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영 시문학 칼럼](10) '그대 가슴에 흐르는 詩' ...찔레꽃은 피고

시인 PEN International 회원 계간 시산맥 / 편집위원, 시회 회장 계간 스토리문학 / 편집위원

2022-09-12     뉴스N제주

신경림 시집,『사진관집 이층』<창비시선 370> 22쪽, 찔레꽃은 피고

찔레꽃은 피고/ 신경림

이웃 가게들이 다 불을 끄고 문을 닫고 난 뒤까지도 그애는 책을 읽거나 수를 놓으면서 점방에 앉아 있었다. 내가 멀리서 바라보며 서 있는 학교 마당가에는 하얀 찔레꽃이 피어 있었다. 찔레꽃 향기는 그애한테서 바람을 타고 길을 건넜다.

꽃이 지고 찔레가 여물고 빨간 열매가 맺히기 전에 전쟁이 나고 그애네 가게는 문이 닫혔다. 그애가 간 곳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오랫동안 그애를 찾아 헤매었나보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그애가 보이기 시작했다. 강나루 분교에서, 아이들 앞에서 날렵하게 몸을 날리는 그애가 보였다. 산골읍 우체국에서, 날렵하게 몸을 날리는 그애가 보였다. 산골읍 우체국에서, 두꺼운 봉투에 우표를 붙이는 그애가 보였다. 활석 광산 뙤약볕 아래서, 힘겹게 돌을 깨는 그애가 보였다. 서울의 뒷골목에서, 항구의 술집에서, 읍내의 건어물점에서, 그애를 거듭 보면서 세월은 가고, 나는 늙었다. 엄마가 되어 있는, 할머니가 되어 있는, 아직도 나를 잊지 않고 있는 그애를 보면서 세월은 가고, 나는 늙었다.

하얀 찔레꽃은 피고,

또 지고.

김필영

『첫 순정, 평생 잊을 수 없는 동경憧憬의 축』

문학작품의 배경에 꽃이 자주 등장한다.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꽃들은 어림잡아도 진달래꽃, 국화, 모란, 나팔꽃, 연꽃, 메밀꽃, 동백꽃, 장미꽃, 수선화, 달맞이꽃, 안개꽃, 제비꽃, 호박꽃, 파꽃, 도라지꽃 등 셀 수 없이 많다. 사건이 펼쳐진 시기에 꽃이 피고 지는 가운데 역사와 사람과 풍경이 바뀔 때 꽃은 아름답게 또는 슬프게 주인공 곁에서 빛과 향을 발한다. 신경림 시인이 제목으로 차용해 전개한‘찔레꽃’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동양의 찔레꽃 이야기는 중국의『시경』「용풍」편에「담장의 찔레꽃(牆有茨)」이란 시 한 수가 있고, 일본의『만엽집』에도 찔레꽃 노래가 있다.『동의보감』에는 열매를‘딜위여름’,『물명고』에는‘늬나무’라고 했다. ‘가시가 찌른다’라는 뜻에서 이름 붙여진 찔레꽃은 이 시에서 화자의 소년시절부터 현재에 이르는 생의 전 과정을 서사적으로 은유하는 가운데 시공의 흐름을 주도하며 등장한다.

1연에는 화자의 소년시절, 한 소녀를“멀리서 바라보며 서 있는 학교 마당가에는 하얀 찔레꽃이 피어 있었다”고 한다. “이웃 가게들이 다 불을 끄고 문을 닫고 난 뒤까지도”“책을 읽거나 수를 놓으면서 점방에 앉아” 있는 소녀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보는 소년의 마음엔 찔레순 같은 애틋한 마음이 자라기 시작하게 된다. “찔레꽃 향기는 그애한테서 바람을 타고 길을 건넜다”고 함으로 보아 소년이 흠향한‘찔레꽃’향기가‘소녀의 향기’로 느껴져 찔레꽃은 소년에게 잊을 수 없는 동경의 대상을 연상시키는 사물이 된다.

‘찔레꽃향기’흐드러진 오월은 찔레꽃과 함께 지나가고 1연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2연에 전개된다. “꽃이 지고 찔레가 여물고 빨간 열매가 맺히기 전에 전쟁이”발발하게 된다. “그애네 가게는 문이 닫혔다.

그애가 간 곳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는 행간에서 전쟁을 통해 소녀와의 별리를 겪는 아픔이 소년에게 계절풍처럼 스쳐간다. 단 2행으로 약술된 행간의 담담함이 소녀가 알아채지 못하는 가운데 멀리서 창문에 어린 소녀의 그림자를 바라보는 소년의 모습보다 침울하다. 시시각각 생사의 갈림길에 직면했을 전쟁 통에 소녀네‘닫힌 가게 문’을 확인하며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 소녀의 부재상황은 절망적으로 다가온다.

“오랫동안 그애를 찾아 헤매었나 보다.”라는 3연 첫 행에는 구체적인 기간을 언급하지 않지만 소녀네 가게가 문을 닫았던 1950년 6월 어느 날부터 어른이 된 후에도 화자는 소녀를 찾아 헤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언제부턴가 그애가 보이기 시작”한다. “강나루 분교에서, 산골읍 우체국에서, 활석 광산 뙤약볕 아래서, 서울의 뒷골목에서, 항구의 술집에서, 읍내의 건어물점에서, 그애로 명명된 소녀는 끊임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시의 종반에서 화자는“그애를 거듭 보면서 세월은 가고, 엄마가 되어 있는, 할머니가 되어 있는, 아직도 나를 잊지 않고 있는 그애를 보면서 세월은 가고, 나는 늙었다.”는 행간에서 화자의 생애를 통틀어‘그애’는 한 번도 화자를 떠난 적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우리에게 꿈과 그리움의 통시적 축이‘첫 순정’임을 깨닫게 한다. “하얀 찔레꽃은 피고, 또 지”되, 우리의 처음 사랑은 찔레꽃 향을 머금은 찔레가시처럼 우리 영혼에 박혀 시공의 인연을 초월하여 평생 우리의 등 뒤에, 가슴팍 사이에 꿈틀거리고 있음을 알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