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택 칼럼](5)제2차 을묘왜변
[김정택 칼럼](5)제2차 을묘왜변
  • 뉴스N제주
  • 승인 2021.10.04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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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공장군 김성조에 관한 연구 경과보고
김정택 건공장군현양추진위원회 위원장
수필가
제주문인협회 회원인 홍창국, 김정택, 현글 작가 세 명이 한국에이즈퇴치연맹제주특별자치도지회(회장 김순택)와 뉴스N제주(대표 현달환)가 공동으로 주최.주관한 ‘2020 제1회 청소년 글짓기 공모전’ 심사를 진행했다
김정택(순택) 건공장군현양추진위원회 위원장(수필가)

김정택(순택) 건공장군현양추진위원회 위원장(수필가)이 본지에 특별기고로 올린 '을묘왜변(1555)의 영웅들을 기리자(건공장군 김성조를 기리며)'라는 내용을 싣고 본사는 '건공장군 김성조에 관한 연구 경과보고'에 대한 자료집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고 추진위원장 이름으로 칼럼을 게재하기로 했다.

내용은 거의 자료집 그대로 싣는데 조금 부가적인 내용을 첨가할 예정이다.

한편, 추진위는 '을묘왜변의 영웅들을 찾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영웅들을 찾고 있다.

남수곽 동쪽 구릉에서 을묘왜변(1555)의 승전을 이끌었던 4인의 치마돌격대(馳馬突擊隊)! 정로위(定虜衛) 김직손(金直孫), 갑사(甲士) 김성조(金成祖), 이희준(李希俊), 보인(保人) 문시봉(文時鳳) 용사와, 왜장을 사살한 정병(正兵) 김몽근(金夢根).

이 분들을 아시거나 조상으로 두신 종친회에서는 제보 바란다며 함께 현양사업을 추진하고자 한다고 전했다. (제보 HP 010-6608-6925 ,Fax 064-712-3064 ,stkiimsj@hanmail.net)

이와 같이 지금 우리 주위에는 과거 제주를 살린 위인, 혹은 이름 없는 영웅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한 영웅들을 찾지 못하기도 하지만 만약 찾더라도 별 뾰족한 수가 없이 그냥 묻히고 마는 사례가 왕왕 있다. '건공장군 김성조'의 비만해도 전쟁터와 전혀 관계없는 다리 위에 세워놓아 관심은 커녕 오히려 퇴색되고 있다고 추진위원회에서는 언급하고 있다.

좀 더 우리 제주에 위대한 인물이 탄생했다는 것을 알리고 그 후손이라도 잘 관리할 수 있도록 행정에서도 관심을 가져주기 바라는 마음으로 연재한다. 많은 응원과 관심바랍니다.[편집자 주]


◆제2차 을묘왜변(乙卯倭變)⁸⁾ / 『디지털제주문화대전』

<정의> 1555년(명종 10) 왜구가 제주도 화북포 일대에 침입한 사건.

<개설> 을묘왜변은 두 차례에 걸쳐 발생했는데, 1555년(명종 10) 왜구 선박 70여 척이 1차로 전라도 영암·강진·진도 일대를, 2차로 제주도를 휩쓸며 약탈한 사건이다.

<역사적 배경> 이 사건은 조선과 일본 원활하지 못한 외교 관계와 일본 내의 혼란으로 말미암아 발생하였다. 즉, 1510년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난 이래 조선 정부는 일본에 대한 세견선을 감축하여 교역량을 줄였다. 이로 인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된 쓰시마섬[對馬島] 등지의 왜인들이 1555년 5월 11일 배 70여 척을 타고 전라도 남부 지역을 1차 침입하였다.

<발단> 왜구의 침입에 대비한 제주 방어가 마련되어가던 1555년(명종 10) 5월 1차 을묘왜변이 발생하였다. 왜구는 먼저 전라남도 달량진·장흥·강진 등을 침략하여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 그러다가 그것이 여의치 않자 같은 해 6월에 제주를 침략했다.

<경과> 일본의 제주에 대한 약탈은 고려 시대 이후 계속되어왔으며 조선 전기만 하더라도 20여 차례나 있었다. 제1, 2차 을묘왜변의 왜구는 모두 동일한 무리들이었다.

그러나 제2차(제주) 을묘왜변은 단순한 약탈의 성격을 떠나 제주도를 왜구의 본거지로 삼으려는 계획적인 침략이었다. 이 시기의 왜구는 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전라도-제주도-북구주를 잇는 해상권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절해고도인 제주도에 근거지를 마련해야 했던 왜구는 1555년 6월 27일 1000여 명이 선박 70여 척에 분승하여 화북포에 상륙하였다. 이후 3일간 제주성을 둘러싸고 제주민과 왜구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결과> 김수문 목사를 중심으로 민·관·군이 협력하여 왜구를 격퇴하였는데, 여기에는 김성조·김직손·이희준·문시봉 등의 이른바 치마(馳馬)돌격대의 공이 컸다. 이에 명종은 김수문에게 일자(一資)를 올려주고, 비단옷 한 벌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김성조에게는 건공장군 벼슬이 제수되었다. 이리하여 제주도를 해상 근거지로 삼으려는 왜구의 꿈은 좌절되었으며, 1·2차에 걸친 을묘왜변으로 중앙 정부는 남해안 및 제주 지역의 방위 체제를 한층 강화하였다. 비변사의 권한을 확대하여 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김동전>

◆2차 을묘왜변은 제주을묘왜변이라고도 하며 을묘년(1555)과 병진년(1556)에 일어난 제주의 두 차례 왜변을 말한다.

1차에서 전라도를 약탈•유린하는 것이 여의치 않자, 왜구는 같은 해 6월 1차 때와 같은 무리들을 이끌고 제주도를 침략했다. 1차의 단순한 약탈이라는 성격을 떠나 제주도를 왜구의 본거지로 삼으려는 계획적인 침략이었다.

이 시기의 왜구들은 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중국-전라도-제주도-일본을 잇는 광활한 해상권을 장악하려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간에 교두보가 필요했고 제주도를 근거지로 삼고자 1555년 6월 전라도 분탕질에서 패퇴(敗退)하는 길에 1,000여 명이 선박 70여 척에 분승하여 화북포에 상륙하였다. 이후 3일간 제주성을 둘러싸고 제주목사 김수문(金秀文)을 중심으로 제주민과 왜구 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왜구를 격퇴한다.

여기에는 김성조·김직손·이희준·문시봉의 이른바 치마돌격대(馳馬突擊隊)의 공이 컸다. 이에 명종은 김수문에게 벼슬을 올려주고, 비단옷 한 벌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김성조에게는 건공장군 벼슬을 제수했다. 현재 제주도에서는 수문장 교대식과 무예 24기 공연을 겸한 연극 《김수문 목사와 결사대》를 만들어 혹서기를 제외한 매주 일요일 오후 제주목관아에서 공연하여 이를 기념하고 있다.

4. 단행본

『김성조 건공장군의 일생』
-- 나주김씨제주도종친회 『김성조 건공장군 행장』 (1982)

(1) 김성조는 누구인가

김성조 장군은 제주도 출신의 뛰어난 용장으로 을묘⸳병진왜변 때 왜구를 격퇴하여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출함으로써 역사에 기록되는 위대한 공훈을 세우신 분이다.

제주도 출신의 인물열전을 더듬어 보면 문과에 급제하여 시종신(侍從臣)이 되고 높은 관직에 올라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힘쓴 인물들과 명예직으로서 장군 품계를 받은 이들은 있으나 현직무장으로서 직접 무기를 들고 적중으로 돌격하여 우리 향토를 지킨 인물은 김성조 장군 이외에 그리 많지 않다.

다만, 역사서에 그 성명과 공적을 몇 줄 수록하여 놓았을 뿐으로 그 얼을 되새김이 없음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공은 무려 1천여 명에 달하는 왜적의 대군 앞에 결사대로 자진하여 몸소 병기를 들고 말을 달려 적진으로 돌격하여 그야말로 처참한 혈전으로 적들을 격퇴하였으니 그 위민애향(爲民愛鄕)의 충의(忠毅)는 충분히 젊은 학도들의 교본으로 삼을 만하며 도민의 애향하는 정신적 바탕이 될 만하다고 생각된다.

공은 나주김씨로서 1527년(중종 22)에 제주목 엄장촌(구엄리) 김윤형(金允亨; 증가선대부 병조참판) 전용교위의 장남으로 태어나 1575년(선조8)에 48세 나이로 별세하였다. 공의 가문을 살펴보면 원시조 김알지에서 비롯하여 경순왕 후손 18세 김운발(金雲發)이 나주에 봉(封)함을 받아 본관이 되었으며 입도조 김인충(金仁忠)은 공의 5대조가 된다.

입도조 김인충은 고려말 강화진 좌령낭장으로 진충보곡의 충절에 일신을 바쳤으나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는 와중에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충의로서 관직을 버리고 바다를 건너 제주에 정착하였다.

장군의 조부 김지손(金智孫)은 어모장군 충부부사직으로 가선대부 평조참판을 증직 받았으며, 증조 김여수(金麗水) 또한 어모장군으로 공은 대를 이어 강직용맹하고 유서 깊은 무반의 가문에서 태어난 것이다.

(2) 유년시절

전해오는 이야기로 공의 성장과정을 더듬어 보면 공은 4살에 부모님의 가르침으로 천자문을 완전히 해독함으로써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유년시절에는 가정에 스승을 초청하여 동네 아동 10여명과 어울려 공부하게 하였는데 공은 언제나 고강(考講)에서 책을 외우고 그 내용을 모두 통달하여 칭찬을 받았으며 늘 접장이 되어 다른 아동의 선두에 서서 모범이 되었다. 또한 동네에서 전쟁놀이를 좋아하였는데 언제나 대장노릇을 도맡아 하였다고 한다.

공은 이와 같이 어려서부터 성품이 고결하고 강직하여 지혜가 비상한데 부모님에게는 효성이 지극하고, 어른에게는 예의가 바르며 친지에게는 우정이 두터웠다. 10살이 되자 말타기와 궁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나타내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한편 장차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크게 이비지할 인물에 될 것이라는 기대를 안겼다.

(3) 호기(豪氣) 청년

공은 문무를 겸비한 호기남아로서 주변 사람들의 촉망을 받게 되자 17세가 되는 1544년(중종 39)에 제주목 영평마을에 사는 진사 김양필(金良弼)의 사위가 되었다.

김양필은 교수관으로 그 당시 제주도에서 이름 높았던 명사였다. 충암 김정(冲庵 金淨)이 지은 《제주풍토록》에 따르면 제주에는 김양필 말고는 학식 있는 이가 별로 없다고 할 정도로 높이 평가했다. 《탐라지》와 《속수삼강록》 등 모든 읍지에 수록되어 그의 업적을 찬양 받는 인물이었다.

김양필은 충암 김정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문장에 능하며 서예에도 뛰어나 생진시험에 급제하고, 향리자제들의 교수관으로 임명되어 당나라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규범을 도입하는 등 새로운 방법으로 후진교육에 힘썼다.

김양필 교수관이 김성조를 자진하여 사위로 삼았으니 김성조의 인물됨과 장래의 촉망이 어떠하였음을 미리 짐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김성조는 장인댁에서 기거하면서 경서와 병법을 비롯한 광범위한 학문연수에 더욱 정진하였고, 아울러 무술의 연마에도 여념이 없는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이때 마침 장인댁에 사나운 야생마가 있어 아무도 감히 손을 쓰지 못하였다. 공이 채찍을 높이 들고 크게 꾸짖어 외치되 “네 주인이 여기 있노라, 나를 태우고 네 힘껏 달려 보아라.”하고는 올라타니 준마는 비호와 같이 내달라니 반나절에 400리를 주파하고 돌아왔다. 사람들이 말을 하되 “‘옛날부터 명장이 나면 명마가 따라 나온다’더니 이는 김성조를 두고 한 말이구나.” 하였다. 그후 이 준마는 김성조의 애마가 되었다.

김성조는 양반출신이어서 군역을 지지 않아도 되었지만 장인 댁에서 문무를 연마하기 어언 8년이 되자 3년마다 열리는 무과시험을 기다리며 군역을 자원했다. 1553년 (명종 8) 마대, 속오군, 별아병을 두루 섭렵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들은 정규군은 아니었지만 제주사람들의 일상에는 늘 왜침의 경계가 있었기에 제주방위를 담당하는 어엿한 군인역할을 하고 있었다.

(4) 왜구의 행패

돌이켜 보면 고려시대부터 조선 명종 11년(병진년, 1956)까지 240여 년간에 왜구들이 제주를 30여회 이상 침범했다. 특히 김성조의 생애 동안 대규모 침략이 여러 번 집중되었다. 명종 7년(1552)에는 성산읍 신천리 일대에 ‘천미포왜변’을 일으켜 주민을 살해하고 재물을 약탈해갔다. 70여명의 왜구를 막지 못했고 겨우 왜구 1명을 생포했을 뿐이었다. 조정의 문책으로 제주목사 김충렬과 정의현감 김인이 유배형을 받고 갈릴 정도였다.

남치근 목사 때(1554) 천미포에 왜구가 다시 쳐들어오자 배2척을 나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듬해 을묘왜변(1555)이라는 대규모 침략이 전라도에 이어 제주도로 일어났다. 이해 6월 27일 60여척의 배에 1천명의 왜구가 화북포로 밀려들어온 것이다. 그들은 제주의 중심지인 제주성을 공략했으나 김성조의 분전으로 물리쳤다.

명종 11년(1556) 초에는 동시다발로 쳐들어오자 공은 아우 김성지와 더불어 격파했다. 제주목에서 33명, 정의현에서 31명 대정현에서 30명의 왜구를 참수했을 정도였다. 그해 7월 15일 왜선 2척이 다시 침입하자 75명을 잡아 참수했다. 명종 대의 왜변은 왜구의 단순한 약탈을 위한 침공이 아니었다. 제주성의 점령이 곧 제주도의 함락이었다. 제주도를 완전히 장악하여 왜구의 본거지를 삼으려 했던 것이다.

(5) 김성조 장군의 활약

왕조실록에서 제주목사 김수문이 당시의 왜적격퇴에 관한 상황을 명종에게 보고한장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명종10년(1555) 7월 6일에 목사 김수문이 장계로써 아뢰되 “지난 6월 27일에 왜적 1천명이 하륙하여 진을 치고 행패를 부리므로 신이 용감한 군사 70여명을 뽑아 거느리고 적진으로 돌격하여 피차의 거리가 약 30보에 이르니 아군의 화살에 맞아 쓰러지는 왜구가 매우 많았사오나 아직도 왜적들은 물러나지 아니 하므로 정로위 김직손, 갑사 김성조 이희준, 보인 문시봉 등 4인이 준마를 달려 적중으로 돌격하여 종횡무진으로 왜적을 무찌르니 적군은 무너지고 흩어졌습니다. 정병 김몽근은 붉은 갑옷을 입은 왜장의 등을 쏘아 꺼꾸러지게 하였습니다. 우리 군사들은 승전의 틈을 타서 일제히 총공격을 감행하여 왜적을 참획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위 실전상황의 기록을 놓고 생각해 볼 때 김성조 장군의 혈전이 눈에 선하게 보인다. ‘1당 100’이란 말이 있지만 우리 용사들은 1당 250에 좌충우돌 지동지서(之東之西;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 등의 말을 모조리 모아 놓아도 표현이 충분하지 못하다.

명종 임금은 목사 김수문에게 하서 하시어 그 전공을 치하하고 김수문에게는 표리이중의 상을 내려주라 하시니 대신들은 이중으로 상을 내림은 남상(濫賞)이라 하여 반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명종 임금님은 적은 병력임에도 불구하고 순국의 정신으로 능히 대적을 격파하고 대승하였음을 치하하고 김성조에게 일등군공으로 가자(加資) 건공장군의 상을 하사하였다.

그렇다. 공은 제주 사람으로서 당시 28세의 활기 넘치는 투지와 충의를 발휘하고 생사를 초월한 순국의 정신 하나로 백성들의 목숨과 재산을 구하고, 이 고장을 보전하였으니 그 공의 크기가 제주역사의 으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6) 남기신 유언

공은 돌격대로서 강직하고 철저한 군인정신을 발휘하였으니 자신을 돌보지 못 하였고 전투 때마다 백병전을 감행하여 무수한 적을 무찔러 백승을 거듭하였다. 그동안 공은 무리한 군무와 여기저기 전상(戰傷)으로 인하여 나이 37세인 1564년(명종 19)관직을 사퇴하였다.

공은 관직을 떠나 요양하면서도 왜적에 대한 경계심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어떤 모임이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장래에 예상되는 사태와 호시탐탐 왜적의 야망을 진지하게 설유하시면서 그 방비에 잠시라도 게을리 하여서는 안 된다고 유비무환의 정신을 강조하고 솔선하시었다. 김성조 장군은 집안에서 자녀들의 훈육에 힘쓰시다가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시니 아, 애석하다, 선조 8년(을해 1575) 9월 22일 그 전도가 요원하고 양양한 장년의 나이인 48세로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공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왜구에 대한 우려를 놓지 못하시어 임종에 이르러 자손과 친지들을 불러 앉히고 유언 하시기를 왜적의 야욕은 비단 본도뿐만 아니라 나라의 중대한 환란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므로 자나 깨나 지역수호와 국방에 대비하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또한 당신의 장사는 선조의 은둔정신과 겸양지덕을 본받아 조용하고 평범하게 치루고, 비석을 비롯한 석물을 장식하지 않도록 당부하셨다.

공이 타계한지 17년 되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금수강산이 초토화하고 말았다. 제주도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도 명목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1910년 대한제국은 일본에게 국권을 상실하였다가 1945년에야 광복을 맞았다. 김성조 장군의 선견지명을 알아보는 대목이다.

김성조 장군의 유언에 따라 후손들은 묘소를 애월읍 상가리 연화못 남쪽에 모셨고, 장군의 위의를 세우지 못하고 한말에 겨우 표석 하나를 세웠을 뿐이었다. 2013년 묘소 위로 신작로가 생기자 이 해 청명절을 기하여 흩어진 선조묘들을 고내봉 회룡고조지명혈(回龍顧祖之明穴)에 모시고 이 일대를 나주김씨입도조성역(羅州金氏入島祖聖域)으로 삼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새 세기를 맞아 을묘왜변의 전적지에 장군의 동상을 세우고 정화하여 가전충효(家傳忠孝)의 정신을 반드시 이루도록 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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