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택 칼럼](3)을묘왜변(1555)의 영웅들을 기리자(건공장군 김성조를 기리며)
[김정택 칼럼](3)을묘왜변(1555)의 영웅들을 기리자(건공장군 김성조를 기리며)
  • 뉴스N제주
  • 승인 2021.09.07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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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공장군 김성조에 관한 연구 경과보고
김정택 건공장군현양추진위원회 위원장
수필가
제주문인협회 회원인 홍창국, 김정택, 현글 작가 세 명이 한국에이즈퇴치연맹제주특별자치도지회(회장 김순택)와 뉴스N제주(대표 현달환)가 공동으로 주최.주관한 ‘2020 제1회 청소년 글짓기 공모전’ 심사를 진행했다
김정택(순택) 건공장군현양추진위원회 위원장(시인)이 본지에 특별기고로 올린 '을묘왜변(1555)의 영웅들을 기리자(건공장군 김성조를 기리며)'라는 내용을 싣고 본사는 '건공장군 김성조에 관한 연구 경과보고'에 대한 자료집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고 추진위원장 이름으로 칼럼을 게재하기로 했다.

지난 19일 본지에 실린 김정택(순택) 건공장군현양추진위원회 위원장(시인)이 본지에 특별기고로 올린 '을묘왜변(1555)의 영웅들을 기리자(건공장군 김성조를 기리며)'라는 내용을 싣고 본사는 '건공장군 김성조에 관한 연구 경과보고'에 대한 자료집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고 추진위원장 이름으로 칼럼을 게재하기로 했다.

내용은 거의 자료집 그대로 싣는데 조금 부가적인 내용을 첨가할 예정이다.

한편, 추진위는 '을묘왜변의 영웅들을 찾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영웅들을 찾고 있다.

남수곽 동쪽 구릉에서 을묘왜변(1555)의 승전을 이끌었던 4인의 치마돌격대(馳馬突擊隊)! 정로위(定虜衛) 김직손(金直孫), 갑사(甲士) 김성조(金成祖), 이희준(李希俊), 보인(保人) 문시봉(文時鳳) 용사와, 왜장을 사살한 정병(正兵) 김몽근(金夢根).

이 분들을 아시거나 조상으로 두신 종친회에서는 제보 바란다며 함께 현양사업을 추진하고자 한다고 전했다. (제보 HP 010-6608-6925 ,Fax 064-712-3064 ,stkiimsj@hanmail.net)

이와 같이 지금 우리 주위에는 과거 제주를 살린 위인, 혹은 이름 없는 영웅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한 영웅들을 찾지 못하기도 하지만 만약 찾더라도 별 뾰족한 수가 없이 그냥 묻히고 마는 사례가 왕왕 있다. '건공장군 김성조'의 비만해도 전쟁터와 전혀 관계없는 다리 위에 세워놓아 관심은 커녕 오히려 퇴색되고 있다고 추진위원회에서는 언급하고 있다.

좀 더 우리 제주에 위대한 인물이 탄생했다는 것을 알리고 그 후손이라도 잘 관리할 수 있도록 행정에서도 관심을 가져주기 바라는 마음으로 연재한다. 많은 응원과 관심바랍니다.[편집자 주]

◆스크랩

『명종실록』 19권 명종10년(1555, 명 嘉靖34) 7월6일 무술 4번째기사

○濟州牧使金秀文狀啓: 六月二十七日, 倭賊無慮千餘人, 下陸結陣。 臣抄率驍勇軍七十人, 突入陣前, 相距三十步。 倭人中箭者甚多, 而尙未退兵, 定虜衛金直孫、甲士金成祖ㆍ李希俊、保人文時鳳四人, 馳馬突擊, 賊軍潰散。 有一倭將, 着紅毛頭具【盔也〭 】,自恃其能射, 獨不退北, 正兵金夢根射中其背, 卽顚仆。我軍乘勝追擊, 斬獲甚衆。

<풀이> 명종10년(을묘 1555) 7월 6일자 제주 목사 김수문이 왜적이 침공한 것에 대해 장계하다.

제주 목사 김수문(金秀文)ⁱ⁾이 장계(狀啓)2⁾ 하였다. “6월 27일, 무려 1천여 인의 왜적이 뭍으로 올라와 진을 쳤습니다. 신이 날랜 군사 70인을 뽑아 거느리고 진 앞으로 돌격하여 30보(步)의 거리까지 들어갔습니다. 화살에 맞은 왜인이 매우 많았는데도 퇴병(退兵)하지 않으므로 정로위(定虜衛) 김직손(金直孫), 갑사(甲士) 김성조(金成祖)ㆍ이희준(李希俊), 보인(保人) 문시봉(文時鳳) 등 4인이 말을 달려 돌격하자 적군은 드디어 무너져 흩어졌습니다.

홍모두구(紅毛頭具; 투구)를 쓴 한 왜장(倭將)이 자신의 활솜씨만 믿고 홀로 물러가지 않으므로 정병(正兵) 김몽근(金夢根)이 그의 등을 쏘아 명중시키자 곧 쓰러졌습니다. 이에 아군이 승세를 타고 추격하였으므로 참획(斬獲)이 매우 많았습니다.”

1) 목사 김수문(金秀文, 1506~1568)은 명종 10년(1555) 3월 남치훈 목사의 후임으로 부임하여 1557년 10월 이임했다. 부임 석 달 만에 적선 40척이 화북포에 상륙하여 3일간 제주 주성을 포위하는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목사는 수성이냐 공략이냐 대책 도모에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4명의 용사가 치마돌격대로 자원하자 70명의 엄호부대를 조직하고 도민들의 단합을 이끌어내어 싸움을 승리로 이끈 공적은 신임 목사에게 돌아갔다. 조정에서는 상으로 김수문 목사를 가선대부로 가자하고 비단옷 한 벌을 하사하였다.

다음 해에는 전도에 걸친 왜구의 침입도 관민을 독려하여 대승을 거둠으로써 자헌대부에 가자되었다. 명종 12년 첨지중추부사를 배명하여 떠났는데 곧 한성판윤으로 승진하였으며 훗날 평안도 병마사로 북방 방어에 공적을 남겼다.

2) 성종대 이후 왜구와 여진의 소규모 침입이 끊이지 않자 을묘⸳병진왜란이 끝난 후 효율적인 군사전략을 위해 지변사 재상(3의정, 병조대신, 국경지방의 관찰사·절도사 역임자)들과 군사방략을 협의하고자 비변사라는 임시 협의체제 기구를 운영했다.

김수문 목사가 장계를 올릴 때까지는 비변사가 구성이 안 된 듯 을묘왜란에 대한 기술이 없다. 김 목사가 의정부에 바로 장계를 올린 것으로 보인다.

4인의 치마돌격대(馳馬突擊隊)

을묘왜변에서 승전을 이끌었던 전략은 목숨 바칠 각오로 자원한 치마돌격대(馳馬突擊隊)의 등장이었다. 70명의 엄호부대가 따르긴 하였으나 치마돌격대는 정로위(定虜衛) 김직손(金直孫)、갑사(甲士) 김성조(金成祖) 이희준(李希俊)、보인(保人) 문시봉(文時鳳) 등으로 4인이었다. 고작 4명이 말을 타고 적진에 돌격해 개인 전술로 싸워 공을 세운 것이다.

정로위는 조선 중종 7년(1512)부터 광해군 무렵까지 존속한 정예 군인으로 중종 5년(1510)에 삼포 왜란을 겪으면서 만들어졌다. 김직손(金直孫)은 김수문 목사와 고령김씨 재종간(再從間; 6촌형제)으로 목사로 부임할 때 함께 파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갑사(甲士)는 조선 의흥부(義興府)에 딸린 군인으로, 1401년(태종 1)부터 왕권 호위를 담당하는 중앙군의 기간병인 특수 병종으로 제도화하여 엄격하게 시취되었다. 김성조는 갑사로 시취된 바 없어 단순히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甲軍, 甲兵, 甲首, 甲卒)의 뜻으로 쓰인 것 같다.

이영권의 『새로 쓰는 제주사』(2012)에는 치마돌격대(馳馬突擊隊) 가운데 보인(保人)만을 지적하여 현역군인이 아니라 현역을 돕는 예비 병력에 불과했다고 하나 갑사로 지칭한 김성조와 이희준, 보인 문시봉(文時鳳)도 무관이 아닌 한량 출신으로 돌격대를 자원하여 ‘갑사’라는 임시직을 받은 것이다. 이는 일반인들도 이 전투에 적극 참여했음을 말해준다.

문시봉은 남평문씨 33세 입도 15세 제주사람이며, 영평동 제단비(1977)에는 건공장군으로, 문씨족보에는 그의 부 문윤창(文胤昌)이 전승공로로 건공장군행충무위부사직을 수직했음을 기록하고 있어 오류가 있는 것 같다.

왜장을 사살한 정병(正兵) 김몽근(金夢根)은 아직 상세불명이다.

▲ 4인 돌격대 보인(保人) 문시봉의 단비(壇碑)
▲ 4인 돌격대 보인(保人) 문시봉의 단비(壇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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