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주년 제주4·3 희생자 추념식]고가형양 외할머니 사연 토로..."경해도 살암시난 살아져라"

제주 평화공원에서 3일 고가형 외할머니 손민규 여사 사연 밝혀 "입밖으로 '엄마' 부르면 견딜 수 없어 차마 불러볼 수도 없었다"

2021-04-03     강정림 기자

"우리 오빠 명예회복만 해줍써~"

제73주년 제주4·3 희생자 추념식이 열린 제주 평화공원에서 3일 고가형양(17·대정여고)이 유족대표로 나와 4·3 당시 부모님과 오빠를 잃은 외할머니 손민규 여사(87)의 사연을 소개했다.

손 여사의 오빠인 손돈규씨는 지난달 16일 무죄 판결을 받은 행방불명인으로, 4·3사건 당시 19살의 나이로 체포돼 군사재판을 받았다. 아버지는 집을 지키다 총살 당했고, 어머니도 함덕초등학교에 잡혀간 뒤 희생됐다.

고가형 학생은 "할머니께서 열다섯살이던 시절, 할머니의 오빠는 대구형무소로 끌려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셨다"며 "행방불명되신 후 지금까지 시신도 찾지 못했다. 억울하게 돌아가신채 누명까지 쓴 오빠를 생각하며 슬퍼하시던 할머니를 볼때면 저도 마음이 많이 아팠다"며 지난 3월 할머니의 큰 꿈이 이뤄졌다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고 양은 "오랫동안 기다려온 4.3행방불명수형인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으신 것"이라며 할머니는 이번 재심에서 이 한마디만 전했다고 말했다.

이어 고 양은 "할머니는 4.3에 대해 말조차 꺼낼 수 없었던 지난 날에 비하면 지금은 너무 다행이라 말한다"며 "이런 날이 올거라 생각도 못했다며, '이제 반가슴은 풀어졌다'고 말했다. 재판이야기를 어렴풋이 들었을 땐 저는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다"며 "늘 인자하면서도 강하게 보였던 할머니에게 이렇게 큰 아픔이 있는줄 몰랐다"고 토로했다.

또한 고 양은 "4.3당시 할머니는 지금의 저보다 어린 소녀였다. 그때 할머니의 꿈은 선생님이었다"며 "동네에 소문이 자자할정도로 공부를 잘하셨다. 할머니의 부모님도 우리 딸은 꼭 대학공부까지 시켜 선생님이 되게 해주신다 약속하셨다"고 설명했다.

고 양은 "하지만 할머니의 어릴적 꿈은 한순가에 무너져버렸다"며 "'무슨 죄가 있어 도망가냐'셨던 아버지와 함께 불타버린 집, 함께 피난중에 총살당한 어머니, 억울한 누명으로 옥살이 후 행방불명된 오빠. 할머니는 그렇게 홀로 남아 끼니 걱정에 공부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고 전했다.

고 양은 "할머니는 친구들이 '엄마~'하고 부르는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했다. 눈물이 쏟아지는 걸 많이도 참으셨다고 했다"며 "입밖으로 '엄마'하고 부르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차마 불러볼 수도 없었다고 했다"고 눈물을 삼켰다.

그러면서 "'엄마'라고 얼마나 불러보고 싶으셨을까"라며 "저는 하루에도 수십번은 엄마를 부르는데, 저보다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은 할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 진다"고 울먹였다.

고 양은 "그때 4.3만 아니었다면 훌륭한 선생님이됐을텐데 억울하지 않냐"고 가끔 할머니께 물어본다고 말했다. 고 양은 "그럴때 마다 할머니께서는 '경해도 살암시난 살아져라' 하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고 양은 할머니에게 "이제 가슴 속 응어리 절반이 풀리셨다고 하셨죠? 앞으로는 제가 할머니의 상처를 낫게 해드리겠다"며 "나중에 어른이 되면 심리치료사의 꿈을 이뤄 할머니처럼 마음의 상처를 안고 계신 분들에게 위로와 도움을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고 양은 "알고보면 할머니처럼 4.3으로 평생 힘들어하셨던 분들이 참 많더라"며 "저 할머니를 생각하며 열심히 할게요! 그래서 꼭 할머니의 가슴속 응어리를 다 풀수 있게 해드리겠다. 할머니. 그때까지 건강하셔야 해요. 사랑해요 할머니."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