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택 칼럼](6)담수계의 『증보탐라지』 제주문화원(2004)
[김정택 칼럼](6)담수계의 『증보탐라지』 제주문화원(2004)
  • 뉴스N제주
  • 승인 2021.10.12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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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공장군 김성조에 관한 연구 경과보고
김정택 건공장군현양추진위원회 위원장
수필가
제주문인협회 회원인 홍창국, 김정택, 현글 작가 세 명이 한국에이즈퇴치연맹제주특별자치도지회(회장 김순택)와 뉴스N제주(대표 현달환)가 공동으로 주최.주관한 ‘2020 제1회 청소년 글짓기 공모전’ 심사를 진행했다
김정택(순택) 건공장군현양추진위원회 위원장

김정택(순택) 건공장군현양추진위원회 위원장(수필가)이 본지에 특별기고로 올린 '을묘왜변(1555)의 영웅들을 기리자(건공장군 김성조를 기리며)'라는 내용을 싣고 본사는 '건공장군 김성조에 관한 연구 경과보고'에 대한 자료집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고 추진위원장 이름으로 칼럼을 게재하기로 했다.

내용은 거의 자료집 그대로 싣는데 조금 부가적인 내용을 첨가할 예정이다.

한편, 추진위는 '을묘왜변의 영웅들을 찾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영웅들을 찾고 있다.

남수곽 동쪽 구릉에서 을묘왜변(1555)의 승전을 이끌었던 4인의 치마돌격대(馳馬突擊隊)! 정로위(定虜衛) 김직손(金直孫), 갑사(甲士) 김성조(金成祖), 이희준(李希俊), 보인(保人) 문시봉(文時鳳) 용사와, 왜장을 사살한 정병(正兵) 김몽근(金夢根).

이 분들을 아시거나 조상으로 두신 종친회에서는 제보 바란다며 함께 현양사업을 추진하고자 한다고 전했다. (제보 HP 010-6608-6925 ,Fax 064-712-3064 ,stkiimsj@hanmail.net)

이와 같이 지금 우리 주위에는 과거 제주를 살린 위인, 혹은 이름 없는 영웅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한 영웅들을 찾지 못하기도 하지만 만약 찾더라도 별 뾰족한 수가 없이 그냥 묻히고 마는 사례가 왕왕 있다. '건공장군 김성조'의 비만해도 전쟁터와 전혀 관계없는 다리 위에 세워놓아 관심은 커녕 오히려 퇴색되고 있다고 추진위원회에서는 언급하고 있다.

좀 더 우리 제주에 위대한 인물이 탄생했다는 것을 알리고 그 후손이라도 잘 관리할 수 있도록 행정에서도 관심을 가져주기 바라는 마음으로 연재한다. 많은 응원과 관심바랍니다.[편집자 주]


◆담수계의 『증보탐라지』 제주문화원(2004)

김성조는 증보탐라지 인물편 <科宦>에 김성조의 장인 김양필, 아들 김용호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

金成祖: 勇力이 絶人하고 騎와 射를 잘 했다. 명종조에 왜변을 당하여 후군장으로 왜를 남수구에서 파하고 건공장군의 階를 수하였다.

金用瑚: 김성조의 子이니, 戰功으로 방답진 첨절제사에 이르렀다.

金良弼: 제주읍 영평리 사람이니 중종조에 생원에 뽑혀 능문선서(能文善書)하여 관이 제주교수에 이르렀다. 명륜당 현판시가 남아있다.

『역주 탐라기년』 김석익/ 제주문화원(2017) ---원본; 김석익 『탐라기년』, 영주서관, 1918

○ 을묘(1555) 명종10년(명 가정34년)

여름 5월 김수문 목사(임기 명종 10년 3월~ 명종12년 10월)이 임금에게 아뢴 일이 임금의 뜻을 거스렸다 하여 목사인(牧使印)⁹⁾을 강등하여 판관인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증보탐라지). 6월 왜적이 침입하니 김수문 등이 이를 쳐부셨다. 당시 왜적의 배 60여척이 전라도 장흥 강진 등 8진을 연이어 함락하고, 이어서 화북포로 침범하여 제주성을 3일 동안 포위하였다. 김수문 등이 힘써 물리치며 그들이 물러나기를 기다리다 날쌘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크게 쳐부수니 목을 베고 사로잡은 것이 아주 많았다.

조정이 이를 가상히 여겨 김수문을 포상하여 가의대부로 품계를 올려주고, 한 벌의 옷감을 하사하였으며, 홍문관교리 윤의중을 보내어 대신 위로하고 목사인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명종실록 10년 7월 6일, 7일, 담수계 『증보탐라지』 명종 10년 8월 10일)

○ 병진(1556) 명종11년(명 가정 35년)

여름. 목사 김수문 등이 앞뒤로 걸쳐 왜선 6척을 포획하여 공으로 임금이 조서를 내려 칭찬하고 장려하였으니 김수문에게 자헌대부를 가자하고 판관 이선원에게 다헌대부를 가자하고, 판관 이선원에게는 군기부정(軍器副正)을 제수하고 대정현감 공사검을 판관으로 옯겨 파견하고, 군관 강려에게는 대정현감을, 최수장에게는 정의현감을 주었고, 그 나머지는 상으로 관직을 주는 데에 차등이 있었다(명종실록 11년 6월 15일).

제주사람 김성조(1527~1575 신엄리 출신, 교수 김양필의 사위)에게 왜변을 당하여 후군을 거느리고 적을 패배시킨 공적으로 건공장군(종3품 무관 품계) 상 주었다.

겨울 망경루(이원진 탐라지, 망경루)¹⁰⁾ 를 건축했다.

 김수문은 제주목사부임 직후인 5월에 조정에 보내는 보고문 관계로 임금의 뜻을 거스르게 하였다고 제주목사인(濟州牧使印)을 판관인(判官印)으로 강등하여 사용 중이었다. 관인(官印)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달은 김수문은 똑똑하다고 알려진 향인 김성조에게 지인(知印)을 맡겼다, 지인은 제주영(營) 지방관의 관인을 맡아 토관(土官) 밑에서 지방행정과 군사에 관련된 일을 담당했다. 을묘왜변 전승의 공로로 목사인 사용을 다시 허가했다.

김수문 목사는 을묘왜란 전승유공자에 대한 임금의 포상에 보답하는 뜻으로 명종 11년(1556) 겨울 제주관아 연희각(延曦閣) 동북쪽에 망경루(望京樓)를 건립했다. 그러므로 선조 때에 포상했다는 『제주선현지』의 기술은 잘못이다. 망경루는 북두성을 의지해 한양의 궁성을 바라보며 임금의 은덕을 기리는 한편, 왜구의 침입을 경계하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한일합방 3년 후인 1913년 일제가 그 역사를 알고 강제로 헐고 제주세무소를 건립했다. 이러한 통한의 역사와 질곡을 품고 있는 망경루를 2007년 2월 4일 제주시(시장 김영훈)가 복원준공하고 선현들이 고귀한 정신문화를 되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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