑의 낭만을 만끽하고 있던 때인데 나 홀로 머리를 빡빡 깎고 일본군 제복 같은 냄새가 풍기던 교복을 입고서 한참 어린 동생들과 같은 학년이 된다는 것을 의연하게 받아들이기도 어려웠을 뿐더러 어린동급생들의 눈에 '못난 만학도'로 비쳐지지 않을까 하는 것도 근심이었다.

그러한 근심들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주변에서도 만만치 않은 비아냥거림이 날아들었다. 이렇게 뒤늦게 공부해서 무엇에 쓰려고 그러냐! 네 처지를 알아야지 늦은 공부가 어디 제대로 되겠나?

그런 말을 들을 때는 지금까지 하던 양봉이나 계속하며 그런저런 촌뜨기로 지내는 것이 훨씬 마음 편할 것 같기도 했다.

진학 여부 자체를 고민할 때는 미래의 인생이나 목표 또는 희망과 같이 다소 거창한 문제가 대상이었다면 막상 진학하겠다는 결심이 서자 4년 만에 학교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새삼 걱정거리가 되었다. 너무 어색할 것 같았고 심지어 입학할 시기를 앞두고는 두렵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굳은 의지로 어떻게든 고등학교를 마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부터 어색함과 두려움도 조금씩 극복되어 갔다.

생각을 빠르게 하고 판단이 서면 행동으로 바로 옮기는 것이 나의 조그마한 장점이라 생각한다. 지금도 고민을 그리 오래 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고민한다고 반드시 좋은 결론이 도출 되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다만 고민을 위한 기초조사를 충분히 할 뿐이다.

고민은 항상 두 개의 접시를 동시에 보여주며 선택을 강요하곤 한다.

어느 선택이 좋은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냐는 고민을 하는 시간의 문제가 아니다. 즉 심사숙고(思考)의 결과물이 반드시 그에 투입된 시간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 4년 늦은 나이에 고등학교에 입학하다가. 숙고하는 시간의 길이보다 냉철한 분석과 판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물을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바라보면 그 순간 청정하고 바른 마음이 최선의 선택, 최선의 판단을 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닐까? 오히려 고민을 오래 거듭할수록 생각이 흩어지고 흩어진 생각이 판단을 흐리게 하고 흐린 판단이 원치 않는 결과를 불러올 위험을 더 많이 수반할 수도 있다.

나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면 가급적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덜 쓰고 객관적 입장에서 냉정하게 선택하고 선택한 이후에는 그 목표를 향해 전력을 기울이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래서 위와 같은 걱정과 비아냥거림 쯤은 어쩌면 잠시 스쳐가 사라지는 일이라고 애써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가장 중요한 현실적인 문제는 입학시험이었다.

서귀포에 소재한 인문계 학교는 서귀포고등학교와 남주고등학교가 있었는데 당시 기억으로 소위 우등생들은 서귀포고를 선호하였다. 그래서 남주고에 지원하면 상대적으로 합격확률이 높다고 판단하고 남주고에 입학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에 남주중 출신이므로 혹시 입학시험 성적이 미달되더라도 중학교 은사님들께서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기대도 있었다. 그렇게 황당한 기대를 해야 할 만큼 입학시험에 자신이 없었다.

출신 중학교를 통해 입학원서를 접수해야 하는데, 입학원서 접수하는 날 도저히 혼자 갈 엄두가 나지 않아 초등학교친구 두 명과 동행하였다.

4년 전 뛰어놀던 남주중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이윽고 교무실 앞 복도에 다다르니 나도 몰래 멈칫하게 되었다.

사립학교여서 중학교 시절 선생님들이 그대로 계셨기 때문에 앞으로도 마주칠 일이 많을 것이고 그런 생각이 부끄러움과 걱정이 되어 다시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교무실 문 앞까지 와 있는 것을. 심호흡을 하고 용기를 내어 교무실 문을 밀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시 힘을 주어 문을 밀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순식간의 일이었지만 매우 당황스러웠다. 고작 문 하나에 불과했지만 바로 그 문 하나가 열리지 않으니 어찌 할 바를 모르던 나였다. 순간 이성은 온데 간데없이 사라지고 오로지그 자리를 피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어서 교무실 문을 뒤로하고 돌아서려는 데 같이 갔던 친구가 나를 붙잡더니 교무실 문을 옆으로 밀어서 여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교무실 문은 여닫이가 아니라 미닫이였다. 문이 열리지 않을 때보다 더 창피하고 스스로가 너무도 초라해 보였다.

온 몸이 꽁꽁 얼어붙은 듯이 꼼짝을 하지 못하고 서 있는데 잠시 후 중학교 은사님께서 다가오셔서 나를 끌어다 의자에 앉히고는 "용진이 너 입학하러 왔니?"하고 다정스럽게 말을 건네셨다.

나는 아무런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원서를 제출하고 나서 교정 밖으로 나오니 그제야 긴장이 풀려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며칠 후 입학시험이었다.

시험지를 보는 순간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풀 수 있는 문제는 아무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멍하니 교실 앞 태극기만을 응시했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중하여 시험문제를 열심히 그리고 차근차근 읽어 나갔다.

그러나 문제를 풀기란 매우 어려웠다. 정답이란 것을 도대체 찾을 수 없었다. 배고픔을 떨쳐버리기 위해 땀 흘렸던 지난 4년이 처음으로 후회스러웠다. 중학교 시절 배웠던 것들은 이미 내 머릿속에서 모두 도망쳐 버린지 오래였다. ①23④ 번호에 의무적으로 체크만 했다. 특히 수학은 기초적인 인수분해조차도 손댈 수 없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아는 것이 없으니 시험 시간 내내 그리여유로울 수가 없었다. 주변의 녀석들은 한 문제라도 더 풀겠다고 아등바등하는 터에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의 고교 입학시험이 사법시험보다 더 어려웠던 것 같다.

합격자 발표 날이 되었다.

듣기로는 기껏 한두 명 정도를 빼고는 모두 합격한다고 하지만 그 한두 명에 내가 포함될까 여간 긴장되고 초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합격자 명단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다가 내 이름을 발견하였다. 천만다행이구나 생각하며 돌아서는 순간, 중학교 시절 선생님이 다가 오시며 소리쳤다.

“허용진! 너 수석 합격이다"

주변에 있던 수많은 시선이 일제히 나를 응시하였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 하는 내게 선생님의 큰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합격생 삼백 명 중 뒤에서 일등이란 말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었다. 그때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경험해보지 못한 극도의 수치심이 밀려들어 도대체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이 왜 그리 길게 느껴졌던 것일까? 두 번 다시 돌이키고 싶지 않은 수치심이었다.

그 선생님께서는 상심한 나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제 시작이다. 공부하지 않고 4년이 흐른 탓이 아니겠느냐. 앞으로 충분히 잘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네가 정상적으로 공부하였으면 수석 합격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절대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고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다.

그러자 내 마음을 짓누르던 수치심은 순간적으로 비치는 강렬한 햇빛에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리는 무지개처럼 어디론가 도망가고 진학 결심 하던 때 생겼던 그 용기가 더욱 배가되어 용솟음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이 된 남주고등학교 입학은 그렇게 우여곡절 속에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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