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민숙 칼럼](6)나를 사랑할 수 있는 평대리 마을길
[양민숙 칼럼](6)나를 사랑할 수 있는 평대리 마을길
  • 뉴스N제주
  • 승인 2019.03.14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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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길, 위로하는 문학 6
시인 양민숙

□나를 사랑할 수 있는 평대리 마을길(6)

나이가 들어갈수록 건강염려증이 심해져 안하던 운동도 하게 되고, 몸에 좋다는 식품도 챙겨 먹게 된다. 누구는 짧고 굵게 살겠다고 하지만, 나는 그러하질 못하다. 딱히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는 그 후 남겨진 자들의 슬픔을 거의 온 몸으로 느끼는 편이라 감당하기 힘들 때가 많다. 그러기에 장례식장에 들어설 때는 호흡이 필요하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군가를 실컷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은 크지만 제대로 표현을 못하고 돌아오는 길, 혼자만 가슴을 쓸어내릴 때가 많다.

며칠 전 건강검진을 받았다. 몸 상태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라 기본 검사 외에도 추가적으로 세밀히 받았다. 예상대로 얌전히 있었던 용종은 더 커졌고, 조직검사를 요하는 곳도 몇 군데 있었다. 아직 검사결과가 나온 것은 아니지만 이 과정을 거치면서 스스로에 대한 애정도가 꽤나 높아졌음을 깨달았다. 난 도저히 내 가족들에게 슬픔을 줄 수는 없다는 완강한 믿음이 스스로를 더 사랑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검사결과가 나쁘지 않을 것이란 것도 알고 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무엇을 하는 행위에 있어서 집착이 심한 편이다. 완벽하고 싶고 대충 하는 것을 스스로가 용납하지 못하니 스트레스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 과정을 남에게도 강요한다는 것이다. 어떤 자리에서건 그 자리에서 해야 될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그 자리에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 내 원칙이었다. 그럼에도 세상은, 너무도 중요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너무도 중요한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채 흘러가고 있다. 아무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그 안에서 그대로 고이고 있는 모습도 자주 보인다. 그리고 나 역시 어느 순간 그 안에 섞이고 있었다. 익숙함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마음을 털고 싶을 때 걷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 이런 몸 상태, 이런 마음 상태, 이런 사람들과의 관계를 모두 다스릴 수 있는 시간을, 걷다보면 얻게 된다. 아름다운 바다와 아기자기한 길, 그리고 특색 있는 카페로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마을이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모르는 이야기를 찾으러 그 곳을 다녀왔다.

구좌읍 평대리,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조선희시인이 동행했다. 조선희시인은 여행과 공연과 자연을 사랑하는 초 긍정적인 시인이다. 그녀의 시에는 ‘평대리’가 많이 등장한다. 어느 하나 따듯하지 않은 시는 없으나 그 중 하나를 고르라면 주저하지 않고 「이녁이라는 말」을 고르겠다.

이른 저녁
피마자 잎이 폭염을 견디고
윤진 잎사귀 펼치면
챙겨 듣고 싶은 인사가 있네

사랑이 저만치에 있다고
애태우던 나이는 지났다지만
무수한 별이 뜨기 전에
듣고 또 듣고 싶은

오늘도 이녁이 있어 견뎌냈다고

푸릇한 손바닥 죄다 펼쳐
축 쳐진 어깨 토닥이면
저어기 평대 바당 깊은 곳에서
숨비소리로 묻어나는

이녁이라는 말

거친 숨소리 다독여 듣고 있으면
땡볕에도 견딜 짱짱한 힘이 생기네

             - 조선희 시인의 '이녁이라는 말' 전문

‘당신’이었으면 이 시가 이리 빛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대신 들어간 제주어 ‘이녁’이 주는 어감이 너무도 평대리의 모습과 맞아 떨어진다. 사실 어떤 몸 상태이든, 어떤 마음 상태이든, 이녁이 있으면 짱짱한 힘이 생기고 분명 위로가 되는 것이 맞다. 싸울 때는 원수처럼 대하다가도 온전히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은 또 ‘이녁’밖에 없기 때문이다.

길 이름도 정겹다. 오소록길, 수리앗길, 불림모살길, 갯마리길 등 평대리의 옛 지명들이 고스란히 들어간 이름들이 길의 특성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더욱 행운이었던 것은 마을의 옛 지명들을 복원하고 옛 모습 그대로의 평대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계시는 조선희시인의 친구께서 직접 길 안내를 해 주신 것이다.

길에 얽힌 사연들, 평대리가 지키고 있는 이야기들, 지명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이야기들이 봄바람에 섞여 살랑살랑 다가왔다. 제주의 마을을 이토록 애정을 가지고 지키며 가꾸어 나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고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도 놀라웠다.

관광객들이 좋아한다는 카페가 즐비한 바닷가를 벗어나면 평대리의 길은 대체적으로 좁다. 정말 신기한 것이 이 크지 않은 마을에 길이 이어지고 갈라지고 다시 이어지고 집으로 들어가는 올레길로 다시 나뉘고 구불구불 계속 나온다는 것이었다.

평대리의 길은 오밀조밀한 평대리의 집들과 그에 어울리는 돌담과 폭신폭신한 잔디가 깔린 마당과 평대리 사람들이 어울려 더욱 가치가 있었다. 제주 어느 시골마을에서 볼 수 있는 마을길이겠지만, 조근조근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며, 혹은 혼자 마음을 다스리며 걸을 수 있는 최고의 길이 아닐까 싶었다. 마침 날씨도 좋았다.

길을 걸으며 어렸을 때 많이 따먹었던 열매를 따 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한참을 길을 걷다가 조선희시인은 당근이 귀한 제주서쪽에 살고 있는 나를 위해 어느새 준비했는지 비닐과 칼을 가지고 갓 수확을 마친 당근 밭으로 들어가 당근을 캐기 시작하였다. 덩달아 밭으로 들어간 나도 같이 당근을 캤다.

순식간에 주황색으로 물든 마음이 봄날을 더욱 따듯하게 만들어 주었다. 조선희시인이 나를 위해 지인의 밭을 미리 섭외했다는 이야기를 그때 들었다. 쉽지 않은 배려가 평대리에 대한 전체적인 이미지까지 고정시켜 놓았다.

조선희 시인과의 평대길 데이트는 살아갈 힘을 충전하고, 또한 관계에 대한 감사함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루하루 익숙함 속에서 스스로에 대한 애정을 놓고 있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본다.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평대리의 이야기를 선물로 받아 글을 쓰며 평대리의 그림을 다시 그려본다. 마을길 안내를 흔쾌히 해 주신 평대리지킴이 부석희님께도 지면을 빌어 감사의 인사 전한다.

▶찾아가는 길 : 구좌읍 평대리 서동과 중동의 마을길로 평대초등학교에서 바닷길을 따라 내려가면 중간 중간 마을길 지도가 보인다. ‘염나니코지길’부터 걷기 시작하면 좋다. 한 시간 반 정도면 평대의 모든 길을 충분히 걸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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