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헐크' 이만수 감독 “야구만 50년...내 인생은 야구다”

김만덕기념관, 20일 ‘헐크 이만수의 도전과 나눔’ 특강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도전’, ‘모험’, ‘열정’ 가져야"

2019-12-21     현달환 기자
김만덕기념관(관장

김만덕기념관(관장 김상훈)은 20일 오후 6시 30분 김만덕기념관 1층 만덕홀에서 전 SK 와이번스 감독이자 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인 이만수 감독을 초청해 ‘헐크 이만수의 도전과 나눔’ 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올해 마지막 나눔특강을 가졌다.

이번 나눔특강에는 제주남초등학교야구부, 신광초등학교야구부, 제주제일중학교야구부, 회천야구단, 제주리틀야구단 학생들과 농협리틀야구단과 김문자,문영자 김만덕기념관 공동대표, 강승표 농협 본부장을 비롯한 농협직원들이 참여한 가운데 사인회를 곁들여 강의가 이어졌다.

김만덕기념관(관장

김상훈 관장은 “오늘 어렵게 모신 이만수 감독은 야구볼모지인 라오스에서 도전과 나눔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며 “김만덕 할머니의 나눔정신에 걸맞는 불굴의 의지로 역경에 도전해 나눔을 실천하는 이만수 감독의 이야기를 듣고 많은 교훈을 얻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만수 감독은 단상에 오르자마자 “50년 동안 야구만 했다”며 “야구가 내 인생의 전부라며 야구로 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첫 번째가 지도자, 두 번째가 해설이라고 생각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김만덕기념관(관장

그는 “그러나 막상 야구로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해설 강연 등 38가지”이며 “선수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려 14가지나 되며 도합 52가지”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5년 전 (자신이) 라오스에 정착한 시기에 라오스는 야구라는 경기를 전혀 모르고 선수는커녕 야구장 하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이제까지 선수로 생활하면서 뚝심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지내왔던 경험을 되살려 “야구선수는 프로선수가 아니면 실패자라고 하는 데 그게 아니다. 초. 중에 야구를 그만두면 많은 부모들은 자식이 미래에 대해 걱정을 한다”고 말했다.

김만덕기념관(관장

이만수 감독은 “그러나, 그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야구선수만이 아닌 다른 많은 분야에서 할 수 있는 게 많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운동선수는 세 가지를 해야한다”고 제시했다.

바로 일기 쓰기, 야구일지 쓰기,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

그는 “이러한 일을 한다며 다른 사람의 삶을 알 수 있다”며 “사회진출해도 적응이 가능하다. 어떤 사람과 대화할 수 있다, 그런 공부를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김만덕기념관(관장

특히 그는 “(초.중.고) 지금 시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만수 감독은 강의를 통해 영상을 먼저 보여주며 라오스로 떠난 사연을 밝혔다. 그는 “50년 동안 야구를 했다. SK와이번스 감독에서 경질된 후 야구단 최초로 이.취임식 거행을 제의해 와 속으로는 달갑지 않았지만 자신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지금은 그것이 전통이 돼서 이제까지 이뤄지고 있다“며 설명했다.

그는 퇴임 후 ”그런 행사가 끝난 후 자신의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아내랑)보름동안 동유럽에 비행기랑 예약하고 레스토랑 가서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려 했는데 와이프가 ‘잠깐!’ 하면서 와이프 첫마디가 왜 프로야구감독으로서 약속을 지키기 않는냐“며 ”라오스 가서 야구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게 프로다“라는 말을 해서 10일 만에 비행기를 타고 내려갔다고 말했다.

언론인터뷰 등에서 “감독이 끝나면 라오스에서 재능 기부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지금 당장 라오스로 가라고 해서 떠났다”고 말했다.

김만덕기념관(관장

그는 “입버릇처럼 과거에 야구를 그만두면 라오스로 건너가 봉사활동이나 하면서 살겠다고 한 약속을 아내가 잊지 않고 상기시켜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아내의 말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고 라오스로 떠난 배경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그는 ‘도전’, ‘모험’, ‘열정’, 지금은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50년 동안 야구현장을 누비고 그 현장에서 빠져나오면 죽는 줄 알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우리나라 야구가 최고 인기가 있지만 세계1위가 많다“며 ”아이티 강국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악플을 달아서 죽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김만덕기념관(관장

이어 이 감독은 “제일 힘든 게 가족이고 제일 힘든 사람이 아내”라며 “그 악플 때문에 우울증까지 왔었다”고 그동안 어려움의 처해 있었음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악플들을 이긴 방법으로 믿음, 즉 기도로 어려움을 이겨냈다고 밝히며 자신을 채찍질했다고 말했다.

사실 야구만 해서 그때까지도 라오스 위치를 잘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그 나라는 사회주의 공산국가였다며 야구 불모지였다”고 말하며 “와이프는 빨리 가라고 했다. 열흘 만에 갔다. 라오스에 갔는데 데 (관중으로 온 초.중 야구부를 향해)여러분은 천국에서 야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라오스 가보니 선수가 11명이었다. 5명이 맨발로 왔고 어찌 맨발로 하느냐 해서 볼을 굴러줬더니 야구공을 발로차서 큰일 날 뻔했다”며 “야구보다 축구가 인기인데 축구공을 발로 차는 것만 봤으니, 그럴 만도 했다며 아주 위험할 뻔 했다”는 일화를 말했다. 동남아는 돈이 없어 축구가 인기가 있는 종목이다.

이 감독은 “11명으로 야구를 할 수 없어서 라오스는 물이 귀해서 생수로 사 먹어야 되는 지역으로 물이 귀한 것을 알고 포스터를 붙여 야구하고 싶은 사람은 00장소로 모여라 .대신 물과 빵을 준다고 공고하니 500명이라는 숫자가 모였다”고 놀라워했다.

김만덕기념관(관장

그래서 그는 선수후보가 너무 많아 야구할 수 없어 테스트로 운동장 돌면서 한 바퀴 돌때마다 반으로 줄이고 100미터 남을 때까지 줄여서 최종 40명이 모이게 됐다“고 술회했다.

그 40명이 지금 라오스 국가대표 선수였다는 것.

이 감독은 “그 40명으로 인해 시작돼 지금 선수가 150명”이라며 “선수가 200명으로 어마어마하다. 야구는 돈이 많이 들고 야구장도 없고 축구장에서 하고 있는 야구를 보고 ‘이만수는 미쳤다’고 대한민국 언론에서 불가능하다고 한 예상을 뒤집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감독은 당시 큰소리 쳤다. ‘(라오스)너희 나라에 야구협회를 만들어주겠다“면서 말하니 주위사람들이 아무도 안 믿었다”며 “우리나라 사람은 더 안 믿었다. 그러나 우여곡절끝에 2017년 7월 3일 라오스 야구협회가 설립이 됐다"고 말했다.

야구장도 없는 데 세상 사람들이 다 웃었다. 그런데 이만수 감독은 다시 두 번째 약속으로 “야구장을 만들어주겠다”고 말해서 “이달(12월)말에 최초로 만들어진다”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인조잔디 다 깔고 덕아웃 만들고 본부석만 지으면 된다고 했다.

그는 “불가능...도전하세요”라며 ‘섬이라서 야구선수로 잘 못한다’,,,누가 그런 말을 하느냐면서 ”도전정신을 가지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김만덕기념관(관장

“저는 중1부터 야구했다.

야구를 처음 시작한 게 14살이었다. 맨날 물심부름 등 운동장 돌을 주우면서 했다. 아무리 야구를 해도 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14살에 10년을 내다보고 꿈을 꾸었다.

앞으로 10년 후에 대한민국 최고의 선수가 되는 게 첫째 목표. 10년 후 메이저리그에 입성한다는 게 두 번째 목표였다고 했다.

그는 “꿈만 꾸면 안 되고 계획이 있어야 한다”며 “10년 동안 하루 4시간만 자겠다고 했다. 진짜로 야구를 못했다. 재능 하나도 없다. 후천성이다. 노력으로 이 자리에 왔다. 야구 못해 중학교 4년 다녔다. 중.고.대학 11년 동아 하루 4시간동안만 잤다”고 말해 관중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어 그는 “3년 만에 대한민국최고 선수가 됐다. 그래서 고등학교, 대학에 갈 수 있었다”며 “꿈이 있으면 상상하고 실천해야 되고 생각만 하면 아무것도 못한다”고 했다.

이어 “일기를 써야 된다”며 “(일기 쓴 것을 보고)10년 후에 무엇을 할 것인지 알 수가 있다”고 팁을 줬다.

김만덕기념관(관장

이만수 감독의 표현을 옮기면, 이만수는 16년 동안 프로생활 했다.

40살까지 야구하고 그 때 잘렸다. 삼성에서 잘리고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미국으로 도망갔다.

맨 처음 간곳이 인디언스 클리브랜드로 갔다.

그는 40살이 되니 꼭 잘린 느낌이었다. 미국 가기전 1년동안 대구에서 영어 공부만 했다.

미국가자마자 영어가 하고 싶었다.

사람이 긴장하다보니 알던 영어를 다 까먹었다.

하루는 가방 들고 운동장에 갔는데 키가 큰 젊은 선수가 뒤에서 내 머리를 때리고 도망갔는 데 너무 놀라 속상했다.

뭐 이런 나라 있어 하면서 그냥 나갔는데 키가 193센티 몸무게 125키로가 오더니 등으로 어깨를 툭치니 내가 멀리 날아갔다. 얼마나 놀랐는지 동양인은 나 혼자 뿐이라서 한국으로 돌아가야 지 했는데 그 때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만수야, 절대 포기하지 마라”라는 말에 마음 다잡고 다시 나갔다.

다들 나를 보면서 너무 웃고 해서 존재감이 없어 원숭이 보고 웃는 것 같아 이런 수모를 겪어 숨고 싶었다고 말했다.

야구 경기가 이어지고 3류 작전 코치로 나가서 영어는 알아듣지 못해 ‘Let’s go’라는 말은 알아 들어서 잘하고 싶어서 소리질렀다.

김만덕기념관(관장

3회까지 전혀 못했다. 지루해서 4회부터는 한국말로 “야, 안타치자“라고 모션을 하면서 해도 안타가 없어 7회엔 주심이 나를 보고 ‘미쳤다”며 퇴장명령을 내렸다.

그는 “영어를 못하는 데 주심이 다가옴에 따라 불안했다. 나를 쳐다보더니 ”퇴장‘하면서 외쳤다. 둘이 엄청 싸웠다.

미국 관중이 150여명이 있었는데 계속 나를 주시하며 “너, 미쳤다” 하면서 계속 싸웠다.

그는 미국와서 피자, 햄버거 콜라 등 먹는 것들도 스트레스 쌓였는데 스트레스 풀 기회가 왔다. 욕을 해서 스트레스를 다 풀고 나니 너무 시원했다.

욕을 하니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미국 가서 제일 먼저 한 것이 욕이었다“고 말해 관중들이 웃었다.

미국 주심이 욕을 하면 인종차별로 잡혀가는 데 그렇게 욕을 하니 너무 시원했다고 말했다.

“그는 두려워하지 말라”며 게임이 끝나 숙소에서 가방에 짐을 다 싸고는 샤워기를 틀었다. 태어나서 제일 많이 울었다. 최근 어머님이 돌아가셔도 그렇게 안 울었다. 미국 땅에서 얼마나 서러웠는지 엄청 많이 울었다.

벽을 치며 내가 왜 이 미국 땅에 와서 이런 설움을 받는가하면서 울고 있을 때 갑자기 ‘만수야, 절대 포기하지 말라“라는 생각에 다시 짐을 풀었다.

그러한 계기로 인해 전날 야구 관중들이 클리브랜드 사무실에 일제히 편지를 보내서 다시 존재감을 드러내게 됐다고 말했다.

김만덕기념관(관장

다시 단장이 와서 나의 존재감을 알게 되서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또한 홈런왕에 대한 에피소드를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 홈런왕이라고 하니 믿기지 않아 홈런 하나만 치면 인정하겠다고 하면서 홈런을 쳐보라고 했다. 야구 그만 둔지 6년이 지났는데 그런 시범을 보여준다는 게 어려웠다.

그러나 이 시범이 좋은 보약이 됐다.

이 감독은 “공이 크게 들어와 타석에서 홈런을 치기 위해 ‘따악’ 때리니 너무 잘 맞아 그 펜스에 노바운드로 맞았다”고 말했다.

이어 “내가 헐크라는 자신감이 생기니 100의 자신감이 300이나 됐다”며 “다시 투수가 던진 공을 치니 홈런이 돼서 10개 공에서 6개를 쳤다”고 말했다.

현지인 야구 선수 앞에서 6개를 치니 다들 놀라워했다고 말했다.

감독은 믿기지 않아 “어제는 태풍이 뒤로 불어서 그냥 홈런이 됐다”며 내일 다시 시범을 보여라 하길래 “자신감을 얻어 오케이라고 했는데 뒷날 메이저리그 최고의 선수 5명이 왔고 그라운드에서 홈런 치는 것(마이크(당시 투수)가 던진 공을 치니 무려 7개나, 그것도 동양인이 7개를 치니) 애들이 너무 놀랐다”고 말했다.

김만덕기념관(관장

그날 이후로 감독은 선수들에게 타격과 홈런을 배우라며 “‘만수 리(이만수)’의 타격에 대해 묻지 마라, 시키는 대로 하라“면서 ”영어 한마디 못하지만 세계 공통어인 바디랭기지로 지시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인디언스가 꼴찌 팀이었는데 제가 있을 때 1등을 했다”고 말해 어린선수들과 관중들이 감동의 박수를 보냈다.

이만수 감독은 야구선수 시절부터 코치, 감독 시절의 도전과 결실, 헐크파운데이션을 설립하게 된 계기와 유소년 아구 및 야구부흥을 위한 나눔 활동, 야구 불모지인 라오스에서 새롭게 펼치는 야구인 이만수의 도전 이야기 등 불굴의 의지로 역경에 도전해 이를 극복하고 이웃을 위해 나눔을 실천하는 모습에 대해 강의하는 시간이 모자라 다음을 기약하며 마무리 됐다.

강의가 끝난 후 유소년 선수들과 팬들이 줄을 지어 사인회가 계속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