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잊어버린 제주 방어의 역사
[특별기고]잊어버린 제주 방어의 역사
  • 뉴스N제주
  • 승인 2021.09.26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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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택 수필가
건공장군현양추진위원장
제주문인협회 회원인 홍창국, 김정택, 현글 작가 세 명이 한국에이즈퇴치연맹제주특별자치도지회(회장 김순택)와 뉴스N제주(대표 현달환)가 공동으로 주최.주관한 ‘2020 제1회 청소년 글짓기 공모전’ 심사를 진행했다
김정택 수필가(건공장군현양추진위원장)

제주성에 명종10년(1555) 6월 25일 사라봉 봉수로부터 왜구군단 70여척이 쳐들어왔다는 비상연락이 왔다. 무혈 상륙한 1천명의 왜구는 아무런 저항 없이 남수각 동쪽 구릉으로 직진하여 진을 쳤다. 제주성의 동태를 내려다보며 점령하려는 의도였다.

제주목에 부임한지 3달 밖에 안 된 김수문 목사는 수성군 5백명에 불과한 병력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해상 봉쇄를 뚫고 육지부 원군을 구하려 해도 지원병이 어느 세월에 올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도내 22개 봉수대와 9곳 방어소에 알리는 한편, 염탐군의 탐망을 통하여 신산모루 일대에 왜구의 군세를 파악했다. 이들은 전라도 해안을 분탕질(제1차 을묘왜변)하다가 배고프고 지친 상태로 귀국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왜구들도 나름의 정보를 갖고 있어 고립무원의 제주성을 아예 점령하여 왜구의 본거지로 삼으려는 계획적인 침략이었다. 이 시기의 왜구는 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전라도-제주도-북구주를 잇는 해상권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제주도를 절해고도의 무주공산으로 보았던 왜구의 입장에서는 선승구전(先勝求戰)으로 매우 유리한 상황이었다. 시간과 장소를 능동적으로 선택하여 이길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서 싸움을 구한 것이었다. 이들은 제주도의 점령은 관아가 집중해있는 제주성을 함락함으로써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제주성을 공략했다.

목사 김수문(金秀文)과 판관 이선원(李善源)이 지휘하는 관군은 제주성을 포위당한 채 함락직전의 성벽에 기대어 원병을 기다릴 때였다. 다행히 위기에도 블루오션이 있었다. 난세에 영웅이 나타났다. 제주관아의 지인(知印)이었던 열혈청년 김성조(金成祖 1527~1565)가 분연히 “향토가 급란을 당하매 대장부 마땅히 신명(身命)을 바쳐 왜적을 격퇴하리라.”하고 전사후생(前死後生)의 각오로 창의(倡義)하자 치마돌격대 4인과 효용군(驍勇軍) 70인이 자원해 왔다.

김성조는 작전계획을 들고 나왔다. 무과를 준비하고 있어 제법 병법과 치마(馳馬)를 알았다. 약한 병력으로 강적을 대항하려면 소수 정예의 기습이 최선임을 주장했다. 의병책(疑兵策)으로 성담만 지키기만 할 것이 아니라 서성동격(西聲東擊)과 군관민 총력전을 주장했다. 무관 출신인 김수문 목사는 바로 김성조의 제안을 수용했다.

드디어 말을 탄 돌격대 4명은 6월 27일 새벽 몰래 동문성문을 거쳐 신산모루를 돌아 왜군진지 안으로 휘갈아 돌격했고, 효용군은 엄호부대였지만 남수각 동쪽 절벽을 기어 올라가 같은 시각에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화살을 날렸다. 아침밥을 짓던 왜구들은 혼비백산하여 저항도 못해보고 여지없이 궤멸되고 말았다. 화북포에서 퇴각하려던 잔병들도 산지포를 거쳐 군선으로 나타난 아군들에 의해 패퇴하였다.

이것이 제주에서 벌어진 왜변(제2 을묘왜변)의 전승(全勝)이었다. 제1차 왜변은 1555년 5월 전라도 영암·달량진·장흥·강진·진도 등에 상륙하여 약탈과 방화를 일삼다가 여의치 않자, 해상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를 왜구의 본거지로 삼아야겠다는 대담한 침공계획을 세우고 6월 27일 제주도 침공으로 방향을 돌려 제2차 왜변을 벌인 것이었다. 제1, 2차 을묘왜변의 왜구는 모두 동일한 무리들이었다. 450년 후 오현교(2000 제주시 세움) 다리 위에 <을묘왜변 전적지>라는 구두닦이 발판크기의 표석이 세워졌을 뿐 이의 전승을 기억해주는 주민은 거의 없다.

이른바 치마돌격대(馳馬突擊隊) 정로위 김직손, 갑사 김성조, 이희준, 보인 문시봉 등 4명은 적진 한 가운데로 말을 달려 돌격, 왜적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고, 정병 김몽근은 활을 쏘아 적의 우두머리부터 잡는 계책을 성공시켰다. 임금이 감열(感悅)하여 목사와 판관을 일등급 가의로 가자(嘉義加資)하고, 김수문에게 비단옷 한 벌까지 하사했다. 이선원을 군기부정(軍器副正)에, 대정현감 공사검(孔士儉)을 제주판관으로, 군관 강려(姜侶)를 대정현감으로, 최수장(崔水長)을 정의현감으로 승진시켰다. 그리고 김성조(金成祖)에게는 종3품 건공장군(建功將軍)증가선대부도총부부총관이라는 파격적인 벼슬을 제수했다.

김성조 장군는 누구인가? 김성조의 근본은 고려 유신(遺臣) 김인충의 5세손이었다. 선대가 모두 신분을 감추고 반농반어로 살았으니 김성조는 애월읍 엄장리(嚴莊里) 말테우리였다. 통훈진사 교수관 석학통유(碩學通儒)인 김양필(金良弼)이 그를 알아보고 “양반도 어제기 모ᄉᆞᆯ에 왕 살민 어제기 된다”(‘어제기’는 어부의 뜻)며 데려다 키워주었다. 데릴사위(婿留婦家)로 약 6년간 살다가 돌아오면서 말을 잘 타고 문무를 겸전한 의기남아로 장성하여 을묘왜변의 전공을 세운 것이다.

“인류의 가장 큰 비극은 지난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1889~1975)의 경구였다. 지난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제주도는 일제에 뺏기어 1944년 일제의 결(決)7호 작전지역이 되고 말았다.

6.25때는 제주도에 육군 제1훈련소가 있었으나 대한민국 최후의 보루는 아니었다, 심지어 제주도와 도민들을 버리고 1951년 4월 한국정부와 주요 인사 등 50만명을 미국령 사이판과 티니언으로 이송한다는 작전계획까지 있었다고 한다. 2007년 도민들의 해군기지 수용건의에 따라 제주민군복합형관광미항이 준공(2010~2016)되었다.

지금은 제9해병여단(백룡부대)가 제주도와 부속도서를 방어하고 국지도발 대비작전과 통합방위작전, 제주군항 방어, 예비군 동원 및 관리 등 제주도 안보의 핵심 역할을 맡아 있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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