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일 2024-03-29 19:09 (금)
>
[양치복 칼럼](3)제1편 가난의 굴레
[양치복 칼럼](3)제1편 가난의 굴레
  • 뉴스N제주
  • 승인 2021.11.07 01: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양치복 자서전]나는 오늘도 축산왕을 꿈꾼다
(사)한국말산업중앙회 제주특별자치도 지부장
선양목장 양치복 회장 파란만장 인생 스토리
양치복 씨
양치복 씨

뉴스N제주는 ‘경제인 칼럼' 세 번째 순서로 양치복 회장의 인생 스토리를 엮은 '나는 오늘도 축산왕을 꿈꾼다'의 자서전 스토리를 게재하고 있다.

지금 앞이 캄캄하고 성공의 문턱에서 주저앉는 젊은 청춘들에게 좋은 지침서가 되리라 생각되며, 매주 목요일마다 게재되는 인생스토리를 독자여러분의 많은 성원과 필독이 있기를 기원합니다.[편집자 주]

1. 유년시절의 단상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입니다. 초저녁부터 밤새껏 배가아파서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다음날 조반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책보를 허리에 메고 학교로 갔습니다.

내가 다니는 조천면 신촌국민학교(현재 조천읍 신촌초등학교) 우리 학급에는 벌써 30여명이 와있었는데 담임선생님(김영자)은 어느새 칠판에 큼직하게 ‘떴다 비행기, 우리 비행기' 라고 쓰고서는 우리 보고 곱게 다섯 번씩 쓰라고 말씀했습니다.

나도 정성껏 써보고 싶었지만 아팠던 배가 점점 아파와서 견딜 수가 없었지요. 깜짝 놀란 선생님은 나에게 다가오시더니 배를 쓸어보다가 나를 들쳐 업고 운동장을 빙빙 돌아 나무 아래 앉혀놓고 병원도 없고 약도 없으니 꾹 참고 물을 먹으면서 정신을 차리라고 하시더니 다시 직원실까지 업고 가서 두어 컵이나 뜨거운 물을 먹여주었습니다.

아픈 증세가 가라앉지 않으니까 다시 선생님은 저를 업고 운동장을 빙빙 돌면서 “남자는 용감해야 되니까 조금 아픈 것쯤은 꾹 참고 넘길 줄 알아야 한다“고 타일러주셨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어갈 때쯤 배 아픈 증상이 조금 누그러지자 저는 다시 학급에 가서 공부를 하다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4~5년 후에야 안 일이지만 그 때 배가 아팠던 것은 회충이 몸속에 가득해서 요동을 친 것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당시는 6·25 전쟁이 일어나서 온 나라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터라 너나 할 것 없이 밥 세 끼니를 먹기가 힘들었고 겨울이라도 여름철 옷을 두세 벌씩 겹쳐 입고 학교에서 주는 옥수수 가루나 밀쭈시(밀겨) 가루를 먹으면서 살던 시대였지요.

한번 입은 옷을 제때에 빨지 못해 몸에는 이가 바글거리고 저 또한 어른 옷 밖에 없어서 소매를 서너 번 걷어 올려 한두 달씩 입었으니 국민학교 1학년 때의 저의 몰골이 어떠했는지는 지금 상상해보아도 거지 차림의 '고아'가 분명했을 것입니다.

그 거러지 같은 나를 우리 선생님(김영자)은 아랑곳하지 않고 달래고 격려해주시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그처럼 어린이를 따스하게 감싸고 가르쳐주신 선생님이 틀림없이 천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마는 지금 그 분의 소식은 알 길이 없습니다.

그 선생님이 너무도 좋아서 나는 열심히 학교를 다니고 싶었지만 집이 너무 가난해서 기성회비를 낼 수가 없게 되자 2학년 중간까지 다니다가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잔심부름을 하면서 가난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때쯤 아버지(양남호)도 아파서 자리에 누워계셨기 때문에 우리 집은 더욱 가난해졌지요.


그간 우리 집에는 여러가지 변화가 있었습니다. 원래 우리는 조천면 와흘리(원래 지명은 논울)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4·3사건이 터져서 동네 많은 사람들이 해안가에 있는 마을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너무 어렸을 때 일이라 저는 잘 모르지만 와흘리에서 신촌까지는 한 시간 정도를 부지런히 걸어야 하는 먼 피난길인데도 우리 집 부모님과 누나(양순여) 그리고 나 네 식구는 다행스레 모두 살아서 신촌 동가름 안면이 있는 집 모커리 집 방 한 칸을 빌려 5년쯤 사는 동안 누이동생 순옥이도 태어났고 저도 학교에 다시 입학하게 되었는데 얼마 안되어 아버님이 병환으로 돌아가시자 저는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와흘리도 돌아와 이곳 옛 집터에 원두막 같은 단칸방을 짓고 네 식구가 어려운 삶을 이어갔습니다.

2. 고향이 좋아

집이라고 해봐야 작은 나무가지나 대나무 등으로 사방을 얽어매고 그 틈새에 진흙을 이겨 넣고 비바람을 막을 공간을 메꿨고 방바닥에는 짚을 두텁게 깔아 추위를 피해 4식구가 방 하나에서 살림을 하는데 방 가운데에는 화덕을 만들어 죽을 끓여 먹으며 방안 찬기를 없애는 구차한 삶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어머니는 저에게 기어히 학교를 다니라고 닥달해주었기 때문에 저는 학교까지 4km가 넘는 길을 걸어서 통학했는데 2년간 놀았기 때문에 저의 동창들은 모두 저보다 2년이 높은 상급반이 되어서 기가 죽기도 했습니다.

2학년 때에는 채모 선생님이 우리를 맡았는데 어찌나 독한지 매 안 맞은 어린이가 거의 없을 정도였지만 옛날 김영자 선생님처럼 마음 따뜻한 천사 같은 분은 그 후에도 저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채선생님은 기성회비를 내지 않은 학생은 수업 전에 꼭 불러내서 교실 뒷쪽에 꿇어있도록 하고 양손까지 들라고 들볶아대니 학교가 왠지 싫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학생들 뒤에서 벌을 받으면서도 선생님이 가르치는 구구단 외우기나 글 읽기는 제가 제일 빨리 외우고 계산해 맞추었는데 이것은 동급생보다 2년 연상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3학년 때에 이웃집 친구와 싸웠던 일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때는 땔감도 없어서 들에 나가 억새나 크게 자란 날 고사리도 베어다가 말리면서 밥을 지어 먹기도 하고 또 성냥이 귀한 때라 한번 불이 꺼지면 이웃에서 불씨를 얻어 더 쓰기도 했습니다.

우리 동네도 사정은 비슷해서 불을 꺼지지 않게 하려고 매우 조심했는데 숯 같은 것이 귀하니까 들녘에서 억새꽃을 많이 꺾어 말린 후 이것을 다시 어린이 팔뚝만 하게 돌돌 말아서 한발쯤 길이의 억새꽃 막대기를 만들고 끄트머리에 불을 붙이면 이것이 조금씩 타들어가면서 두세 시간 쯤은 불씨를 살릴 수 있었지요.

어른들은 겨울철 농한기 때도 이런 억새 불살게를 30개쯤 만들어두고 성냥 대신 쓰곤 했는데 우리도 어른들을 도우려고 들로 나가서 큰 고사리나 억새꽃을 꺾어다 말렸습니다.

어느 날 나는 동생 순옥이를 데리고 이웃집 친구와 들로 나가 억새밭 속으로 들어갔는데 ‘푸드덩' 하고 알을 품었던 까투리가 바로 우리들 앞에서 날아갔습니다.

저는 본능적으로 꿩이 알을 품었던 자리를 덮쳤고 함께 갔던 그 친구는 도망친 꿩을 잡으려고 달려갔습니다.

그 까투리는 자기 알을 지키려고 내가 엎드린 근처를 푸드덕거리며 멀리 가지 않으니까 친구는 그 꿩을 잡으려고 쫓아다녔지만 허사였지요.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꿩을 잡지는 못했지만 자기가 꿩을 먼저 보았으니 내가 먼저 덮쳐서 주운 10여 개의꿩알자기 것이라고 우겨대니까 서로 코피를 흘리며 싸웠지만 나는 꿩알을 나누어주지 않았습니다.

저녁때 주워온 꿩알을 어머니에게 자랑하며 친구와 싸운 얘기를 했더니 어머니는 “이웃집에 자꾸 불 빌리러 가기도 하고 그 친구와도 사이좋게 지내는데 꿩알을 반반씩 나누어주는 게 좋겠다” 면서 저를 달래는 바람에 윗집 친구에게 삶은 꿩 달걀을 절반 나누어 갔다주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런데 한두 가지 좋은 것은 두 살 더 먹은 덕에 우리 학년에서나 한 학년 위의 상급생과도 싸우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 반 아이들은 나를 좋아했고 대장처럼 모셔주기도 했고5학년 때는 급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초등학교를 졸업하기는 했지만 집안이 가난해서 중학교를 갈 형편이 못되었기 때문에 나는 와흘리 고향에서 그럭저럭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내 집에 불이 나고 말았습니다. 조금 추운 날이어서 원두막 같은 집 가운데 있는 화덕에 불씨를 살려놓고 잠든 새에 이게 옆에 요 대신 깔고 자는 지푸라기에 불이 옮겨 붙어 그나마 몇개 있던 살림 가재도구가 몽땅 타버린 것입니다.

온 가족이 실의에 빠져 망막한 세상을 원망하던 참인데 이게 왠 일인가요? 우리 집 형편이 너무 어려운 것을 알고 동네 분들이 모두 모아들어 2칸짜리 번듯한 집을 순식간에 지어주었습니다. 불타버린 집보다는 두 배가 크고 방과 부엌이 따로 구분되는 새 집을 보고 우리는 절망 속에서 힘과 용기를 얻어 열심히살아야 되겠다고 결심했지요.

어머니는 새벽만 되면 일어나서 2km쯤 떨어진 아랫마을 동수동에 가서 남의 밭 김매는 일을 했지요. 김매는 일감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게 아니지요. 어머니는 손놀림이 빠르고 작물을 다치지 않고 잡초만 쏙쏙 뽑아내는 기술이 능숙해서 '상꾼' 으로 인정받아 농삿일은 쉴 새가 없이 이어졌고 그 덕에 우리 집은 이제밥 걱정은 안해도 될만큼은 됐지요. 한 가지 서운한 것은 제가 동리에서 빈둥거리며 놀고 있어도 학교 가라고 격려를 해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하기는 제 살기가 바쁜 고난의 시기인데 남의 일 걱정할 계를이 어디 있을 수 있나요. 조금 건방진 생각이겠지요. 그래도 쥐구멍에도 볕들날 있다는 말이 있지요.

36순여 누나가 자기도 돈을 벌어야겠다며 신촌에 사는 친구와 함께 부산으로 나가더니 방직공장에 취직이 되어 죽기살기로 돈을 모으더니 2년쯤 후에 돌아왔는데 덕분에 고무신과 운동화도 난생 처음 신어보고 런닝셔츠도 선물로 가져와서 추운 겨울에도 그것만 입고 동네를 누비고 다녔는데 감기 한 번 안 걸리고 지냈지요. 그렇게 멋진 내복과 운동화는 처음 신어보았는데 동네에는 초신(짚신)이나 일본 시대에 신었던 게다(나무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지요.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