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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산 "생명력 있는 詩란 우리 삶에 즐거움과 울림 줘야"
이어산 "생명력 있는 詩란 우리 삶에 즐거움과 울림 줘야"
  • 현달환 기자
  • 승인 2019.03.08 22:25
  • 댓글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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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산 칼럼](27)토요 詩 창작 강좌
이어산 시인. 평론가
이어산 시인. 평론가
이어산 시인. 평론가

■토요 시 창작 강좌(27)

□시가 되게 쓰는 방법

다음과 같이 시를 썼다고 하자. 시가 될까?

   사마귀가 여치를 물고 있다
   온 힘을 다해 버둥거리는 여치
   결국 여치는 사마귀의 밥이 되고 말았다

위 글은 시로 성장하지 못하고 상황을 그대로 묘사한  설명문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같은 내용을 다음과 같이 썼다면 어떨까?

   직업은 망나니지만
   모태 신앙이다
   방금 여치의 목을 딴
   두 팔로 경건히
   기도 올린다

      - 반칠환 「사마귀」 전문

반칠환 시인은 사마귀의 직업이 ‘망나니’라고 정의한다. "여치의 목을 딴/두 팔로 경건히/기도 올린다"고 하니 사마귀를 모태신앙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전혀 새로운 해석이다.

이 시는 또 다른 확장성을 가진다. 경건의 모양을 갖추었으나 속을 들여다 보면 사회에 해를 끼치고 있는 신앙인들에 대한 질타일 수도 있다.
다음 시를 보자.

   나주 들판에서
   정말 소가 웃더라니까
   꽃이 소를 웃긴 것이지
   풀을 뜯는
   소의 발 밑에서
   마침 꽃이 핀 거야
   소는 간지러웠던 것이지
   그것만이 아니라
   피는 꽃이 소를 살짝 들어 올린 거야
   그래서,
   소가 꽃 위에 잠시 뜬 셈이지
   하마터면,
   소가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한 것이지

      - 윤희상 「소를 웃긴 꽃」

  위 시를 이렇게 썼다고 하자

   나주 들판에서
   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어먹고 있다
   소 주위에 흐드러지게 핀 꽃
   멀리서 보니
   꽃 위에 소가 뜬 것 같다

윤희상 시인의 시 속 화자는 소가 웃는 것을 꽃이 소의 발밑을 간지럽혔기 때문이란다. 참으로 시적인 해석이다. 그리곤 멀리서 본 착시 현상이 아니라 “꽃이 소를 살짝 들어 올린” 것이라니 우리의 생각에 일격을 가한다.

바람이 부는대로 이리저리 날리는 꽃의 힘이 참으로 대단하다고 화자는 증언한다. 마침내는 “소가 중심을 잃고/쓰러질뻔”했다니 그 재치와 능청스러움은 이 시를 한결 재미있고 맛깔스럽게 만들었다.

이렇게 우리가 익숙하게 봐온 현실이나 현상을 그대로 표현하면 산문이 되고 뒤집어서 낯선 표현으로 독자 앞에 보고하면 시를 제대로 짓는 일이 된다. 시가 노래라고 한다면 산문은 이야기다. 시는 정서를 표현하고 산문은 의미를 전달하는 점에서도 구분된다.

또한 시는 언어의 배열과 형식적 배려가 필수적인데 비해서 산문은 묘사로써 서술되고 설명되는 것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똑같은 내용일지라도 주관적 느낌을 토막말(생략된 말)로 표현한 것이 시라면, 산문은 시처럼 지나친 생략으로는 완전히 뜻이 전달되지 않는, 객관적 서술을 필요로 하는 형식이다. 시는 생략 가운데서 비약과 확대가 허용되지만 산문에선 표현되지 않은 것은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과일을 먹는다고 했을 때 맛으로 먹을 수도 있고 영양분을 섭취하려는 목적으로 먹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맛있는 것이라도 우리 몸에 유해한 것이라면 먹지 않게 되고, 아무리 영양분이 많아도 쓰거나 시어서 먹기가 거북하다면 약으로밖에는 먹을 수가 없을 것이다.

시는 감동적이거나 심미적 쾌락을 유추해내는 정서적 맛으로 먹는 것이라면, 산문은 교훈적이거나 영양분을 목적으로 의미를 찾아 먹는 것과 같다고 해도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시는 아름다운 쾌락을 추구하는 함축의 문학이라면 산문은 교시적, 일상성을 지닌 서술의 문학이라는 점에서 구분된다. 시가 우리에게 즐거움이나 울림을 주지 못한다면 시로서의 생명을 오래 유지하기 힘들게 된다는 말이다.

- 이어산 <생명시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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