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N International 회원
계간 시산맥 / 편집위원, 시회 회장
계간 스토리문학 / 편집위원
(신규호 시집, 거대한 우울<시문학 시인선 511> 11쪽, 세족(洗足) 감상평 : 김필영)
세족(洗足)
신규호
시냇물에 발을 담그고
때를 씻고 있노라니
송사리 떼 모여 꼬리치며 달려드네
풀숲에선 벌레들이 울고
흐르는 물소리에 떠가는 저녁노을
떠날 수 없는 이승에 발을 담근 채
꿈길은 하염없이 허공으로 벋어
발목이 저리고 시도록
무엇을 얻으려 만 리 길 달려 왔나
빈 채로 허전한 서녘 허공에
반달이 걸려 웃고 있네
황혼 속 펼쳐진 비단 구름
낡은 옷자락이 너풀대는 시간
철새들 먹이 찾는 개울에서
잠시 씻던 발을 잊고
가슴 속 잠든 속내 헤아려 보네
씻어도 씻어도 모자라는
발 씻는 일의 끝없음이여
『발 씻기, 삶의 길(道)에 대한 성찰』
사람은 삶의 길을 발을 통해 간다. 자신의 발로 밟아온 길에서의 일화가 모여 저마다의 역사가 된다. 그 길에서 발은 편편한 땅을 밟기도 하고, 험준한 자갈길을 밟기도 하고, 진흙탕 길에 발이 빠져 넘어지기도 한다.
자라면서, 학문의 길에서, 먹이를 벌어야 하는 길에서 발에 물집이 잡혀 짓무르기도 하고, 굳은살이 박키기도 하고, 불의 길을 밟아 더러워지기도 한다. 따라서 발을 씻지 않고는 살 수 없다. 신규호 시인의 시, 세족(洗足)을 통해 발 씻는 시간 속으로 들어가 본다.
첫 연은 언뜻 신선놀이가 연상되는 듯한 장면이나 들여다보면 극명하게 대조되는 두 모습이 공존하고 있다.
“풀숲에선 벌레들이 울고, 흐르는 물소리에 떠가는 저녁노을”이라는 오염되지 않은 자연의 청량한 풍경과 그 풍경과는 대조적인 “시냇물에 발을 담그고 때를 씻고 있는 존재"가 묘사되어 있다.
‘발의 때’라는 것은 발에 어떤 이물질이 순간적으로 묻어 있는 것이 아니고 걸어온 생의 길에서 딛었던 발에 묻은 흔적이나 오염을 수시로 씻어내지 않아 생긴 것이다.
허나 욕실도 아닌 시냇물에서 닦을 수 있는 때란 문자적인 때가 아닌 상징적인 때, 즉 생의 길에서 실수나 잘못으로 딛었던 오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연에서는 발의 때를 닦지 못한 사유를 알려준다. 화자가 걸어온 길이“떠날 수 없는 이승에 발을 담근 채”라는 묘사는‘인생의 길을 지도함이 자기에게 있지 않다’는 경구가 연상되는 행간으로 화자가 의도한 대로 길을 걸어올 수 없었던 안타까움을 말하고 있다.
지나온 길을 돌이켜보니 “꿈길은 하염없이 허공으로 벋어” 있었으니 꿈길 같은 길에서 발이 허공을 밟았다는 것은 삶의 길에서 무수한 헛발을 딛었음을 에둘러 묘사하고 있는 셈이니, 사람의 길에 벌어진 무수한 실수와 실패를 은유함이리라.
더욱이 “발목이 저리고 시도록” 걸어온 길이라면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한 길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길에도 그때그때 목적이 있었으련만 시냇물에 발을 담그고 돌이켜 보니 “무엇을 얻으려 만 리 길 달려 왔”는지 ‘만리’라는 상징적 멀고 먼 생의 길을 걸어오며 겪은 무수한 노력들이 덧없었음을 알게 한다.
그러나 그런 화자를“빈 채로 허전한 서녘 허공에 반달이”보고 웃고 있다는 묘사는‘성찰 없는 생이란 얼마나 허망한 생’이었냐고 반문하고 있는 셈이다.
2연까지 행간의 이미지만으로는 허무주의적인 사유 속으로 빠져드는 막막함을 가눌 수 없다. 그러나 시는 3연에 이르러 반전된다.
“황혼 속 펼쳐진 비단 구름”이 순식간에 “낡은 옷자락이”되어 너풀대는 광경을 보고‘비단의 화려함’과 ‘낡은 옷의 남루함’의 찰나적 변화를 생에 반추해보는 것이다. 저물어가는 황혼 그 시간까지 “개울에서 먹이를 찾는 철새들을 목격하고 이제 ”잠시 씻던 발을 잊고 가슴 속 잠든 속내 헤아려 보“게 된다.
“씻어도씻어도 모자라는 발 씻는 일의 끝없음이여”라고 부르짖는 결구는 반성 없이 앞만 보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성찰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있다.
기원 1세기 한 선생님은 제자들의 발을 물로 닦아 주는 실물교습법을 통해 어떠한 길에 발을 딛어야 하는지, 생의 길에서 얼마나 겸손해야 하는지 일깨워주었다.
발은 우리를 데리고 쉼 없이 생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이제 펼쳐지는 생의 길에서 얼마나 자주 발을 닦으며 남은 길을 걸어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