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복 칼럼](4)양축농가의 씨앗이 생기다
[양치복 칼럼](4)양축농가의 씨앗이 생기다
  • 뉴스N제주
  • 승인 2021.12.06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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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치복 자서전]나는 오늘도 축산왕을 꿈꾼다
(사)한국말산업중앙회 제주특별자치도 지부장
선양목장 양치복 회장 파란만장 인생 스토리

뉴스N제주는 ‘경제인 칼럼' 세 번째 순서로 양치복 회장의 인생 스토리를 엮은 '나는 오늘도 축산왕을 꿈꾼다'의 자서전 스토리를 게재하고 있다.

지금 앞이 캄캄하고 성공의 문턱에서 주저앉는 젊은 청춘들에게 좋은 지침서가 되리라 생각되며, 매주 목요일마다 게재되는 인생스토리를 독자여러분의 많은 성원과 필독이 있기를 기원합니다.[편집자 주]

◇양축농가의 씨앗이 생기다

양치복 축산왕
양치복 축산왕

어느 날 동네 이장 일을 맡고 계시던 고모부님이 신촌 채선생 네 친척집에서 소 네 마리가 어디로 도망쳐 찾지 못하고 있는데 이 소를 찾아주면 '맴쇠'를 준다는 소식을 알려주었습니다.

멤쇠는 '주인 집 암소를 받아서 키우다가 그 소가 새끼를 낳으면 그 새끼의 반을 가질 수 있는 양축 민가의 규칙이지요.

이 말을 들은 나는 선뜻 소떼를 찾아 나섰습니다. 소는 자기가 다니던 단골 풀밭을 찾아간다는 소문을 듣고 와흘리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20km쯤 되는 지형을 목표로 삼고 우리 동네 동쪽 새미오름부터 남쪽의 까꾸리오름 다시 그 서남방에 있는 바농오름 다시 서쪽 지그리오름과 절물까지 찾을 곳을 그물망처럼 엮어 소가족 찾기에 나선지 20일 만에 까끄리오름 기슭에서 4마리가 한가로이 풀을 뜯는 현장을 찾게 되고 이를 신촌리 임자에게 알려줬더니 그 공로로 저는 '맴쇠' 를 받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비록 '맴쇠' 를 가졌지만 이만한 재산을 가져본 일이 없기에 나는 진정 이 소를 빨리 임신시켜 송아지를 낳게 하고 이 송아지를 다시 키워 어른소의 주인이 된다면 나는 소를 가진 사람이 된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지요.

마침 우리 집에서는 어머니가 김매고 품삯 대신 받은 암탉 한 마리를 키우고 있었는데 나는 내가 먹을 계란도 어머니 몰래 암소에게 먹이면서 키웠고 이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이 송아지에게도 내 몫이 계란을 먹이며 빨리 크기를 바라면서 키웠는데 이 암소가 커서 송아지를 낳았는데 이 송아지가 북군에서 최고의 멋진 소가 되어 이놈을 팔았는데 소 값의 절반인 내 몫을 받아도 이 돈이면 암소를 다시 살 수 있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이런 일은 어쩌면 사람들은 그저 그럴 수 있을 거라고 간단히 넘겨버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적어도 이것은 저의 일생을 좌우할 양축 농가의 꿈을 시작하는 첫 발이 될 줄은 저 자신도 그 때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어느 목사님 설교에서 얼핏 들었는데 '시작은 미미하나 끝은 장대하리라' 라고 말씀한 것 같은데 저는 그 때도 이 말의 뜻이 오늘 나의 축산 농가 건설을 예언해주신 것이었다고 말한다면 하느님이 화를 내실지 모르겠습니다.

소가 생긴 이후부터 나는 언제나 소와 함께 하는 일상이 되었습니다. 제가 열네 살 때의 일입니다. 마침 신촌에 계신 맴소의 주인 아주머니께서 밭을 갈아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어머니는 기뻐하시며 쟁기(제줏말 : 잠대)를 챙기고 직접 지고(나도 지고가고 싶지만 체구가 작아서 쟁기를 질 수가 없었음)나는 소를 몰고 조천중학교 근처에 있는 아주머니 밭에 가서 밭을 갈려고 하는 참에 밭주인 아주머니가 오더니 내가 밭을 간다고 하는 말을 듣고는 깜짝 놀라면서 '쟁기도 버청(힘겨워서) 못질 놈이 남의 밭농사 망칠 일 있느냐' 면서 화를 내고 그냥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래도 밭가는 쟁기질만큼은 몸은 작아도 잘해서 농사 망치지 않을 터이니 안심하시도록 했지만 믿지를 않고 훌쩍 가버리더니 한식경쯤에 다시 오면서 점심 참을 가져왔습니다.

밥은 잡곡밥인데 식은 밥이고 국도 싸느랗게 식은 된장국 뿐이었지요.

원래 밭가는 일은 농사의 가장 중심되는 행사라 밭가는 일꾼에겐 쌀밥에 돼지고기국 그리고 생선이나 갈치를 구워 올리고 텁텁한 막걸리에 김치찌개라도 갖추고 잘 대접하는 게 쟁기질하는 어른이 받는 보상이고 밭가는 품상도 김매는 일꾼들이 3 ·4배는 주어야 하는 게 상례로 돼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애기가 밭을 갈아 올해 농사는 다 망했다'고 동네방네에 방방 떠들고 다니는 바람에 애기가 밭가는 이야기는 순식간에 온 마을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나대로 황당하고 서러웠지만 꾹 참고 밭을 갈고 콩씨를 뿌린 후 집에 돌아와 온 가족이 끌어안고 서럽게 울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우는 순간에도 나는 더욱 밭을 잘 가는 농부가 되고 소나 말이라도 더욱 잘 키워서 큰 부자가 되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굳게 하였습니다.

어떻든 내가 처음 쟁기질해서 콩씨를 뿌린 밭에서는 가을 추수때도 풍작을 이루었기 때문에 밭주인 아주머니가 겨울에 찾아와서 ‘애기가 밭을 간다' 며 화를 냈던 일을 사과한다고 해서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60년 전 그 처음 밭갈이를 하러 갔다가 당한 수모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울컥해집니다.

하기는 그때도 맴쇠를 받게 되면 주인집 밭을 봄·가을 철따라 4번을 갈아주는 법이 있어서 저는 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그 일을 참고 묵묵히 밭가는 일에 전념해서 훌륭한 농사꾼이 된 것은 밭주인 아주머니가 화를 내면서 무시했던 작은 사건이 오히려 나를 더욱 능숙한 농사꾼 훌륭한 양축농가의 길을 걷게 해준 동기가 되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두막집도 마련하고

한 세상 살아보면 어찌 좋은 일만 생기고 궂은일은 없는가요. 좋고 궂은 일이 번갈아 생기며 웃고 울면서 살아가는 게 한 세상살이가 아닐까.

가난한 사람이 평생 가난하고 부자가 언제나 부자라고 한다면 그건 인생 역정의 형평성에도 어긋나고 하느님의 뜻도 아닐 것이다. 하느님은 늘 공평하시니 고생한 분에게도 언젠가는 행복을 주시고 부자의 욕심에 불호령으로 심판하시기에 공평한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살맛이 날만큼 재미있고 축복을 주고 축복을 받을 권리가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리라.

그러고 보니 세상은 도둑놈도 있고 남을 돕는 의인도 있고 절망의 늪으로 밀어 넣는 악당도 있지만 그를 구해주는 덕스러운 분도 많으니 얼마나 공평한 것인가.

내가 열여섯 살 때의 일입니다. 정부에서 6·25전쟁이 끝나자 헐벗은 산천을 복구하면서 와흘리 시골구석에도 재건 복구주택을 짓는 혜택이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깜깜 무소식이었는데 강두식 마을이장님이 어린 나에게 복구주택 신청 자격을 주면서 읍사무소에 등록시켜 주었습니다.

읍사무소에 호출을 받고 갔더니 어린 아이에게 복구주택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라면서 거절당했습니다.

강이장님은 어린아이의 어머니와 삼남매가 있는 가정이니 신청인이 나이가 어리다고 복구주택을 허가하는 것이 특혜일 수가 없다고 주장해서 기어이 집을 짓게 되었습니다.

그 때가 김영관 제주도지사 때의 일이라고 하는데 집짓는 재료 일체가 전부 주어지는 게 아니라 주택건설비 약간씩을 보조해 주었던 것이 아닐까요.

우리 가족은 총동원이 되어 6~8km쯤 떨어진 교래 근처 솔밭 숲에서 산림 담당 몰래 서까래감이며 보, 곱은도리, 기둥 등 100여 개가 넘는 건축 자재를 현장에서 찍고 다듬고 짊어져 큰 길로 나른 후에 이장님댁 마차를 빌려 마을로 가져와 우리 집을 먼저 짓게 되었습니다.

와흘리 우리집 근처 전경
우리 마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주는 교회당
와흘리 우리집 근처 전경
와흘리 우리집 근처 전경

강 이장님인들 복구주택을 먼저 짓지 않고 어찌 우리에게 먼저 양보했는지 나는 지금도 그 분의 바다같이 너른 가슴 그 큰 마음쓰심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디 그 뿐이랴. 어머니와 누님은 교래리 숲에서 삭정이를 등짐으로 지고 큰 길까지 날라서 그걸 다시 이장님 마차로 싣고 마을에 와서 그걸 제주 성내 동문다리 아래 화목 장사꾼에게 팔면서 삶을 꾸려나갔지요.

고달픈 시기를 넘으며 내가 젊은 청년으로 커가는 과정에서 이처럼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으니 강 이장님이야말로 오늘 우리 집의 성공의 밑돌을 놓아주신 고마우신 어른이 아닌가요.

우리 집을 후다닥 짓고 드러누워 팔베개를 하고 천정을 보니 저번에 살던 불타버린 집에는 없던 천정이 깔려져 있어서 아늑함이 더해졌고 방 창문과 출입문도 제법 격을 갖추어져 있으니 신기할 따름이었지요.

먼저 방과 부엌이 격리되어 있어서 허덩천했던 집안이 아늑하게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생각할수록 새 집이 좋고 이 집을 짓도록 재건 건축용 경비를 마을에 보내서 동네를 재건하도록 해준 나랏님에게 고마움도 느꼈지만 그보다 먼저 그런 혜택을 동네에서 먼저 받게 되었다는 것에 대한 감사와 기쁨을 그냥 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얼풋 들어서 강이장님댁 집도 하루빨리 지어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생각이 미치자 우리 가족 모두는 집지을 나무를 마련할 생각으로 교래리 영림소 근처 숲 속 들어가 건축자재를 베어내어 찍고 다듬어 큰길가로 나르는 작업을 열흘 가까이 계속 했습니다.

그런데 영림서 솔밭에서 그렇게 몰래 나무를 베고 다듬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근처 고갯길에서 자동차 불빛이 번쩍거리자 거적을 덮고 자던 우리 집 식구들은 깜짝 놀라 허겁지겁 베어낸 나무들을 솔가지로 덮는 등 해서 가까스로 근처 덤불 속으로 흩어져 숨었습니다.

그런데 덤불 속에서 거적을 덮고 숨었던 제가 깜빡 잠이 들어서 온 가족이 나를 찾느라고 난리굿을 치는 바람에 잠이 깨었습니다. 가족들은 제가 행방불명이 됐다고 솔밭이 떠나갈듯 소리치며 저를 찾아 헤매었던 것입니다.

아마 너무 여러 날을 숲 속에서 가슴 졸이며 작업을 한 것 때문에 피곤해서 깜빡 잠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와 큰누나(순여)가 저를 부둥켜안고 얼마나 울었던지요.

그래도 그날 저녁 산림감독차 나왔던 직원들에게 들키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요.

만일 그들이 우릴 찾아냈다면 우리는 산림 도벌죄로 경찰에 끌려갈 뿐만 아니라 강이장님댁 집짓는 일도 말짱 허사가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황급히 밤을 도와 다듬은 집 재목을 마차에 싣고 동네로 와서 강이장님댁 집을 열심히 짓기 시작했습니다.

지붕의 뼈대가 될 대들보는 큰 집이면 2개가 필요한데 이것 두 개는 마차 한 대 분량입니다. 기둥감은 6개가 한 마차 분량이고 서릿감도 수십 개가 있어야지요.

우리 집 식구는 솔밭에서 십여 일을 살며 집 지을 재료를 깎고 다듬는 등 푸닥거리를 한 덕분에 강이장님 3칸 주택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 집을 지을 때 상량식을 하고 축벽을 바르고 흙질을 해서 지붕에 올리고 문짝을 달고 준공했을 때의 기쁨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고 천만 냥 빚을 갚은 것만큼 홀가분하고 기쁜 마음뿐이었지요.

강이장댁의 큰아드님 익범씨나 익상씨 등 삼형제와 두 따님 모두 성공해서 큰아들은 박사가 되고 작은아들은 조천청년단체장 등을 맡아 사회에 큰 공헌을 하는 것을 보면 역시 선행을 해야 후손이 잘되고 집안에 경사스런 축복이 내리는 것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축산에서 희망을 보다

제가 맴쇠를 가져와 사육한 후부터 저는 소가 하루에 얼마나 크는지 그 무게는 하루에 몇 근이나 불어나는지가 몹시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밤중에 깨어나면 문 밖에 메어둔 소가 자는지 먹는지 궁금증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다보니 어느새 새벽에 깨어나는 것이 버릇이 되어버렸지요. 이 버릇은 60년 동안 저의 일상습관이 되었습니다.

봄이 되어 초원으로 소를 방목시켜 놓고서도 마음이 안놓여 새벽에 눈을 뜨면 방목된 초원으로 곧장 달려가 소와 더불어 저의 미래를 말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소는 영리합니다. 저의 발자욱 소리만 들어도 고개를 돌리거나 누웠다가도 일어나 서너발 자국을 옮기며 저에게로 옵니다. 주인을 알아보는 소와 저는 시간가는 줄도 모르게 초원에서 하루해를 넘기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면 소의 하복부나 사지 틈에 붙어있는 진드기 등 해충도 떼어주고 어떤 때는 냇가로 몰고가 목욕도 시켜줍니다.

어떤 때는 송아지가 지만큼 떨어져 나를 보고도 꿈쩍 않는 것을 볼 때는 직감으로 송이지기 감기를 앓거나 설사 등 다른 병이 있는 것을 짐작하고 제가 수의사는 아니지만 설사약이나 「파이루」 주사약을 준비하고 갔다가 곧장 처치하면 병이 나아서 팔짝 뛰며 노는 것을 보면서 가축도 제때 살피고 보살펴야 빨리 건강하게 자란다는 것을 체득할 수도 있었고 또 앓던 소가 원기를 되찾아 회복되는 것을 보는 기쁨은 이루 다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소와의 친구 같은 동거가 저를 점점 양축농가의 청년으로 만들어갔고 끝내는 우리집 뒷마당 쪽에 외양간을 지었는데 너무 크게 지어져서 이 허덩청한 소막에 한 열 마리 소가 크는 날을 간절히 바랬지요.

양축농가의 꿈은 제가 청년이 되어갈수록 커지면서 양축소도 20여 마리가 되자 다시 40여 마리가 들어갈 축사를 세우기도 하였는데 아무튼 소의 움직임을 첫 눈에 파악해서 건강 유무를 알아내는 기술은 소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 시간이 많으면 소는 건강해집니다.

좋은 소는 허약한 소의 두 배 값을 받고 쉽게 팔아 큰 이득도 생기게 되지만 한 마리가 병들어 죽으면 그만큼 큰 손해를 보게 되는 축재의 방법이 내 하기 나름이라는 것을 터득하게 되자 저는 이제 생활 자체가 자신만만해지면서 좀더 축산업을 확장할 계획을 마음 속으로 다짐하게 되었습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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