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택 칼럼][전기동화]을미왜변의 영웅, 김성조 장군
[김정택 칼럼][전기동화]을미왜변의 영웅, 김성조 장군
  • 뉴스N제주
  • 승인 2022.08.06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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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택 수필가
김정택 수필가

김정택(순택) 건공장군현양추진위원회 위원장(수필가)이 본지에 특별기고로 올린 '을묘왜변(1555)의 영웅들을 기리자(건공장군 김성조를 기리며)'라는 내용을 싣고 본사는 '건공장군 김성조에 관한 연구 경과보고'에 대한 자료집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고 추진위원장 이름으로 칼럼을 게재하기로 했다.

내용은 거의 자료집 그대로 싣는데 조금 부가적인 내용을 첨가할 예정이다.

한편, 추진위는 '을묘왜변의 영웅들을 찾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영웅들을 찾고 있다.

남수곽 동쪽 구릉에서 을묘왜변(1555)의 승전을 이끌었던 4인의 치마돌격대(馳馬突擊隊)! 정로위(定虜衛) 김직손(金直孫), 갑사(甲士) 김성조(金成祖), 이희준(李希俊), 보인(保人) 문시봉(文時鳳) 용사와, 왜장을 사살한 정병(正兵) 김몽근(金夢根).

이 분들을 아시거나 조상으로 두신 종친회에서는 제보 바란다며 함께 현양사업을 추진하고자 한다고 전했다. (제보 HP 010-6608-6925 ,Fax 064-712-3064 ,stkiimsj@hanmail.net)

이와 같이 지금 우리 주위에는 과거 제주를 살린 위인, 혹은 이름 없는 영웅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한 영웅들을 찾지 못하기도 하지만 만약 찾더라도 별 뾰족한 수가 없이 그냥 묻히고 마는 사례가 왕왕 있다. '건공장군 김성조'의 비만해도 전쟁터와 전혀 관계없는 다리 위에 세워놓아 관심은 커녕 오히려 퇴색되고 있다고 추진위원회에서는 언급하고 있다.

좀 더 우리 제주에 위대한 인물이 탄생했다는 것을 알리고 그 후손이라도 잘 관리할 수 있도록 행정에서도 관심을 가져주기 바라는 마음으로 연재한다. 많은 응원과 관심바랍니다.[편집자 주]


[전기동화]을미왜변의 영웅, 김성조 장군

책을 펴내며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만일 임진왜란 때 토요토미 정권이 부산진성과 동래성으로 침범하기 전에 제주도를 점령했으면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제주도를 보급기지로 삼고 침략을 했으면 임진왜란이 성공하지 않았을까?

고려시대부터 제주도는 끊임없이 왜구의 침입으로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천여 명이 왜구가 침범한 을묘왜변이 있었습니다. 고인이 되신 향토사학자 김봉옥 선생님으로부터 제주를 구한 영웅 김성조 장군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한 적이 있습니다. 국사나 세계사는 배워도 제주역사를 배운 적이 없으니 제주를 구한 영웅이야기는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듣는 듯 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왜구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하여 정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3성, 9진, 25봉수, 38연대, 환해장성만 보아도 왜구를 막아내기 위해 선조들이 감당한 고통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듯합니다. 전복 채취, 말 기르기, 귤나무 가꾸기 등과 함께 왜구를 막아내기 위한 방어시설에서의 고역을 견디기 힘들어 육지로 도망을 갔고, 출륙금지령으로 이어졌을 듯합니다.

어린이들에게, 어른들에게 김성조 장군에 대하여 알려주고 싶은 욕심에 이 책을 펴냅니다. 일부는 상상으로, 일부는 사실을 엮었습니다. 제주를 지킨 장군을 소개하는 건 애향심, 애국심을 가지게 하는 일이라 가슴이 벅찹니다.

제주가 아닌 육지부 어린이들도 읽었으면 하는 마음에 표준어로 썼습니다. 제주어로 쓰면 제주어린이들도 읽기에 난감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명사 중 일부만 제주어로 썼으니 양해 바랍니다. 김성조 장군을 알면 나라사랑의 정신이 저절로 자리 잡으리라 믿습니다.

2021년 7월

박재형*
* 글쓴이 박재형 약력
1951년 제주에서 태어났고, 제주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했습니다.
1973년부터 토평초등학교 교사를 거쳐 서귀포학생문화원장, 제주도교육청 정책기획과장·실장, 평대초·백록초 교장을 지냈습니다. 
창작집 『이여도를 찾는 아이들』, 『검둥이를 찾아서』, 『까마귀 오서방』,『고래굴의 비밀』, 『동자석을 찾아라』, 『최정숙』, 『우리 아빠는 해남』 등이 있으며, 현재 제주문인협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을미왜변의 영웅, 김성조 장군

글쓴이 박재형

별을 보며 꿈꾸는 소년

어두운 밤이었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히 떠 있었지만 달이 뜨지 않아 깜깜했다. 밤이 깜깜해야 별은 더 뚜렷하게 빛난다. 소금빌레에서 만든 하얀 소금처럼 수없이 많은 별들이 밝은 빛을 내며 하늘에서 밝게 빛났다. 그러나 소년 성조는 호롱불이 문풍지를 뚫고 들어온 바람에 흔들려도 꼼짝도 하지 않고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었다.

건넌방에서는 짤깍짤깍 베를 짜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조는 새벽부터 소리를 들으며 일어나고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새벽에 일어난 어머니가 물허벅을 지고 바닷가 절벽에 있는 새물에 가서 물을 길어다가 물항아리에 붓는 소리를 잠귀가 밝은 성조는 이불 속에서 들었다. 잠시 후에는 쿵덕쿵덕 방아를 찧는 소리가 들려온다. 돌방애(돌절구)에 보리를 넣고 절굿공이로 내리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나면 밥 짓는 소리가 이어진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아버지가 일어나 외양간으로 걸어가서 말에게 촐(꼴)을 주는 소리가 들린다. “푸르릉 푸르릉.” 말이 좋아서 콧소리를 하면서 아버지가 준 촐을 씹는 소리가 사각사각 들려온다. 소년의 아침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내는 소리를 들으며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밥을 먹자마자 밭에 나가 김을 매다가 한낮이 되어 돌아온 어머니가 다시 바다로 가서 물질을 하고 돌아와 저녁밥을 짓고, 나면 다시 베를 짜러 베틀에 앉아 소리를 낸다. 성조가 책읽기를 마치고 동생과 함께 잠을 잘 때에도 건넌방에서는 여전히 베틀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성조는 그 베틀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베틀소리는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며, 자장가였다.

성조는 소학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책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명심보감을 뗐다고 훈장님이 읽으라고 주신 책이다.

아버지는 소년이 네 살 때부터 천자문을 가르쳤다.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성조는 한 번 가르친 것은 잊지 않았다. 두세 살 때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누는 말을 들었다가 그대로 따라 하여 놀라게 했다. 그래서 네 살이 되자 천자문을 가르쳤는데 곧잘 따라하더니 완벽하게 천자문을 외우고 그 뜻을 풀이하여 아버지 어머니를 놀라게 하였다.

한번은 아버지가 “모든 신라 김씨의 원조는 김알지이시지. 우리 집안도 김알지의 후손이야. 알지라는 말로 보아 알에서 나왔다는 걸 알 수 있겠지?”

“알에서 나왔어요? 어떤 알요. 어미가 무슨 새예요?”

“닭이야. 신라 탈해왕이 밤중에 금성 서쪽 숲속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대. 그 소리를 듣고서 신하 호공을 시켜 가보게 하였더니 금빛이 나는 작은 함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고 보고했어, 왕이 직접 가서 함을 열어보니 얼굴이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나왔단다. 그때부터 그 숲을 계림이라 하고, 아이는 금함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 씨라 했어. 그래서 우리는 김알지의 후손으로 김 씨가 된 거야.”

아버지는 어린 아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하면서도 자세히 시조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런데 어린 성조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아버지, 동네 형이 놀다가 자기는 고을나의 자손이어서 제주 고 씨래요. 그럼 나는 무슨 김 씨에요?”

“응, 우리 시조 운발 할아버지가 나주에 사셨으니 우린 나주 김 씨지. 전라도에는 전주와 나주가 큰 고을이었지. 그래서 앞 글자를 따서 전라도가 된 거란다.”

“어떻게 나주에 살게 되셨나요?”

“네가 이해할 수 있겠니? 음, 나주 김씨는 신라 경순왕계에 속하며 경순왕은 대보공 김알지의 28세손이시다. 경순왕의 손자 김운발은 김알지의 30세손이 된단다. 신라가 망하고 고려라는 나라가 들어선 후 고려 조정에서는 김운발에게 문하시중이란 벼슬을 주고, 관할지역을 나주군으로 하니 나주군에서 살게 되었고, 나주 김씨의 시조가 된 거란다.

“그럼 저는 나주 김씨 몇 세손인가요?”

“아버지가 18세이니, 너는 19세구나. 그리고 제주로 들어왔을 때로 치면 입도 6세가 되는 구나. 1세를 30년으로 잡으니 제주에 입도한지도 180여 년이 되는 셈이지.”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자랑스러운 조상이야기를 하면서도 자기가 한 말을 듣고 잊어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어린이가 알아듣기에는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저녁이 되어 잠자리에 들었는데 성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는 성조가 무슨 말을 하나 자세히 들어보니 자기가 낮에 해준 말을 동생에게 들은 대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어린 성조가 잊지도 않고 조근 조근 말을 하자 웃음이 나왔다. 머리가 좋은 어린 아들을 보는 건 아버지의 기쁨이었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공부를 더 시키고 싶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학식이 짧아 천자문보다 더 어려운 책을 가르칠 수 없었다. 마을에는 글을 가르치는 훈장이 없어 하는 수 없이 공부를 접었다. 선비가 많은 과납(납읍)마을은 너무 멀어 어린 성조를 보낼 수가 없었다. 집에서 놀기만 하는 아들을 보는 건 아버지에겐 고통이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성조는 읽을 다른 책이 없어 천자문을 읽고 또 읽었다.

성조가 여덟 살이 되자 아버지는 성조에게 공부를 시키고 싶어 동네 아이들 열 명을 모아 서당을 열었다. 훈장님은 과납마을에 찾아가 훌륭한 선비 한 분을 모셔왔다.

성조는 나이가 가장 어렸다. 같이 공부하는 아이들 중에는 열한 살짜리도 있었다. 그런데도 성조는 가장 빨리 배워나갔다. 같이 배우는 학동들이 천자문이나 동몽선습을 읽고 있는데, 혼자 명심보감을 떼고 소학을 읽었다.

책을 뗄 때마다 어머니는 책거리를 한다면서 어려운 살림에도 곤쌀(멧밥용 흰쌀)이나 좁쌀로 떡을 만들어 훈장님과 아이들에게 대접했다. 곤쌀떡은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떡이 아니었다. 쌀이 귀한 고장이라 곤쌀밥은 일 년에 한두 번 구경할 뿐이었고, 좁쌀로 오메기떡을 만들었는데 그마저도 제사나 명절날이 아니면 꿈에서도 먹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곤쌀로 만든 흰 시루떡을 먹는다는 건 정말 행운이었다.

“너 때문에 곤떡 먹는다.”

아이들은 성조 때문에 떡을 먹는 것은 좋았다. 어린 성조가 자기들보다 앞서 배우는 것을 질투하던 것도 잊어버리고 떡을 들고 맛나게 먹곤 했다.

그래도 훈장님이 안 계실 때면 어린 성조를 놀리거나 괴롭히곤 했다.

“야 임마, 소학을 배우면 다냐? 아직 젖도 안 뗀 녀석이.”

“아니야, 동생이 있어서 가까이 가지도 못해.”

“너 밤에 잠잘 때, 요에 오줌 싸지? 너 우리 집에 소금 빌러 오지 마라. 소금이 너무 귀해서 너 줄 소금 없다.”

친구들은 훈장님의 칭찬을 독차지 하는 성조가 미웠다.

훈장님은 다른 아이들보다 빨리 배우는 성조를 귀여워 하셨다.

“성균관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소학을 읽어야 한단다. 소학은 우리가 공부하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책이거든. 김굉필이라는 분은 소학이 사람이 공부를 하는데 가장 기본이며,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예의범절이 들어가 있어 죽을 때까지 놓지 않아 소학동자라고 불렸어. 그러니 성조야, 너도 이 책을 여러 번 읽어 그 뜻을 모두 알아야 한다.”

훈장님은 다른 친구들보다 빨리 진도가 나가는 성조가 대견하신지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훈장님은 성조를 보면 기분이 좋아졌다. 성조가 공부를 잘 한다는 소문과 함께 훈장이 잘 가르쳐서 그렇다는 소문도 함께 퍼져나갔다. 훈장님은 동몽선습을 가르치면서 사람은 오륜을 잘 지켜야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씀하시곤 했는데, 성조는 그 말을 잘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아버지나 어머니의 말을 거스른 적이 없었다.

봉수와 연대

성조는 훈장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다시 책을 읽었다. 그러다가 새소리를 들었다.

“까악 까악”

밤하늘을 날아가며 우는 새소리가 신기해서 성조는 귀를 모았다.

“밤에 새가 울면 비가 내린단다.”

언젠가 아버지가 해주신 말을 기억해 냈다.

성조는 급히 책을 펼쳐둔 채로 밖으로 나왔다. 깜깜한 밤이라 새는 보이지 않고 하늘꽃밭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뿌려놓았는지 하얗게 빛나는 소금밭처럼 하늘에 가득한 별들이 눈에 들어왔다.

성조는 북두칠성을 찾아 북극성을 가늠해 보았다. 나무국자처럼 생긴 북두칠성의 머리에서 다섯 걸음을 걸으면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북극성을 보며 성조는 신기했다.

아버지가 북극성 찾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성조야, 북극성은 내가 태어날 때도 저 자리에 있었거든. 해는 아침에 동쪽에서 떴다가 저녁이 되면 서쪽으로 지고, 달은 한 달 동안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안 보이다가 하지만 북극성을 언제나 제자리에 있어.”

“다른 별들도 움직이나요?”

“그럼, 다른 별은 일 년에 한 번씩 제자리로 돌아오지.”

“그럼, 별들은 북극성을 왕으로 생각해서 도는 거네요.”

“왕이라. 그럼 왕이지. 북극성은 모든 별들이 왕인 거지.”

아버지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우리 성조도 왕이 되라고 이름을 지은 거란다.”

“나도 왕이 될 수 있나요?”

“그건 아니지. 우리 같은 미천한 백성이 어떻게 왕이 되겠니? 그런 소리 어디 가서 하면 큰일 난다.”

“왜요? 아버지가 지난번에 내가 천자문을 떼니까 왕이라고 하셨잖아요.”

“그건 네가 공부의 왕이라는 거였지.”

“그렇구나. 왕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구나.”

“그럼 어디 가서 왕이 된다고 하면 역적으로 몰려서 우리 가족은 모두 죽을 수 있으니 절대로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 네 이름은 이룰 성, 끈 조 그러니까 어떤 일을 하더라도 조직이 우두머리가 되라는 뜻을 담아 지은 이름이야.”

아버지는 성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씀하셨다.

성조는 밤하늘을 보면서 생각했다. 어떻게 별들이 하늘에 떠 있는지, 북극성은 왜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지. 커서 어른이 되면 북극성처럼 큰 사람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고내오름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누가 불장난을 하고 있을까? 까만 밤하늘에 불꽃은 밝은 빛을 내며 타올랐다.

“어머니, 고내오름에 불이 붙었어요!”

성조는 깜짝 놀라 베틀에 앉아 있는 어머니를 급히 찾았다. 고내오름은 소년이 사는 엄쟁이에서 서남쪽에 있는 오름이었다. 고내오름 봉우리에서 누가 불을 붙였는지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바닷가에 있는 남두연대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더니 이웃마을의 바닷가에서도 불꽃이 피어올랐다. 밤하늘에 피어오르는 불꽃은 아주 아름다웠다.

성조는 더럭 겁이 났다.

‘왜구가 쳐들어오는 것일까?’

언젠가 아버지가 성을 쌓으러 가면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바닷가에는 돌로 만든 성이 있었다. 그 성이 무너지면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가 성이 무너진 곳에 다시 돌을 쌓아올리곤 했다.

“동쪽에 왜구가 사는 나라가 있는데, 큰 바람이 많이 불고, 땅이 흔들려서 살기가 어렵대. 그래서 농사가 잘 안 되니까 우리나라나 중국으로 도둑질을 하러 다녀. 그 나라 사람들은 키가 작아서 왜구라고 부른단다.”

“아주 나쁜 사람들이네. 그 사람들이 우리 마을에 오면 안 되겠다. 어떻게 막아내지요?”

“사람들이 고내오름과 남두연대에서 지키다가 왜구가 다가오면 불이나 연기를 피워서 알려주지. 그러면 마을 사람들은 연기나 불을 보고 숨으러 가고, 군인들이 와서 물리친단다.”

아버지가 했던 말을 생각하면서 성조는 소름이 돋았다.

‘왜구가 우리 마을에 쳐들어온다면 어떡하지?’

성조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왜구가 쳐들어와 사람들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해 갔다는 말을 할아버지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어린 시절에 추자도에 왜구가 쳐들어와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이거나 잡아가고 재물을 빼앗아 갔다는 말을. 그리고 육지로 가던 배를 탄 사람들을 죽였다는 말을. 그 말이 생각나서 성조는 연대를 지키러 간 아버지가 걱정스러웠다.

“어머니, 연대랑 오름에 불이 붙었어요. 왜구가 쳐들어왔을까요?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요? 아버지는 괜찮을까요?”

성조는 무서워 연거푸 물었다. 왜구가 금방이라도 쳐들어올까 봐 가슴이 덜덜 떨려 어머니가 베를 짜는 방으로 동생 성지를 데리고 들어갔다.

“걱정마라. 오늘은 연대에 봉홧불을 올리는 걸 훈련하러 간다고 했으니까. 왜구가 쳐들어오지 않아도 미리 훈련을 해두어야 왜구가 왔을 때, 제대로 연락을 하지.”

어머니는 어린 아들들에게 차분하게 말해주었다. 어머니의 말을 들으니 성조는 안심이 되었다. 아버지가 무사하다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없는 집에서는 어머니들도 연대에 나갔다. 연대를 지키러 간 여자들을 여정(女丁)이라고 했는데, 동네 사람들은 여청이라고 불렀다.

봉수는 횃불과 연기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시대의 통신제도였다. 봉수는 높은 오름이나 해 안 높은 곳에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위험이 닥치는 걸 알려주는 신호였다.

연대도 봉수대와 같은 군사 통신시설이었다. 연대는 해안가 동산에 있었다. 대부분 해안과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바다를 통해 쳐들어오는 왜구를 발견하기 위하여 조금 높은 곳에 만들다보니 해안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연대도 있었다. 연대 또한 통신을 위해 불을 지필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어머니의 설명을 듣다가 성조와 성지는 베틀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었다. 성지가 이불을 발로 차서 어머니는 이불을 당겨 덮어주고 나서 다시 베를 짜기 시작했다.

항파두리와 김통정 장군

아침이 밝았다. 어머니가 방아를 찧는 소리를 듣고 성조는 일어났다. 성조네가 잠이 깨기 전에 어머니는 벌써 일어나 허벅을 지고 먼 해안가 엉장(절벽) 밑에 있는 새물에 가서 물을 길어온 모양이다. 가족들이 먹고 마실 물은 매일 필요했다. 그래서 어머니의 물 긷기는 하루도 거르는 법이 없었다.

이윽고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아들들 아직도 안 일어났느냐?”

아버지는 문밖에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벌써 일어났어요.”

성조는 얼른 일어나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두 살 아래인 성지는 여전히 꿈나라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아버지는 지난밤에 연대를 지키고 아침에 돌아온 것이다.

“아버지, 밤에 불을 붙였어요? 여기저기서 불이 오르는 걸 봤어요.”

“그렇구나. 우리 마을에서 가까운 오름에는 고내봉수가 있고, 바닷가에는 남두연대와 애월연대가 있어. 왜구가 쳐들어오면 먼저 발견한 봉수나 연대에서 밤에는 횃불로 알리고, 낮에는 연기를 올려 알리면 제주도내 오름과 연대에서 연달아 연기나 횃불로 알려 제주읍성 안에 있는 목관아에서 일하는 높은 사람에게 알려서 막아낸단다.”

“제주에는 봉수대와 연대가 많아요? 산에는 봉수대, 바닷가에는 연대.”

성조가 노래하듯이 말했다.

“그럼 높은 오름에 있는 봉수대가 25곳, 바닷가에는 연대가 38곳이나 있지.”

“어제는 왜구가 쳐들어 올까봐 불을 피우는 거 연습했지요?”

“그렇지. 왜구가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니까 평상시에 연습을 하는 거지. 어머니가 말해줬구나. 우리 아들 기억력은 최고.”

아버지는 밤을 새워 연대를 지켜 피곤했는데도 성조가 영리하게 말을 하자 기분이 좋았다.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성조는 안심이 되었다. 왜구가 어떤 사람들인지는 몰라도 아주 나쁜 사람들이라는 건 틀림없다. 사람들을 함부로 죽이고 잡아가는 사람이라면 착한 사람들은 절대 아니다.

아버지는 성조와 말을 마치고 나서 눌(낟가리)에서 촐(꼴)을 한 단 빼어 말에게 던져 주었다. 말은 촐을 입으로 물더니 이빨로 씹어 먹기 시작했다. 바삭 마른 풀인데도 말은 맛있다는 듯이 소리를 내며 씹었다.

말이 먹고 있는 촐은 작년 가을, 들판에 있는 촐밭(꼴밭)에서 베어 말린 후 집으로 옮겨와 우영(텃밭)에다 차곡차곡 쌓아 눌을 만들었다. 눌이 된 촐은 밥을 하는 땔감으로도 쓰고, 말의 사료가 되었다.

성조는 아침밥을 먹고 나서 공부할 준비를 했다. 훈장님은 과납(납읍)에서 걸어오시느라 해가 수산오름 위에 떠 있을 때쯤 오시고, 훈장님이 오시기 전에는 친구들이 공부를 하는 마루는 떠들썩한 놀이터가 된다. 친구들은 간밤에 있었던 일이랑 아는 얘기들을 모두 풀어놓았다. 지난 밤에 식게(기제사)를 지내고 떡을 것을 가지고 오는 아이가 그 날 대장이었다.

그런데 재순이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성조의 귀에 대고 귓속말을 했다.

“내일 놀러가지 않을래?”

“어디로?”

“항파두리.”

“항파두리? 아주 멀 텐데.”

“멀지. 그래서 가보려는 거야. 아무 때나 갈 수 없는 곳이니까.”

“알았어. 그런데 너랑 나만 가는 거야?”

“아니야. 친구들이랑 같이 가기로 했어. 넌 책벌레니까 내가 물어보는 거야.”

성조는 가고 싶었다. 같이 공부하는 친구들은 어디든지 놀러 다닌다. 그런데 성조가 어리다고 같이 놀려고 하지 않아 속상했다.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말하면 보내줄까?’

순간 성조의 머리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몰라도 어머니는 성조가 밖으로 나도는 걸 좋아하지 않으신다. 아버지는 말을 돌보러 마장으로 가야하고, 어머니가 밭일과 물질을 하러 가면 동생 성지를 돌봐야 한다. 비가 오는 날이면 어머니가 일하러 가지 않으니까 비가 오기를 바라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다. 비가 오면 항파두리에 갈 수도 없을 테니까.

“알았어. 동생도 데리고 갈게.”

성조는 항파두리에 꼭 가보고 싶었다. 항파두리에 장수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김통정 장군이 항파두리 토성에서 뛰어내리면서 찍힌 발자국에서 샘물이 솟아난다는 이야기를 들은 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암만 그래도 발자국에서 어떻게 샘물이 솟아날까? 성조는 믿기 어려웠다.

이튿날은 서당이 쉬는 날이어서 아이들은 부모를 도와 밭에 일하러 가거나 바닷가에 톳이랑 가시리풀(우뭇가사리)을 뜯으러 갔다. 톳은 밥에 넣어 먹고, 가시리풀은 더운 여름철에 묵을 쑤어 먹거나 보름구덕에 도배를 할 때 썼다. 아버지는 새벽에 마을의 말들을 몰아 산으로 갔고, 어머니는 검질(김)을 맨다면서 꿩지빌레에 있는 밭으로 갔다.

성조는 성지를 데리고 약속장소인 곰재기머를로 향했다. 벌써 아이들이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성조와 성지가 가자 아이들은 출발했다. 발 빠른 아이들이 금세 앞서 걸어갔다. 성조는 성지 손을 꼭 잡고 걸었다. 성지의 걸음이 늦어 자꾸 뒤처지긴 했지만 성지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형의 손을 꼭 잡고 부지런히 걸음을 뗐다. 한참 걸어가 물메오름 곁을 지났다. 물메오름을 지나자 한라산이 한 눈에 들어왔다. 한라산을 보는 순간 “와!”하고 탄성이 절로 나왔다. 한라산이 오름을 거느리고 어머니처럼 서 있었다.

가는 길에는 소나무와 갖가지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고, 아이들은 씩씩하게 항파두리를 향하여 나아갔다. 길가에 있는 맹게(청미레덩굴) 순을 따서 씹으면서 걸어갔다. 봄이라 꽃들도 아름답게 피었고, 하늘은 맑았다.

해가 머리 위에 떠 있을 무렵 항파두리에 닿았다.

“우선 장수물부터 가보자.”

칠득이의 말에 아이들은 장수물로 향했다. 경사가 급한 동산 아래 냇가 한 쪽에 장수물이 있었다. 사람발자국처럼 생긴 돌틈에서 맑은 물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리 크진 않았지만 샘물이 솟는 장수물을 보는 순간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형, 목말라.”

성지의 말에 성조는 얼른 두 손을 모아 물을 떠서 성지에게 내밀었다.

성지는 형이 내미는 물을 맛있게 받아마셨다.

“조금만 더 줘.”

성지는 형을 따라오느라 목이 말랐던 모양이었다.

성조는 다시 물을 떠서 성지에게 먹이고 나서 두 손으로 물을 떠서 마셨다. 시원한 물이 목을 타고 흘러내리자 온 몸이 다 시원했다. 아이들도 연달아 물을 마시면서 김통정 장군이 동산 위에서 뛰어내려 발자국이 생기고 그 발자국에서 샘물이 솟아나는 걸 신기해했다.

아이들은 물을 마시고 나서 망이리 동산 위로 올라갔다. 흙으로 만들었다는 성은 거의 무너져 아주 작은 성만 남아 있었다. 바닷가에 쌓은 성은 돌로 만들었는데 항파두리의 성에는 돌이 없어 흙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토성이라 불렀다.

“김통정 장군은 고려시대 장군이야.”

우리나라 역사를 잘 아는 창국이가 김통정 장군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했다. 성조는 창국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김통정 장군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들려준 말이 있어 성조도 대강은 알고 있었다.

“김통정 장군이 삼별초 군인들을 데리고 진도를 거쳐 제주에 들어와 항파두리를 쌓고 백성들을 시켜 환해장성도 쌓았대.”

나이가 많은 칠구가 아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흙으로 쌓았으니 돌로 쌓는 것보다 쉬웠겠다.”

창국이의 말에 성조가 나섰다.

“아니야. 성을 쌓을 때, 배가 고파서 자기가 싼 똥을 식기 전에 먹을 정도로 힘들었대. 배가 고프면 일을 할 수 없잖아.”

성조는 아버지에게 들은 대로 이야기했다. 아이들은 똥을 어떻게 먹느냐며 이구동성으로 성조가 거짓말을 한다고 떠들었다.

그러자 성조가 다시 말을 이었다.

“김방경 장군이 고려군을 거느리고 김통정 장군을 잡으러 제주로 왔대. 김통정 장군은 서둘러 성안으로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철문을 굳게 닫았는데, 마침 아기업개 한 사람만 들이지 못했어. 몽고와 고려 군인들이 뒤쫓아 오자 김통정 장군은 토성 위에 재를 뿌리고 꼬리에 빗자루를 매단 말을 달리게 해서 잿가루가 사방으로 피어올라 토성이 보이지 않았대. 그래서 몽고와 고려 군인들은 답답해서 애기업개에게 물어보니 며칠만 기다리면 재가 가라앉을 테니 성이 보인다고 이야기했지.”

“그래서 며칠 후에 성이 무너지고 성을 지키던 군인들을 공격해서 무찌른 거구나.”

재순이가 신기한 일이라는 듯이 말했다.

성조의 말에 모두들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장수 물은 언제 생긴 거야?”

창국이가 궁금했는지 물었다.

“김방경 장군이 토성 앞에 도착했지만, 성이 높고 철문이 굳게 잠겨 들어가지 못했지. 그때 아기업개가 열나흘 동안 불을 지펴 철문을 녹이라고 일러 주었어. 철문이 녹자 군사들이 몰려들었지만, 김통정 장군은 쇠방석을 바다로 던지고 날아서 도망갔지. 아기업개는 장수 한 사람은 새로 변하고, 또 다른 장수는 모기로 변하면 잡을 수 있어요 하고 말했지.

새로 변한 장수가 김통정 장군 머리 위를 날았지. 김통정 장군이 머리 위로 날아온 새를 보는 바람에 목에 있는 비늘 사이에 틈이 생겼고, 그때 모기로 변한 장수가 칼을 꺼내 김통정 장군의 목을 내리쳤대. 목이 떨어지자 얼른 재를 뿌려 다시는 붙지 못하게 했거든. 김통정 장군은 죽어가면서 내 백성들일랑 물이나 먹고 살아라 하며 홰(가죽신)를 신은 발로 바위를 찍자 샘물이 솟아올랐지. 이 샘물이 바로 횃부리물 또는 장수물이라고 불리는 그 물이야. 김방경 장군은 김통정 장군을 죽이고 부인도 죽였는데, 부인의 배속에는 아홉 마리의 새끼매가 들어있어 불로 태워 죽였대. 이때 부인이 죽으며 흘린 피 때문에 저 오름이 붉게 물들어서 붉은오름이라고 부르는 거야.”

성조는 아버지에게 들은 항파두리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 마을 사람들도 항파두리 성을 쌓을 때 끌려와서 죽을 고생을 했다는 거야.”

“우리 마을 사람들도?”

“그럼, 이 근방 사람들은 모두 왔을 걸. 흙과 돌을 나르는 게 워낙 힘든 일이니까.”

항파두리에 오지 않은 사람들은 제주 해안을 따라 성을 쌓았다고 했고 그 성의 이름이 환해장성이라고 성조는 아주 자신있게 말해주었다.

“넌 모르는 게 없네.”

재순이가 성조를 보며 치켜세웠다.

항파두리에서 돌아오는 길에 성조는 김통정 장군을 생각했다. 부하들을 데리고 제주까지 와서 모두 죽었다고 하니 불쌍했다.

‘나도 장군이 될 거야. 그리고 절대로 나도 죽지 않고, 부하들도 죽게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성조는 단단히 결심했다. 장군이라면 어떤 일이 있어도 적을 물리쳐야 하고 부하들을 죽이지 말아야 한다. 전쟁에서 패한 장군은 장군도 아니다. 더더구나 부하들이 죽어 없다면 어떻게 다시 싸움에서 이길 건가?

“형, 같이 가.”

동생 성지의 목소리가 들려 돌아봤더니 동생은 저만치 뒤떨어져 걸어오고 있었다. 김통정 장군을 생각하느라 동생의 손을 놓친 것이었다.

전쟁놀이

항파두리에 다녀온 뒤, 서당에 모인 아이들은 항파두리에서 보고 온 것들을 화제로 삼아 이야기 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장수물을 보면서 신기하지 않았니?”

“그러게. 사람 발자국을 닮은 우물이 있다니.”

“정말 김통정 장군이 뛰어내리면서 만들어진 우물일까?”

“그렇겠지. 삼별초 군인들이 먹었다는 구시물 같은 샘물은 크잖아. 그런데 장수물은 어른 발자국보다 조금 더 커.”

“가죽신을 신었으니 발이 컸겠지.”

“아무튼 신기해. 발자국처럼 생긴 곳에서 샘물이 솟아난다니.”
아이들은 항파두리에서 본 것들을 이야기하느라 소란스러웠다. 항파두리에 가지 못한 아이들만 부모님을 원망했다. 집안일을 하느라 항파두리 구경을 놓친 것이 못내 섭섭해 했다.

훈장님이 도착하고 공부를 했다. 천자문을 마치지 못한 아이들은 여전히 머리를 흔들며 천자문을 외고, 천자문을 마친 아이들은 동몽선습을 읽거나 명심보감을 읽었다.

성조는 소학을 읽다가 김통정 장군을 생각했다. 냇가에 발자국 우물을 남긴 장군. 부하들을 이끌고 와서 흙으로 성을 쌓고, 부하들을 모두 죽인 장군. 왜 부하들을 데리고 제주도로 왔을까? 김통정 장군은 칼싸움을 얼마나 잘 할까? 잘 하니까 장군이 되었겠지.

성조는 공부를 하면서 내내 김통정 장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공부가 끝나 훈장님은 집으로 돌아가시고, 아이들은 곰재기머를에서 놀기로 했다. 아이들은 한가할 때면 곰재기머를 넓은 풀밭에서 연도 날리고, 자치기도 하며 놀았다.

성조도 아이들과 자치기를 하면서 신나게 놀았다. 날아오른 새끼자를 큰 막대로 치면 한참 날아가다 떨어졌다. 성조가 친 새끼자가 가장 멀리 날아갔다.

한참 놀고 있는데 재순이가 수리대(해장죽)를 한 다발 가지고 왔다. 재순이네 집에는 대나무가 많아 재순이 어머니가 대나무 구덕(바구니)을 짜서 돈을 번다.

“우리 대나무로 전쟁놀이 하자.”

“좋아, 나는 김통정 편이야.”

“나는 김방경 장군 편.”

아이들은 김통정과 김방경 장군 편으로 나뉘어 섰다.

항파두리에 놀러갔다 돌아온 후, 아이들은 전쟁놀이를 많이 했다. 두 편으로 나뉘어 칼싸움을 했는데, 나무막대기로도 하고, 대나무로도 했다. 전쟁놀이를 할 때면 재순이네 대나무를 자르러 가기도 했다.

성조는 나이가 어리지만 키가 크고, 칼싸움을 제일 잘 했다. 서당에서 공부도 제일 잘 할뿐만 아니라 운동도 잘했다. 재기차기를 하면 다른 아이들보다 스무 개는 더 찼다. 그래서 놀이를 할 때면 성조가 대장이 되는 게 당연한 일처럼 여겼다.

아이들이 성조네 편이 되고 싶어 해서 둘씩 짝을 지어 가위 바위 보로 편을 정할 때가 많았고, 때로는 성조와 칠득이가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자기네 편을 고르기도 했다. 그럴때면 아이들은 성조네 편이 되고 싶어 잘 보이려고 애썼다.

성조는 김방경 장군이 되었고, 칠득이는 김통정 장군이 되었다. 성조는 전쟁에서 진 장군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재순이가 대나무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성조도 대나무를 받았다. 성조네 편은 삼식이, 칠구였고, 칠득이네 편은 봉선이, 재순이였다.

“대나무로 얼굴이나 머리는 때리기 없기.”

“알았어. 피가 나지 않게 때리기.”

아이들은 놀다가 다쳐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드릴까 봐 다치지 않게 싸우자고 말했다.

성조네는 곰재기머를 동쪽 폭낭(팽나무)에 본부로 정하고, 칠득이네는 서쪽에 있는 굴묵이낭(느티나무)에 본부를 정했다.

“대장이 항복하면 이기는 거다.”

칠득이가 굴묵이낭 아래서 큰 소리로 말했다. 굴묵이낭과 폭낭은 한 백보쯤 떨어져 있었다.

“알았어. 지는 편이 이번 단오에 떡 하나 주는 거다.”

성조가 큰 소리로 말했다.

“우선 연습하고.”

“좋아.”

칠득이의 말에 성조도 좋다고 했다.

아이들은 대나무칼을 내리치기도 하고, 옆으로 베기도 했다. 적군이 있었다면 한 칼에 베어버릴 듯이 대나무 칼은 인정사정없이 가로 세로로 날아다녔다.

“자 시작하자!”

봉선이가 소리치자 아이들은 연습을 멈추고 두 편으로 나뉘어 곰재기머를 풀밭으로 나왔다. 대장은 뒤에 서고 호위병 두 명이 앞서 나아갔다.

“간다!”

재순이가 큰 소리를 지르며 내달았다. 봉선이가 따라 뛰어왔다.

삼식이가 겁이 났는지 걸음이 무거웠다. 추춤추춤 걸으며 눈치를 보는 폼이 칼싸움에 자신이 없어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재순이가 대나무를 휘두르며 달려오자 칼에 맞기도 전에 얼른 주저앉았다. 재순이가 어이가 없는지 픽 웃으며 성조를 향하여 달려왔다. 재순이, 봉선이가 의기양양하게 대나무를 휘두르며 성조 앞에 섰다. 그러자 칠구가 재빨리 성조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이대 일로 맞서서 대나무 칼을 휘두르는 바람에 칠구는 여러 대를 맞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항복은 하지 않았다.

그 때였다. 성조가 나선 것은. 성조는 대나무를 두 손으로 잡고 높이 들더니 재순이를 향하여 재빨리 내리꽂았다. 재순이가 막으려고 대나무를 들었지만 어느 새 성조가 내리친 대나무는 재순이 손을 때렸다.

“아이고 아파라!”

재순이 손에서 대나무 칼이 떨어졌다. 재순이는 패했으니 죽은 병사가 되어 제 자리에 앉았다.

성조는 봉선이 앞으로 다가갔다. 봉선이가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러더니 재빨리 앉아버렸다. 성조랑 맞섰다가는 매만 맞는다는 걸 알았는지 겁이 잔뜩 난 표정이었다.

성조는 칠득이 앞으로 나아갔다. 칠구가 용기가 났는지 칠득이와 맞섰다. 그러나 칠구는 칠득이의 맞설 상대가 아니었다. 칠수의 대나무칼은 성조가 휘두르는 칼에 여지없이 부저져 버렸다.

성조는 칠득이를 향하여 몸을 날렸다. 대장과 대장의 싸움이었다. 제 자리에 앉은 아이들은 성조와 칠득이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대장의 승리가 자기들 팀의 승리였기 때문이었다.

칠득이가 휘두른 대나무가 성조의 머리를 스쳤다. 성조는 아주 아팠지만 꾹 참고 칠득이를 노려보았다. 성조는 기회를 노리다가 칠득이의 허리를 냅다 갈겼다.

“아이고! 허리야. 너 정말로 아프게 때릴 거냐?”

칠득이가 오른손으로 허리를 잡고 원망스런 얼굴로 항의했다.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풋, 싸움이잖아.”

성조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도 장난으로 하는 건데. 그렇게 아프게 때리면 어떻게 해.”

칠득이는 정말 아픈지 허리를 꽉 잡은 채 말했다.

“그럼, 우리 팀이 이긴 거지? 단오 명절에 곤떡 잊지 마라. 송편도 좋다.”

성조가 큰소리로 칠득이에게 말했다. 삼식이와 칠구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너 칼 싸움 잘 하더라. 집에서 연습했냐?”

재순이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매일 연습하지.”

성조는 기분좋게 말하곤 아이들과 동네로 돌아와 헤어졌다.

항파두리에서 돌아온 후, 성조는 아버지가 말을 돌볼 때 사용하는 윤유리나무(윤노리나무)를 휘두르며 김방경 장군 흉내를 내곤 했다. 성지에게는 김통정 장군이라고 이름을 지어주고 둘이서 칼싸움을 했던 것이 칼싸움을 잘 하는 비결이었다.

성조네는 칼싸움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신나게 칼싸움을 한 터라 목이말라 우선 정지(부엌)로 들어가 물항아리를 열어 물을 한 바가지를 떠서 꿀꺽꿀꺽 마셨다.

성조가 물을 마시고 마당으로 나오자 성지가 보말을 잡은 구덕을 들고 들어왔다.

“형, 보말도 안 잡고 어디 갔었어?”

“응, 전쟁놀이하러. 그 대신 명절날 곤떡 줄게.”

“곤떡? 정말이지?”

“그럼, 자 약속.”

성조는 기분좋게 손가락을 내밀었다.

귀한 소금

비가 내렸다. 하늘 강물이 넘치는지 비가 자주 내렸다.

“무슨 놈의 비가 이렇게 많이 내리냐.”

어머니가 하늘을 보며 한숨을 쉬셨다.

오월 말이 되자 내리기 시작한 장맛비가 유월이 되어도 그치지 않았다. 가을에 뿌린 보리가 한 겨울을 넘기고 누렇게 익어 거두는 계절인데, 끊임없이 장맛비가 내려 보리를 거두어들일 수 없었다. 보릿고개를 넘긴지가 얼마되지 않아 모두들 보리수확을 기다리고 있는데 비는 심술을 부리듯이 보릿고개를 연장시켜 버렸다. 묵은 곡식은 다 떨어지고 보리는 아직 덜 여물어 식량이 부족하여 지내기가 어려운 상태라는 보릿고개야 매년 겪는 어려움이지만 다 익은 보리를 밭에서 썩히는 건 더 큰 고통이었다.

성조네 집뿐만 아니라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식량이 떨어졌다고 난리를 쳤다. 거두어들인 게 없으니 고팡(고방)의 항아리에는 바닥난 지 오래였다. 내년 농사에 쓸 씨앗도 장만하지 못했으니 난리가 아니었다. 집집마다 쌀이 떨어져 구하러 갈 수도 없어 애를 태웠다.

“성조 아버지, 이렇게 손을 놓고 있으면 아이들 굶어죽겠어요.”

“그럼 어떻게 해요? 비가 줄기차게 오는데.”

“젖은 보리이삭라도 베어다 말려서 보리쌀을 거두어야지요.”

어머니는 말에 아버지는 새(띠풀)로 만든 우장(비옷)을 내왔다. 그리고 어머니와 같이 밭으로 갔다. 한참 후, 아버지와 어머니는 비에 흠뻑 젖은 보리단을 지고 돌아왔다. 보리단은 헛간에도 널고, 부엌에도 널었다. 공기가 축축해서 보리는 아주 천천히 말랐다. 어머니가 아궁이에 불을 떼자 그나마 부엌에 널어놓은 보리와 방에 널어놓은 보리는 빨리 말랐다.

보리쌀을 장만하고 나서 어머니는 보리밥을 지었다. 푹 삶아 부드러운 햇보리밥은 꿀맛이었다. 어머니는 말린 톳을 넣어 보리밥을 지었다. 톳이 들어간 보리밥은 맛이 없었지만 ᄌᆞ냥(절약)을 하려면 하는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도 비를 맞으며 보리를 베어다 방이나 헛간에서 말렸다. 그리고 눅눅한 보리쌀로 밥을 지었다. 집이 작아 말릴 수 있는 보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줄기차게 내리는 비로 드러누운 보리 이삭에서 싹이 났다. 싹이 난 보리 가 썩어가는 걸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비가 그치지 않아 보리를 수확하고 난 밭에 좁씨를 뿌려야 하는데 여름농사까지 망쳐버리고 말았다. 늦여름에서 초가을에 불어오는 큰 비바람 때문에 조 농사는 재수가 좋아야 거두어들였다. 그래서 보리를 수확하는 일은 목숨이 걸린 일인데, 가끔씩 일찍 장마가 와서 사람들을 배곯게 했다. 부자 집에서는 작년에 거둔 곡식이 남아있거나 돈을 주고 사다가 먹겠지만 가난한 집에서는 먹을 식량이 없는 건 큰일이었다. 그래서 아버지 어머니는 비를 맞으며 성조와 성지의 배를 곯리지 않겠다고 먹을 것을 찾아다녔다.

“성지야, 우리도 바당(바다)에 보말 잡으러 가게.”

성조 또한 성지를 데리고 먹을 것을 찾아 다녔다. 비가 잠시 그치면 바다로 가는 게 제일이었다.

바다는 일 년 내내 멋을 것을 내주었다. 보말(고둥)이랑 구살(성게), 구쟁기(소라)랑 미역, 파래, 우뭇가사리 등을 내주어 구덕에 가득 담아오면 배고픔을 면할 수 있었다.

장마로 흉년이 오지 않았다면 보리를 수확하고 나면 집집마다 보리개역(미숫가루)을 만들었을 것이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어머니들은 보리개역을 만들었다. 솥덕(부뚜막)에 솥뚜껑을 뒤집어 놓고 불을 때서 보리를 볶았다. 보리가 익어가면서 갈색으로 변하면서 톡톡 튀면 구수한 보리냄새가 난다. 아이들은 어머니 주위를 얼쩡거리다 익은 보리 한 줌을 얻어 먹고 행복해 했다. 어머니는 잘 볶아진 보리를 말방애(연자방아)에 가지고 가서 개역을 만들거나 연자매에 놓고 어처구니를 잡고 돌린다. 잘 볶아진 보리가 가루가 되어 나오면 아이들은 손으로 집어먹다가 한 대 맞기도 했지만 울지 않았다. 고소한 개역은 밥에 비벼먹어도 좋고, 그냥 물에 개어 먹어도 맛있다. 그런데 장맛비가 개역을 만들 보리를 모두 썩여버렸다. 정말 얄미운 장맛비였다.

“올해는 개역 구경도 못하고 지나가겠다.”

“형, 내년에도 비가 오면 어떻게 해?”

성조와 성지는 개역을 못 먹는 게 정말 아쉬웠다. 개역은 모두가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장맛비가 그치자 어머니는 헛간에서 테왁(두렁박)을 담은 구덕을 지고 물질을 갔다. 잠녀들의 바구니 속에는 장작이나 촐 같은 땔감이 들어 있었다. 불턱에서 추위를 녹일 때 쓸 땔감이었다. 초여름이어도 바닷속은 매우 추웠다. 잠녀들이 물속에서 나올 때 입술이 새파랗게 변하는 건 바로 추위 때문이었다. 그래서 물에서 나오면 바로 불턱으로 가서 몸을 녹였다. 보자기 남자들도 바다로 들어가서 전복을 잡다가 나오면 불턱으로 향했다. 불턱에서 불을 쬐는 게 건강을 지키는 일이었고, 목숨을 유지하는 일이었다.

바다는 언제나 미역, 소라나 성게, 전복 같은 걸 길러내어 바닷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잡을 건 있었다.

“우리도 보말(고둥) 잡으러 바다에 가자.”

열 살이 넘어 키가 커진 성조는 성지를 데리고 대나무 구덕을 들고 바닷가 철무지개로 나갔다. 바닷가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모두들 굶주렸기 때문에 먹을 것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성조네가 사는 엄쟁이 바닷가는 절벽이 많아 보말을 잡을 수 있는 돌밭이 많지 않았다. 돌밭이 많은 다른 마을에서는 썰물이 들어 바닷물이 낮아지고 바위랑 너럭바위가 드러나면 돌 사이에서 자라는 고둥이랑 소라, 오분자기 같은 걸 잡아 차롱에 가득 채울 수 있지만, 엄쟁이는 절벽이 해안가를 빙 둘러 있어 잡을 수 있는 보말이 많지 않았다. 그나마 몇 군데 절벽이 없는 곳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성조와 성지는 조심조심 거친 돌을 밟으며 걸어 바닷물이 출렁이는 바위에서 보말을 잡았다. 그러다가 돌염전을 보았다. 찰흙으로 만든 돌염전은 쇠머리코지부터 옷여까지 이어져 있었다. 이곳은 다른 해안과 달리 평평한 바위가 있어 소금을 만들기 좋은 곳이었다. 거북 등껍질처럼 생긴 넓은 바위가 바닷가에 펼쳐져 있어서 소금을 만들었다. 그리 높지 않은 절벽 위에 있어 파도가 아주 센 날이 아니면 소금을 만들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소금이 워낙 귀해 돌염전은 밭보다 소득이 더 많았다.

성조네도 소금밭을 가지고 있었다. 소금밭 값이 비싸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부지런히 일을 해서 번 돈으로 구입한 것이었다. 비가 그치면 소금을 만들어 팔아 겨울 식량을 마련해야 한다는 걸 성조는 잘 알고 있었다.

성조는 보말을 잡다가 바다를 보았다. 보자기와 잠녀들이 바다 속을 드나들며 물질을 하고 있었다. 눈(물안경)을 쓴 보자기와 잠녀들이 물질을 하면서 숨비소리를 냈다. 갈매기들이 우는 소리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다가 아니 휘파람 소리랑 닮았다고 생각했다. 호오이 호오이 잠녀들이 내는 소리는 파도소리를 뚫고 퍼져나갔다.

바다에서 물질을 하는 사람들은 잠녀들만이 아니었다. 보자기라고 불리는 남자들도 임금님께 바칠 큰 전복을 잡으려고 물질을 했다. 물질하는 남자를 복작우(보자기, 보재기)라고 부르고, 물질하는 여자를 잠녀 또는 ᄌᆞᆷ수, 잠수라고 불렀다. 보자기는 주로 전복을 잡아 임금님께 보내고, 잠녀들이 잡은 건 가족들이 먹었다. 보자기들이 잡은 전복이 모자라면 여자 잠녀에게도 불똥이 떨어졌다.

보자기들은 잠녀들보다 더 깊은 바다에서 전복을 잡아 임금님께 바쳤기 때문에 더 힘들었다. 전복잡기는 일 년 내내 이어졌기 때문에 추위에 시달렸다.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어 파도가 높은 날에도 보자기들은 바다에 들어가는 날이 많았다. 물질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 일이 많아서 보자기에겐 여자들이 시집을 가려고 하지 않았다.

성조와 성지는 한참 동안 보말을 잡다가 잠녀들이 나오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박으로 만든 테왁을 탄 잠녀들이 뭍으로 헤엄쳐 나왔다. 어떤 잠녀들은 망사리에 소라가 가득했지만 망사리 반쯤 잡은 잠녀들이 있었다. 많이 잡은 잠녀는 상군이고, 조금 잡은 잠녀는 똥군이라고 불렀다.

보자기와 잠녀들이 밖으로 나오자 한 관리가 나와 전복을 모두 골라 가져가 버렸다. 전복은 말려서 임금님께 보낸다고 했다. 늘 그래왔다는 듯이 보자기와 잠녀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복을 내주었다.

어머니는 다섯 개나 내주었다. 전복은 모두들 탐내는 것이어서 식량과 바꿀 수 있었을 텐데. 어머니는 성조네에게 말을 걸 새도 없이 벌벌 떨며 불턱으로 걸어갔다. 보자기가 가는 불턱과 잠녀들이 가는 불턱은 따로 떨어져 있었다. 불턱에서 불을 쬐고 나서 옷을 입는다.

어머니의 야윈 팔다리를 보면서 성조는 가슴이 아팠다. 밥을 못 먹어 살이 빠진 것이다. 그나마 먹을 것이 생기면 아버지와 성조, 성지에게 내주곤 누룽지나 맹물을 마시고 나물이나 씹어 먹는 어머니가 힘든 물질을 한다니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왔다. 그나마 바다에서 잡아온 소라나 미역, 몸(모자반) 등으로 끼니를 이어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불이 활활 타올랐다. 봉수대와 연대에서 불꽃이 피어올랐을 때처럼. 보자기들과 잠녀들은 불꽃을 향하여 두 팔을 벌리고 섰다. 뜨거운 열기를 골고루 받고나서 옷을 갈아입고 바다에서 잡은 걸 구덕에 담았다. 식량 대신 먹을 양식이었다. 매일 매일 먹는 보말과 소라는 이제 보기만 해도 지겹다. 그러나 하는 수 없었다. 굶는 것보다는 그래도 배를 채울 수 있는 게 낫다.

“이젠 가자.”

어머니가 테왁이 든 구덕을 지고 불턱을 나서면서 기다리던 성조와 성지에게 말했다.

“많이 잡았어요?”

“많이 못 잡았다. 눈(물안경)에 물이 들어가 앞이 흐려서 잡을 수가 있어야지.”

눈에 물이 들어갔다는 것은 눈에 틈이 생겼다는 거다. 수리를 하거나 새로 사야하는데, 눈을 살만한 돈이 없을 거다. 먹을 쌀도 못 사는 처지니까. 새로 만들려면 먼 마을까지 다녀와야 한다. 지금 사용하는 눈도 하루 종일 걸어갔다가 이튿날 저녁에 돌아와야 할 만큼 먼 마을에서 사온 눈이었다. 그렇다고 맨 눈으로 바다 속에 들어가면 물이 흐려 잡을 수가 없다.

저녁은 어머니가 잡아온 소라와 성조네가 잡아온 보말을 삶아먹었다. 그리고 말려둔 파래를 물에 불려 된장을 풀어놓고 끓인 국으로 저녁을 때웠다. 저녁을 먹고 성지가 설사똥을 쌌다. 매일 소라나 보말만 자꾸 먹으니 배가 탈이 날만도 했다. 어머니는 곡식을 못 먹어서 그렇다고 하며 배를 문질러 주었다.

“어머니 손은 약손, 어머니 손은 약손.”

어머니가 문질러주자 성지는 배가 안 아프다고 하며 잠이 들었다.

어느 날 재순이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 놀러 갔거나 먹을 것을 찾아 들판으로, 아니면 바닷가로 나갔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소문이 돌았다. 재순이네 가족이 모두 도망을 갔다는 것이다. 재순이 아버지는 보자기이고, 전복을 많이 바치지 못해 관청 사람들에게 매를 맞았다고 했다. 전복 때문만은 아니었다. 봉수대나 연대를 만들고, 도로를 닦고, 교대로 지키러 나가야 했다. 아무튼 관청에서 시키는 일이 많아 살 수가 없다고 재순이 어머니가 넋두리를 하곤 했는데, 배를 타고 육지로 도망을 갔다고 했다. 재순이 아버지가 몸이 시원찮은데도 관청 사람들은 봐주지 않아 많이 힘들었다고 어머니가 말했다.

“말을 기르는 사람은 말이 죽자 변상을 하느라 가족을 팔아 돈을 마련했대.”

“귤이 떨어져도 마찬가지야.”

사람들은 먹고 살기 힘든데다가 관청에서 자꾸 무리한 요구를 해서 배를 타고 육지로 도망을 갔다는 말이 나돌았다.

늦여름부터 가을 사이에 거센 비바람이 불어 큰 피해를 주었다. 큰 나무가 드러눕고, 허술하게 동아줄로 엮은 초가지붕이 날아갔다. 장맛비를 피해 심은 작물도 바람에 휘둘려서 잎이 다 날아가고, 낮은 밭마다 빗물이 고여 사람들은 애를 태웠다. 밭을 만들기 위해 사람들은 돌과 가시덤불에 불을 붙이고 나서 돌을 치우고 따비나 가래, 쇠스랑 같은 도구로 땅을 개간했다. 나무뿌리와 돌이 방해를 했지만 밭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더위와 추위, 부상을 입어도, 배가 고파도 참으며 만든 밭이었다. 사람들은 악착같이 밭을 만들어 씨앗을 뿌려 가족들을 먹여 살렸다. 그런 밭에 심은 보리를 장맛비는 쓸어버리고 비를 몰고 온 큰 바람은 밭을 연못으로 만들어 버렸다. 바닷가에 있는 밭에는 소금기를 가진 바닷물이 바람을 타고 날아와 작물의 잎을 태워버리기도 했다.

서당은 문을 닫은 지 벌써 오래전이었다. 훈장님은 글을 읽을 수 있으니 공부를 멈추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셨다. 성조는 틈이 날 때마다 소학을 몇 번이나 읽었다. 사람의 도리를 가르치는 책이어서 싫지 않았다.

가을이 되자 다행히 비는 멈추고 햇빛이 났다. 지겨운 비가 그치고 햇빛이 비추자 동네 사람들은 돌염전으로 모여들었다. 비가 언제 내릴지 모르지만 우선은 비가 내리지 않고 하늘이 맑아 소금을 만들기에 적당한 날이 이어졌다. 비는 돌염전의 가장 큰 적이었다.

염전 일은 보통은 4월 달에 시작해서 두 달이 걸려야 소금이 만들어졌다. 거북등처럼 금간 넓은 돌의 둘레를 찰흙으로 울타리를 만들어 호갱이라고 부르고, 울타리는 한 뼘 정도 높이인데 두렁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돌과 찰흙으로 확(혹)을 만들었는데, 확은 사람이 들어가 손을 벌릴 만큼 큰 통이며, 깊이는 어른들이 들어가면 목이 잠길 정도였다. 확에는 바닷물을 햇볕에 말려 만든 짠물인 곤물을 보관했다. 비가 오다가 그치거나 겨울철에도 소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은 곤물 만들기에 정성을 들였다. 그리고 비가 내려도 빗물이 들어가지 않게 새(띠풀)로 노람지를 만들어 그 위에 덮었다. 곤물을 만드는 호갱이 네 개에 소금을 만드는 호갱이 소금돌 두 개, 확이 하나가 있어야 소금을 만들 수 있었다. 돌염전에서 만든 소금은 굵고 맛이 있어서 모두들 좋아했다. 겨울철에는 확에 담아두었던 곤물을 가마솥에 넣고 장작불로 12시간 정도 끓여 삶은소금을 만들었다.

어머니는 허벅으로 바닷물을 길어다 호갱이에 넘치지 않게 부었다. 그리고 바닷물이 줄어들면 다시 물을 채워 물맛이 아주 짤 때까지 햇볕에 말렸다. 며칠이 지나 달걀을 넣었더니 둥둥 떴다. 곤물이 만들어진 것이다. 곤물이 만들어질 때마다 확에 부어넣었고, 소금돌에도 부어넣었다. 보름이 지나자 소금돌에 하얀 소금 알갱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머니, 소금이 됐어요! 소금!”

성조는 기뻐서 소리를 질렀다. 이틀이 지나자 돌염전 여기저기에서 소금을 수확하는 모습이 보이고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기가 돌았다.

소금돌에서 물이 모두 증발하고 나자 마침내 성조네 돌염전 바닥에도 하얀 소금이 깔린 것이다. 어머니가 흘린 땀의 열매였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소금은 황금처럼 귀한 것이었다. 소금이 없으면 장을 담글 수도 없고 음식을 만들어도 맛이 없으니 소금은 정말 귀한 것이었다. 제주에는 소금을 만들 갯벌이 거의 없어 쌀보다도 비쌌다.

“아이고, 소금 잘 됐다.”

어머니는 기뻐하면서 솔박(나무로 만든 도구)으로 소금을 담아 구덕에 부었다.

어머니의 활짝 웃는 얼굴을 보자 성조도 기분이 좋았다. 소금을 팔면 올 겨울은 무난히 넘길 수 있을 것이다.

소금을 거둬들이는 날에는 아버지도 나와 일을 거들었다. 소금을 등에 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행복한 길이었다.

이튿날, 어머니는 소금을 지고 길을 나섰다.

“소금 다 팔면 돌아올 테니 집에서 동생이랑 잘 놀라.”

등에 진 소금이 무거울 텐데도 어머니는 씩씩하게 걸어갔다.

어머니는 해가 바닷속으로 숨어들고 깜깜한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어머니의 등에는 아침에 지고나간 소금보다 더 많은 보리쌀이랑 콩, 팥, 깨가 담겨 있었다. 어머니는 물메와 장전, 거문대기 마을에 가서 바꿨다고 했다. 창국이네 어머니는 용흥을 거쳐 더럭, 과납, 소길에서 소금을 팔았다고 했다.

장맛비로 농사를 망쳤는데 어떻게 그 마을 사람들은 곡식을 수확했는지 성조는 아리송했다.

말을 타다

성조는 말을 잘 탔다. 열 살이 넘자 아버지가 타는 말을 안장도 없이 거침없이 타고 돌아다녔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가르쳐 주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를 뛰어넘었다.

“저 녀석 말타는 거 봐. 장군감이야.”

성조가 말을 타고 달려가면 사람들은 모두 장군감이라고 칭찬을 했다. 말 등에 꼿꼿하게 앉아 달려가는 모습은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성조는 틈이 날 때마다 말을 타고 놀았다.

“조심해라. 다친다.”

어머니가 걱정이 되어 말하면 성조는 “알았어요. 조심할게요.”하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성조는 어머니의 걱정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말을 탔다.

성조네 말은 청총으로 회백색 말이었다. 말 중에서 가라말 다음으로 좋은 말이라고 사람들이 말했다. 그래서 성조는 말을 타고 가면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처럼 둥실둥실 떠가는 것 같았다. 성조네 말은 지치지도 않고 바닷가 모래밭을 달리거나 항파두리까지 단숨에 달려가곤 했다. 곽지 모래해변을 달리는 것은 힘든 일인데도 거침이 없었다. 궷물오름이랑 노로오름, 노꼬메, 바리메 가까이에는 들판이 많아 성조는 마음 놓고 달릴 수 있었다.

성조가 열두 살이 되었을 때는 아이들과 말을 몰고 산으로 갔다. 어린 테우리가 된 것이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말을 몰고 가는 모습은 의젓했다.

“말은 털 색깔을 보고 나눈단다. 제일 우수한 말은 가라말(진흑색)이고, 검정과 흰색이 섞인 청총(회백색), 얼룩이는 월라, 붉은 색깔인 적다마, 백마의 순서야.”

궷물오름 연못에서 개구리를 열 마리나 잡아 구워먹고 나서 숲그늘에 앉아 쉬다가 창국이가 아는 체 했다. 창국이네는 적다마를 기르고 있어 늘 성조를 부러워했다.

“아버지, 말은 털 색깔로 나누는 게 맞아요?”

성조는 저녁이 되어 말 목장에서 돌아온 아버지에게 물었다.

“그럼, 말은 털 색깔에 따라 이름이 있어. 네가 말한 대로 다섯 가지로 나누는 사람이 많지만 새끼 때 색깔이 다르고, 자라면서도 변하고,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따라 털색깔이 변하기 때문에 오십여 가지로 나눌 수 있어.”

아버지는 성조에게 말의 종류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검은 색의 가라말의 경우에는 최소 털색에 따라 네 가지로 나누는데 흑가라, 먹가라, 보통가라, 추가라로 나눈다고 했다. ‘흑가라’는 여름철 영양상태가 좋거나 어릴 때는 아주 짙은 흑색을 띄며, ‘먹가라’는 까마귀의 깃처럼 광택이 나고, ‘보통가라’는 봄에는 검은색이지만 점차 색깔이 변하여 적흑색을 띄며, ‘추가라’는 봄부터 가을까지는 흑색, 겨울에는 회흑색 그리고 봄철에는 회적색을 나타낸다. 다른 말들도 자라는 시기에 따라, 계절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기 때문에 이름이 쉰 여 가지나 된다는 것이었다.

조랑말은 몸은 작지만 오래 달려도 빨리 지치지 않고, 성질이 온순하며, 체질이 강하여 병에 잘 걸리지 않는다고 아버지는 이야기해 주었다.

성조는 친구들과 놀다가 제주의 고양부 삼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나주 김씨인 조상은 어떻게 제주로 입도했는지 알고 싶어 아버지에게 여쭈었다.

“제주에 맨 처음 오신 입도 할아버지를 남하거사라고 한다. 우리 집안의 남하거사는 휘 인자 충자 할아버지시다. 인충 할아버지는 고려말 강화진 좌령낭장을 하셨는데 나라가 조선으로 바뀌자 고려 충신들은 핍박을 받기 시작했지. 임금님을 한 분만 모신다는 불사이군의 충정으로 몰래 바다를 건너 제주로 낙향하신 거란다. 제주에서도 신분을 감추고 엄쟁이에서 숨어 살았어. 이곳 풍속에 따라 필부나 다름없이 농사짓고 고기 낚고 소금을 만들며 살아왔단다. 그러니 너는 항상 잘난 체 하지 말고 조상님들에게 감사하고, 누가 되는 행동은 삼가야 해. 알았지.”

아버지는 선조님의 내력을 가르치면서 비록 반농반어의 고된 삶이었지만 어린 성조와 성지가 반듯하게 자라기를 빌었다. 아버지는 하는 일이 많았다. 집안일도 하지만 연대를 지키러 가고, 산으로 말을 돌보러가기도 했다. 말을 돌보는 사람들을 말테우리이고, 소를 돌보는 사람은 쇠테우리니까 테우리는 소나 말을 돌보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 셈이다.

농사에 필요한 소를 기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값이 워낙 비싸 아무나 기를 수는 없었다. 아침이 되어 쇠테우리가 마을 안을 돌아다니면 소를 기르는 집에서는 소를 밖으로 내보냈다. 쇠테우리가 산으로 올라갈 땐 동네 소들이 모두 테우리를 따라갔다가 저녁이면 돌아왔다. 성조네가 사는 엄쟁이 쇠테우리도 마을 소들을 몰아 항파두리를 넘어 더 위쪽에 있는 들판으로 나가 풀을 먹이고 저녁이면 돌아왔다.

말도 마찬가지였다. 말을 기르는 부잣집에는 돈을 주고 말을 잘 돌보는 테우리에게 맡겼다. 말테우리가 산으로 올라가 넓은 들판에 말을 풀어놓으면 말은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풀을 뜯어먹었다.

사람들은 먼 거리를 이동할 때 말을 타기도 하고, 관리들의 지시에 따라 말을 나라에 바치기도 했다. 짐을 나를 때나 밭에서 거둔 곡식을 집으로 나를 때에도 말이 필요했지만 가장 필요한 때는 좁씨를 뿌릴 때였다. 유월 초에 보리를 수확하고 난 밭을 갈고 소나무 가지를 꺾어 칡줄기로 묶어 이랑을 평평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서 좁 씨를 뿌리고 나면 말떼를 밭에 들여보내 돌아다니며 밟았다.

흙이 가벼워 여름철의 뜨거운 햇볕과 강한 바람으로 흙이 날리면서 씨앗까지 날리는 것을 막아주기 위해서는 말떼가 지나가면서 밟아주는 게 제일이었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몰라도 조밭 농사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 테우리는 말떼를 몰면서 노래를 불렀다.

어러러러러
요 저 ᄆᆞᆯ ᄒᆞᆫ저 걸으라
어어어량하아량
저 산중에 놀단 ᄆᆞᆯ아
이 산중에 놀단 ᄆᆞᆯ아
여러러러 요ᄆᆞᆯ 저ᄆᆞᆯ
신나게 말앙 잘 ᄇᆞᆯ리라
저 산 앞의 안개가 찌면
석ᄃᆞᆯ 열흘 장마가 진뎅 ᄒᆞᆫ다.
어러러러령 어량하량
어러러러령 어량하량

테우리는 구수한 노래를 불러 밭을 밟는 사람들의 피곤함을 덜어주고, 말들이 무리를 지어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좁씨를 뿌리고 나면 소나 말은 산으로 올려 보냈다. 그러면 여름 내내 잘 자란 풀을 먹다가 가을이 되어 한라산에 서리가 내리면 내려왔다. 가끔씩 내려오지 않는 말이나 소도 첫눈이 내리기 전에 내려와 안심시켰다. 백록담까지 올라가 풀을 뜯는 말들도 있었다. 겨울이 되어도 안 내려오면 찾으러 가는 사람들도 있긴 했다. 산에서 병이 들어 죽은 소나 말이 있어 주인을 애태우게 하였다.

성조의 나이가 열두 살이 넘자 아버지는 자주 성조에게 말테우리 일을 시켰다. 말을 좋아하는 성조는 동네 말을 몰고 산으로 올라갔다. 말떼를 풀이 많은 들판에 풀어놓고 나면 할 일이 없었다. 가끔은 말이 멩게낭(청미레 덩굴)이나 새비낭(찔레꽃) 밭에 들어갔다가 꼬리가 엉켜 빠져나오지 못하면 가시에 찔리면서도 말을 구해내곤 했다.

봄에는 고사리를 꺾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낮잠을 자거나 탈(딸기)을 따먹기도 하고, 꿩이나 지다리(오소리), 노루를 잡기고 하고, 개구리를 잡아 구워먹기도 했다. 산에는 사슴도 많았지만 임금님께 바쳐야 한다며 못 잡게 했다. 지다리를 잡을 때는 사납고 영리한 개가 도와주었다. 지다리굴은 양쪽으로 뚫려있어 한쪽에 불을 피워 연기를 굴로 들여보내면 반대편으로 나왔다.

말을 먹이러 산에 올라가면 이웃마을의 아이들도 말을 몰고 올라와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아이들은 누가 말을 잘 타나 내기를 하곤 했다. 때로는 마을 대항으로 말타기 시합을 했다. 귀일, 더럭, 고내, 애월, 곽지 아이들은 마을의 명예를 걸고 시합을 하곤 했다. 시합에서 1등은 당연히 성조의 몫이었다. 성조는 바람처럼 빨리 달려서 결승점을 돌아오곤 하여 다른 마을 아이들의 부러움을 사고 엄쟁이 마을 아이들의 어깨를 으슥하게 만들었다.

“경기만 하면 일등이니 참. 언제면 저 녀석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 수 있지?”

“저 얄미운 염쟁이 소금바치 놈을 어떻게 하면 이길까?”

다른 동네 아이들은 경기가 끝나면 성조를 염장이 소금바치라고 놀렸다. 소금을 생산하는 마을 사람이라는 뜻으로 깔보는 말이었다.

“우리 마을 이름은 엄쟁이야. 왜 마음대로 바꿔 부르냐?”

엄쟁이 마을 아이들은 용기가 나지 않아 아무 말도 못하는데, 성조는 달랐다. 아이들이 염쟁이라고 놀리면 엄쟁이라고 강력하게 대들곤 했다. 그러나 왜 엄쟁이라고 하는지 몰랐다.

소금바치라고 놀림을 받고 다툰 날 아버지에게 여쭈었다.

“왜 우리 마을을 엄쟁이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 마을 바닷가에는 절벽이 있잖아. 절벽을 엉장이라고 하니까 그 말이 변해서 엄장이 되고 엄장이라고 부르다가 엄쟁이로 마을 이름이 변한 거야.”

아버지의 설명을 들으며 성조는 염쟁이라고 놀리는 아이들이 몰라서 그런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성조가 태어나고 자란 동네는 엄쟁이 중에서도 서쪽에 있는 서엄쟁이었다.

살아있는 말

시월 달이 되었다. 어머니는 돌염전에 가고, 아버지와 성조, 성지는 촐을 비러 촐밭에 갔다. 촐들이 키높이까지 자라 베어내기는 힘들었다. 센 바람이 불어올 때 누워버린 촐도 있었다.

“아이고 힘들어.”

성지가 땀을 닦으며 말했다.

“힘들어도 촐을 베어야 말도 먹이고, 밥도 해먹지.”

아버지는 잠시도 쉬지 않고 호미(낫)로 촐을 베어냈다. 아버지가 지나간 곳에는 촐이 가지런히 한 줄로 누워있는데 성조와 성지가 벤 촐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한 줄로 놓아야 나중에 묶기가 좋아.”

아버지의 말에 성조와 성지는 아버지처럼 가지런히 놓느라고 애를 썼지만 여전히 엉망이었다. 촐베기는 닷세나 걸렸다. 밥을 지을 때도 사용하고, 청총이가 많이 먹기 때문에 넉넉하게 베어야했다. 또 소금을 만들 때도 필요하기 때문에 힘들어도 열심히 베어냈다. 베어낸 촐은 사흘이나 바짝 말렸다. 그리고 잘 마른 촐을 한 줌 쥐어서 꼬아 줄을 만들어 묶고 나서 집으로 날랐다. 말 등에도 싣고 아버지와 성조, 성지도 등에 지고 날랐다. 어머니도 소금밭에 나가지 않고 같이 등짐을 졌다. 집으로 날라 온 촐은 높이 쌓아 눌(낟가리)을 만들었다. 눌 위에는 아버지가 올라가 성조가 던지는 촐 묶음을 받아 차곡차곡 올려놓고 큰 노람지를 덮었다. 그리고 촐로 꼰 새끼줄로 얽어매었다. 아무리 센 바람도, 큰 비도 해치지 못할 것이었다.

섣달이 되자 본격적으로 추위가 몰려왔다. 먹구름이 몰려오고 추운 바람이 불면 손발이 시렸다. 바람과 함께 싸락눈이 내려 추위가 찾아온다는 걸 알렸다. 그러나 해가 나고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은 봄 날씨 같았다. 그런 날은 말을 타고 풀이 잘 자란 해안가 엉장을 찾았다. 사람들이 미처 베어가지 않은 풀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어 촐밭에서 베어 말린 촐을 아낄 수 있었다.

청총이를 풀밭에 매어놓았다. 가까운 곳에 보리밭이 있어 청총이를 풀밭 가운데에 솟아있는 바위에 묶어 놓았다. 말이 보리밭에 들어가 보리를 먹어버리면 밭주인에게 변상을 해야 한다. 그래도 청총이는 마른 풀만 먹다가 덜 마른 풀을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씹어 먹었다.

“내일 올께. 풀 많이 먹어라.”

성조는 한참 동안 풀을 뜯는 청총이를 보다가 집으로 돌아와 책을 읽었다. 오랜만에 소학을 읽으며 훈장님을 모셔와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성조는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책을 읽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친척집에 잔치가 있어 성지를 데리고 가면서 하룻밤을 자고 오신다고 했다.

성조가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부터 날씨가 급변했다. 하늬바람이 거세지면서 기온이 내려가고 구름이 밀려오더니 해를 가렸다. 검은 구름이 밀려와 낮게 깔리더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은 정말 펑펑 내려쌓였다. 골채(삼태기)로 눈을 퍼붓듯이 눈이 쏟아졌다. 눈은 엄쟁이를 하얀 세상으로 만들어버렸다.

성조는 책을 읽다가 오줌이 마려워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어느 새 밤이었고, 하얀 눈 세상이 펼쳐졌다. 마당에도 지붕 위에도 눈이 수북했다. 밤인데도 눈 때문에 사방이 환했다.

‘청총이를 데리러 가야하는데’

성조는 더럭 겁이 났다. 청총이가 눈밭에서 얼어 죽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성조는 청총이가 걱정되어 올레 밖까지 나왔다. 눈 속으로 발이 빠져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눈은 허벅지까지 내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다리가 빠져나오지 않았고, 짚신 사이로 차가운 눈이 들어와 발이 너무 시렸다. 눈길을 더 갔다가는 얼어 죽을 거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가끔씩 눈밭에서 얼어 죽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시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렸다. 성조의 머리와 어깨에 눈이 수북히 쌓여 걸어가는 눈사람이 되었다.

‘말은 추위를 잘 견디니까 내일 아침까지는 괜찮을지 몰라.’

성조는 망설이다가 돌아서서 집으로 들어왔다. 다리에 묻은 눈을 털면서 청총이에게 퍽 미안했다. 주인을 잘못 만나 추위 속에서 떨고 있으니. 성조는 밤새 청총이 생각으로 잠을 설쳤다. 청총이가 얼어 죽었으면 어쩌나 하고 가슴 졸였다.

새벽에 일어난 성조는 아침이 밝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단단히 외출준비를 끝냈다. 천으로 발을 싸고 짚신을 신은 다음 헛간에서 설피를 가져다 발에 묶었다. 설피를 신으면 눈 속에 빠지지 않는다. 겨울에 꿩 사냥과 노루 사냥을 가기 위해 아버지가 미리 만들어 논 설피가 떠올라 헛간에서 설피를 가져다 신으며 성조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날이 어스름하게 밝아오자 성조는 집을 나섰다. 눈은 그쳤지만 지난 밤에 내린 눈으로 허리까지 눈이 쌓였지만 설피를 신어 발이 빠지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눈 위로 걸어가면서 성조의 마음은 청총이 곁으로 날아갔다. 언뜻언뜻 해가 구름 사이로 나타날 때면 폭포처럼 햇빛이 쏟아져 내렸고, 하얀 눈에 반사하여 눈이 부셨다. 청총이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면서 성조는 빌고 또 빌었다. 청총이가 무사하기를.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았는데도 성조는 눈사람이 되어 걸어갔다. 멀리 까만 점이 보였다.

‘청총이구나.’

그런데 그 점은 움직이지 않았다. 살아있다면 움직여야 하는데 가만히 있다니 얼어 죽었다는 말인가? 성조는 마음이 급해서 바삐 걸음을 옮겼다.

“살았구나! 살았어!”

성조는 너무 기뻐서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청총이가 서 있었다. 사방이 눈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가운데 청총이가 서 있었다. 성조는 너무 좋아서 급히 달려갔다. “척! 척! 척!” 설피에 눈에 찍히는 소리가 났다.

청총이가 있는 곳은 눈이 없었다. 누가 눈을 파냈는지 동그란 눈 웅덩이가 생겼고, 그 안에 청총이가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눈이 모두 밟혀 있었다. 청총이가 줄을 끌고 빙빙 돌면서 눈을 밟아버리고, 매어 놓은 밧줄이 빙빙 돌면서 눈을 치워버린 것이었다.

“히이힝! 히이힝!”

청총이도 기분이 좋은지 성조를 보면서 크게 울었다.

성조는 기뻐서 청총이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얼른 줄을 풀어 눈 웅덩이를 벗어났다. 청총이도 좋은지 큼직하게 발자국을 남기며 따라왔다.

활을 쏘다

성조가 13살이 되던 중종 35년(1540년) 그동안 말로만 들었던 왜구가 쳐들어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봉수가 있는 오름마다 연기가 오르고, 바닷가 연대에도 연기가 올라갔다. 성조네 마을에서 보이는 고내오름이나 남두연대에도 역시 봉수불이 타올랐다. 아버지는 남두연대를 지키러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 왜구가 우리 마을에도 쳐들어올까요?”

“글쎄, 그런 일은 없어야할 텐데.”

“아버지는 괜찮겠죠?”

“괜찮겠지.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린 못 산다. 너희들 아무데도 가지 말고 꼭 집에만 있어라.”

어머니는 아버지가 연대를 지키러 나가서 그런지 얼굴이 창백했다.

왜구가 우리나라 해안지방으로 쳐들어가 큰 피해를 준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정말로 제주까지 쳐들어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어머니, 왜구는 어느 나라 사람들인가요? 왜 우릴 괴롭히는 거예요?”

성조는 궁금했다. 왜구가 왜 자꾸 쳐들어 와서 괴롭히고 있는 것인지.

“왜구는 우리나라의 동쪽에 있는 섬나라 사람들인데 열심히 일해서 먹고 살려고 하지 않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동남아까지 쳐들어가 식량이나 재물을 빼앗고 사람들을 죽이는 나쁜 사람들이란다.”

어머니는 성조와 성지에게 왜구에 대하여 자세하게 말해주었다.

제주는 우리나라의 남쪽에 있어 남해나 서해로 건너가거나 중국으로 가는 바닷길의 중간에 있어 제주를 거쳐 가면 좋은 점이 많기 때문에 차지하려고 한다는 것을. 일본에서 가까운 섬인데다가 한양에서 멀리 떨어져 군사력도 강하지 않기 때문에 만만히 보고 쳐들어와 괴롭힌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는 무사히 돌아왔다. 연대를 지키느라 잠을 자지 못했는지 돌아오자마자 곯아떨어졌다. 하루 종일 잠을 자고 나서 아버지는 잠에서 해방되었다.

“우리 마을에 안 쳐들어온 게 얼마나 다행이냐.”

아버지는 성조와 성지를 꼬옥 껴안으며 좋아하셨다.

성조는 왜구가 엄쟁이에 쳐들어오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마을 사람들에게 얼마나 피해를 주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왜구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얼마나 슬플까 하고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무섭기 그지 없었다.

그 이후, 성조는 무서운 왜구가 쳐들어오면 어떻게 막아낼 건지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어린 성조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지만 빨리 자라서 제주를 지키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 후로도 성조는 말을 타고 동네를 돌기도 했지만 이웃마을을 돌아 들길로 나가 달리는 걸 좋아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무르익은 어느 날, 성조는 말을 타고 가다가 활을 쏘는 걸 보았다. 사장밭이었다. 사장밭이란 활터를 일컫는 말이었다. 사장밭은 아주 넓었다.

군복을 입은 사람들과 젊은이들이 활을 들고 화살을 쏘았다. 화살은 힘차게 날아가다가 동그라미가 그려진 과녁에 맞았다. 활쏘기를 하는 사람들의 팔뚝은 굵었고, 눈은 매서웠다.

“아버지, 나도 활 쏘는 걸 배우고 싶어요.”

“왜 누가 활 쏘는 걸 보았니?”

“예, 낮에 말을 타고 장전에 갔다가 사람들이 활쏘는 걸 보았어요. 나도 활을 쏘고 싶어요.”

성조는 아버지가 틀림없이 부탁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성조에게 무장의 훈손답게 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으니까. 무장의 후손이라면 말타기뿐만 아니라 활쏘기도 잘 해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장전에 가서 사장밭을 보았구나. 항파두리를 만든 김통정 장군이 군사들에게 활쏘기 연습을 시키던 곳이란다.”

아버지는 성조가 말타기에 뛰어나고 활쏘기에도 흥미를 느끼고 있어 군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나 사장밭에서 화살을 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아직 활쏘기엔 너무 어렸다.

성조는 아버지에게 졸랐다.

“아버지, 저도 화살을 쏘는 연습을 할 수 없을까요? 저는 훌륭한 군인 되고 싶어요.”

“네 뜻은 알겠다만 화살을 쏘기엔 넌 너무 어려. 활쏘기를 하는 건 보기엔 쉬워보여도 팔 힘이 좋아야 한단다. 활쏘기를 하고 싶으면 팔 힘을 길러라.”

아버지는 말을 잘 타는 성조가 틀림없이 훌륭한 군인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동생 성지도 형을 따라다녀서 그런지 형 못지않게 말을 잘 탔다. 씩씩하고 용감한 두 아들을 보면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쁨이 컸다. 그렇지만 어린 성조가 사방밭에서 활쏘기를 배우는 건 일렀다.

성조는 활쏘기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왕대나무를 잘라다가 잘 다듬어 활대를 만들었다. 골고루 휘어지게 다듬은 다음 불에 그슬려 휘었다.

활시위는 어머니가 짜는 삼베를 여러 겹으로 꼬아 옻칠을 해서 단단하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칡의 속살을 길게 벗겨 말려서 만들었는데 시위를 당기기도 전에 끊어져 버렸다. 그래서 사장밭까지 찾아가서 시위에 쓰는 재료를 물어보고 돌아와서 흉내를 낸 것이었다.

그리고 수리대를 뾰족하게 깎고 꼬리에 홈을 만들어 꿩의 꼬리를 잘라 붙여 화살을 만들었다. 성조가 만든 활은 처음에는 자주 부러져서 쓸모가 없었는데, 여러 번 실패한 끝에 성조의 마음에 드는 활과 화살을 만들 수 있었다. 성조와 성지는 활과 화살을 가지고 사람이 없는 바닷가로 가서 연습을 했다. 처음에는 과녁도 없었지만 차차 마음먹은 대로 화살이 날아가자 큰 소나무를 과녁 삼아 화살을 쏘았다.

“오늘은 누가 이기나 내기할까?”

“내가 틀림없이 이길걸요. 어제도 내가….”

“무슨 소리? 한 번 이긴 걸 가지고.”

성조와 성지는 집안일을 하고 나서 여유가 있을 때마다 활쏘기 연습을 했기 때문에 일 년이 지나자 곧잘 과녁으로 쓰이는 소나무를 맞추었다. 그리고 팔운동도 부지런히 했다. 바닷가에서 무거운 듬돌을 가지고 와서 매일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처음에는 잘 들 수 없었던 듬돌을 열 번도 넘게 들거나 듬돌을 들고 마당을 한 바퀴 돌 수 있을 만큼 팔 힘이 불어났다. 팔힘이 좋아지니 ᄉᆞᆱ은(삶은) 소금을 만들기 위해 장작을 팰 때도 순식간에 장작이 쌓였다.

성조가 열다섯 살이 되자 아버지는 사장밭으로 데리고 갔다.

“우리 아들이 활쏘기를 하고 싶어 하니 가르쳐 주십시오.”

“활쏘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놀이가 아닙니다.”

사장밭에서 활쏘기 훈련을 시키던 사람이 아주 무시하듯이 말했다. 활쏘기는 무관시험 6가지 중 4가지나 시험을 볼만큼 어려운 훈련이었다.

“우리 아들이 소원이니 한 번 시켜보시고 결정하십시오.”

아버지는 성조를 위해 부끄러움을 접었다. 성조가 잘 하리라고 굳게 믿었다.

“그럼 한 번 쏴 봐라.”

사장밭 주인인 어른이 말했다.

성조는 자기가 만든 활을 잡았다. 사람들이 구경을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덜덜 떨렸다. 조잡한 활을 들고 있는 성조를 보며 웃는 사람도 있었다.

성조를 활시위를 당겼다가 놓았다. 화살이 날아가더니 과녁의 귀퉁이를 맞췄다. 주위에서 구경을 하던 사람들이 “아!”하고 탄성을 질렀다. 활 같지도 않은 활을 가지고 와서 화살을 쏜다고 하니 어디 구경이나 한번 해보자고 지켜보던 사람들이 아주 엉뚱한 화살로 과녁을 맞히는 것을 보며 놀랐다. 한 가운데에 맞은 것은 아니지만 명장이 만든 활과 화살로도 맞추는 게 어려운데, 엉성한 활과 화살로 과녁을 맞추었으니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아드님은 활을 아주 잘 쏩니다. 내일부터는 우리 사장밭에 와서 연습을 하도록 하세요.”

사장밭 주인은 성조를 받아들였다. 그 후, 성조는 집에 일이 없을 때면 사장밭에 가서 화살을 쏘았다. 엉터리 화살이 아니라 기술자가 제대로 만든 화살이었다. 얼마 후에는 성지도 형을 따라와서 같이 활을 쏘았다. 그러나 무과시험은 볼 수 없었다. 무과는 천민이라도 볼 수 있었지만 성조네 집안 사정이 무과시험공부를 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하지가 않았다. 가뭄과 센 비바람이 연달아 찾아와서 농사를 망쳐 공부를 시킬 여유가 없었다.

무과는 문과와 함께 3년마다 정기적으로 치러졌는데, 초시, 복시, 전시의 3단계 절차를 밟았다. 1차 시험인 초시는 무예만으로 선발했는데 서울에서 70명을 선발하는 훈련원시와 각 지방에서 120명을 선발하는 향시가 있었지만 제주에서는 볼 수 없었다. 2차 시험인 복시는 초시 합격자를 서울에 모아 무예와 강서 - 병서와 유교경전 강독 - 를 통하여 28명을 선발하였다. 복시에 합격한 28명은 국왕이 참석한 전시에서 무예만을 시험보아 갑과 3명, 을과 5명, 병과 20명으로 구분하여 최종 선발하였다.

무과의 시험과목은 조선 초기 약 백여 년간 시행하여 오던 것을 정비하여 「경국대전」을 통하여 제도화 하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무과의 시험과목 중 활을 쏘는 과목으로는 240보에서 활을 쏘는 목전, 80보에서 활을 쏘는 철전, 130보에서 활을 쏘는 편전, 말을 타고 달리다가 활을 쏘는 기사와 창던지기, 두 패로 갈라서 말을 타고 하던 운동 경기인 격구 등 6가지였는데 말타기와 활쏘기만으로는 무과 과거시험을 볼 수 없었고, 또 가난한 성조네 형편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성조는 말타기와 활쏘기를 포기하진 않았다. 무과시험을 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훈련을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왜구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버텨냈다.

사장밭에 다니면서 성조와 성지의 말타기, 활쏘기 실력은 더욱 자라났다.

어느 날, 아버지는 성조와 성지를 불러 앉혀놓고 말했다.

“성조야, 성지야, 우리 집 형편이 넉넉지 않아 너희들 뒷바라지를 못해줘서 미안하다. 지금은 비록 시골에 묻혀서 농사를 짓고, 어머니가 힘들게 물질을 하면서, 소금이나 만들며 살고 있지만 우린 무관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지난 번에도 너에게 얘기한 적이 있는데, 제주에 처음 입도한 할아버지는 고려조 충신이었던 강화진 좌령낭장인 인자 충자인 어른이시고, 나주 김씨로 본관을 받은 시조할아버지 운자 발자의 13세손이시다. 너는 나주 김씨 19세손이니 전에도 말했지만 무관이었던 조상들의 얼을 이어받아 제 몫을 하는 사람들이 되길 바란다.”

아버지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했지만 그 말 속에는 조상의 얼을 받들라는 준엄한 명령이 들어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그 말을 들은 후부터 성조와 성지는 훌륭한 조상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자손이 되기 위해 매사에 행동거지를 조심하고 더 열심히 책을 읽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사나운 말

성조가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쏜다는 소문이 금세 멀리 퍼져나갔다. 다른 동네 사람들이 성조와 성지가 활을 쏘는 걸 보기 위해 사장밭으로 놀러오기도 했다.

“어린 녀석이 활솜씨가 대단하네.”

성조가 쏜 화살이 과녁 한 가운데를 맞히면 사람들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 말에 신이 나서 성조는 더 정신을 가다듬고 활시위를 놓으면 화살은 바람처럼 날아갔다. 화살이 날아가는 속도처럼 성조에 대한 소문도 발이 달려 사방으로 펴져나갔다.

성조가 열일곱 살이 되었다. 그 사이에 키가 부쩍 자라서 말을 타고 달려가면 모두들 돌아보았다.

“저 아인 말을 잘 타니까 큰 일물이 될 거야.”

“맞아. 저 덕대(몸)를 봐봐. 힘도 장사야,”

동네 사람들은 성조를 보면서 칭찬을 하곤 했다.

성조가 훌륭한 젊은이라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어느 날, 과납(납읍)에 사는 선비가 찾아왔다. 그 선비는 제주향교 교수관이었다.

“윤형이 있는가? 나 김 교수야.”

아버지는 갑자기 찾아온 과납 선비를 보며 의아해 했다.

“아니 어떻게 저희 집엘….”

“자네 아들 장가보내려고.”

“장가요? 우리 성조요? 아직 어린앤데.”

“어리긴? 벌써 열일곱 살이 되었을 텐데. 내가 중매를 설 테니 생각해 보게나.”

“아 예.”

아버지는 성조에게 혼사를 권하는 교수관을 보며 난처했다. 열일곱 살이면 장가 갈 나이가 되긴 했지만 어떤 집에 중매를 들려고 하는지 궁금했다. 향교 교수관이 중매를 한다니까 뼈대 있는 집안 규수라는 건 짐작할 수 있었지만.

“우리 향교에 아주 학식이 높은 교수관이 계시네. 그 교수관이 자네 아들을 사위로 삼고 싶어 하시네.”

“교수관이요?”

아버지는 깜짝 놀랐다. 향교 교수관이라면 학식이 높은 어른이고, 향교에서 공부하는 선비들도 많은 텐데, 시골 총각을 사위로 들이고 싶어 하다니.

“왜 싫은가?”

“아니요. 싫다니요.”

아버지는 교수관의 말에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우리 항교에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관이 여럿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학문이 높은 사람은 김양필 교수관이네. 그 김양필 교수관이 자네 아들 소문을 듣고 사위를 삼고 싶어 한다네. 그 선비에게 예쁜 외동딸이 있어. 그 집에 사위로 간다면 벼슬은 떼어 놓은 당상이고.”

향교 교수관은 아주 좋은 집안에 장가를 가는 성조가 부럽다는 듯이 말했다.

통훈대부 진사 교수관인 김양필은 가시나물 사람인데 벼슬이 교수관에 이르렀다. 그는 학식이 많고 깊은 사람으로 세상의 일이나 학문에 두루 통달한 유학자로 주위사람들로부터 ‘석학통유’라는 말을 들었다.

중종15년(1520)에 오현의 한 사람인 충암 김정이 제주에 유배 왔을 때, 제주 선비들을 가르쳐 학문을 전해 주었는데, 충암으로부터 “제주에는 김양필 외에는 학식이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는 문학이 뛰어나고 지덕을 겸비하였다.”는 평을 받을 만큼 뛰어난 분이었다. 탐라지와 소수삼강록 등 제주목에서 발간되는 읍지에도 그의 글이 실릴 만큼 문장이 아주 뛰어나고, 서예에도 뛰어나서 생원시험에 급제하였다. 향리자제로 교수관으로 임명되자마자 당나라의 교육방법을 들여와 공부를 하는 방법을 달리 하는 등 매우 훌륭한 분이었다. 또한 김양필은 제주읍의 남쪽성 밖에 향학당을 세웠으며, 제주향교의 명륜당을 보수하면서 현판 글씨를 쓴 아주 유명한 학자였다.

가시나물에는 진주 강 씨가 맨 처음에 터를 잡고 살다가 김 씨, 이 씨, 오 씨가 들어와 같이 살기 시작했다.

가시나물은 온통 숲으로 둘러싸인 마을이었다. 조록나무를 비롯한 사철 늘 푸른 숲이 우거져서 많은 새들이 날아와 살았다. 사람들이 숲의 언저리에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점점 넓어졌다. 곶(숲)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가시나물이라고 전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그 유명한 김양필이 성조를 사위로 삼고 싶어 한다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깜짝 놀랐다. 제주읍성 안에도 훌륭한 가문의 아들들이 있을 텐데 성조를 사위로 삼고 싶어 하다니 놀랄만한 일이었다.

언젠가 김양필이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는 젊은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사장밭에 와서 성조가 활을 쏘는 걸 보고 갔다고 했다.

아버지는 성조를 불러 앉혔다.

“성조야, 김양필 교수관이 너를 사위로 삼고 싶어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저는 아버지 뜻에 따르겠습니다.”

“김양필 교수관은 이름난 선비인데, 너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공부를 많이 한 것도 아닌데 귀히 여겨 사위를 삼고자 한다니 아버지는 찬성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 어머니 살기도 어려운데 제가 가버리면 되겠습니까? 제가 아버지를 도와 농사도 짓고, 소금도 만들어 집안을 일으켜야 하는데.”

“괜찮다. 엄쟁이에 살면 농사꾼이나 테우리 밖에 더 되겠느냐? 그분은 향교에서 교수관으로 일하는 분이니 네가 가면 공부도 많이 할 수 있을 테니 아무 걱정 말고 가거라.”

아버지는 아들을 멀리 장가보내는 게 섭섭하기도 했지만 아들의 장래를 생각해서 기꺼이 허락했다. 엄쟁이는 제주향교에서 너무 멀어 공부를 시키기 힘들고, 나중에 제주목에 관리가 되어도 가까운 곳에 사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알았습니다. 가문에 먹칠이 되지 않게 처신을 잘 하겠습니다.”

어머니 또한 아들의 장래를 위해 엄쟁이에 잡아두는 것보다 장인댁으로 보내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찬성했다.

성조는 혼례를 치르러 신부댁으로 가기 전에 동생 성지를 불렀다.

“성지야, 형이 장가를 가면 집이 멀어서 자주 다니러 오지 못할 듯하다. 내가 없는 동안 부모님을 잘 모시고 집안일을 잘 도와주어라.”

“알았어요, 형님. 걱정 마시고 가세요.”

“내가 없는 동안에도 전처럼 책을 많이 읽고, 말타기랑 활쏘기 연습을 많이 해라. 우리 집안은 옛날에는 무신집안이었으니 우리 몸에 무신의 피가 흐른다. 왜구가 자꾸 쳐들어와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으니 무술을 익혀두면 언젠가는 백성을 구할 날이 올 거다.”

“알았습니다. 형님 말씀 명심할게요.”

동생 성지는 형의 말을 고분고분 따랐다.

성조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경주 김 씨 통훈대부 제주교수관 김양필의 딸과 혼례를 치렀다.

김양필은 사위 성조를 아꼈다. 남자답게 씩씩할 뿐만 아니라 학문이 높지는 않지만 소학까지 읽었으니 공부를 시킨다면 더 발전해서 무관시험이라도 보게 할 생각이었다. 성조의 외모와 성품을 보면서 장래 큰일을 하리라 믿었다.

성조는 장인댁에서 살게 되자 무과시험 중 처음 보는 초시에 필요한 무예를 훈련하고, 병법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다. 손자병법은 물론 오자병법을 읽으며 적을 어떻게 막아내는지 그 비법을 생각하곤 했다.

성조가 좋아하는 책은 손자병법이었다. 고대 중국의 병법서로 춘추 시대 오나라 왕 합려를 섬기던 손무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조는 그 중에서도 ‘지피지기 백전불태’를 좋아했다. 손자병법 모공 편에 나오는 말로 자신과 상대방의 상황에 대하여 잘 알고 있으면 백번 싸워도 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원래의 문장은 ‘지피지기 백전불태 부지피이지기 일승일부 부지피부지기 매전불태’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우더라도 위태롭지 않고, 적을 모르고 나만 안다면 한 번은 이기되 한 번은 진다. 적을 모르고 나도 모른다면 싸울 때마다 위태로워질 것이다.’는 뜻이다.

성조는 손자병법을 읽으면서 왜구로부터 자주 침략을 받는 제주의 위태로운 환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구가 마음만 먹으면 제주를 침략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성조가 장가를 간 며칠 후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성조가 밖으로 나가보니 숫말 한 마리가 앞다리를 들고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말은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가만히 있지 않고 마당을 맴돌면서 누구든지 가까이 오기만 하면 차버리겠다는 듯이 앞다리를 들어 올리거나 뒷다리로 연거푸 차고 또 찼다. 말을 돌보는 하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삐를 쥐고 끌려 다녔다.

장인과 장모도 어쩔 줄 몰라 쩔쩔맸다.

그 때였다. 성조가 날쌔게 말 위로 뛰어오른 것은. 성조는 사납게 뛰어다니는 말 등에 단숨에 올라 고삐를 단단히 쥐었다. 성조가 올라타자 말은 더욱 사납게 날뛰었다. 성조를 떨어뜨리려는 듯이 껑충 껑충 뛰기도 하고, 미끌어지게 앞다리를 높이 들었다.

“조심하게!”
장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 마십시오! 이놈은 제가 다스리겠습니다!”

성조는 큰 소리로 대답을 했다. 그리고는 말을 향하여 소리를 질렀다.

“네 주인이 여기 있다. 나를 태우고 힘껏 달려봐라.”

성조는 겁도 없이 소리를 지르며 두 다리로 배를 찼다. 말은 더욱 날뛰었다. 구경하던 아내가 겁이 나서 소리 질렀다.

“조심하세요. 떨어지면 다쳐요!”

아내의 말을 들으며 성조는 눈으로 걱정하지 말라는 뜻은 전하고는 올레 밖으로 달려 나갔다. 말은 금방이라도 성조를 떨어뜨릴 기세로 껑충껑충 뛰면서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성조는 말고삐를 꽉 잡고 두 다리는 배에 붙이고 균형을 잡았다.

말은 달리기 시작했다. 빠른 속력으로 달려가서 말 등에 올라탄 성조를 떨어뜨리려는 듯이 힘차게 달려갔다. 돌담이 휙휙 지나갔다. 마실을 가던 사람들이 놀라 황급히 길옆으로 몸을 피했다. 길에서 놀던 아이들도 말발굽 소리에 놀라 몸을 사렸다. 말은 잠시도 쉬지 않고 달려갔다. 말의 입에서 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말은 지치지도 않은지 마을을 지나고, 들판을 지나고, 숲을 지나서 달려갔다. 단숨에 200리를 달리니 정의현 성산 일출봉 앞이었다. 말은 그제야 숨을 헐떡거리며 멈추었다.

“너도 성질머리 한번 급하다. 좀 천천히 달리면 안 되겠니?”

“히이힝! 히이힝!”

말은 성조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이 소리를 냈다. 힘이 빠져 겨우 내지르는 소리였다.

성조는 말을 보면서 흐뭇했다. 천리마가 있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이렇게 잘 달리는 말은 처음이었다. 반나절 만에 200리를 주파한 것이다. 성조는 말에서 내려 숨이 차고, 힘이 빠진 말의 목을 잡고 가볍게 쓸어주었다.

성조는 샘물로 끌고 가서 물을 실컷 먹였다. 그리고 일출봉 앞 풀밭으로 데리고 가서 풀을 먹이고 나서 다시 말 위에 올라탔다. 말은 온순해져서 성조가 고삐를 당기는 대로 얌전하게 걸었다. 성조는 기왕 정의현까지 왔으니 말로만 들었던 정의현청이 있는 성읍을 구경하고 싶어 말머리를 성읍으로 돌렸다.

성조가 집에 돌아온 것은 초저녁이었다. 사납게 달려갔던 말이 천천히 달려왔으니 그만큼 시간이 더 흘렀다.

아내와 장인 장모는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말을 타고 나타난 성조를 보고 그제야 안심하여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침 점심도 굶었지만 사나운 말을 길들여 처갓집의 인정을 받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말과 함께 살아온 성조로서는 사나운 말 길들이기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 타면 사납게 들락퀴던 말을 김송조가 타면 아주 얌전해졌고, 김성조의 명령대로 움직여서 동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감탄을 하곤 했다. 김성조는 장군처럼 사나운 말을 타고 다녀서 “장군이 나니 용마 났다‘라는 말이 퍼져나갔다. 말을 타고 지나가면 사람들은 김성조를 한참이나 쳐다보곤 했다.

빈번한 왜구의 침략

김성조가 김양필의 데릴사위가 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온 일이었다. 가시나물 인근에도 사위가 되고 싶은 출중한 젊은이들이 많았다. 평소에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한다는 소문이 나서 다른 젊은이들도 김성조에 대하여 입소문으로 알고 있기는 했다. 처가댁 마당에서 혼례를 치루는 김성조를 바라보는 눈은 부러움 반, 미움 반이었다. 아들을 김양필의 사위로 들이고 싶어 하던 사람들에게 김성조는 눈에 가시였다.

어느 날, 김성조가 밭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씸대왓을 지나는데 한 젊은이가 김성조를 불러 세웠다. 그 주위에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듬돌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냥 가지 말고 이 돌이나 한 번 들어보고 가지.”

젊은이는 시비를 걸듯이 말했다. 다른 젊은이들도 비아냥거리는 듯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김성조는 손에 들고 있던 농기구를 내려놓고 듬돌 앞으로 걸어갔다.

“누가 나랑 내기를 할 텐가?”

김성조가 갑자기 내기를 하자는 바람에 젊은이는 움찔했다. 그 젊은이는 힘이 센 친구는 아니었다. 그러자 젊은이는 난처한지 친구들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키가 크고 덩치가 좋은 친구가 앞으로 나섰다.

“내가 들지.”

그 젊은이는 심호흡을 하더니 “이랏차차!”하고 큰 소리를 내지르면서 듬돌을 들어올렸다. 젊은이는 듬돌을 안고 오만상을 찌푸리며 다섯 발자국을 걷더니 털썩 떨어뜨렸다. 힘이 부친 것이다.

그걸 바라보던 김성조가 듬돌을 안았다.

둘러섰던 젊은이들이 얼굴이 굳어졌다.

김성조는 팔에 힘을 주고 “얏!”하는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그리고 걷기 시작했다. 한 발, 두 발, 다섯 발을 놓자 조금 전에 다섯 발을 갔던 젊은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김성조는 멈추지 않고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열 발을 더 가서 듬돌을 내려놓았다.

김성조는 숨을 돌리고 나서 청년들에게 말했다.

“힘도 없으면서 괜히 불편을 끼쳤습니다. 교수관 김 양자 필자 어른의 사위라는 건 다 알 테고 앞으로 잘 지도해 주십시오.”

김성조가 아주 예의 바르게 말을 하자 젊은이들은 당황했다.

“아 아니, 저희들이 잘, 아니 저희들을 잘 지도해 주시지요.”

키가 큰 젊은이는 쩔쩔매며 말했다.

그 후, 김성조는 마을 젊은이들과 아주 친하게 되었다. 가끔은 다라쿳 마을에 있는 사장밭에 가서 활쏘기도 하고, 꿩을 잡거나 노루사냥을 다니기도 했다.

가시나물은 제주읍성 남문을 나와 광양, 아라리를 거쳐 동쪽으로 들어간 곳에 있는 마을이어서 농사를 짓기에는 아주 좋은 곳이었다. 그러나 겨울철이면 눈이 많이 내렸다. 눈이 내리면 장인 김양필은 제주향교까지 가기가 힘들었다.

제주향교에서는 시시 때때로 제사를 지내고 유생들을 가르쳤다. 교수관인 장인은 하루도 빠짐없이 유생들을 가르치고 향교를 돌보는 일을 좋아했기 때문에 눈이 온다고 집에서 머물 수는 없었다.

“허 참, 눈이 많이 와서 큰일이네.”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장인이 창밖을 내다보며 안절부절못하면 김성조는 장인을 말 뒤에 태우고 제주향교까지 모셨다. 김성조가 교수관을 모시고 향교에 가면 공부를 하러온 유생들이 아주 반겼다. 김성조는 다른 유생들과 같이 앉아 장인의 가르침을 들었다.

제주향교의 책을 수많은 유생들이 보는 바람에 너덜너덜 했지만 모두들 열심히 공부를 했고, 김성조 또한 병법에 대한 책을 열심히 읽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혼례를 치른 지 8년 동안 장인을 도와 집안일을 할 때도 있었지만 말타기와 활쏘기, 칼쓰기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명종 대에는 유달리 왜구의 제주 침략이 많았다. 명종 7년(1552년) 정의현 천미포(성산읍 신천리 일대)에 왜구가 쳐들어왔다. 왜구가 천미포로 향해 가는 것을 토산망을 지키던 군인들이 발견하여 봉수대에 불을 피워 제주목사에게 알렸다. 제주목사 김충렬은 정의현감 김인과 대정현감, 동쪽에 있는 5개 방호소에 연락한 후 접전을 하였으나 1명만 생포하고 30여명의 왜구들이 달아나 버렸다.

문책을 받은 김충렬과 김인의 후임으로 남치근 목사가 부임한 명종 9년(1554년) 5월에 왜선 한 척이 다시 물마루(수평선)를 건너왔다. 토산봉수에서 왜선을 발견한 군인들이 연기를 올리자 연달아 독자봉수, 수산봉수, 지미봉수, 입산봉수에도 연기가 올라가고 마침내 제주읍성과 가까운 사라봉수에 연기가 올랐다.

배는 천미포를 향하여 빠르게 달려왔다.

“왜구가 쳐들어왔습니다.”

봉수에서 잇달아 연기가 오르자 전령이 남치근 목사에게 달려왔다.

“어서 가자.”

남치근 목사는 부하들을 데리고 봉개와 교래를 넘어 천미포로 달려갔다. 서귀진과 수산진에서도 군인들이 천미포로 달려왔다.

남치근 목사와 군인들은 해안가에 숨어서 기다리다가 왜선을 나포하고 왜구를 모두 잡았다.

5월 22일에는 황당선 한 척이 조천관을 향하고, 또 다른 왜선 세 척은 해안에서 5리(2km) 쯤에 돛을 내리고 정박했다.

24일에 군인들이 배를 타고 나가자 모두 달아났는데, 25일에는 검은 옷을 입은 왜인 4,5명이 비양도에 나타났다. 남치근 목사는 용감한 군인을 골라 옹포포구에서 전선 4척을 띄웠다. 전선이 비양도에 다가가자 왜구는 배를 타고 달아나려고 포구에서 나왔다. 남치근 목사는 전선을 두 척씩 나뉘어 나아가도록 명령했다. 배가 좌우로 쳐들어가니 왜선은 더욱 빨리 달아났다. 당황한 왜구가 허겁지겁 노를 젓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왜선은 물속에 잠겨 있던 바위를 피하지 못하고 부딪히더니 그만 부서지고 말았다. 삼나무로 지은 배는 빠르기는 하지만 단단하진 못했다.

물에 빠진 왜구 7명이 허겁지겁 헤엄을 쳐서 비양도에 상륙하자 뒤따라 간 목사는 그들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파선된 배의 판자를 타고 왜구 23명과 중국인 2명이 한수풀 해안가로 밀려오자 사로잡아 감옥에 가두었다가 왜구 12명의 목을 베었다.

제주는 고려시대부터 끊임없는 왜구의 도발에 역대 목사들은 제주의 방어시설을 정비하는데 힘썼다. 제주성, 정의성, 대정성 3성이 만들어졌고, 명월진, 별방진, 모슬진 등 9진과 구내봉수, 수산봉수, 원당봉수 등 25곳에 봉수가 있으며, 두모연대, 별도연대, 애월연대, 남두연대 등 38연대가 있어 왜구를 막아내기 위해 애를 썼다.

조선시대 세종 19년(1437)에는 제주 안무사 한승순이 제주 방어체제를 정비하여 방호소 12개소와 수전소 10개소를 설치하였다. 그런데 왜구가 쳐들어왔다는 연락을 받고 군인들을 보내는 사이에 왜구는 약탈과 살인을 끝내고 사라져버릴 때도 있었다.

김성조는 왜구가 쳐들어 왔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안타까웠다.

‘내가 군인이었다면 왜구를 무찌르러 갈 텐데.’

마음 같아서는 말을 타고 한걸음에 달려가 왜구를 물리치고 싶었지만 군인 신분이 아니니 어쩔 수 없었다. 김성조는 언젠가는 왜구를 물리칠 날을 기다리면서 무술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남치근 목사는 제주에 부임한 이후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언제 왜구가 다시 쳐들어올지 모르는 일이고, 왜구를 막아내지 못하면 앞으로 영영 벼슬길이 막힐 것이다.

“왜구가 또 언제 노략질을 하러 올지 모르는 데 어떻게 하면 좋겠소?”

“군인이 더 필요합니다. 왜구가 많이 온다면 지금 제주에 있는 500여 명의 군인만으로는 막아낼 재간이 없습니다.”

“그게 좋겠소. 쳐들어오는 왜구의 수가 많으면 지금 제주에 있는 군인만으로는 막아낼 수 없지.”

제주목사는 제주판관의 대답에 좋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목사는 제주, 대정, 정의 군수 등과 의논하여 왜구를 막아내는데 알맞은 군인들을 뽑기로 했다. 근접전 이전에는 활쏘기가 우선이었고, 맞닥뜨리면 칼싸움이었다. 왜구가 육지에 상륙하기 전에 활을 쏘아 물리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었다.

제주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라 가까운 전라도에서 수군이 온다고 하더라도 하루나 이틀은 지나야 했기 때문에 용맹한 군인이 필요했다. 왜구를 막아낼 만한 병사를 훈련시킬 수 없으면 제주는 왜구의 밥이 되고 말 것이었다.

남치근 목사는 왜구를 막아내기 위해서는 군인들이 모두 총통과 화창(총), 궁현을 가져야 하는데 부족하니 보내달라고 편지를 썼다. 그리고 왜구를 막아낼 군인들을 모집했다.

당시 남자들은 16세가 되면 군역의 의무가 시작되었다. 건강하고 정상적인 남자라면 60세까지 정군이 되던지, 정군을 뒷받침하는 봉족으로 구분하여 정군 한 명에 봉족 몇 명을 배정하여 근무를 하게 했다. 제주에서 봉족은 말 기르기, 감귤 가꾸기, 봉수나 연대에서 군역을 감당해야 했다. 군역은 제주 사람들에게는 의무였다. 하지만 김성조는 장인이 양반출신이라 군역을 면제 받을 수도 있었다.

“저도 왜구를 막는데 힘을 보태겠습니다.”

김성지는 자진해서 남치근 목사를 찾아가 군인이 되었다. 김성조가 말타기와 무술에 뛰어나다는 소문을 들어 알고 있던 남치근 목사는 김성조를 군인들을 훈련시키는 교관으로 임명했다. 김성조에게는 딱 알맞은 일이었다.

김성조는 훈련시킬 때면 정확한 동작으로 활쏘기와 칼쓰기를 훈련시켜 새로 입대한 군인들에게 존경을 받았고, 남치근 목사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김성조는 제주를 지키겠다고 지원한 젊은이들에게 우선 정신무장을 단단히 하도록 가르쳤다.

“왜구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인다. 특히 아녀자들을 잡아가고 재물을 빼앗아 가니 제주 사람들의 운명이 너희들 손에 달렸다.”

김성조는 훈련을 받는 군인들에게 가족을 보호하기 위하여 죽을힘을 다해야 한다고 가르쳐 젊은 군인들을 감동시켰다.

그리고 활쏘기와 칼싸움 훈련을 시켰다. 호시탐탐 제주도를 노리고 있는 왜구를 물리치려면 왜구가 배에서 내리기 전에 활을 쏘아 물리치는 게 최선이며, 상륙을 한다면 칼을 잘 써야 한다고 가르쳤다. 칼싸움에 밀리면 왜구를 물리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제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동생 김성지도 군에 입대하여 훈련을 받았다. 동생도 말타기와 무술이 출중해서 형보다 뒤지지 않았다. 형이 떠난 후에도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은 결과였다.

관리 지인이 되다

명종 6년(1551년), 을묘년 정월에 발령을 받고 3월에 김수문 목사가 부임했다. 김수문 목사는 빈번한 왜구의 침입에 대한 제주의 방어 현황을 파악하느라 분주했다. 그런데 조정에 보내는 보고문에 목사의 직인을 잘못 찍어 명종 임금의 노여움을 샀다. 명종 임금은 제주목사 관인을 판관인으로 낮춰 버렸다.

김성조가 김수문 목사의 눈에 띈 것은 그 후였다.

“누구를 지인으로 뽑아서 판관인을 맡기면 좋겠는가? 다시 실수하면 곤란하네.”

“김성조에게 지인을 맡기면 틀림이 없을 겁니다.”

현명하고, 성실한 김성조의 됨됨이를 알고 있는 관리들이 이구동성으로 김성조를 추천했다.

김성조는 주위 사람들의 추천으로 지인 일을 맡게 되었다. 그래서 군인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접고 지인 자리로 옮겼다. 제주의 행정과 군사에 관련된 관인을 관리하는 일을 담담하게 된 것이다. 지인은 관인을 관리하는 중요한 일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김성조가 비록 낮은 계급이지만 지인으로 일하게 된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엄쟁이에 사는 부모와 동생도 아주 좋아했다.

지인이 되던 해에 아들 용효가 태어나고, 이어서 동생 용련, 딸이 태어나 2남 1녀를 두었다. 용효와 용련은 아버지와 어머니,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가르침을 받아 바르게 자라났고, 할아버지를 따라가 제주향교에서 공부를 하였다. 용효와 용련도 아버지를 닮아 동네 아이들의 대장이 되어 칼싸움 놀이를 즐겼다.

제주의 유월은 농사일로 바쁜 때였다. 보리를 장만하고 나서 여름농사로 좁씨를 뿌리기 위해 밭을 갈고 테우리들은 밭을 밟기 위해 말떼를 밭으로 들여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어려려려 어려려 어려려려려려려 돌돌돌” 또는 “어려려 어려려 어려-어려령 어-허량 하-량”하고 후렴구를 붙이며 열심히 밭을 밟아나가는 시기였다. 또한 바다에서는 보자기와 잠녀들이 물질을 하여 소라나 전복을 잡는 때였고, 철없는 아이들은 바다에서 헤엄을 치면서 놀기 시작했다. 유월 장마로 세찬 비가 내리기도 했고, 무더운 날씨로 사람들은 오랜만에 한가한 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제주는 풍전등화의 시기를 맞고 있었다. 왜구가 다시 대규모로 쳐들어 온 것이다. 명종 10년(1555년) 6월 21일에 왜선 70여 척이 호남의 영암, 강진, 진도, 달랑포 일대를 노략질하고 제주해협을 건넜다.

세종 25년(1443년)에 조선과 대마도 사이의 세견선에 관한 조약을 맺었다. 삼포(부산포, 제포, 염포)의 개항 이후 삼포에는 수많은 왜인이 거주하고, 대마도주는 일 년에 50척의 세견선을 조선에 보낼 수 있었다. 무역과 어로가 끝나면 곧 돌아가게 하되, 거류한 지 오래된 자 60명만을 잠시 살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그러나 왜인들은 이를 지키지 않고 계속 삼포에 들어와 거류했으며, 그 수가 해마다 증가하여 커다란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조선 조정에서 법을 엄하게 지키자 명종 10년(1510년)에 왜인들이 반항하여 삼포왜란을 일으키자 조선 조정은 세견선을 줄여버렸다. 그러자 대마도에 살고 있는 왜인이 왜구가 되어 전라도를 침략하고 제주까지 내려온 것이었다. 이들은 단순히 제주를 노략질하는데 그치지 않고 제주를 왜구의 본거지로 삼아 전라도, 제주도, 일본의 북구주(큐슈)를 잇는 해상권을 장악하려는 목적으로 제주를 침범한 것이었다.

6월 25일 정오, 사라봉수에서 물마루(수평선)를 지키던 봉수군들은 화들짝 놀랐다. 하늘과 바다를 가르는 물마루에 무수히 많은 돛대가 보이더니 왜선 70여 척이 모습을 드러냈다. 왜구는 조선으로 약탈을 하러 올 때면 대형선 35척, 중선 25청, 소형 10척을 선단으로 만들어 이동했다. 무수히 많은 배가 있는 수군을 보냈지만 군사의 수가 작고, 배가 좋지 못하여 추자도에 머물며 왜구의 동향을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제주목사 김수문은 원병이 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면서 사라봉수에 올라가 화북포구 앞바다에 정박한 왜선을 바라보며 입이 바싹 바싹 말랐다.

‘저 놈들을 무슨 수로 막아낼 것인가?’

제주목사는 눈앞이 캄캄했다. 왜구가 상륙을 한다면 제주는 난장판이 되고 말 것이었다. 재물을 빼앗기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닥치는 대로 불을 지르고 사람을 죽이고 여자들을 잡아가는 왜구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마침내 왜구는 6월 27일 화북포로 상륙했다. 화북진을 지키는 관군으로는 이들을 막아낼 수 없었다. 왜구는 화북포구에 상륙하자마자 ᄀᆞ으니마루를 거쳐 제주성이 내려다보이는 신산마루에 진을 쳤는데, 왜구의 수가 천여 명이었다. 왜구는 제주성밖 주민들을 죽이고, 곡식과 재물을 약탈하고, 거로에 있는 소림사에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성밖에 살던 사람들이 죽어가면서 지르는 비명소리와 불타는 집에서 나오는 연기가 제주성 안으로 밀려들었다. 제주성 안에 있는 군인보다 더 많은 천여 명의 왜구는 저승사자들이었다. 성을 지키는 군인들은 신산마루에 진을 친 왜구를 보면서 부들부들 떨었다.

제주성은 언제 만들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주 단단한 성이었다. 고려시대에 제주에 상륙한 삼별초는 제주성 성주 고인단에게 성문을 열어 통과시켜줄 것을 요청했지만, 고인단이 이를 거절하여 성문을 굳게 지키는 바람에 삼별초는 성을 돌아 항파두리로 갔다고 한다. 그만큼 제주성은 적이 쳐들어가기 어려운 성이었다. 성문의 이름은 연양문(동문), 진서루(서문), 정원루(남문)라고 했고, 수구는 쌍안교, 원교라고 했다. 이밖에도 소민문과 수복문, 중인문 등의 작은 간문이 더 있었다.

성 위에는 사격을 하는 격대 27곳, 화살을 막는 타첩(여장)이 404곳이 있어 왜구는 쉽게 제주성을 공격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제주는 워낙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어서 왜구가 마음만 먹는다면 점령하기 좋은 곳이었고, 제주성 또한 마찬가지였다.

제주성은 동쪽으로는 산지천을 끼고 있고, 서쪽으로는 병문천, 남쪽은 돌로 쌓은 성이 길게 이어져 있으며, 북쪽은 바다였다. 삼 면이 성인데, 제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무암으로 쌓았다. 둘레가 4,394척이고 높이는 11척이라 하였다.

산지천의 남쪽에는 남수구, 북쪽 바닷가에는 북수구라는 다리가 있어 사람들이 왕래하였다. 제주성의 남쪽성담은 동서로 길게 뻗어 있었고, 동쪽 끝에 있는 절벽 아래 가락천에는 남수구라는 다리가 있었다.

그런데 제주성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산지천의 산지물과 가락천의 가락쿳물은 생명수나 다름없었다. 허벅으로 물을 길어다 항아리에 부어놓고 사용하고 있는데, 갑자기 쳐들어온 왜구 때문에 물을 길어오지 못하자 난리가 났다.

“물이 없으면 밥은 어떻게 해 먹어?”

“물이 있어야 세수도 하고, 빨래랑 청소도 하는데.”

물이 떨어진 집에서는 밥도 해먹지 못하고 옆집으로 물을 꾸러 다녔다.

산지천 건너편 신산마루는 제주성내가 들여다 보일만큼 높았다. 천여 명의 왜구가 제주성이 내려다보이는 신산마루에 진을 치니 읍성주민들은 겁에 질려 꼼짝도 못했다. 왜구의 잔인함을 익히 알고 있던 주민들은 오금이 저려 바깥출입도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빨리 육지에서 수군이 와서 왜구를 물리쳐 주기를 바랐지만 육지는 너무 멀었고, 제주로 오던 수군은 추자도에 머물러 제주는 풍전등화 같은 신세였다.

치마돌격대와 효용군

목사 김수문과 판관 이선원이 지휘하는 관군은 3일 동안 동쪽 성 가까이 다가오는 왜구를 향하여 활을 쏘았다. 산지천에 가로막혀 왜구는 공격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성문이 열리지 않아서 왜구는 총공격을 하지 못하고 산발적으로 활을 쏘았고, 제주성을 지키는 군인들은 왜구를 향해 활을 쏘면서 원병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제주읍성이 풍전등화 같은데 제가 대장부의 신명을 바쳐 왜구를 격퇴하겠습니다.”

지인 김성조가 왜구를 무찌르겠다고 나섰다. 김성조의 눈에는 결기가 뚜렸했다.

“너의 용기는 매우 가상하다만 그대가 군직이 아닌데 어떻게 선두에 나갈 수 있겠느냐! 이 난국을 피하고 왜구를 물리치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나 말해보아라.”

김수문 목사는 지인인 주제에 당돌하게 나서는 김성조를 보며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왜구를 물리칠 좋은 방도가 생각나지 않아 난감하던 참이어서 김성조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성동격서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왜구를 무찌르려면 쳐들어오기를 기다리기보다는 기습을 해서 무찌르는 게 어떻겠습니까? 효용군을 조직하여 남수구로 보내어 소리를 지르면서 쳐들어가면 왜구는 효용군을 물리치려고 할 것입니다. 그 때, 동문으로 치마돌격대를 보낸다면 왜구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도망칠 것입니다. 도망가는 왜구를 물리치는 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김성조는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

“네 말에도 일리가 있다. 그럼 언제 공격하는 게 좋겠느냐?”

“날쌘 군사들을 모아 왜구가 잠이 든 새벽에 쳐들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말을 타고 가서 잠이 덜 깬 왜구들을 공격한다면 우리가 이길 수 있습니다.”

김성조는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와 같이 무모한 짓이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백성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면 왜구를 물리칠 수 있다고 김성조는 생각했다.

“그게 좋겠네. 빨리 날쌘 군사를 모으시오. 그리고 말을 타고 공격할 수 있는 사람들을 알아봅시다.”

김수문 목사는 김성조의 말에 동의했다. 김수문 목사는 군인들이 모여 있는 관덕정 마당으로 급히 걸어갔다. 병사들은 왜구의 기세에 잔뜩 겁이 나서 주눅이 든 체 앉아 있었다.

“제주성을 지키려면 결사대 효용군을 만들어 왜구의 진지로 쳐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왜구를 물리치려면 날쌘 군인이 필요하다. 너희들 중에 제주성을 지킬 마음으로 나설 자가 있느냐?”

김수문 목사가 큰 소리로 말하면서 제주병사들을 둘러보았다.

“제가 가겠습니다!”

한 병사가 용감하게 일어섰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병사들이 일어섰다. 그 병사들을 세어보니 모두 70명이었다.

제주목사는 다시 말을 잘 타고 칼을 잘 쓰는 치마돌격대를 선발했다.

“저희들이 왜구를 무찌르러 가겠습니다.”

김직손과 김성조, 이희준, 문시봉이 치마돌격대에 지원했다.

김수문은 말을 잘 탄다고 알려진 군인들로 치마돌격대를 조직했다. 정로위 김직손에게 지휘를 맡기고 보인 문시봉을 붙여주었고, 김성조, 이희준을 갑옷을 입혀 갑사로 임명했다. 김직손은 김수문 목사의 인척으로 정로위로 파견된 서울 군인이었다.

정로위는 조선 중기에 있었던 한량 계층 중심의 군대계급으로 양반의 자제들로 고급 군사력을 확보하려고 만든 군인 계급이며, 그의 부하로 보인을 배당하였다.

갑사는 직업군인으로 간단한 시험을 거쳐 선발하였는데, 무예 시험을 거쳐서 선발된 정예 부대였다. 갑사에 뽑힐 수 있는 사람은, 부유한 집안의 자제가 아니면 어려웠다. 특히, 기갑사는 본인이 말을 준비해야 했는데, 김성조는 길들인 사나운 말이 있어 기갑사가 된 것이다. 또한 제주목사를 호위하는 일을 했으므로 용모가 준수하고 싸움을 잘 하는 사람만이 임명될 수 있었다. 때문에 아무리 부유한 양반자제라 하더라도 시위 군사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임명될 수 없었다.

보인은 원래 봉족이라고 했다. 16세 이상 60세까지의 평민에게 군역의 의무를 부과하고, 6년마다 군적에 올리도록 되었는데 이 가운데서 현역으로 뽑혀 군인이 되고, 직접 군역을 지지 않는 나머지를 장정으로써 봉족을 삼아, 그 비용을 조달하도록 하였다. 나중에 봉족 대신 보라고 해서 보인이라면 군졸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치마돌격대는 동문으로 나가서 왜구를 후방에서 공격하고, 효용군은 남수구로 나가서 공격하는 양면작전을 세웠다.

김수문 목사는 나머지 병사들을 모아 명령을 내렸다.

“치마돌격대와 효용군이 왜구를 향해 쳐들어가가 전에 몰래 북수구를 빠져나가 사라오름과 별도오름 해안으로 돌아가서 왜구가 타고 온 배들이 보이는 해안가에 잠복하고 있다가 왜선에 불을 질러라. 반항하는 왜구는 단호하게 베어라.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 왔지만 나갈 때는 우리의 허락이 없으면 안 된다. 단 한 명의 왜구도 제주를 떠나지 못하게 막아라.”

병사들은 김수문의 명령을 듣고 단단히 결심을 했다. 죽는 한이 있어도 왜구를 막아내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삼일 째나 공방전을 벌이던 왜구들은 숨을 돌리고 이튿날 아침이 되면 총공세를 취할 작정이었다. 천여 명의 대군으로 제주성을 공격하면 쉽게 함락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느긋했다. 왜구의 일부는 진을 지키고, 나머지는 천막 안에서 잠이 들었다.

날이 밝아왔다. 사라오름 위로 개밥바라기별(샛별) 이 한층 밝은 빛을 내고 있었다. 이제 아침이 성큼성큼 다가올 것이다. 인시(오전 3시반~4시 반)가 되자 날밤을 세운 기마별동대와 효용군은 관덕정 광장에 모였다. 모두들 얼굴에는 비장한 각오가 비쳤다. 왜구를 물리치지 못하면 제주성뿐만 아니라 제주도가 적이 수중에 넘어갈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과 제주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게 하려면 무조건 왜구를 물리쳐야 할 사명이 치마골격대와 효용군의 어깨에 달려있었다.

“적을 두려워하면 무조건 패할 것이다. 용기를 내어 일당백의 정신으로 싸우러 가자.”

김수문 목사는 효용군을 향하여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반드시 왜구를 물리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도록 비장한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묘시(오전 5시)에 화포를 쏘기로 하여 군령을 내렸다.

김수문 목사는 70명의 효용군을 이끌고 왜구의 눈을 피해 남수구로 향했다. 언덕 위에서 왜구가 내려다보고 있어 몰래 몰래 제주성에 바짝 붙어 이동했다. 효용군의 접근을 왜구가 알아차리고 공격을 한다면 왜구의 화살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지만, 제주를 지킬 수 있다면 제 한 목숨은 바쳐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이동했다.

마침내 묘시가 되었다. 사방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김수문 목사와 효용군은 조용히 남수구 다리를 건넜다. 구릉 비탈을 살금살금 올라가던 효용군은 왜구와 30보쯤 앞에서 맞닥뜨렸다.

“쏘아라!”

김수문 목사의 명령이 떨어지자 효용군은 왜구를 향하여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수많은 화살이 왜구를 향하여 날아갔다. 제주성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담은 화살이었다. 효용군은 큰 소리를 지르며 활을 쏘았다. 그리고 칼을 빼어들고 용감하게 왜구 진지를 향하여 달려갔다.

왜구는 갑자기 들리는 고함소리와 날아온 화살에 혼비백산했다. 잠이 덜 깬체 천막에서 나오는 왜구를 향하여 화살이 날아가자 고꾸라지며 피를 흘리는 왜구가 보였다. 갑작스런 공격에 우왕좌왕 하다가 도망가는 왜구가 많았다. 그러나 왜구도 곧 정신을 차리고 맞서기 시작했다. 화살에 맞은 왜구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왜구는 물러서지 않고 제주 군인들을 향하여 화살을 쏘았다. 높은 곳에 있는 왜구가 내려다보면서 쏘는 화살은 빗나가기 십상이었다.

효용군이 남수구를 향할 때, 정로위 김직손, 갑사 김성조, 이희준, 보인 문시봉은 말을 타고 동문으로 향했다. 4인의 돌격대는 말발자국 소리가 나지 않게 천천히 동문을 향하여 나아갔다. 출발할 때는 정로위 김직손이 앞장을 섰지만 동문이 가까워지자 갑사 김성조와 보인 문시봉이 선두로 나갔다.

성문을 지키고 있는 군인들이 소리나지 않게 빗장을 빼고 성문을 열었다. 어둠이 제주성을 감싸고 있어 신산마루 위에서 제주성을 내려다보고 있는 왜구 보초병의 눈에 띄지 않았다. 멀리서 효용군이 지르는 함성이 들려왔다.

4인의 치마돌격대는 동문을 나서 산지천 다리를 넘자마자 단숨에 왜구가 진을 치고 있는 신산마루를 향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따각! 따각! 따각!”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새벽하늘을 가르며 퍼져나갔다.

김성조는 앞장서서 달려갔다. 그 뒤를 보인 문시봉이 따라가고 정로위 김직손, 갑사 이희준이 뒤따랐다. 치마돌격대 네 사람은 용감하게 적진으로 뛰어들어 천리마처럼 좌충우돌하면서 칼을 휘둘렀다. 잠이 덜 깬 왜구들은 천막에서 뛰쳐나오다가 네 사람의 칼을 맞았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 속수무책으로 달아나거나 칼에 베인 왜구는 붉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치마돌격대가 지나간 자리에는 널브러진 왜구들의 시체만 남아 있었다.

제주 군인들은 왜구들을 향하여 인정사정없이 칼을 휘둘렀다. 갑자기 공격을 당한 왜구가 연이어 죽어 나자빠지자 살아남은 왜구는 당황하여 달아나기 시작했다. 허겁지겁 칼을 버리고 걸음아 날 살리라고 하는 듯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붉은 모자를 쓴 왜군 장수가 활을 쏘면서 물러가지 않았다. 왜군 장수는 부하들이 달아나는 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바위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활을 쏘았다. 그대로 두면 우리 군인들에게 큰 피해를 줄 것 같아 정병 김몽근이 몰래 돌아가 그의 등을 향해 힘껏 활을 쏘았다. 화살은 힘차게 날아가 왜장의 등에 꽂혔고, 왜장은 맥없이 꼬꾸라졌다.

적장이 쓰러지자 왜구들은 더욱 당황하여 도망가기에 바빴다. 말을 탄 정로위 김직손, 갑사 김성조, 이희준, 보인 문시봉은 도망가는 왜구들을 향하여 칼을 휘두르며 달려갔다. 치마돌격대를 피해 숨으려는 왜구는 효용군이 쫓아가 칼을 휘둘렀다. 왜구의 진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살아남은 왜구는 배가 있는 화북포를 향하여 정신없이 달려갔다. 일당백이라는 말이 있는데 치마돌격대나 효용군들은 왜구를 물치치는데 일당백의 역할을 하고도 남았다.

김성조의 활약은 놀라운 것이었다. 워낙 말을 잘 타는 김성조는 적진 깊이 들어가 왜구의 목을 벴다. 달아나는 왜구에게 김성조는 무서운 저승사자였다. 김성조의 칼에 죽은 왜구가 백여 명이 넘었다. 길들이기 전에 200리를 뛰어갔던 장인댁 말은 왜구를 쫓아 힘차게 달려갔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김성조가 나타나 휘두르는 칼날에 아침햇살이 비쳐 반짝거렸다.

문시봉 또한 말을 아주 잘 타는 젊은이로 김성조 못지않은 활약을 하였다. 그의 칼에 죽어 넘어진 왜구도 부지기수였다.

살아남은 왜구는 화북포에 있는 배를 타고 도망가려고 했지만 북수구를 빠져나간 군인들은 왜선에 불을 붙였다. 또한 달아나려는 왜선 10여 척을 빼앗고, 수백 명의 적을 죽였다. 배를 타고 달아난 왜구는 얼마 되지 않았다.

“살았습니다. 제주백성이 이젠 살아났습니다.”

성안에서 숨을 죽이고 숨어 있던 주민들이 나와 만세를 불렀다.

효용군 중에서도 일부는 화살을 맞고 죽거나 다쳤지만 왜구의 피해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왜구 1천여 명이 제주성을 함락했더라면 제주는 왜구의 본거지가 되어 영원히 일본 땅이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제주가 왜구의 소굴이 되었다면 우리나라의 해안은 물론 중국까지도 안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구를 물리친 후, 김수문 목사는 군관 장려를 조정으로 보내어 승전의 소식을 알렸다. 명종 임금님은 왜구가 제주를 침략한다는 것을 알고 걱정하고 있던 참에 승전소식을 알리자 아주 기뻐하였다.

“왜적이 경계를 범하였다는 말을 들으면서부터 멀리 떨어진 외딴 섬에다 병력은 단약하고, 구원병도 때를 맞추어 보낼 수 없으니 어찌 방어할까 몰라서 마음이 편치 못하여 잠을 이룰 수 없는 날들이었다. 지금 경의 치계를 보니 지난 달 27일에 전승 상태를 알게 되어 내 근심하던 마음이 10에서 7, 8은 감하였다. 이는 경이 평소에 충의로 복종하고 나라를 죽음으로 고수하겠다는 마음이 없었다면 어찌 능히 적은 병사로 많은 적을 격파하여 이 대첩을 이루겠는가. 김직손 등 4인이 돌격한 공 역시 적지 않다. 그러나 이는 경이 몸소 사졸에 앞장서서 적의 흰 칼을 무릅쓰고 달려 나가 그들의 용기를 고무하여 준 소치가 아니겠느냐. 내가 심히 기뻐서 경에게 일자를 올려주고 또 비단 옷 한 벌을 하사하니 경은 받으라.”

을묘왜변을 성공적으로 치러 전승했다는 보고가 조정에 알려지자 명종 임금님은 크게 기뻐하면서 이듬해 김수문 목사와 이선권 판관은 일등급 가의대부로 임명하고, 목사에게는 비단옷 한 벌을 하사하였다. 이성원은 군기부정에, 대정현감 공사검을 제주판관으로, 군관 강려를 대정현감으로, 최수장을 정의현감으로 승진시켰다. 그리고 판관인으로 사용하던 지인을 제주목사인으로 사용하도록 허락했다.

그리고 김성조와 문시봉에게는 종3품 건공장군의 벼슬을 내렸다.

을묘왜변의 승전 공로로 건공장군의 품계를 받은 김성조에게 가선대부도총부부총관의 직을 내렸으며 아버지 김윤형에게는 무신 정6품 진용교위의 품계에 가선대부 병조참판을 증직하였고, 처에게는 숙인의 칭호를 내렸다.

문시봉의 형 문서봉은 조선 제일의 말테우리 김만일을 사위로 맞아 말을 기르는 방법을 배워주어 헌마공신이 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큰 별이 지다

을묘왜변을 겪고 나서 김성조는 왜구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왜구는 다시 쳐들어옵니다. 배운 짓이 도둑질이고 살인이니 스스로 먹고 살려고 애쓰지 않고 또 우리나라의 해안으로 쳐들어와 식량을 빼앗아가고, 사람들을 죽일 테니 만반의 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김성조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왜구를 막을 준비를 해야 한다고 목사를 비롯한 관리들과 주민들에게 강조하곤 했다.

명종 11년(1556) 병진년 6월, 다시 왜구가 쳐들어왔다. 봉수와 연대에서는 재빨리 연기와 횃불을 올려 주민들을 피하게 하고 군인들은 해안으로 몰려갔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왜적선 5척이 제주 해안가 여러 마을에 침범하였다.

김수문 목사와 병사들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가 왜구를 맞았다.

제주성을 침략하려던 왜구 천여 명을 물리친 경험을 가지고 있는 김수문 목사는 민관군을 모두 동원해서 용감하게 왜구에 맞서 싸웠다. 특히 김성조의 동생 김성지의 활약이 두드러져 명종 임금님은 어모장군으로 임명하였다.

형제가 모두 왜란에 큰 공을 세워 정3품의 벼슬을 받았으니 평소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병서를 읽고, 무술을 익힌 공이 컸다.

병진왜란에 제주목에서 66명, 정의현에서 31명, 대정현에서 30명이 왜구를 죽였다. 병진왜변에도 김수문 목사가 혁혁한 공을 세우자 명종 임금은 자헌대부로 품계를 올려주었다.

“제주목사 김수문은 항상 방어하는 일에 마음을 다하여 조치하고 적이 나타나 만나기만 하면 모두 섬멸하여 남김이 없다. 5척의 배를 한 척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으니 그 공이 적지 않으며 지극히 가상하다. 특별히 한 자급(지위)을 올려 주어서 장려하는 뜻을 나타내라. 또 해마다 방비하는 모든 일을 여러 방면으로 규획하였으니 이와 같은 방략도 또한 가상하다. 승정원에서는 별도로 문서를 작성하여 아름다 운을 포상하는 뜻을 표시하라.”

을묘왜변과 그 이듬해 병진왜변이 끝나자 제주는 다시 잠잠해졌다. 바다는 여전히 푸르렀고, 마을 해안에서는 보자기와 잠녀가 어울려 전복이랑 소라를 잡았다. 보리를 수확하고 밭을 갈아 좁씨를 뿌리면서 초여름을 맞았다. 농부나 어부는 가족들을 위해 땀을 흘렸지만 관리들은 언제 다시 왜구가 쳐들어올지 몰라 전전긍긍하였다. 그래서 관군들은 열심히 훈련을 했고, 봉수대와 연대에 일하는 사람들은 왜구의 침략을 알아내기 위하여 눈을 부릅떴다. 왜구의 침략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가난한 제주사람들을 더욱 가난의 구렁텅이로 몰아놓는 일이라 한 시도 안심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군인들은 군사훈련을 멈추지 않았고, 주민들도 관의 명령에 따라 무너진 환해장성을 수리하고, 연대나 봉수에 나가 군인들을 도왔다.

이에 김수문은 임금님에 대한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하여 제주목관아 안 연희각 동북쪽에 망경루라는 누각을 지었다. 북극성을 바라보며 한양의 임금님의 은덕을 기리는 한편 왜구의 침략을 경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명종 임금님은 강려, 이서원의 공을 치하하며 3품 동반으로 임명하였다.

그 후에도 왜구는 끊임없이 제주를 할퀴었다. 명종 11년 7월에도 왜적선 12척이 나타나자 2척을 포획하여 75명을 죽였다. 그 중에는 중국 당나라 사람들도 있었다. 명종12년(1557) 7월에도 왜적선 26척이 제주 경내에 와서 정박하였고, 명종 14년(1559) 6월에도 왜선 2척이 쳐들어왔다.

조정에서는 제주지역의 방위가 국가안보에 중요함을 알고 비변사의 권한을 확대하여 왜구를 막아내는데 도움을 주었다.

왜구의 침략이 있을 때마다 김성조와 김성지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왜구를 막아내는데 몸을 아끼지 않았다. 왜구가 뭍으로 상륙하여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선두에 서서 싸웠다.

김성조는 왜구를 막아내기 위하여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고, 때로는 다쳐서 상처를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남편을 보는 아내는 늘 불안했지만 남편의 기를 살리기 위해 위로의 말을 건넸다.

“여보, 집안일이랑 아이들은 제가 잘 돌볼 테니 당신은 왜구를 막는데만 힘쓰세요. 몸조심하시고요.”

김성조가 왜군을 막아내기 위해 애쓰는 동안 아내 김 씨는 2남1녀의 자녀를 잘 키워냈다.

“여보, 이젠 관직을 버리는 게 어떨까요?”

김성조의 아내는 아픈 몸으로 아침마다 제주목관아로 출근하는 남편이 불안했다. 그동안 몸을 돌보지 않고 왜구를 막아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다보니 다친 곳이 많았다. 그런데도 치료를 제대로 하지 않고 싸움터에 나가다보니 병은 점점 깊어갔다. 제주목관아에서 돌아와 자리에 누우면 마치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아내는 조심스럽게 남편에게 권하곤 했다. 처음에는 단호하게 거절하던 김성조는 차차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우렸다. 나라에 대한 충성심으로 왜구를 막아내는 일도 귀중한 일이지만 부하들에게 걱정을 끼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미안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은 왜구를 막으러 달려나가고 싶지만 그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명종 19년(1557년) 김성조는 37세에 관직을 그만 두었다. 김성조는 관직을 떠나 집에서 요양하면서도 왜구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모임이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김성조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왜구는 또 다시 쳐들어올 것이니, 방어에 잠시라도 게을리 해선 안 된다. 정신무장을 하지 않고 지내다가는 을묘왜변보다 더 많은 왜구가 쳐들어오면 큰 화를 입을 수 있을 것이다.”

김성조는 왜구의 침략을 경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김성조는 집에서 몸을 추스르면서 자녀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자녀들에게는 늘 모범을 보이는 아버지였다. 말타기, 활쏘기뿐만 아니라 책을 가까이 하도록 가르쳤다. 특히 왜구를 막아내기 위해 병법에 대한 책들도 읽도록 했다.

이런 아버지의 정성이 헛되지 않아 자녀들도 성장하여 아버지 못지않게 용맹한 장수가 되었다. 큰아들 김용호는 활을 잘 쏘는 방답첨사였다. 아버지와 함께 왜구가 침입할 때마다 왜구를 향해 활을 쏘았다. 그 결과 정략장군 순천 절제사가 되었고, 순천에서도 쳐들어오는 왜구를 막아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둘째 아들은 승의부위가 되었고, 딸은 만호 현봉의와 결혼했다.

선조 8년(1575년), 왜구를 물리치느라 몸을 혹사한 탓에 오랫동안 병을 앓던 김성조는 눈을 감았다. 을묘왜변을 막아낸 큰 별이 진 것이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김성조는 숨을 거두기 전에도 자손과 친지를 불러 왜구에 대한 유언을 남겼다.

“왜구의 동향을 보건대 그들은 제주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 환난을 초래할 것이니 한 시도 그들이 침략을 잊지 말고 대비에 만전을 기하여야 한다. 또한 왜구가 제주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으니 언제 다시 쳐들어와 복수를 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죽거든 나의 장사는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고 조용히 평범하게 지내도록 해라. 분묘와 주변에 조경 등을 해서 타인의 눈에 띄게 해서도 안 될 것이며, 비석은 절대로 세우지 마라.”

가족과 친지들은 건공장군 김성조의 유언을 듣고 당황했다. 죽어가면서도 왜구의 침략을 걱정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게 소박하게 묘지를 조성하라는 유언은 듣는 사람의 귀를 의심하게 했다.

김성조가 죽자 제주사람들의 슬픔은 컸다. 왜구를 막아내느라 제 한 몸을 돌보지 않고 전투에 참가하였고, 오십 세도 채우지 못하고 눈을 감았으니 그 슬픔이 컸다. 김성조가 없었더라면 제주읍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제주를 구한 영웅 김성조는 그렇게 눈을 감았다.

김성조가 죽자 성대한 장례식을 준비하려던 사람들은 마지막 유언을 듣고 난감했다.

“종삼품 건공장군이 죽었는데 서민들처럼 그냥 장사를 지내라니.”

김성조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의아하게 여겼다.

“그분은 허례허식을 싫어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는 걸 싫어했으니 그 분다운 생각입니다. 참 훌륭한 어른이시지요.”

“왜구가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데 장례식을 거창하게 하지 말라는 말만 들어도 왜구를 막아내는 일에 얼마나 마음을 쓰다가 죽었는지 알 수 있지요.”

평소 김성조는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하고, 호의호식 하는 일 없이 검소하게 살았다. 그래서 건공장군다운 유언이라고 칭송했다.

제주의 상례 절차는 임종-수시-초혼-염습-조관-입관-출구-발인-운상-하관-성분-초우-귀양풀이-재우-삼우-졸곡-소상-대상-시왕맞이-담제 등의 순서로 절차가 아주 복잡하다. 그래서 상을 치루고 나면 가계도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친족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가족과 친지들은 김성조의 유언대로 고향 엄쟁이에서 가까운 하가리 연화못 남쪽에 장사를 지냈다. 김성조보다 못한 사람들도 백여 장의 만장을 앞세우고 묘지까지 상여를 운구했다. 그리고 화려하고 커다란 비석을 세워 업적을 알리려고 하는데, 김성조는 소박하게 장례식을 치루고 작은 묘지에 잠들었다.

김성조가 죽은 후, 가선대부 도총부 부총관의 증직을 받았지만 작은 비석 하나가 전부였다. 아내 김 씨는 1605년 8월 2일에 돌아가서 광평리 고사모루 동쪽에 모셨다. 그리고 2011년 12월 26일 김성조 내외의 묘는 고내오름으로 옮겨졌다. 김성조의 유품은 자손들에게 전해지다가 화재가 나서 모두 타버렸다.

을묘왜변에 물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제주성은 명종 24년(1529년)에 목사 곽흘은 동쪽으로 성을 옮겨 산지천과 가락천을 제주성 안으로 들였다. 또한 임진왜란 직전까지 목사 성윤문이 성벽을 5자 더 높이고 포루 등을 구축했다. 또한 일제가 헐어버린 제주목관아가 2007년 복원되면서 망경루 또한 새로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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