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택 칼럼](7)탐라인물고(심재집3)...제주대 탐라문화연구소(2011)
[김정택 칼럼](7)탐라인물고(심재집3)...제주대 탐라문화연구소(2011)
  • 뉴스N제주
  • 승인 2022.07.17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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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공장군 김성조에 관한 연구 경과보고
김정택 건공장군현양추진위원회 위원장
수필가
김정택 수필가
김정택 수필가

김정택(순택) 건공장군현양추진위원회 위원장(수필가)이 본지에 특별기고로 올린 '을묘왜변(1555)의 영웅들을 기리자(건공장군 김성조를 기리며)'라는 내용을 싣고 본사는 '건공장군 김성조에 관한 연구 경과보고'에 대한 자료집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고 추진위원장 이름으로 칼럼을 게재하기로 했다.

내용은 거의 자료집 그대로 싣는데 조금 부가적인 내용을 첨가할 예정이다.

한편, 추진위는 '을묘왜변의 영웅들을 찾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영웅들을 찾고 있다.

남수곽 동쪽 구릉에서 을묘왜변(1555)의 승전을 이끌었던 4인의 치마돌격대(馳馬突擊隊)! 정로위(定虜衛) 김직손(金直孫), 갑사(甲士) 김성조(金成祖), 이희준(李希俊), 보인(保人) 문시봉(文時鳳) 용사와, 왜장을 사살한 정병(正兵) 김몽근(金夢根).

이 분들을 아시거나 조상으로 두신 종친회에서는 제보 바란다며 함께 현양사업을 추진하고자 한다고 전했다. (제보 HP 010-6608-6925 ,Fax 064-712-3064 ,stkiimsj@hanmail.net)

이와 같이 지금 우리 주위에는 과거 제주를 살린 위인, 혹은 이름 없는 영웅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한 영웅들을 찾지 못하기도 하지만 만약 찾더라도 별 뾰족한 수가 없이 그냥 묻히고 마는 사례가 왕왕 있다. '건공장군 김성조'의 비만해도 전쟁터와 전혀 관계없는 다리 위에 세워놓아 관심은 커녕 오히려 퇴색되고 있다고 추진위원회에서는 언급하고 있다.

좀 더 우리 제주에 위대한 인물이 탄생했다는 것을 알리고 그 후손이라도 잘 관리할 수 있도록 행정에서도 관심을 가져주기 바라는 마음으로 연재한다. 많은 응원과 관심바랍니다.[편집자 주]


◆『탐라인물고(심재집3)』/ 제주대 탐라문화연구소(2011)

김성조(金成祖) : 김성조는 본관이 나주다. 어려서부터 용력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다. 집이 본래 가난하여 제주본영 지인(知印)에 소속되었다. 명종 10년 을묘(1555)에 왜적 80여척이 호남의 장흥 당진 등 8진을 연이어 함락하였고, 이어서 화북포를 침범하여 제주성을 3일 동안 포위했다. 목사 김수문과 판관 이선원 등이 왜적들을 힘써 막았다. 김성조가 제주와 용기로써 군대에 응모하여 후군을 맡아 몸이 가볍고 날래며 예리한 병사들을 이끌어 남수구까지 추격하여 대파 하였는데, 죽이고 포획함이 매우 많았다. 김수문 이하에게 새서포리(옥새를 찍은 諭書와 관복감 명주나 비단 2필; 전공에 대한 임금님의 상품의 하나)로 포장하고 작위를 높여주며, 김성조에게는 건공장군을 상 주었다. 그 아들 金用瑚는 당시 왜변에 아버지를 따라 왜적을 토벌한 공이 있었으므로 방답첨사에 제수되었다,

◆『濟州先賢誌』 / 제주도(1988)

김성조(金成祖) : 본관은 나주. 중종 22년(1527) 제주목 엄장리(신엄리)에서 병조참판에 오른 김윤형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강직했던 김성조는 기마와 궁술에 남다른 재질을 보이고 문장에도 뛰어나 의기남아로 주위의 촉망을 받았다 한다. 자라난 후 생원진사 출신의 교수 김양필의 자원사위가 되었다. 김성조가 전설적 인물로 용맹을 떨친 것은 명종2년(1547; 명종10년 1555의 잘못)으로 그의 나이 약관 20세(28세의 잘못)때였다. 정미년(을묘년의 잘못)인 이 해에 제주도를 넘보던 왜구들이 수천명의 집단으로 제주성에 침입, 닥치는 대로 주민을 살상하고 양곡과 재물들을 약탈하기에 이르러 민심은 걷잡을 수 없이 동요되고 말았다.

실로 전후후무한 왜구의 침입이요, 대춘사였다. 제주성은 함락직전에 이르고 목사 김수문은 왜적의 위세에 눌려 감히 출전할 엄두도 못 내고 갈팡질팡 하는 가운데 구원병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일촉즉발의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이때 20세의 열혈청년 김성조가 분연히 일어섰다. 그는 처가에 준마 1필이 있어 아무나 접근 못하는 것을 채찍을 높이 들어 호령하고 올라타니 말은 주인을 만난 듯 비호같이 내달아 불과 반나절만에 4백리 주위를 치달렸다.

이때 왜구들은 삼성혈 아래 남수곽에 집결하고 있었다. 김성조는 관군의 엄호를 받으며 준마를 휘몰아 단기로 돌진, 종횡무진으로 적을 무찌르며 닥치는 대로 수급을 베자 이에 놀란 왜구들이 크게 당황한 나머지 뿔뿔이 흩어져 잔해들을 남기고 퇴각하고 말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대승이었다. 이 전투에서 왜구가 남기고간 이수가 무려 2천을 넘었다 한다.

왜구의 침입으로 인명 재산에 막대한 손실을 주었던 ‘정미왜란’(을묘왜변의 잘못)은 김성조의 초인적인 용맹과 분전으로 격파되었고 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여 다시는 이 땅을 노리지 못하게 하는 결정적 동기가 되었다. 또 김성조의 분전은 향토수호에 대한 자주의식을 심어 조정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민심을 안정하는 활력소가 되었다.

이 전공으로 김성조는 가선대부도총부부총관이 되고 선조때¹⁰⁾에 이르러 건공장군에 증직되었으며 충훈원에 등록되었다. 김성조는 선조8년(1575) 9월 48세를 일기로 별세. 애월읍 상가리 연화지 남쪽에 묻혔다.

◆새로쓰는 제주사 / 이영권(2012) p.139~140

왜구의 공격은 제주동초등학교 앞의 높은 언덕에서 시작되었다. 이처럼 왜구가 성안을 한 눈에 내려다보며 공격해오자 당황했던 것은 제주 읍성의 군졸들이었다. 이에 제주목사 김수문(김수문)은 별동대 70명을 조직하여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불리한  조건 속에 계속 밀리면서 읍성 방어를 고집하느니, 차라리 성문을 열고 별동대로 하여금 적을 치게 하는 것이 오히려 더욱 효과적인 방책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의 작전은 적중했다. 무엇보다 김직손 김성조 이희준 문시봉 4인 돌격대의 과감한 적진돌파가 전세역전의 계기가 되었다.

결국 왜구는 배9척을 빼앗기고 수백명의 전사자를 남긴 채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제주군졸의 완벽한 승리였다.

여기서 4인 돌격대 중 문시봉의 직책이 보인(保人)이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보인은 본래 현역 군인이 아니라 현역을 돕는 예비 병력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보인이 나서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것은 일반인들도 이 전투에 적극 참여했음¹¹⁾을 말해준다.

시간이 마무리 된 후 명종은 제주목사 김수문에게 비단옷을 내리고 품계도 한 등급 높여 종2품 가의대부 품계를 내렸다. 또 돌격대 김성조에게는 비단옷과 종3품 무관품계인 건공장군을 내려주었다12⁾.

11) 김성조는 제주영(營) 지인(知印)에 불과했고 갑사(甲士)로 시취된 바 없었으나 기사(騎射)를 잘하여 돌격대를 자원했다. 실록의 갑사는 단순히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甲軍, 甲兵, 甲首, 甲卒)의 뜻으로 쓰인 것이다.
12) 김성조 장군의 수훈은 향토사 나오나, 나머지 네 분에 대한 포상기록은 찾을 수 없다. 김성조의 실기와 유물은 안타깝게도 회록(回祿; 화재)으로 유실되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서훈 발부대장이라 할 수 있는 규장각 《충훈록》도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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