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훈 칼럼](23)토정 이지함(李之菡)에게 배운다
[김성훈 칼럼](23)토정 이지함(李之菡)에게 배운다
  • 뉴스N제주
  • 승인 2023.01.18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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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김성훈 수필가
김성훈 수필가

우리나라에는 조선시대부터 매년 정월에 ‘토정비결’을 보는 풍습이 있다.

지금은 ‘토정비결’을 그다지 믿지 않는다. 이지함은 원래 토정비결을 방대하고 정확한 적중도를 보여주도록 하였으나 자세하고 정확한 예언서가 주는 폐해를 많은 것을 깨닫고 그 규모를 줄여서 현재는 단지 144가지의 경우의 수로 줄여서 정확도가 줄어들었다. 이지함은 백성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며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토정비결’을 저술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토정비결’에는 저자가 기록되어있지 않으며 다른 어떤 기록에서도 ‘토정비결’의 저자가 언급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토정비결’의 저자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토정비결’은 70% 이상이 행운의 괘가 나와서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또한, 나쁜 괘가 나와도 어려움이 생기면 인내하면서 견디면 좋은 날이 온다고 하고 있다.

이지함은 평생 가난한 생활을 하였는데 당리당략으로 많은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정치에 환멸을 느꼈다. 그래서 청빈하게 살면서 항상 베옷과 짚신을 신었다. 이지함은 1547년 정언각(鄭彦慤)이 발견한 양재역의 벽서사건으로 그의 친구였던 안명세(安名世)가 을사사화로 죽는 것을 보았다.

벽서에는 붉은 글씨로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政權)을 잡고 간신(奸臣) 이기(李芑)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리게 되었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중추월(仲秋月) 그믐날’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 일로 많은 사람이 처형당하여 죽었다.

1548년에는 을사사화와 공신 책록의 정당성을 위해 『속무정보감(續武定寶鑑)』의 편찬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공신세력들이 기록을 살펴보다가 사관(史官) 안명세(安名世) 등이 죄인들의 진술은 생략하고, 역적이라는 표현을 하지 않고 있음을 발견하고 처형을 주장하였다.

1549년에는 정유길(鄭惟吉)과 원호변(元虎變)이 을사사화로 유배 간 이약빙의 아들 이홍윤(李洪胤)이 명종을 연산군에 비유하며 많은 사람을 살해했다고 비방하고 충주사람들과 함께 역모를 꾸민다고 고발하였다. 이 사건으로 그의 처가가 화를 입었다.

이지함은 형인 이지번에게 “처가에 길한 기운이 없어 떠나지 않으면 장차 화가 저에게까지 미칠 것입니다”라며 ‘처가의 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을 하며 피신하여 그의 가족은 무사하였다.

이지함은 56세가 되던 1573년에 초야에 은거한 선비들을 찾아 등용하는 제도인 유일(遺逸)로 과거 시험 없이 포천 현감이 되어 처음으로 관직에 나갔다. 식량 부족으로 고통을 받는 백성들을 구제하려고 정책제안을 하였으나 조정에서 받아들이지 않자 곧 사직했다. 이지함은 1578년에 아산현감에 임명되어 걸인청(乞人廳)을 세워 백성을 돕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지함은 『토정유고』를 남겼다. ‘대인설’과 ‘과욕설’, ‘피지음설’이 있다. ‘피지음설(避知音說)’에서 이지함은 ‘나를 알아주는 사람’인 지음(知音)을 피하라고 말한다.

“선비가 믿고 의지하는 것은 지음(知音) 때문이었는데, 말세의 지음(知音)은 재앙을 줄 뿐이다.

왜 그럴까? 재물은 처음에는 흉물이 아니었으나 나라의 재앙이 되는 것은 재용을 많이 지출하기 때문이요, 권세도 처음에는 흉물이 아니었으나 대부(大夫)의 재앙이 된 것은 권세를 부려 많이 써먹었던 때문이요, 보물을 소유하는 것은 처음에는 흉물이 아니었으나 평범한 사람의 재앙이 된 것은 보물을 많이 꺼내 썼기 때문이요,

지음도 처음에는 흉물이 아니었으나 어진 선비의 재앙이 된 것은 지음을 많이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선맹을 알지 못하였더라면 정영에게 무슨 근심이 있으며, 연단을 알지 못하였더라면 형경에게 무슨 근심이 있으며, 소하를 알지 못하였다면 한신에게 무슨 근심이 있었으며, 서서를 알지 못하였더라면 제갈공명에게 무슨 근심이 있었으리오.

지음을 만나고서 근심을 겪지 않은 경우가 드물어서, 곤란과 곤욕을 겪지 않은 경우의 이야기를 아직 들어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어진 선비는 자신에게 지음이기를 자처하거나 이를 원하는 사람을 반드시 피하는 것이다. 서로 만나서 해롭지 않은 것은 오직 그 산수 사이에 있는 지음이요, 들판 사이에 있는 지음이라!”

자연만이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지혜를 토정 이지함에게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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