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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김성조 장군은 누구인가?
[특별기고]김성조 장군은 누구인가?
  • 현달환 기자
  • 승인 2021.10.21 06: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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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공장군 김성조에 관한 연구 경과보고
김정택 건공장군현양추진위원회 위원장
수필가
제주문인협회 회원인 홍창국, 김정택, 현글 작가 세 명이 한국에이즈퇴치연맹제주특별자치도지회(회장 김순택)와 뉴스N제주(대표 현달환)가 공동으로 주최.주관한 ‘2020 제1회 청소년 글짓기 공모전’ 심사를 진행했다
김정택

김성조(金成祖 1527~1575)는 누구인가? 이번 호에는 그가 살던 마을사와 족보, 가승, 가전을 살펴보기로 하자.

김성조는 제주 을묘왜변(1955) 때 왜적 1천여명을 남수곽 동쪽 구릉에서 격파한 자원 치마(馳馬)돌격대의 한 분으로, 건공장군을 수직한 西엄쟁이(신엄 남ᄄᆞ르) 출신이다.

명종실록과 탐라지(耽羅志)에 사적이 상견하다. 나주김씨 19세(世)로 입도 6세이니 입도조 강화진좌령낭장 김인충의 5세손이다. 진용교위 김윤형(金允亨 1491~1574)의 2자 중 장남이다.

김성조의 선조는 고려 유신(遺臣; 강화진 좌령낭장) 김인충이 1403년 이후 화북포로 낙향(入島)하여 고려와 인연이 있었던 엄쟁이 서쪽 신엄리 끝 남ᄄᆞ르에 은신하면서 이 마을을 설촌하였다. 엄쟁이(엄장포, 엄장면, 엄장리)는 신엄 중엄 구엄 용흥의 포괄적 지명이다.

이 가계(家系)는 김성조까지 신엄에서 180여년을 살았고, 김성조의 손 김위남의 둘째(汝砥 후손)와 2대를 구좌 쪽에서 옮겨 살다가 25세손(김보온)부터 다시 신엄으로 돌아와 살기 시작했다(신엄종친회 가승).

김성조의 선대는 나주김씨 14세손인 김인충(金仁忠, 입도조) 강화진 좌령낭장이며, 김계전(金季全) 천호, 김여수(金麗水) 어모장군충무위부사직, 김지손(金智孫) 어모장군충무위부사직, 김윤형(金允亨) 진용교위의 5대 독자로 이어졌고, 고(考) 김윤형이 비로소 성조 성지의 형제를 두었다. 김성조의 자는 김용호, 김용련 형제이다. 김성조의 아우는 병진왜변(1956)을 물리친 어모장군 김성지(金成祉)이며, 그의 자는 김경기(金景麒)이고, 그 후손은 대정에서 살았다.

장남 김용호(1551~1602)는 순천 방답첨사(증 정략장군 절제사)를 행임하였으며 손 김위남(金衛南) 봉직랑수례빈시첨정은 가시나물로 이거하였고, 차남 김용련은 김수남(金守南) 승사랑제용감봉사, 김두남(金斗南) 장사랑, 김진남(金珍南) 만호을 두어 애월읍 일대에 석무(碩茂)하였고, 김경기는 김균남(金鈞南) 현신교위를 낳아 분가하면서 각각 계파(系派)의 중시조가 되었다. 김성조의 손자 항렬 남(南)은 남ᄄᆞ르에서 살았음을 말해준다.

김성조의 어린 시절은 이 지역에서 ᄆᆞᆯ테우리로 살았지만 어릴 때부터 천품이 총명하고 강직한 기개가 있어 사람들이 후에 큰 그릇이 될 것이라 점지했다. 학문에 전념하고 문일지십(聞一知十)하여 문장이 뛰어났고 병학을 익혀 기마와 검술에 능하니 문무겸전의 의기남아로 장성한다.

“병정놀이 ᄒᆞ단 아으 크민 건공장군 뒌다.”는 속담도 어릴 때부터 장래성이 있는 징후를 감지하게 된다는 비유이다.

김성조는 19살(1546년, 입도169년)에 영평하동 통훈대부제주교수관 김양필(金良弼)의 딸 경주김씨(1526~1605)와 혼인하여 신엄을 떠나 두 아들을 둘 때까지 약 6년 처가에 살다가 1552년(1527+19+3+3) 신엄에 돌아온다.

일설에는 데릴사위로 삼았다 하나 김성조가 5대조가 독자로 이어져 데릴사위로 갈 이유는 없었다. 다만, 장인(김양필)이 “신엄에만 살다가는 ‘어(ᄇᆞ)제기’ 밖에 안 되니 손자를 봉글 때까지는 내 훈교를 받으라.”고 한 것으로 한시적 서류부가(婿留婦家)의 형태였다.

김성조가 장가들어서 장인댁에 있을 동안 움추려 지내던 웅마가 야성을 발동하여 활기 찬 울음을 터뜨리며 앞발로 땅을 찧고 콧소리를 내는 등 억샌 기질을 드러냈다.

기세가 등등하여 거칠 것이 없어 아무도 어거하질 못하였다. 김성조가 올라타 성읍까지 왕복 400리를 달려오는 동안 온전히 순화(馴化)시켰으므로 동네 사람들이 김성조와 말(馬)을 칭송하였다. “ᄆᆞ쉬도 부려봐사 안다.”고 김성조는 이 말과 호흡이 딱 맞았다. 실제 김성조 28살에 을미왜변(1955)이 일어나자 이 말을 타고 치마(馳馬) 돌격대를 자원하여 왜군을 물리쳐 건공장군을 수직하자 온 섬 안에 소문이 나 ‘장수 나거니 용매 나거니’, ‘장쉬 나자 용매 난다.’ 또는 ‘장군 나니 용마 났네(將軍出 龍馬出)’ 등의 속담이 생겼다고 한다.

김성조 26살 때 남치근(南致勤) 목사가 도민들에게 군역의무를 강화하자 김성조는 무과시험을 앞두고 경험을 쌓겠다며 군역에 지원하였다. 남 목사는 그에게 교관을 시켰다. 1555년 김수문 목사는 1월에 제주목사로 발령이 났고 3월에 부임했다.

부임 직후 조정에 보내는 보고문 관계로 임금의 뜻을 거스르게 하였다고 제주목사인(濟州牧使印)을 판관인(判官印)으로 강등하였다. 이때 김수문 목사는 전임 지인을 인책해임하고 군역에 있던 김성조를 지인(知印)으로 발탁하였다.

김성조 28살에 을묘왜변(1555년 6월 25~27일)이 일어나자 김수문은 고립무원에 빠진 김수문 목사에게 돌파계획을 제시하였고 치마(馳馬) 돌격대를 자원하여 전승을 거두었다.

다수의 적을 이기려면 수성(守城)으로 이길 수 없고 지쳐있는 적을 먼저 소수의 정예로 성동격서(聲東擊西) 병법으로 쳐야함을 주장한 것이다. 패퇴한 적은 이듬해 병진년(1556)에 다시 쳐들어오자 아우 김성지와 유배중인 이희손(前 광주목사)과 더불어 전승했다.

명종임금은 승전의 공로를 치하하여 이 해에 바로 포상하였는데 김수문의 품계를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올리고 김성조에 건공장군과 직지(職贄)로 가선대부 도총부부총관을 내렸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희손을 해배(解配)하고 김성지에 어모장군을 내린다.

그해 말에 김수문이 목관아에 세운 망경루(望京樓)는 명종의 배려에 감사하고 어의(御意)에 보답하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김성조 장군은 1575년 별세했다. 장남 김용호 24살, 손자 김위남 5살 때였다. 원좌는 연화못 남쪽(상가리 1536)에 있었으나 2012년 신작로 공사를 앞두고 고내봉 입도조성역(고내리 산16-2)으로 이묘(2011.12.26)하였다.

김성조 장군의 장손 입도8세손(나주김씨 21세)은 김위남(1571~1637) 19살 때 영평동 진주강씨 훈련주부 언준(姜彦俊)의 장녀와, 차손 김수남은 강언준의 차녀와 혼인한다.

김위남 34살(1605) 때 옛집에 불(回祿 1605)이 나서 김장군의 교지, 첩자, 구군복, 서책 등 집채와 가구를 안타깝게 모두 소실하고 말아 가시나물(영평상동 사송길 93-12)로 옮겨 정착하게 된다. 이때 심은 조록나무(제주도기념물 제21호)가 수령 420년이 된다.

김성조 장군은 어떻게 살았을까? 김성조의 가계는 신엄에서 신분(강화진좌령낭장)을 감추고 반농반어로 시골에 묻혀 180여년을 사는 동안 “양반도 어(ᄇᆞ)제기 모ᄉᆞᆯ에 왕 살민 어(ᄇᆞ)제기 된다.”는 속담이 생겨났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김성조 장군은 어린 시절 ᄆᆞᆯ테우리로 살아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선조 이래 온갖 고초를 겪으며 귀천을 체감하면서 살았던 경험들이 “둥그린 아은 쓸 메 나곡, 모시는 아은 어중기 뒌다.”고 자신을 성공시킨 기반이었다.

선조의 직함 진용교위(아버지 윤형), 어모장군충무위부시직(조부 지손)은 김성조의 출세로 인한 증직이었으며, 아들은 정략장군절제사 순천방답첨사(김용호) 승의부위(김용련)로 활약하였으니 제주도에서도 ᄆᆞᆯ테우리 출신이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준 훌륭한 사례였다.

한편, 가시나물로 이거한 손 김위남은 선조의 덕으로 “(남ᄄᆞ르에서는)가시 둘렁 살당 (가시나물에서는) 벵풍 둘렁 살았주.”라는 말이 떠돌았다 양반행세를 하며 어렵잖게 살았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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