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민숙 칼럼](4)서로에게 관심을 보이는 자리
[양민숙 칼럼](4)서로에게 관심을 보이는 자리
  • 뉴스N제주
  • 승인 2019.01.24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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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길, 위로하는 문학4
시인 양민숙

제주농촌의 겨울은 잎이 떨어진 앙상한 나무와 간혹 열매 몇 보이는 정겨움과 쑥쑥 자라는 농산물의 파릇함으로 조화를 이룬다.

보리와 콩과 고구마가 주 농산물이었던 제주는 겨울만 되면 농한기였다. 그러다 감귤과 마늘재배가 시작되고 양채류 도입으로 농번기 농한기 구분 없이 사계절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기에 겨울, 제주 밭은 수확기에 접어든 브로콜리. 양배추. 콜라비등의 양채류와 조금씩 올라와 밭 한가득 파릇함으로 채운 보리 순과, 한창 자라고 있는 무. 마늘 등 다채로운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길을 다녀왔다. 전형적인 농로였다. 마을길이 경작지로 이어지고, 다시 그 길이 바닷길로 이어진, 결국 바다를 만날 수 있는 길이다. 제주의 마을. 밭. 바다가 한데 어우러져 이 길을 만들고 있었다.

길로 들어가는 입구에 커다란 나무 한그루가 길지기를 하고 있었다. 항상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은 보는 사람에게 든든함을 준다. 이 나무처럼 한결같은 사람을 보면 부럽다. 누군가에게 어떻게 그리 한결같은지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것이란 답을 들었다. 매일매일 날씨에 따라, 만나는 사람에 따라, 음식에 따라,  몸 상태에 따라 수시로 기복이 심해지는 나로서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렸었다.

그렇지만 아무 욕심 없이 이 길을 걷다 보면 그 ‘정체성’이란 단어가 확 다가온다. 그리고 가만히 나를 다독인다. 발을 내딛는 길보다 더 낮은 밭, 길에 키를 맞춰 쌓은 밭담이 조근거리며 내게 말을 건넨다.

가공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가 주는 아름다움이 얼마나 위대한지 길에서 배운다. 내가 먼저 마음을 열어야 상대방도 마음을 주며 서로의 관심을 교류할 수 있음을 느낀다.

이 길에 있는 밭들은 빽빽하지 않아서 좋다. 듬성듬성 농산물이 난자리가 있고, 그 자리에 흙이 보여 푸근함을 주었다. 이 길에서 만난 딱 한 사람인 할머니 한 분이 삽으로 풀 마늘용 마늘을 캐고 계셨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농촌의 여유로움과 정겨움을 더해주는 풍경이다.

길 중간 갈림길이 두 번 나온다. 이 길을 걷는 사람이면 이 곳에서 한 번 쯤은 길을 잃었으면 좋겠다. 어느 길로 가야 되는지 선택하는 행위도 기쁨일 테고, 사실 어느 길로 가도 상관은 없다. 분명한 건 조금 돌아 나오더라도 목적지는 갈 수 있으니까. 

한참을 걷다 보면 후미진 구석에 남몰래 핀 수선화 한 송이도 볼 수 있다. 아니, 구석구석 더듬거리며 시선을 주어야만 찾을 수 있다. 그만큼 천천히 걸어야만 한다. 겨울바람에 묻어나는 수선화의 향긋함은 덤이다. 

아무도 모르듯이
-강영란

꽃 한 송이 더 피었다
아무도 모른다

꽃 한 송이 졌다
아무도 모른다

내가 당신에게 갔다 와도
당신은 모르듯이

강영란 시인은 내가 좋아하는 몇 안 되는 시인 중의 한 명이다. 사실 그녀를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으나, 그녀의 시를 보고 내가 너무 반해버렸다. 이 바다로 이어지는 마을길에서 갑자기 그녀가 떠오른 것은 이 「아무도 모르듯이」 詩 때문이다.

이 시가 아름다운 이유는 절절하게 아파서다. 그러기에 혼자 서 있는 나무, 혼자 피어 있는 꽃, 홀로 일하시는 할머니가 모두 지독한 외로움으로 아픔으로 다가온다.

그러니 이 길을 걷게 된다면, 따듯한 시선으로 더 낮고 더 구석진 곳까지 바라보며 그 시선까지도 겨울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자리하기를 바란다.

■찾아가는 길 : 한경면 용수리 용수5길 - 지금은 폐교가 된 용수초등학교 맞은편 길을 따라 100m 정도 가면, 오른쪽으로 골목길이 하나 나오는데 그 길을 따라 가면 바다까지 이어져 있다. (약 1Km, 느린 걸음으로 40분이면 바다까지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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